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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②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결혼행진곡 두 곡, 그 불편한 만남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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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보다 나이가 네 살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는 활동 기간은 36년 더 길었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독일 음악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쪽을 빼버리면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자들이다. 그런데 유대인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페스트에 비유한 바그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 만든 음악 두 곡이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늘 함께 연주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상은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할 수밖에.
유대인 멘델스존과 반유대주의자 바그너

(왼쪽)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오른쪽) 리하르트 바그너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은 최소한 두 곡의 음악을 듣는다. 신부 입장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음악, 그리고 결혼식 마지막에 신랑 신부가 힘차게 발걸음을 옮길 때 듣는 음악이다. 결혼식에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입장할 때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배합창곡. 그리고 예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연주되는 행진곡은,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을 시작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다.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이후 일반인의 결혼식에서 널리 연주되고 있다. 신부는 바그너 음악과 함께 입장하고, 신랑 신부는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과 함께 퇴장하는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1809~1847)보다 나이가 네 살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활동 기간은 36년 더 길었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독일 음악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쪽을 빼버리면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자들이다. 그런데 유대인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페스트에 비유한 바그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곡이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늘 함께 연주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유대인 엄친아’ 멘델스존

사람들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스존을 두고 펠릭스(Felix, 행운아란 뜻)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평생을 호사스럽게 산 음악가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으로 당시 칸트, 헤르더에 버금갈 정도의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지적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범상치 않은 두각을 나타낸 ‘엄친아’였다. 그렇지만 그는 유럽인, 기독교인의 무의식 속 공공의 적인 유대인이었다.

이 때문에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차별받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도록 기독교인으로 만들었으며, 멘델스존은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보다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독일 음악가였다. 예컨대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슈베르트의 여러 작품 등 많은 곡을 재발견해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인맥을 활용해 독일 음악가들이 유럽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도록 물심양면 후원한 사람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과 같은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해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음으로써 라이프치히를 실질적으로 명망 있는 음악도시로 만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다섯 명의 독일인 아이를 낳은 아버지였다.



멘델스존이 26세에 허약한 몸을 이끌고 라이프치히에 와서 죽는 날까지 12년 동안 이 도시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자란 바그너는 전 유럽을 방황하며 굴곡진 잡초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의 지휘자로 부임할 무렵 바그너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6살 연상의 여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한 후 쾨니히스베르크에 정착했다. 그렇지만 정착생활은 잠시였고 얼마 후 빚쟁이들에게 쫓겨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돼 오랫동안 라트비아, 파리, 드레스덴 등 전 유럽을 기약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멘델스존과 바그너를 정반대의 존재로 만든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바그너는 가장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를 이상으로 삼아 게르만 민족에게 보편적 긍지를 심어줄 오페라 음악 작곡과 이론 정립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바그너의 모습과 사상을 후대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발견하고 심취하면서 이미 죽은 이 두 작곡가의, 물과 기름으로 갈라지는 새로운 운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독일인의 우수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예로 우상화한 반면 유대인인 멘델스존의 음악은 짓밟고 격하했다. 박물관에 있던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으며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그를 기념해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철거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카르미나 부라나’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1895~1980)에게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대신할 새로운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토록 했다. 우리가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유명한 가곡도 유대인 출신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시에 멘델스존이 곡을 붙였다는 이유로 당시 히틀러에 의해 금지곡이 됐다. 이렇게 히틀러는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영광과 수난을 생전과 다르게 바꾸어놓았다.

“세계 음악계에서 대성하려면 실력은 필수이고, 거기에 절세미인(미남) 혹은 동성연애자이든지 아니면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이 농담을 농담으로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은 게오르그 솔티(지휘자·1912~1997), 아이작 스턴(바이올리니스트·1920~2001), 앙드레 프레빈(지휘자·1929~), 로린 마젤(지휘자·1930~), 다니엘 바렌보임(지휘자·1942~), 이츠하크 펄먼(바이올리니스트·1945~), 핀커스 주커만(바이올리니스트·1948~)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영화감독, 빌 게이츠와 같은 사업가 등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 세계 인구의 0.2%(약 1300만명)에 불과한 유대인이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0%, 세계 억만장자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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