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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이슈

알코올·도박 중독, 환각, 가정폭력…미국 사회의 잠재적 폭탄

아프간·이라크 파병 후유증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알코올·도박 중독, 환각, 가정폭력…미국 사회의 잠재적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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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 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군인들이 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 다녀온 미군 병사 상당수가 알코올·도박 중독에 빠지거나 환각에 시달리고,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다.
  • 파병 군인 5명 중 한 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 이들 중 상당수는 파산, 가정폭력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미국 워싱턴주 매코드 공군 기지는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돌아오는 병사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공항 안으로 들어오자, 그동안 서로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이 부둥켜안으며 공항은 순식간에 환호와 눈물바다로 변했다. 그들이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감격했다. 그러나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건 아니다. 어쩌면 전쟁터보다 더 혹독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2009년 겨울, 텍사스 오스틴에 사는 케이트(27)도 들뜬 마음으로 공항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의 남편 데릭 맥브라이드(29) 하사는 15개월에 걸친 이라크 파병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필자는 2008년 바그다드 캠프 스트라이커에서 종군기자 프로그램 취재를 할 당시 데릭 하사와 5개월을 같이 지냈었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후 케이트는 전쟁터로 남편을 세 번씩이나 보내야 했다. 가슴을 졸이며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케이트는 데릭을 만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데릭 하사는 한눈에도 건강해 보였다. 유난히 붙임성 있고 늘 남을 배려하던 그의 착한 심성 덕에 필자도 취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데릭을 다시 만난 것은 2010년 여름이었다. 이라크에서 만났던 미군들을 미국에서 다시 찾아 후기 취재를 하면서 이미 전역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오스틴 외곽에 있는 그의 집은 아내 케이트가 아이들과 주방에서 케이크를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형적인 미국 소시민 가정의 풍경이었다. 데릭과 그의 가족들이 저녁을 먹은 뒤 필자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주로 이라크에서 돌아온 이후의 생활과 그때의 기억들을 회상하는 인터뷰였다. 1시간 가까이 인터뷰는 잘 진행됐다. 그러다 그가 점점 초조해 보이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술을 들고 왔다. “술 좀 마시면서 해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그렇게 음주 인터뷰가 진행되며 데릭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자꾸만 아무도 없는 나의 옆을 슬쩍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왜 자꾸 내 옆을 보냐?”고 물었더니 내 옆에 그렉 하사가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그가 말하는 그렉 하사는 2008년 바그다드에서 도로매설 폭탄이 터져 사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렉 하사가 죽기 전 여러 번 보아온 터라 그의 얼굴이 떠오르며 더 무서워졌다. 나는 “이봐, 그렉 하사는 이미 죽었잖아. 기억 안 나요? 우리 같이 바그다드 공항에서 그의 관을 비행기에 넣는 것도 봤잖아요” 하고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데릭은 “그래, 나도 다 기억나요.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그렉이 집으로 찾아온 거야!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몰라요. 그가 살아 있었다니. 그리고 지금도 네가 온다니까 그렉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거예요”라고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사실 데릭과 그렉은 같은 중대 소속이었지만 소대가 달랐다. 그렉과 유난히 친하게 지냈던 데릭은 슬픔에 빠졌고 며칠을 막사 안에서 혼자 멍하니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대놓고 죽은 그렉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데릭에게 그렉과 인터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다 대고 물어본다. 그렇게 졸지에 데릭의 통역으로 이미 죽은 그렉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 중에도 데릭은 술을 계속 마셨다. 갑자기 케이트가 나타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부부싸움으로 인터뷰는 중단됐고 데릭이 집을 나가버렸다. 케이트는 울면서 “이라크에서 돌아오던 날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심지어는 공항에서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렇게 귀신과 대화를 합니다. 저는 매일 겪는 일입니다. 제 남편이 왜 저렇게 변해서 돌아왔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안타깝게도 데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겪은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데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안보 분야 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복무를 마치고 퇴역한 예비역 군인 3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무려 다섯 명 중 한 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처들이 이라크나 아프간으로 파병되었던 병사들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내모는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알코올 중독, 폭력행위, 파산, 가정폭력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9년 5월11일, 존 러셀(44) 병장은 오후 2시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주변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리버티’에 있는 정신과 상담소에 앉아 있었다. 조용히 상담 차례를 기다리던 러셀 병장이 갑자기 총을 들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닥에 피가 낭자했고 5명의 미군 병사가 숨지고 1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목격자들은 총을 쏘던 그가 웃고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고 전했다. 미국 헌병이 그를 간신히 제압해서 살인죄로 기소했다. 러셀 병장 사건은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저항세력의 총만 피하면 된다고 믿었던 미군들이 아군의 손에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평범한 40대의 가장인 그가 왜 동료들을 살해한 살인자로 변했을까. 러셀은 장기간 반복된 해외근무로 인해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판정을 이미 몇 달 전에 받았다. 약 6주 후면 그의 3번째 이라크 파병이자 15개월에 걸친 장기 근무가 끝나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는 2003년 4월과 2005년 11월에도 각각 1년씩 이라크로 파병됐었다. 짧은 기간 3차례에 걸친 러셀의 파병 기록은 이라크전 이전에는 미군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러셀만이 아니라 당시 거의 모든 미군이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의 파병을 다녀와야 했다.

문제는 이런 유례없는 장기 파병이 그들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 전쟁터라 전사할 수도 있고 신체적인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실전 상황이 불러오는 긴장감은 병사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러셀도 이라크 파병 중에 사건이 일어난 정신과 상담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결국 사고가 타진 것이다. 그의 상관인 데이비드 퍼킨스 장군은 “그(러셀)의 심리 상태를 우려한 지휘관이 그를 정신치료센터에 보내고 총기 등 무기에 접근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령했다”며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러셀 병장은 총을 손에 넣고 정신치료센터에 들어가 발포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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