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알코올·도박 중독, 환각, 가정폭력…미국 사회의 잠재적 폭탄

아프간·이라크 파병 후유증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1-11-22 18: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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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 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군인들이 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 다녀온 미군 병사 상당수가 알코올·도박 중독에 빠지거나 환각에 시달리고,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다.
    • 파병 군인 5명 중 한 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 이들 중 상당수는 파산, 가정폭력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미국 워싱턴주 매코드 공군 기지는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돌아오는 병사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공항 안으로 들어오자, 그동안 서로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이 부둥켜안으며 공항은 순식간에 환호와 눈물바다로 변했다. 그들이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감격했다. 그러나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건 아니다. 어쩌면 전쟁터보다 더 혹독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2009년 겨울, 텍사스 오스틴에 사는 케이트(27)도 들뜬 마음으로 공항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의 남편 데릭 맥브라이드(29) 하사는 15개월에 걸친 이라크 파병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필자는 2008년 바그다드 캠프 스트라이커에서 종군기자 프로그램 취재를 할 당시 데릭 하사와 5개월을 같이 지냈었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후 케이트는 전쟁터로 남편을 세 번씩이나 보내야 했다. 가슴을 졸이며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케이트는 데릭을 만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데릭 하사는 한눈에도 건강해 보였다. 유난히 붙임성 있고 늘 남을 배려하던 그의 착한 심성 덕에 필자도 취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데릭을 다시 만난 것은 2010년 여름이었다. 이라크에서 만났던 미군들을 미국에서 다시 찾아 후기 취재를 하면서 이미 전역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오스틴 외곽에 있는 그의 집은 아내 케이트가 아이들과 주방에서 케이크를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형적인 미국 소시민 가정의 풍경이었다. 데릭과 그의 가족들이 저녁을 먹은 뒤 필자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주로 이라크에서 돌아온 이후의 생활과 그때의 기억들을 회상하는 인터뷰였다. 1시간 가까이 인터뷰는 잘 진행됐다. 그러다 그가 점점 초조해 보이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술을 들고 왔다. “술 좀 마시면서 해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그렇게 음주 인터뷰가 진행되며 데릭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자꾸만 아무도 없는 나의 옆을 슬쩍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왜 자꾸 내 옆을 보냐?”고 물었더니 내 옆에 그렉 하사가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그가 말하는 그렉 하사는 2008년 바그다드에서 도로매설 폭탄이 터져 사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렉 하사가 죽기 전 여러 번 보아온 터라 그의 얼굴이 떠오르며 더 무서워졌다. 나는 “이봐, 그렉 하사는 이미 죽었잖아. 기억 안 나요? 우리 같이 바그다드 공항에서 그의 관을 비행기에 넣는 것도 봤잖아요” 하고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데릭은 “그래, 나도 다 기억나요.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그렉이 집으로 찾아온 거야!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몰라요. 그가 살아 있었다니. 그리고 지금도 네가 온다니까 그렉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거예요”라고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사실 데릭과 그렉은 같은 중대 소속이었지만 소대가 달랐다. 그렉과 유난히 친하게 지냈던 데릭은 슬픔에 빠졌고 며칠을 막사 안에서 혼자 멍하니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대놓고 죽은 그렉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데릭에게 그렉과 인터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다 대고 물어본다. 그렇게 졸지에 데릭의 통역으로 이미 죽은 그렉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 중에도 데릭은 술을 계속 마셨다. 갑자기 케이트가 나타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부부싸움으로 인터뷰는 중단됐고 데릭이 집을 나가버렸다. 케이트는 울면서 “이라크에서 돌아오던 날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심지어는 공항에서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렇게 귀신과 대화를 합니다. 저는 매일 겪는 일입니다. 제 남편이 왜 저렇게 변해서 돌아왔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안타깝게도 데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겪은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데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안보 분야 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복무를 마치고 퇴역한 예비역 군인 3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무려 다섯 명 중 한 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처들이 이라크나 아프간으로 파병되었던 병사들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내모는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알코올 중독, 폭력행위, 파산, 가정폭력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9년 5월11일, 존 러셀(44) 병장은 오후 2시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주변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리버티’에 있는 정신과 상담소에 앉아 있었다. 조용히 상담 차례를 기다리던 러셀 병장이 갑자기 총을 들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닥에 피가 낭자했고 5명의 미군 병사가 숨지고 1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목격자들은 총을 쏘던 그가 웃고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고 전했다. 미국 헌병이 그를 간신히 제압해서 살인죄로 기소했다. 러셀 병장 사건은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저항세력의 총만 피하면 된다고 믿었던 미군들이 아군의 손에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평범한 40대의 가장인 그가 왜 동료들을 살해한 살인자로 변했을까. 러셀은 장기간 반복된 해외근무로 인해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판정을 이미 몇 달 전에 받았다. 약 6주 후면 그의 3번째 이라크 파병이자 15개월에 걸친 장기 근무가 끝나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는 2003년 4월과 2005년 11월에도 각각 1년씩 이라크로 파병됐었다. 짧은 기간 3차례에 걸친 러셀의 파병 기록은 이라크전 이전에는 미군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러셀만이 아니라 당시 거의 모든 미군이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의 파병을 다녀와야 했다.

    문제는 이런 유례없는 장기 파병이 그들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 전쟁터라 전사할 수도 있고 신체적인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실전 상황이 불러오는 긴장감은 병사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러셀도 이라크 파병 중에 사건이 일어난 정신과 상담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결국 사고가 타진 것이다. 그의 상관인 데이비드 퍼킨스 장군은 “그(러셀)의 심리 상태를 우려한 지휘관이 그를 정신치료센터에 보내고 총기 등 무기에 접근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령했다”며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러셀 병장은 총을 손에 넣고 정신치료센터에 들어가 발포한 것”이라고 말했다.

    러셀 병장의 해외 복무 기간과 복무 환경은 그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당시 모든 미군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2001년 이후 미국이 대(對)아프간과 이라크전쟁을 시작하면서 미군 병사들은 정신없이 전쟁터로 내몰렸다. 아프간과 이라크, 두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전쟁이 벌어진데다 전쟁 규모도 커서 파병할 병사 수가 항상 모자랐다. 현장 지휘관들은 지속적인 증파를 원했고 미국 본토가 아닌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래서 부족한 인원을 메우려 군 당국은 새로운 병사 모집에 열을 올렸다. 이제 갓 신병 훈련소를 나온 신참 병사들도 곧바로 전쟁터로 향했다. 필자가 이라크를 취재할 때 ‘신상품(Brend new)’이라 불리는, 이제 막 신병 훈련소를 나온 병사들이 한 소대에 적어도 2~3명씩은 있었다. 이제 막 총을 잡아본 신병을 전쟁터로 보낼 만큼 병사 수가 부족했다. 기존에 제대로 훈련받고 경험이 있는 병사들도 여러 번 파병됐다. 원래 파병 기간 1년을 복무한 다음에는 1년 휴지기를 갖는다. 하지만 2007년, 미군은 파병 기간은 12개월에서 15개월 복무로 연장하고 1년 휴지기를 갖는 것으로 변경됐다.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파병 15개월 연장에 대해 “이라크 미군 증파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으나,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군 핵심 인사가 고심할 정도로 미군이 복무기간을 3개월 연장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병에서 복귀 후 1년의 휴지기를 갖는 것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신병들이 곧장 전쟁터로

    브라이언 중사는 2008년 11월에 이라크 북부 바쿠바에서 15개월의 파병 기간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이듬해 6월 다시 아프간으로 떠났다. 그는 이라크 파병 이후 다른 부대로 전출됐는데 새로 전입한 부대가 6월에 아프간에 파병됐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는 단체로 움직이는 조직이고 다들 파병되고 우리 부대에서 나만 남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7개월밖에 쉬지 못하고 다시 아프간으로 향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떠난 그는 파병된 지 겨우 2개월 만에 도로 매설 폭탄(IED)으로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겪었다. 그의 가족들은 “휴지기만 제대로 지켰어도 브라이언의 다리가 잘리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10년에 걸친 전쟁 동안 미군 병사들은 보통 3~4번, 많게는 6번까지 전쟁터에 다녀와야 했다. 현재도 미군은 치열한 전투와 긴장된 상황의 아프간에 파병되고 있다. 러셀 병장도 잦은 횟수와 장시간의 해외 파병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러셀의 아버지 윌번 러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이라크에서 제 엄마에게 보낸 e메일에서 ‘내 삶은 끝났다’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등 심각한 증세를 보였다”며 “그러나 아들은 정신치료센터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치료센터 관계자들도 자신들이 아들의 친구라고, 아들의 복리를 위해 일한다고 설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러셀 병장 총기 난동 사건 이후 군 당국은 일선 병사들에 대한 정신건강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조사에 착수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인한 미군 내 자살자도 3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늘고 있다. 제이콥 블레이록 병장은 1451 수송중대 소속으로 1년간 이라크에서 복무한 뒤 2007년 4월 귀국했다. 그는 귀국하기 2주일 정도를 앞두고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지면서 선두차량 탑승자 2명이 숨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전사자 중 1명은 긴장에 시달리던 블레이록 병장과 자리를 바꿔준 전우였다. 보통 순찰을 나갈 때 3대의 군용 차량이 한 조로 나가는데 그중 제일 위험한 차량이 선두 차량이다. 도로 매설 폭탄은 누군가 폭탄을 매설해놓고 발포를 기다리다가 미군 차량이 다가오면 휴대전화나 TV 리모컨으로 조종해 폭파시킨다. 그래서 선두 차량 탑승자가 제일 많이 희생된다. 이라크와 아프간 같은 전쟁터에서 선두 차량을 타는 것만으로도 그 긴장감은 배가된다. 전사한 블레이록의 동료는 긴장하는 그를 위해 대신 선두 차량에 탑승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그 사건을 겪고 귀국한 블레이록 병장은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5개월 뒤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쐈다.

    알코올·도박 중독, 환각, 가정폭력…미국 사회의 잠재적 폭탄

    지난해 1월26일 자살폭탄 테러 공격을 당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이라크 경찰 건물 앞에서 미군 병사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월러스 병장의 경우도 안타깝다. 그는 순찰 나갔다가 소규모 총격전을 겪게 됐다. 현장이 정리되고 나서 다른 동료 차량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월러스 병장은 이들에게 조금 전 소규모 총격전이 있었다고 경고했지만 차량이 총격전이 일어난 곳을 지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이라크에서 그런 소규모 총격전은 늘상 있는 일이라 크게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차량은 불과 몇 분 후에 강력한 폭발음과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 차량에 탑승했던 병사 5명은 전원 사망했다. 윌러스 병장이 그들의 통행만 막았어도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 그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복귀한 직후인 2008년 7월 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마치 그 희생자들을 죽인 것처럼 괴로워했다. 그리고 사건을 수습하며 본 시신과 잔해들을 머릿속에서 떨치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고 말했다.

    높아지는 자살률, 약물중독

    현재 미군 자살률은 군인 10만명당 22명으로 일반인의 자살률에 비해 높은 편이다. 2009년에는 파병 경험이 있는 현역 및 예비역 381명이 자살했고 2010년에는 462명으로 집계됐다. 올해는 자살률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해를 거듭할수록 자살자가 늘어날 전망이다. 원래 민간인에 비해 낮았던 미 육군 병사의 자살률은 테러와의 전쟁 이후 10년 동안 3배가 높아졌다. 솔트레이크시티 유타대의 데이비드 러드 사회·행동과학과 교수는 “아프간 파병과 그곳에서 전투를 앞두고 스트레스가 급증하면서 자살하는 병사의 수도 늘어났을 것”으로 분석했다. 보통 자살자 통계는 군 당국이 축소하기 마련이고, 퇴역한 참전군인 자살의 경우 신뢰할 만한 통계조차 없기 때문에 실제 자살자는 통계로 나와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살뿐 아니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의 약물 남용도 심각한 문제다. 전선이 확장되면서 약물에라도 의존해 두려움과 긴장 초조를 잊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미 육군이 2009년 발표한 ‘건강증진·위험감소·자살예방’ 보고서에서도 자살과 약물복용을 비롯해 사기저하에 따른 전력감소가 기록적으로 늘고 있다고 적혀있다. 350쪽에 달하는 미 육군 보고서는 또 자살 및 위험행동의 증가는 병사들의 합법 또는 불법적인 약물복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 미군의 3분의 1이 복수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이 중 14%는 항우울제와 진통제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복용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보고서는 또 “여러 곳의 전선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우리는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의약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데이터를 접하고 있다”면서 “미 육군은 불법 또는 합법적 약물에 갈수록 더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병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경우는 미군뿐만이 아니다. 이라크 파병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일본의 자위대에서도 자살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가 2007년 입수한 방위성 내부문서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귀환한 자위대원 가운데 육상자위대원 6명, 공군자위대원 1명 등 총 7명이 자살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 방위성은 2006년 국회답변에서는 이라크 파병 대원 자살자 수가 육상자위대원 4명, 공군자위대원 1명이라고 했었다. 결국 1년 사이 자위대원 2명이 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다. 자살한 한 자위대원은 이라크 현지에서 “미군 가까이에 가지마라. 죽는다”며 소란을 피웠다는 동료들의 증언도 나왔다. 2003년 이라크전쟁 발발 이후 일본 자위대는 100여 명의 육해공 자위대원을 파병했다. 그러나 그들이 안전하다고 장담하며 주둔했던 이라크 남부 사마라에서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저항세력의 로켓 공격을 받았다. 실제 전사자는 없었어도 그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일본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7년 자위대는 이라크 파병을 끝내고 철군했지만 지금까지 파병된 자위대원 중 자살자 수는 총 46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이라크 파병이 일본 자위대에도 견디기 힘든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 영국 등 미국의 동맹국으로 이라크와 아프간에 파병한 국가들의 상황은 대개 비슷하다.

    미국 정부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반복되는 장기 해외 순환 배치에 관해 미 국방부는 2012년까지 12개월 복무 후 24개월 휴지기를 갖는 방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2009년부터 1170만달러를 들여 파병 병사들의 감정관리 집중훈련 계획도 실시했다. 2개의 미군기지에서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앞으로 110만명을 상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은 자살방지 프로그램과 시뮬레이션을 동원해가며 병사들의 정신 건강을 지키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라크·아프간 제대군인을 위한 입법연합(IAVA)은 미국 전역에 전문 정신과 치료기관을 확대하고 제대군인에 대한 대면 상담 치료 제도화, 군 훈련과정 중 병사들이 동료들의 정신건강을 체크하는 프로그램의 증편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또 외상후 스트레스를 막기 위한 정신과 전문 인력을 배치하고 상담과 치료를 위해 군의관과 심리학자도 대거 배치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9년까지 지난 5년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미군 병사의 수가 총 4만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에릭 슈메이커 육군 의무감이 밝혔다. 미 국방부가 이라크와 아프간전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판정받은 병사의 숫자를 공개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더 이상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만큼 이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숫자조차 군 당국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일 뿐 증상을 숨기거나 신고하지 않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상관들이 병사들의 정신건강에 집중하고 있어도 군 내부에서 병사들의 심리적 불안을 사전에 인지하는 경우는 2%에 불과하다. 슈메이커 의무감도 “상당수 병사가 자신의 군 경력에 오점이 생길 것을 우려해 증상을 숨기거나 겁쟁이로 오인받을 것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필자가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만난 병사들 중에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이는 병사도 많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본인의 증상을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도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자살방지 프로그램까지 동원

    제리 야브로 상병은 이라크 바그다드 캠프 스트라이커에서 만난 병사다. 그는 고향이며 가족이 살고 있는 조지아 주로 돌아온 후 술과 도박이 날로 심해졌다. 특히 도박은 정도를 넘어섰다. 파병 복무 대가로 번 돈은 물론 사금융에서 대출을 받아가며 도박을 했다. 집에 있는 TV나 가전제품, 아내의 결혼반지도 모두 도박으로 잃었다. 그가 집세를 내지 못해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먼 친척이 있는 켄터키주로 떠나고 본인은 친구 집에 빌붙어 살고 있다. 그는 “도박을 하고 있는 시간이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과 안식을 준다. 이라크에서 벌어졌던 그 끔찍했던 일들이 모두 잊히는 순간은 바로 도박하고 있는 순간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료인 브라운 상병이 단(斷)도박 모임과 군이 제공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프로그램을 권하자 그는 “나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다. 나의 군 경력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나를 약해빠진 계집애로 여길 것이다”며 한사코 치료를 거부했다. 브라운 상병은 “군대 내부에서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미래를 예고한다. 나도 저 친구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친구의 종착점은 아마도 파산과 전역, 그리고 노숙자가 될 것이 자명하므로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결국 야브로 상병은 도박을 끊지 못한 채 치료 프로그램조차 거부하고 아내와도 이혼했다.

    미군은 파병 미군의 정신적 스트레스 해결을 위해 정신과 담당 군의관 및 의무병을 대거 아프간에 파견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상당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미 국방부는 그동안 참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미군이 날로 늘어가자 이를 예방,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군의관 및 카운슬링 담당 의무병들을 대거 차출해 아프간과 이라크에 보냈다. 아프간에 파병된 미군 세 사람 중 한 명꼴로 전투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전투 스트레스에 관한 상담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여서 군 당국은 정신과 담당 군의관 파견을 서둘렀다. 현재 아프간 동부지역에는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및 심리치료사 등 미군 병사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할 45명의 군 요원이 파견돼 있다. 아프간 남부지역에도 45명의 군 요원이 파견된 데 이어 최근에는 25명의 정신과 담당 군의관 및 의무병이 더 파견됐다. 이런 정신과 의료진 파견은 이전 전쟁터에선 전례가 없었던 규모다. 그만큼 병사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한 군 당국의 고육책이었지만 이들 인원은 현재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9만여 명의 미군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군의관도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이런 상황에서 장기화되는 아프간 전쟁과 탈레반의 강력해진 공격 양상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생하는 미군의 수는 날로 급증하게 됐다. 미국에서 검증된 최상의 정신과 의료진과 심리학자들을 계속 공수해 와도 물리적으로 장애를 앓고 있는 병사 모두를 감당하기는 힘들다. 자연히 이들은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아프간에 있는 공군 전쟁스트레스 통제팀의 경우 25명의 요원이 한 달에 1500여 건의 상담을 하면서 800여 명의 새 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게다가 매일 50건 이상의 상담을 해야 하는 의료진 자신들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각하다.

    정신과 의료진은 아프간 외진 곳에 분포해 있는 미군기지도 정기적으로 헬리콥터나 차량으로 방문해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과로는 물론 탈레반의 공격에도 노출돼 있는 상황이다. 현재 아프간 동부 쿠나 주에서 병사들의 전신 건강을 위해 파견된 정신과 군의관인 마이클 핸콕(42)은 “내가 아프간에 와서 듣는 병사들의 증세는 너무나 똑같다. 긴장, 초조, 불면증, 분노장애… 이런 상담을 하루 종일 수십 건 하다보니 나도 조금씩 이상해진다. 우리도 전투 상황에 노출된 상황에서 매일 똑같은 상담을 하다보니 정말 미칠 것 같다.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의 상담건수를 처리하려면 밥 먹는 시간외에 거의 개인 시간이 없다. 아프간 전쟁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우리 의료진에게도 퍼지고 있는 것 같다”고 현재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제는 의료진조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자유롭지 못해 범죄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9년 미국 텍사스 주 ‘포트 후드’ 미군기지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12명이 숨지고 31명이 다쳤다. 총기를 난사한 미 육군 소속 니달 말릭 하산(39) 소령은 ‘1493 전투 스트레스 통제팀’ 소속으로 근무 중인 정신과 군의관이었다. 그가 죽인 사망자들 대부분도 정신과 의료진이었고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라크나 아프간으로 파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인 하산 소령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고 파병에 대한 압박이 최악의 총기 사고를 저지르게 한 것이다. 그가 근무하던 포트 후드 기지는 미 국방부가 이라크 및 아프간전 참전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미군이 급증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시범 실시해온 주요 기지 중 하나였다. 이 사건으로 파병을 앞두거나 전쟁지역에 파병됐다가 돌아온 정신과 의료진조차 얼마나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는지 알게 됐다.

    기억을 못하는 병사들

    그렇다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참전한 병사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은 그들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필자가 이라크에서부터 추적하고 있는 병사들에게는 공통된 증상이 있다. 그것은 기억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이라크에서의 일들을 끄집어내어 그때 생각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상당수 병사가 기억을 잘 못한다. 2008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앤드루 페친(26) 병장의 경우도 건망증이 심했다. 우리가 이라크에 있었을 때 그는 도로매설폭탄이 터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를 묻자 그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막상 당시 같이 사고를 당했던 동료 전우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5개월을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인데 그는 “아, 그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며 한참을 기억하려 애썼다. 심지어는 중대장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던 때가 이라크에서 돌아온 지 겨우 몇 달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그는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수백 번은 지나다녔을 이라크 도시 이름과 순찰했던 지명, 같이 일했던 이라크 통역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페친 병장뿐만 아니라 그때 같이 있었던 동료 전우들도 마찬가지였다. 페친과 같은 소대였던 페드로 곤잘레스(24) 상병은 “귀국한 후에 나의 기억력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감퇴되었다. 오늘 아침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가 오늘 뭔가 사오라고 했는데 기억나지 않아 식료품점에서 한참을 기억하려 하다가 결국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냈다. 나는 한 시간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가물거릴 때가 많다”고 증언했다. 병사들은 이런 심상치 않은 기억감퇴 외에도 끝없는 두통과 메스꺼움, 청력 감퇴,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또 다른 페친 상병의 전우 슈미츠는 이라크 파병 이후 전역했다. 하지만 전역 이후에도 그는 같은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전우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고 집중력도 더 떨어지고 예민해져 짜증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소연하는 또 다른 증세는 청각의 예민함이다. 그들은 세상 모든 소리에 예민해졌다. 전쟁터에서는 작은 소리도 그들에게 큰 위험을 줄 수 있었기에 병사들은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뇌가 강력한 폭발음이나 총소리를 공포와 경계로 인식하기에 소리에 극도로 민감해졌다. 한 병사는 “주방에서 칼로 도마 두드리는 소리나 공사현장 소리는 50켈(cal)기관총의 다연발소리로 들리고 천둥소리는 폭탄소리로 들린다. 냉장고 문 닫는 소리와 불꽃놀이 하는 소리는 RPG 7 (로켓 추진포) 소리 같아 나를 괴롭힌다. 그 외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리들의 근원을 찾아 헤매게 되어 하루 종일 예민하게 굴며 아내에게 화만 내게 된다”고 말했다.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귀향한 미군 병사 중 많은 숫자가 이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페친이나 곤잘레스처럼 폭탄 사고를 겪었다. 참전 후 귀향한 미군 2500명 중 2건 이상 폭발물 공격을 당한 사람은 62%나 된다.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복무한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폭탄 사고를 경험했다. 4~5번이나 폭탄 사고를 겪고 살아난 병사들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 폭탄 사고로 인해 병사들이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뇌 손상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존스 홉킨스 대학 산하 응용물리학연구소의 신경과학자 이볼랴 체르나크는 이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폭발이 뇌에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몸통을 압박, 혈관 속에 ‘피의 쓰나미’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가 급격하게 뇌로 몰려 조직을 손상시킨다고 보고 있다. 폭발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해치는데 직접 폭탄의 충격을 받지 않고 살아남더라도 폭발물이 터지면서 생기는 고압가스는 순식간에 뉴런을 파괴해 허리케인의 수배에 달하는 파동을 생성한다. 또한 엄청난 속도로 기체가 쓸고 지나가면서 진공상태가 발생하고, 기압차로 인해 인체의 장기는 확장되었다가 도로 축소된다. 이 과정에서 폐가 찌그러지기도 하고, 고막이 파열되기도 한다. 그래서 직접적인 폭발 피해에 노출되지 않고 현장에서 살아남아도 치명적인 뇌손상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볼라 체크냐르 박사의 주장이다.

    보이지 않는 부상

    미국 의회는 이 같은 파병 병사들의 뇌손상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에 예산 3억달러를 배정했다. 국립신경질환뇌졸증연구소는 100명의 의사, 신경과학자, 물리학자, 생체역학 연구자들을 모아 폭발로 인한 뇌손상의 비밀을 밝히려고 연구 중이다. 국방고등연구기획국(DARPA)도 현재 900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폭발이 뇌에 미치는 화학적, 구조적 영향은 물론 행동장애 증후군까지 구명하는 1년간의 연구를 수행 중이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알고 싶은 것은 폭발에 노출되면 그때 어떻게 뇌가 손상을 입으며 장기간에 걸친 신경정신병적 증세가 일어나는지 여부다. 랜드 협회에서 발행한 보고서 ‘보이지 않는 부상’에 따르면 이라크와 아프간에 투입된 미군 병사 중 5분의 1은 뇌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만난 병사들의 지독한 건망증도 이 폭발로 인한 뇌손상이 가져온 변화일 수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참전 병사들의 심각한 뇌손상은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0년 9월8일 미국 워싱턴 주에서는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주에 주둔하던 포트루이스 소속 스트라이커 여단 병사 12명이 저지른 충격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사건기록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09년 11월 캘빈 깁스(25) 병장이 아프간 칸다하르 램라드 전초 기지로 파병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깁스 병장은 같은 중대 동료들과 ‘킬팀(kill team)’이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1월 깁스 병장과 이 킬팀 소속 제러미 몰록(22), 앤드루 홈즈(19)는 라 모하메드 칼라이 마을의 양귀비 밭에서 순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굴 무딘이라는 15세 아프간 소년을 붙잡아 벽에 세웠다. 깁스는 몰록에게 수류탄을 주면서 겁에 질린 무딘에게 던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홈즈에게는 총격을 가해 무딘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두 병사는 깁스의 명령대로 무딘을 사살했다. 무딘은 죄명도 없이 죽어간 무고한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몰록은 홈즈에게 아무 죄책감 없이 “아프간인을 죽이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들은 2월에도 마라치 아그하라는 아프간 민간인을 재미로 총격해 살해했다. 그 뒤에도 그들의 살인 행위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면서 이 킬팀은 마치 교전 중 사망한 탈레반처럼 위장하기 위해 탈레반들이 주로 사용하는 AK47 소총을 시신 옆에 세워놓았다.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희생자 시신의 손가락과 다리 뼈, 치아를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희생자의 두개골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고 시신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뇌손상이 가져온 전쟁범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그들의 범행은 엉뚱하게 동료 병사가 이들이 대마초의 일종인 ‘해시시’를 피운다며 상부에 보고해 군 당국이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발각됐다. 소지품 검사를 하는 도중에 사람의 두개골과 각종 신체 부위가 나온 것이다. 깁스와 몰록, 홈즈 등 5명은 결국 아프간 민간인 3명을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나머지 7명도 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동료 병사를 구타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본국으로 송환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 병사들은 해시시와 알코올중독 상태로 마치 신나는 취미생활을 하듯 이 같은 살인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그들의 부대가 있는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 기지는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은 아프간에서 생긴 가장 끔찍한 전쟁 범죄로 모든 미디어에서 다뤄졌다.

    심문 영상에서 피의자 제러미 몰록(22) 상병이 군 조사관에게 진술한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에서 몰록 상병은 “깁스 병장이 그 아프간인을 벽 옆에 세워두고는 나와 애덤 윈필드 상병을 정조준할 수 있는 위치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깁스 병장은 수류탄을 꺼내 던지고는 ‘좋아, 이놈의 머리 가죽을 벗겨버려, 죽여, 죽여버려’라고 명령했다”고 진술했다. 이번 사건의 공소장에는 마약을 투약한 채로 재미 삼아 민간인을 살해한 잔혹한 병사들의 행위가 묘사돼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리품인 사람의 신체 부분은 충격적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 두개골을 꺼내 올 생각을 했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짓이다. 몰록 상병의 변호인 마이클 워딩턴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의뢰인이 놀이 삼아 살인을 했다는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도로매설 폭발물 공격을 받아 뇌가 손상돼, 처방약과 대마초를 투약한 상태에서 깁스 병장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병사들이 아프간에서 뇌가 손상된 채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게 변호인단의 설명이다. 어떻게 뇌손상이 되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변호인이 주장하는 대로 이들이 뇌손상을 당했다면 그야말로 살아있는 살인 병기라 할 수 있다. 이 살인 병기들이 아프간에서 미국 본토로 들어오면서 미국 사회의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깁스와 킬팀은 어쩌다 뇌손상을 입은 것일까. 그들은 모두 포트루이스의 제4 스트라이커 전투 여단 소속이다. 이들은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주에서 12개월간 파병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킬팀이 아프간에서 주둔했던 램라드 전초기지는 남부 미군기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으로 꼽힌다. 일단 기지 사방이 모두 평야로 길이 없다. 보통 탈레반들이 도로에 폭탄을 설치할 때는 길옆에 묻어둔다. 그래서 미군들이 차량으로 이동할 때 길을 유심히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그들이 이동 시 주변에 무인 순찰기를 띄워 최대한 주의를 한다. 하지만 이 기지 주변은 사방이 길이 없는 그냥 뚫린 평야다. 이 드넓은 평야 어디에 폭탄을 묻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병사들은 더욱 긴장하게 된다. 램라드 기지에서 근무했던 히이그(26) 상병은 “순찰을 위해 기지 문밖으로 나가면 긴장감을 느낀다. 램라드는 그 어느 기지보다 위험하다. 어디에 폭탄이 묻혔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선두 차량은 더욱 위험하다. 두 번째 차량은 선두 차량의 바퀴 자국을 따라가야 한다. 그렇게 순찰을 마치고 다시 기지로 복귀하고서도 긴장감에 온몸이 떨렸다”고 말했다. 깁스를 비롯한 킬팀 병사들도 이 램라드에서 근무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깁스의 경우도 이미 여러 번의 파병으로 입은 심각한 뇌손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트루이스에서 근무하는 한 병사는 “이런 비극을 바로 같이 근무하는 동료가 벌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간 파병이 계속되면 우리 모두 깁스 병장이 될 수도 있다. 나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게 될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포트 루이스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깁스 병장과 같은 부대인 제4 스트라이커 여단 소속 브랜든 베렛(28) 상병의 경우도 경악할 만하다. 그는 아프간에서 복귀한 직후인 지난해 8월 그의 고향인 유타 주 솔트레이크로 휴가를 갔다. 아프간에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과 단란하게 보낼 그 시간에 그는 아프간에서 근무할 때와 똑같은 방탄복과 헬멧, 전투복을 착용하고 야간 투시경과 총까지 가지고 솔트레이크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아프간을 순찰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시내를 순찰했다. 백주 대낮에 갑자기 등장한 전투복 차림의 총을 든 병사로 시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놀란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를 저지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탈레반에 대항하듯 소리를 지르며 경찰을 향해 총격을 했다. 경찰도 대응을 하면서 베렛 상병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솔트레이크 시 소속 검사 심길은 “이 사건은 한 병사가 아프간전쟁에서 당한 고통을 집까지 들고 들어온 전형적인 증거다. 파병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정신적인 치료 프로그램이 얼마나 필요한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라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연이어 벌어졌다. 워싱턴 주 오쿠보에서도 죽은 베렛 상병과 똑같이 전투 유니폼과 총기까지 든 병사가 총격을 벌이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프간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이 병사들은 여전히 미국에서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증상들은 뇌손상이 아니면 벌어지기 힘든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 카운티 병무청 다니엘 투스 지청장은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당한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다. 앞으로 이들로 인해 큰 문제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총격전

    미국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는 미군의 선진화된 기동 타격대 스트라이커 부대의 중심이다. 이 부대 소속 3개의 스트라이커 여단은 10년간 이라크와 아프간으로 지속적으로 파병됐다. 포트루이스 주둔지 바로 앞에 있는 ‘자유의 다리’에는 주민과 가족들이 매단, 참전 군인들의 복귀를 환영하는 노란리본이 달려 있다. 가족들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남편과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지난해 7월에는 제5 스트라이커 전투여단 2대대의 복귀 환영식도 열렸다. 타코마 시의 한 호텔에서 벌어진 환영식에는 가족들과 돌아온 병사들이 함께 했다. 정복을 한 병사들 사이에서 퍼플 하트(Perple Heart) 훈장을 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는 세 개 이상의 퍼플 하트 훈장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퍼플 하트는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다리가 의족인 병사도 많았다. 아프간에서 도로매설폭탄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다리를 잃고라도 돌아온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 대대는 12개월의 아프간 파병 기간 중 총 65명이 부상을 입었고 22명을 잃었다. A중대는 중대장과 중대 간부 등 6명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사고도 겪었다. 환영식에 참석한 병사들의 표정이 밝지 않은 이유다.

    매트(22) 상병은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작년 8월 아프간에 파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중대장 홀렛(30) 대위와 의무 장교 젝킨스(30) 대위가 스트라이커를 타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 폭탄사고를 당했다. 스트라이커가 뒤집히고 불이 났다. 우리는 상황실에서 뒤집힌 스트라이커 속에서 ‘불이 났다!’고 소리치는 중대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생중계처럼 상황실에 있던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결국 우리가 구조하러 가기도 전에 중대장과 스트라이커에 탑승했던 전원이 사망했다. 그날은 우리 중대에 악몽 같은 날이었다”라고 그날의 사고를 설명했다. 중대장을 잃고 귀국한 그들은 돌아온 기쁨보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 대한 슬픔이 더 컸다. 중대원 중 한 명은 “그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던 비명이 지금도 악몽으로 나타난다. 밤에 자다가도 그 비명이 생생하게 들려 벌떡 깨어나곤 한다”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이런 비극을 겪고 이렇게 악몽과 싸우는 병사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제 미국에서는 이라크와 아프간전쟁 수행 중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돌아온 병사들이 오히려 더 위험한 잠재적 폭탄이 됐다. 포트루이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국민이 안고 갈, 지난 10년간의 전쟁에 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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