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입력2011-11-22 12: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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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1970년 록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로써 참으로 오랜만에 영국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의 콧대를 꺾었다. 웨버는 1981년 3억8000만달러의 수익을 일궈낸 ‘캐츠’로 토니상 7개를 휩쓸며 새로운 전설로 자리 잡았다. 영국 뮤지컬은 웨버로 말미암아 전성시대를 열면서, 이른바 빅 4(오페라의 유령, 캐츠,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의 성공으로 미국 브로드웨이를 잔뜩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 뮤지컬이 관현악의 서정적이면서도 긴박하고 장중한 진행을 가능하게 했던 데 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음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헨리 8세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음악 이야기가 들리면 필자는 본능적으로 귀가 예민해진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무리의 20, 30대 여성이 “오페라가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다”며 수다를 떨고 있기에 귀를 쫑긋했더니 서서히 유령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Opera)’ 관람평을 하고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남녀 주인공의 삼각관계가 파리의 오페라극장을 배경으로 화려하고 괴기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오페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본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가 아니라 뮤지컬이다. ‘오페라의 유령’ 원작은 프랑스 유명 추리소설 작가인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1868~1927)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로 1861년 파리 오페라극장을 무대로 삼고 있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젊은 프리마돈나를 짝사랑하는 괴신사는 극장 지하와 연결된 하수도에 기거하며 그녀를 납치하지만 그녀와 라울 백작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는 자취를 감춘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영화화 작업을 거친 뒤, 영국의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 Webber·1948~)에 의해 1986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처음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 1988년에는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성공을 거두고, 한국에서는 2001년 LG아트센터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뮤지컬 공연시장의 매출규모는 140억원 안팎이었는데 ‘오페라의 유령’이 70억원의 공연수입을 올려 전문적인 공연기획이 뿌리내릴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 공연 마케팅계의 신화를 창조하면서 공연계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오페라와 뮤지컬은 음악을 중심으로 무용, 무대미술, 극본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종합무대예술 장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먼저 생긴 오페라가 뮤지컬의 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둘 사이에 당연히 유사점이 있다. 그렇지만 오페라의 등장인물을 가수(歌手)라고 부르고 뮤지컬의 등장인물은 배우(俳優)라고 부르는 데에서 드러나듯, 오페라는 음악 위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뮤지컬은 드라마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노래로 표현하는 오페라와는 달리 뮤지컬에서는 연극적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사와 안무의 비중이 높다. 그래서 오페라는 번역이 필요 없지만 뮤지컬은 번역이 필요하다. 음악은 만국공통어여서 언어를 몰라도 소통이 되지만, 대사는 외국어이면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원어를 그대로 가창하고 뮤지컬은 이해가 편하게 자국어로 번역해 공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주인공이 춤을 추고 분주히 무대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것은 뮤지컬이고, 주인공이 큰 동선을 만들지 않고 노래만 부르는 것은 오페라라고 말한다. 100%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대사와 안무 비중 높은 뮤지컬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1981년 선보인 뮤지컬 ‘캐츠’.

    오페라는 대형 공연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모두 정통 클래식 창법으로 공연된다. 마이크와 같은 확성장치 없이 훈련을 통한 발성으로 관객에게(무대와 객석 사이에 위치한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육성을 전달한다. 반면에 뮤지컬은 마이크를 사용하며 배우의 창법도 다양하고 현대적이다. 뮤지컬은 라이브 반주와 녹음 반주를 모두 사용하며 대중적인 전자악기까지 동원하기 때문에 구성이 오페라보다 훨씬 다양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만들어낸 영국은 음악 분야에선 후진국이었다. 섬나라인 영국의 음악 발전은 유럽대륙에 속한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었다. 영국이 독자적인 음악양식을 확립한 것은 15세기로, 이때 유럽대륙에서는 테너성부(남성 고음)의 선율을 중심으로 곡이 진행되는 다성 교회음악이 성행하고 있었다.

    6명의 아내로 후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헨리 8세(1491~1547)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음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영국교회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법령인 수장령을 발동해 가톨릭을 대체하는 영국성공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성가대 인원을 대폭 늘렸으며, 교황청과 결별하는 상징으로 라틴어로 된 예배음악이 아닌 영어로 된 예배음악을 사용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1세 또한 아버지처럼 음악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

    청교도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당시 정부는 음악과 연극이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음악과 연극에 관련된 모든 모임을 불허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청교도혁명 당시 혁명정부가 교회 안에서의 연주조차 일절 금지한 것이 거꾸로 대중예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교회에서 폐기한 오르간이 선술집으로 흘러들어가 반주에 이용되면서 대중음악과 무용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 이것이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는 뮤직홀의 유래가 됐다.

    1994년에 개봉된 영화 ‘파리넬리’에는 전설적인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자소프라노 가수)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5)가 영국에서 이탈리아어로 된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 공연을 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18세기 초 독일의 하노버 가문이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 음악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선진적인 유럽대륙의 음악을 소화할 만한 자국의 작곡가가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탈리아와 독일 음악가가 영국으로 유입됐다. 이들은 별다른 경력 없이도 영국에 와서 자국에 있을 때보다 후한 대우를 받았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영어에 어설픈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억양을 따라 하는 음악도들이 생겼고, 그러한 억양이 음성학적인 하나의 분류로 ‘음악가의 억양’으로 새롭게 명명될 정도였다. 이렇게 유입된 사람이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그들이 접하는 인물들이 사회의 상류층 인사다보니 자연히 사회적 영향력 또한 컸다.

    청교도 혁명정부, 음악 탄압하면서 대중음악 발전

    영국에서 맹활약한 외국예술가 중 한 명이 ‘음악의 어머니’로 통칭되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다. 그는 하노버 왕가의 궁정악장으로 있었던 인연으로 하노버공 조지 1세에게 발탁돼 영국에 왔으며, 하노버 왕가의 대관식을 위한 4편의 ‘대관식 미사’곡을 비롯해 영어로 된 최초의 오라토리오 ‘에스더’를 작곡했다. 헨델은 이 같은 작품을 통해 영국인이 가진 특유의 민족의식과 성경에 의거한 종교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헨델은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화려하고 볼거리가 풍부한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으로 작곡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안정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에 고무돼 헨델은 자신의 위치를 작곡가에서 제작자로, 제작자에서 극장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러자 헨델의 성공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인들의 반발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의 결집은 현격한 실력 차이 때문이어서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연예술계의 비판적인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한정된 수의 극장을 영국 극작가들과 외국인 음악가들이 나누어 가져야 했기 때문에 대립구도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연극이 지닌 강점이 가세했다. 오페라 공연은 신작 오페라를 만들어야 하고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구조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반면에 연극은 규모면에서 오페라에 비해 무대장치, 의상, 인건비(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제작비가 현저하게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전작품을 재공연하는 풍토였기 때문에 신작을 계속 발굴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거지 오페라’로 빚더미에 오른 헨델

    영국 뮤지컬의 시작과 끝 헨리 8세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오페라의 유령’ 한 장면.

    이런 상황에서 1728년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가 자신의 극본에 기존의 음악을 끼워 맞추는 방식을 사용해 발라드 오페라라는 장르로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를 무대에 올렸다. 이탈리아 방식의 오페라와 외국인 예술가에게 환호하는 귀족들의 의식을 런던의 거지, 사기꾼, 창녀들이 사는 사창가에 비유해 풍자한 이 작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그 인기는 헨델을 위협했다. 그 결과 헨델은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흥행에 실패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결국 파산해 빚더미에 앉았다.

    헨델 이후에도 영국에서는 자국 작곡가보다는 외국인 작곡가를 선호하는 풍토가 음악 분야에서 지속됐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이전에 독일 오페라의 초석을 다진 카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는 자신의 작품 ‘오베론’의 성대한 초연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머물다가 눈을 감았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외국 작곡가의 명성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수의 외국 작곡가는 최고 대우를 보장해주는 영국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 영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주자의 자질에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최고의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은 영국 음악가들의 형편없는 실력에 불평을 터뜨렸다.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은 1856년 영국에 공연을 갔다가 오케스트라의 함량미달 수준에 크게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만 외치는 청중의 편파적인 수준에도 낙담했다. 당시 영국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독일 음악에 대한 환상이 커져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의 독일음악과 멘델스존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우연이 아니라 1837년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선호했지만, 독일의 앨버트 폰 작센 코부르크 공과 결혼한 이후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성향을 좇아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다. 강력한 군주국가에서 여왕이 작곡가, 제작자의 역할까지 하는 앨버트 공과 결혼한 사건은 영국 음악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는 앨버트 공이 직접 기획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그런데 앨버트 공은 임종 직전 자신의 장례식 행사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멘델스존에 대해서는 무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이 시절 영국의 수많은 음악도는 멘델스존이 태어난 독일로 유학 가는 것을 성공의 지름길이라 여길 정도였다.

    독일 유학 경력을 가진 사람 중 영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아서 설리번(1842~1900)이 있다. 그는 독일 유학 후 왕실음악원 교수직을 얻어 안정된 위치에 있었으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교향곡과 합창곡 작곡을 넘어 대중적인 음악에도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극작가이자 유머작가인 윌리엄 길버트(1836~1911)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내며 길버트-설리번의 코미디 오페라 시대를 열었다.

    길버트의 계급의식과 특권의식에 대한 날카롭고 예리한 풍자와 ‘뒤죽박죽식’ 유머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 것이다. 그들은 예술적 견해 차이로 잠시 독자 노선을 걷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찰떡궁합을 과시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예컨대 이들의 합작품 중 1878년에 공연된 ‘군함 피나포’는 런던을 덮친 갑작스러운 이상고온현상으로 막을 내릴 위기에 있었으나 설리번이 자신의 코벤트 가든 연주 때 이 음악을 레퍼토리에 넣어 대중에게 소개한 것이 큰 효과를 보았다. 결국 다시 극장으로 관객을 모으면서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 여파로 이 작품은 미국에까지 알려져 미국 전역에 두 사람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애석한 것은 당시에 저작권에 대한 아무런 법적인 조치가 없었기에(1891년에 생김) 미국의 어떤 제작자도 이들에게 저작권료를 물지 않았다.

    길버트-설리번이 만든 ‘코미디 오페라’ 시대

    이처럼 길버트와 설리번은 런던에서 가스가 아닌 전기를 사용해 조명을 밝히는 유일한 극장, 당시 최첨단시설을 자랑하던 사보이극장으로 무대를 옮길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 극장에서 요정들의 머리에 배터리를 장착해 빛나는 별을 다는 등 환상적 무대장치를 선보여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클래식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던 설리번이 작곡한 작품은 인물 묘사나, 관현악법 측면에서 대중적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인기작 ‘미카도’는 영국 문화의 일부분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품인데, 넘치는 자부심을 배경으로 일본에 대한 영국민의 환상을 익살스럽게 자극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상황으로는 전무후무한 최고 흥행기록인, 2년간 사보이극장에서 공연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설리번은 국민예술에 이바지한 공로로 ‘경(sir)’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여왕이 개인적으로 밝고 명랑한 음악을 좋아했고, 또 당시 급격히 선양되는 영국의 위상과 팽창하는 경제적 부 및 계급적 대립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밝고 경쾌한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설리번의 역할은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18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은 농민이나 양치기와는 다른 노동자계급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역사 속에 출현시켰다. 이들이 도시주민의 다수가 되면서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삶의 피로를 잊게 해줄 여흥을 찾게 됐는데, 당시의 뮤직홀이 그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다수의 노동자계급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었지만 이들의 정서를 위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당시에는 그다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기껏해야 현세에 만족하며 살라는 식의 성가 구절로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하는 형편이었다. 그 결과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분노는 마침내 1836년 최초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고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적 운동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고 노동자계급도 일정 수준의 교양을 갖춘 대중으로 변모하면서 극장의 관객층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수요와 수준을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 1890년대부터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 무용, 이야기를 받아들인 가볍고, 밝고, 활기찬 일종의 쇼가 나타났다.

    이 쇼들은 익숙한 이야기를 동시대 현실에 대입해 풍자하는 방식과, 희극적인 장면과 여성들의 퇴폐적일 정도로 화려한 춤, 쉬운 멜로디의 노래 등을 결합시킨 양식이었다. 그렇지만 관객들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쇼보다는 일정한 구성이 있는 이야기를 요구하면서 최초의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인 타운(in town)’이 마침내 1892년 런던에서 출현하게 됐다. 이 작품은 수많은 미녀의 안무, 코믹한 연기와 노래는 그대로였지만 엉성하나마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뮤지컬 코미디 공연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좀 더 일관되고 풍부한 줄거리를 가진 음악을 지향하는, 뮤지컬 플레이라는 장르가 나왔지만 당시의 작품들은 대본에 생명력이 없어 한계를 보였다. 이처럼 탄생 초기부터 뮤지컬에서 대본과 음악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생긴 노동자들…뮤직홀 인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이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맹주로 부상하는 것에 발맞추어 문화적 영향력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급상승한 미국 샐러리맨들의 구매력은 이들의 취향을 고려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질적, 양적 성장을 가져온 반면 추락하는 영국의 위상은 런던의 뮤지컬 시장을 현상유지에 급급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1930년대 영국 뮤지컬은 길버트-설리번의 작품에 대한 축소된 수요로 겨우 운영되는 형편이었으며,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뮤지컬은 폭풍처럼 밀려오는 미국 뮤지컬 앞에서 초라함을 확인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영국 뮤지컬의 전통을 이어주던 소수의 성공적인 작품이 교두보가 되어 마침내 197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에서 미국 작품과 경쟁할 수 있는, 어떤 측면에서는 미국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앞서 이야기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 있다.

    로이드 웨버는 런던 로열음악대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와 첼리스트인 동생은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영감과 분위기 속에 성장했으며, 연극배우인 숙모의 영향으로 연극을 자주 본 까닭에 극장 메커니즘에도 일찍부터 눈을 떴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음악에 대한 매혹을 떨치지 못해 로열음악대로 다시 편입해 클래식음악을 전공했다. 1968년 대학 시절 절친한 친구인 팀 라이스(1944~)가 쓴 가사로 ‘요셉과 놀라운 색동옷’이라는 칸타타를 만들었다.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 15분짜리 팝 칸타타가 ‘런던 선데이 타임스’로부터 극찬을 받아 그들의 진로에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최후 7일을 배경으로 하는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영국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의 콧대를 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둘의 협업 관계는 1976년에 만든 ‘에비타(Evita)’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웨버는 1981년에 또다시 세상을 발칵 뒤집는 작품을 내놓았다. 남미 볼리비아의 국민 총생산량에 맞먹는 3억8000만달러의 수익을 일궈낸 ‘캐츠’가 바로 그 작품이다. T. S. 엘리어트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라는 시집의 시 14편에 곡을 붙여 뮤지컬로 만든 작품으로, 각기 다른 성격과 성분을 가진 고양이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세상살이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1981년 런던 초연 이후, 이듬해에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 7개 부문을 휩쓰는 등 모든 분야에서 기록을 경신하며 새로운 전설로 자리 잡았다. 늙은 창녀고양이인 그리지벨라가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부르는 ‘메모리’는 세계적으로 170여 명의 가수가 600회 이상 녹음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웨버는 캐츠 공연 도중 합창단원이던 사라 브라이트만과 1984년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그녀의 음역에 맞추어 만든 작품이 1986년에 나온 ‘오페라의 유령’이다. 현재 뉴욕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기록에다 세계적으로 관객 1억명을 돌파한 지 오래인 ‘오페라의 유령’은 모든 면에서 ‘캐츠’가 세운 기록을 다시 경신하며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1순위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오페라로 착각하게 만드는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이처럼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최고의 음악과 극본의 결합, 뛰어난 연출이 성공요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환상적인 무대장치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공연마다 230벌의 의상, 22번의 장면 전환과 120번의 자동무대장치 효과, 281개의 촛불, 250㎏의 드라이아이스와 이를 작동시키는 10대의 포그 머신(fog machine) 등의 수치를 보면 그 화려한 무대장치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된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폭 3m에 3만5000개의 유리구슬이 장식된 1t짜리 초대형 샹들리에가 초속 2.5m 속도로 객석 위에 떨어질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오페라의 유령’을 본 관객들이 오페라극장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한 무대장치 때문에 이 작품을 오페라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1992년 로이드 웨버는 아서 설리번처럼 예술적인 공로로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로이드 웨버 ‘경(Sir)’이 된다.

    그러나 로이드 웨버가 ‘오페라의 유령’ 이후 발표한 다섯 작품은 ‘웨버’라는 이름에도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오페라의 유령’ 이후 새로 무대에 올릴 작품으로 그는 1990년부터 구상해온, ‘오페라의 유령’의 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러브 네버 다이즈(Love Never Dies)’를 선택했다. 그러나 극본 작업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해 작가를 바꾸고, 그의 단짝친구인 페르시아 고양이 ‘오토’가 장난치다가 그의 컴퓨터를 건드려서 저장해놓은 음악들이 사라지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전립선암이라는 건강상의 문제를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 작품은 2010년 막을 올렸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온갖 혹평과 악평이 이어졌지만, 정작 로이드 웨버는 “‘캐츠’나 ‘오페라의 유령’ 때에도 공연 전 평은 형편없었다”면서 “평을 읽었더라면 절대 공연을 무대에 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태연한 척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전작에서 사라진 유령이 뉴욕으로 가서 놀이동산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뒤 크리스틴과 라울 부부와 그들의 아들을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으로 초청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뮤지컬은 이야기 전개에서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한 라울로부터 크리스틴을 다시 빼앗으려는 유령의 이야기는 개연성 없이 ‘억지 스타일식’ 신파로 몰고 간다는 악평을 받았다. 특히 사고로 총을 맞은 크리스틴이 아들의 아버지는 유령이라고 밝히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기겁하면서 ‘LOVE NEVER DIES’란 제목을 ‘LLOYD WEBBER DIES’로 변경해야 한다고 소리칠 정도였다. 이렇듯 황당하고 허술한 이야기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웨버라는 명성 덕분에 1년6개월이나 장기 공연한 후 올 8월 영국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영국 뮤지컬은 웨버로 말미암아 전성시대를 열면서, 이른바 빅 4(오페라의 유령, 캐츠,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의 성공으로 미국 브로드웨이를 잔뜩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 뮤지컬이 관현악의 서정적이면서도 긴박하고 장중한 진행을 가능하게 한 데 있다.

    영국의 뮤지컬은 설리번의 코믹 오페라와 그전의 발라드 오페라를 원천으로 한 고전적 공연미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 근본 안에서 로이드 웨버의 작품들도 극본의 기본과 격조가 있는 작품들만 살아남았다. ‘맘마미아’ ‘빌리 엘리어트’ 등이 모두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명곡과 영화의 명성에 기대 무임승차한 것이 아니라 관객이 원하는 자연스럽고 탄탄한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로이드 웨버가 차기 작품을 제작한다면 승패의 갈림길은 바로 이러한 영국 뮤지컬의 특성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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