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금 수. 화장 중.’ 영락공원 화장장 벽에 걸린 전광판에 붉은 자막이 흐른다. 이승에서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핏빛으로 흐른다. 이대로 끝을 내기엔 너무 억울한 엄마의 삶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지만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어버린 엄마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죄책감 때문에 나는 혼절할 것 같은 육신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든 뭐든 멈추어만 준다면 죽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엄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빌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승에서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곡 졌는지 알고 있는 자식으로서 엄마의 안식을 바란다면 죽어도 품어서는 안 될 소망이다. 아흔둘의 엄마를 보내면서 나는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 안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맺히고 맺힌 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몰라서다.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한마디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지만 사랑과 미움의 뒤엉킴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평생 엄마에 대한 사랑을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남이 볼까봐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고 거칠고 드센 미움으로 엄마를 대했다. 마음 밑바닥 내 삶의 원초적 불행의 근원은 엄마가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자상하지는 않지만 나를 사랑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어느 날 엄마가 슬픈 얼굴을 하고 큰집으로 갔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다. 다만 엄마 따라 간 큰집의 보리밥이 먹기 싫었을 뿐이다. 대여섯 어린 나이에 아침에 큰집에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논길 밭길 가로질러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가면 아버지는 출근길에 내 손을 잡고 차부까지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것을 사주었다. 그땐 아버지가 사주는 과자가 좋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몰랐다. 그리고 잠시 내 기억은 쉰다. 다시 엄마랑 집으로 왔을 때부터 아버지랑 같이 살지를 않았다. 이건 어쩌면 기억이 아닌, 들어 알고 있는 상황의 종합적인 결론인지 모른다. 희붐하고 막연한 기억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예닐곱 살 무렵 아버지가 대문이 둘씩이나 달린 큰 집을 샀다. 그때 말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나는 빨강 모직에 하얀 토끼털이 달린 예쁜 망토를 입고 기분이 한껏 부풀어 양은 냄비 가득히 자잘한 세간을 담아 아버지가 새로 산 집으로 짐을 날랐다. 부지런히 날랐다. 한참을 신바람 난 다람쥐처럼 세간을 나르고 있는데 계속 입맛을 다시면서 갈팡질팡하던 아버지가 내 어깨를 다독이면서 짐을 집으로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다니는 버스 회사의 차창과 정분이 나 내심으로 딴살림을 차리기 위해 그 집을 마련했지만 당신의 사회적인 위신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나는 퍼질러 앉아 아망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울면 될 줄 알았다. 아버지가 백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었기에 일부러 앙앙앙 소리 내어 더 크게 울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내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게 이별의 서곡, 엄마가 아닌 내가 감지한 아버지와 이별의 시작이었다. 가장 선명한 최초의 기억이다.
여덟 살 3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아버지에게 가서 입학식에 아버지랑 같이 가자고 졸라서 약속을 받아냈다. 아버지와 한 최초의 약속인 셈이다. 다음 날 곱게 차려입고 왼쪽 가슴에 이름표와 손수건을 달고 아버지 집으로 갔다. 손잡고 같이 학교에 가자고 계속 졸라도 아버지는 입맛만 다실 뿐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팔을 잡아당겨도 꿈쩍도 않으면서 엄마랑 같이 가라고 나를 달랬다.
나는 입학식을 다 마칠 때까지 화가 덜 풀려 씩씩거리며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있는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래도 성이 안 풀려서 아버지의 등 뒤로 가서 수도 없이 아버지의 등을 두들겨 팼다. 주먹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쥐어박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두 팔을 돌려 그런 나를 업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내 화풀이를 받아주었다. 등 그네를 태우듯이 일렁일렁 등을 움직여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등에 반쯤 업힌 채로 골이 풀릴 때까지 사정없이 때릴 참이었다. 온갖 응석을 다 받아준 아버지였으니까.
“뭐가 이래 못된 가시나가 다 있노. 안 내려오나.”
아직은 작은엄마라고 불러보기도 전의 작은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작은엄마에 대한 첫 기억이다. 겨우 여덟 살의 여린 계집아이는 안 그래도 뭔가 안 좋은 느낌으로 가득한 여자의 앙칼진 고함에 겁을 먹고 멈칫 하던 짓을 멈추고 그 여자가 아닌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낯선 분위기가 얼마간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는 먼 산을 보는 척, 모른 척, 시침을 떼고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당연히 그 여자를 나무랄 줄 알았는데 나를 업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 서서 앙앙 울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 나를 달래달라는, 내편이 되어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의 신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가라는 말만 했다.
스스로 의식은 못했지만 나는 그날 아버지를 가슴 어딘가에 묻어버렸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와 주파수를 맞추는 법을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여덟 살의 계집애였지만 그날의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고 짙은 아픔이 되었다. 아버지가 날 달래주길 바라며 울면서 아주 천천히 아버지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그냥 울면서 가게 나를 내버려두었다. 분명 내 아버진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여덟 살의 꼬마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나? 뒤에 생각해보니 그날의 일은 나와 아버지의 문제기도 했지만 엄마와 작은엄마의 기싸움이었다. 여리디여린 나를 추악한 어른들의 싸움판으로 밀어 넣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포기했으면 깨끗이 포기할 일이지, 그렇게 나는 엄마 아버지 모두에게서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
큰 집을 샀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상처였다. 규모는 작아도 목욕탕과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좋은 종이로 도배된 큰 방이 셋이나 되고 다른 집에는 없는 복도와 현관이 있어 비가 와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도 나쁘지는 않았다. 근데 왜 엄마는 이미 판판이 지고 있는 싸움에 나를 방패로 내세웠는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까지는 상처의 근원은 아버지였다. 단순히 아버지가 가해자였다. 집을 샀을 때는 이별을 감지했고 입학식은 깊고 오래갈 상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가 어린 딸과 한 첫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은 물론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준 날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지고 아버지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받은 날로 기억되고 있다. 어리지만 나는 뭔가 숙명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막연하지만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동생의 세발자전거를 빼앗아 타는 심통쟁이가 되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고 마는 화약심지 같은 아이로 변해갔다.
매 맞는 엄마
“우당탕탕탕.”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밤이 늦은 시간에 세차게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엄마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아버지가 저승사자만큼 무서운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토록 무서운 얼굴은 전에도 그 뒤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라고 골난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미 겁에 질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마구 고함을 지르면서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동생과 나는 너무나 무서운 분위기라 감히 말리거나 울 엄두도 못 내고 초주검이 되어 영문도 모른 채 매 맞는 엄마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내 생애 가장 무서웠던 장면이다.
“자야 아부지요.”
난폭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과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사정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내 골수에 박혀버렸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내 귓속을 맴돌고 내 뇌리에서 사라져주지를 않는다. 겁에 질린 엄마의 목소리와 무섭고 끔찍한 아버지의 행위는 나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고 큰 아픔이 되었다.
살쾡이처럼 아버지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데 난생처음 보는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주눅이 들어 벌벌 떨었다. 무서워 죽겠으면서도 죽어라고 덤벼들고 싶은 걸 참자니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날 못 지른 비명이 평생 내 육신 속에서 돌아다니며 울부짖고 있다. 끝내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못한 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율배반이며 내 처음의 비겁이다. 빡빡 문질러 닦아내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아마 그때부터인가 싶다. 내 속에서 폭력성이 싹튼 것이. 그날부터 엄마와 나 사이도 멀어져버렸다. 엄마가 싫어진 기억의 시작이 거기부터다.
아무 잘못 없이 맞는 매, 이래도 저래도 피할 수 없는 매라면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써보지 그냥 맞기만 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의 한복판에 퍼질러 앉아 나를 평생 힘들게 하고 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엄마를 윽박지르기는 해도 더 이상 때리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영상은 내게 평생 지옥이 되었다. 죽지 않고는 지울 수가 없음을 안다. 따지고 보면 엄마랑 나랑 오십보백보인데 그 모진 기억은 엄마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엄마가 죽어라고 대들었다면 아마 우리 남매도 같이 죽을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의 모든 것이 그날 밤과 연결되어 엄마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을 빼앗기고 잘못도 없이 매나 맞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엄마의 모든 것이 싫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가버렸고 엄마는 싫었다. 나는 지기 싫다는 오기로 가득한 기가 센 아이가 되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빼앗고도 눈 하나 까딱 않고 사랑이라는 사탕발림을 해 살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알기엔 너무 어린 철부지였지만 나는 점차 이대로 당할 수만 없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했다. 죽어도 엄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다는 오기와 누가 뭐래도 내 아버지라는 천륜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방어를 했다. 그런데 그 본능적인 방어마저 죄악시하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작은엄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당하는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남의 남자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엄마의 불행이 곧 자신의 행복 시작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내세웠다. 오직 그 잘난 사랑을 내세우며 우리가 철저하게 불행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작은엄마의 심리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리 뜨겁고 그 자체로는 절절하기 짝이 없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랑의 본 모습이라 생각한다.
엄마와는 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본처와 시앗의 관계지만 우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금쪽같은 자식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의 알량한 사랑이 거짓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가끔 아버지의 후회의 넋두리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의 말대로 옻나무에 걸린 연 신세가 된 아버지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모든 걸 감수하고 선택한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나이를 먹게 되어 어느 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서, 더는 당하고 살 수 없었다. 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모드로 전환했다. 함정을 파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이를테면 작은엄마가 보면 기겁할 아킬레스건을 일기장에다 써놓고 일기장을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놔두는 식이었다. 내 속에선 작은엄마를 이기고 싶다는 무조건적인 본능이 아주 맹렬하게 자라났다. 엄마를 대신한 복수라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천방지축 명랑 쾌활 순진무구해야 될 유년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어떤 경우에도 내게 잘못이 없을 때는 아버지가 내편이라 걸 알고부터는 더했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당하지 않을 거라는 오기 하나로 힘들고 아프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요즘도 책이나 드라마 등을 보다가 남을 해치려거나 모략을 일삼는 장면이 나오면 책을 덮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모님의 집을 우리 집이라 한다. 나는 아버지가 사는 집도 우리 집, 내가 사는 집도 우리 집이라고 우기며 기분 내키는 대로 두 집을 오가면서 아주 꺽지게 살았다. 누구든지 건들기만 하면 박살내고 말겠다는 투였다.
천벌 받을 년
엄마는 잘못 없이 앙숙으로 지낸 자식들에게 화해의 길을 만들어주고 가셨다.
“누나야, 우리가 아부지를 이해하자.” 대체 어떻게 얼마를 살고서 얻어낸 결론일까? 얼마나 아프고 난 다음에 얻은 깨달음일까를 생각하니 오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용서가 아닌 이해라는 말은 작은엄마는 몰라도 결국 동생들도 피해자라는 말이 아닌가? 정말 동생들이 어쩌면 나보다 더 큰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붙이고 산, 피해자.
인정머리 없는 딸년이 아무렇게나 잘라준 머리 모양 그대로. 쪼그라들어 줄어버린 키로 적신이 되어 염습실에 누워 꽁꽁 묶이고 친친 감기면서도 요동은커녕 찍소리 한 번 못 지르는 엄마를 지켜볼 수가 없어 비틀비틀 흐느적거리는 육신을 겨우 챙겨 밖으로 나왔다.
“불쌍한 우리 엄마, 살아서도 큰소리 못 쳤는데 죽어서는 구속 말고 풀어 놓으라”고 울면서 패악을 지를 것 같아 90대 노인처럼 벽에 몸을 의지해 겨우 밖으로 나왔다.
“어무이, 좋은 데 가이소”라는 올케의 외침이 환청이 되어 고막을 흔들었다. 참으로 낯설고 낯선 소리다. 올케의 그 소리가 내게도 이다지 낯선데 엄마는 오죽할까? 그 소리가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가던 저승길을 돌아올 것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죽어서야 며느리에게 ‘어무이’ 소리를 들었다. 왜 모든 것이 엄마에게만 그리도 귀했을까? 왜 그리 내 엄마에게는 모든 것이 인색하고 궁색하고 짜기만 했을까. 울음을 비틀어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어버렸다. 가짜 같은 내 울음을.
두 외손녀의 흐느낌 소리가 나직이 들렸을 때 난 겨우 위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모두가 제 설움에 우는데 내 두 딸은 거짓으로 울 이유가 없는 아이들이다. 엄마의 마지막을 거짓 없이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마음을 추슬러 다시 염습실로 들어갔다. 엄마의 모습은 안 보였고 태워도 아깝지 않은 가장 값싼 휴지들로 채워진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엄마를 저승으로 보낼 마지막 여정이었다. 이승에서의 삶이 한으로 얼룩졌는데 저승길까지 꽁꽁 묶여 휴지와 뒤엉켜 하직을 고하는 엄마를 보고 “이 개 같은 세상아, 문디 같은 세상아, 이 더러운 세상아, 이렇게 가려고 그 고생을 했나” 싶어 속으로 맹수같이 울부짖었다. 속으로만 울부짖는 게 숙명인 듯. 살아생전 천하 없이 못되게 군 딸년이 혼절을 한다면 개도 웃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쓰러질 것 같은 육신을 붙잡으려고 모진 애를 썼다.
이번이야말로 진정한 죽음, 완벽한 마지막 죽음인 화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절차도 번거로웠다. 한 번, 두 번, 여러 번의 죽음 끝에 비로소 완전한 죽음이 주어졌다. 자유, 그 완벽하게 허망한 자유를 위해 엄마가 감내한 삶이 너무 무겁고 덧없다. 오직 죽음을 위한 삶이었다.
죽음에 이르기 위한 엄마의 삶이 왜 그리도 지난했는지 묻고 싶다. 3000년을 굶주린 듯 게걸스러운 화염이 엄마를 삼켰다. 엄마는 그렇게 첩질 하던 남편에게 이유 없이 매 맞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모진 딸년에게 구박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 엄마만의 진정한 낙원을 향해 훨훨 불이 되고 꽃이 되어 춤을 추면서 떠났다. 한 가닥 끈을 놓아버리자 비로소 엄마의 삶이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지니고 갈 것 하나 없는 적신이 비로소 허기마저 벗고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
‘김 금 수 화장 중’이라는 자막이 붉게 흘렀다. 이승의 모든 것을 지워주는 아름다운 글자다. 얼마쯤 지나‘김 금 수 화장 완료’라는 자막으로 바뀌더니 영상으로 보여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쓰레받기 안으로 쓸어 담기는 엄마.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앞 못 보는 맹인처럼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목석이 되어 울고는 있는데 소리도 눈물도 나지가 않았다. 드디어 내 입에서 참고 참았던 말이 나왔다.
“천벌 받을 년.”
감추려고, 입 밖으로는 절대 밀어내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던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금단의 선을 기어코 넘어버렸다. 한번 뱉어버리면 주워 담을 수가 없는 무서운 말. 세상에 내놓으면 죽어라 돌팔매를 당할까봐 무서워서 꾹꾹 참았던 말이다.
“이 벼락 맞을 년.”
죄는 병이 되고
죽음이 부르고 있었다. 오직 그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죽어서 가든 살아서 가든 죽음의 길은 죽음처럼 힘든 길이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끔이던 불면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이 탓으로 돌렸다. 더우면 더운 탓, 추우면 추운 탓이라 생각했다. 길을 가면서는 나도 모르게 적당히 높은 곳을 찾고 있었다. 적당하게 높은 곳. 무엇을 하기 위한 적당하게 높은 곳인지는 의식을 못 한 채 날마다 적당한 높이만 찾고 있는 한편으로 날마다 서랍을 정리하고 구석구석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찾고 있던 적당한 장소는 죄 많은 내 육신을 던질 곳이었다.
“떨어져도 죽지 않을 높이는 안 돼.”
“죽지 않을 곳은 안 돼.”
오랜 시간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얼마 안 있으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지도 않는 바람이 내 콧잔등을 쓰다듬고 내 폐부 깊이 청량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 거니 애탄 개탄 할 거 없다 싶었다. 삶이란 게 한낱 바람이고, 봄날의 아지랑이며, 볕 좋은 여름에 내리는 여우비 같은 것이니 고통의 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니 평화로워지는 듯했다. 이제 눈을 감아도 떠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염습실의 엄마 모습이나 매 맞던 엄마의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죽음이 겁나지 않았다.
잠시 죽음이 줄 안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안락은 평온이 아니라 심한 불면으로 남편까지 힘들게 했다. 옆에서 지켜보다 못한 남편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때 나 역시 남편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건 병이라는 생각. 얼마 만인가. 온전하게 생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나를 일깨워준 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신이란 걸 차리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해온 짓들에 소름이 끼쳤다.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토록 달콤했던 죽음에의 유혹이 겁이 나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어야 할 수만 가지의 이유를 대면서, 스스로를 변명해가면서 당장 내 발로 병원을 찾았다. 행여 순간적인 감정에 욱해서 내가 찾아둔 적당한 장소에서 뛰어내릴까봐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음이든 삶이든 생각 하나의 차이가 정말 엄청났다. 잠깐의 고통만 감내하면 두려움도 아픔도 없는 삶이 주어지리라던 여태까지의 생각들이 온갖 방정맞은 상상력을 동원해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이젠 정말로 허약할 대로 허약해 자신을 주체 못하고 진짜로 죽을까봐 무서웠다. 모든 구질구질한 변명의 진짜 이유는 ‘살고 싶다’였다, 진실로.
자식들과 남편, 손자들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소중하디소중한 이들에게 참으로 끔찍하고 못할 짓을 할 뻔한 자신이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혼자 죽는다고 혼자 죽는 죽음이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어 나만의 몸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칫 잘못된 생각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뻔했다.
태어남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적어도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해야 된다는 것, 또 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의 내 소신이었는데 정말 이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예의로라도 곱게 살다가 곱게 죽으리라 다짐했다.
정신병원, 그러니까 좋게 말해서 신경과에는 모조리 멀쩡한 사람만 온다. 길에서 오가다 만나면 전혀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만 온다. 청진기로는 병명을 콕 집어낼 수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피를 뽑거나 X레이 같은 걸 찍거나 할 필요가 없으니 모두가 멀쩡하다.
병원 분위기가 맘에 든다. 깔끔하다.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거나, 전화를 걸거나, 아니면 삼삼오오 모여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이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전혀 병자 같지가 않다. 세상엔 나 말고도 참 마음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 알았다. 마음이든 몸이든 아픈 사람이 없다면 세상 자체는 존재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병든 사람으로 가득한 지구는 건강한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 덕으로 온전히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힐끔 힐끔 쳐다봐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저들도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겠지.”
저들 눈에 보일 ‘나’에서 생각과 힐끔거림을 멈추었다.
클리닉이라는 이름이 참 어울리는 풍경, 풍경에 딱 어울리는 중년의 닥터, 언제부턴가 나보다 젊은 사람들의 나이를 분간할 수가 없어졌다. 약간은 점잖음을 과장한 듯한 행동이 어색하기보다는 신뢰가 간다. 살아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 함부로 분탕질을 치려한 어리석음을 토해내면서 나는 끝내 울음도 같이 뱉어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너무 많다”는 내 흐느낌을 듣고 의사는 뭐라 말을 못했다. 부끄러운 내 토악질을 경청해주었다.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부지런히 기록만 하고 있던 그가 전적으로 내 고통에 공감을 표한다. 한때 불면증도 병이고, 우울증도 병이냐면서 그런 유의 아픔을 조롱했던 적이 있다. 마음이 허약해서 그딴 것들에게 진다고 큰소리쳤다. 더욱이 마음의 병 따위를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몸 어디에 마음이란 게 있는지 모르는데 대체 무슨 약을 어떻게 쓴단 말일까? 그러나 마음의 병이 중해지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만가지의 잡념이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의 손에 쥐어준 실타래처럼 끝없이 풀려나와 잠은커녕 온전한 정신으로 놔두지를 않았다. 어쩌다 새벽에 한 시간가량 겨우 자는 토끼잠은 잠이 아닌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약으로 마음의 병을 다스린다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낫고 싶었다. 나아야 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제대로 살다가 제대로 죽고 싶었고 무엇보다 나를 죽음의 유혹 앞으로까지 끌고 간 병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병원보다 더한 곳인들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본을 보여 주어야 할 사랑하는 손자가 다섯이나 된다.
2010년 6월17일, 비록 약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잠이란 걸 자 봤다. 그러나 단잠도 꿀잠도 아닌 뒤죽박죽 악몽의 연속이었다. 다만 잠이란 걸 잘 수 있다는 데 위안을 얻었다. 차차 잠자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지고 악몽에 시달리는 시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살 것 같았다. 불가능하리라 믿었는데 나는 그렇게 약의 힘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2개월여 치료를 받고 나서부터는 잠은 잘 자는데 과한 약 기운 때문에 맥을 못 출 정도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병으로 힘들 때와는 또 다른 육신의 고통에 지치기 시작하자 의사와 상의 끝에 약의 양을 줄였다. 견디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다시 두어 달 후에는 양을 더 줄여서 수면제와 항우울제 반 알 정도만 복용했다. 발악하게 할 것 같던 잡념들이 사라졌다. 삶의 청량감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좋아졌다. 처음엔 행여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약으로도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수면제를 반 알로 줄여 2주에 한 번 가던 병원을 한 달에 한 번꼴로 가다가 드디어 약이란 걸 먹지 않고 잠을 자는 믿어지지 않는 희한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다고 아픈 모든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프지만 병이 되어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갈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수면제의 도움으로 잠을 잔다.
이제 엄마에게 그토록 지독하게 군 내 죄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은 치지 않으려 한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만큼 마음이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내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부분, 어떤 기억은 쉬 지울 수가 없어서 고통이 되고 또 어떤 기억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아서 아파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을 그대로 품고 살면서 아프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나만의 절대적인 고통이란 없다는 걸 엄마의 영정 앞에서 통곡하던 동생을 보고 깨우쳤으니까.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복에 겨워 한판 굿을 치른 것 같다.
평생을 엄마를 미워했으면서도 병적으로 엄마 몫까지 살아내려 했던 그 무거움도 이제 내려놓으려 한다. 죄책감도 유년 시절의 환경으로 인해 생긴 화인(火印)도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 함께 껴안아 보듬고 살아낼 내 몫이다. 내 삶의 일상이다. 상처 자리에는 흉터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흉터 때문에 울고 싶지 않다. 이제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보다 더 엄청난 사투를 벌이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며 그들에 비하면 내 아픔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주어진 내 나머지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유년기의 고통이 인간의 평생을 좌우한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아이들에게 어떤 어미였는지 절로 뒤돌아보게 된다. 만점은커녕 반점짜리도 못 되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아이들이 내게 잘해줄 때마다 내가 과연 이런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느냐는 죄책감으로 힘들었는데 그것도 이모의 말처럼 복불복이라 생각하려 한다.
살아 있는 날의 진정한 시작
삶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소중하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안다. 애들 키우면서 남편 사랑의 울타리에서 사는 동안은 아버지에 대한 아픔을 잊은 줄 알았는데 나이 들어 내 시간이라는 게 주어져 글공부를 시작한 뒤로 기억의 밑바닥으로부터 용해되지 못하고 침전되어 있던 아버지에 대한 아픔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다면 자식으로서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며,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인간으로서 행복한 사람이리라. 천륜으로 받은 상처를 지운다거나 잊는다는 것 또한 천륜이라는 이름 때문에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무엇보다 나 자신을 한번 원 없이 사랑해보고 싶다. 고통을 대신할 희망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수없는 정을 맞았으니 더 이상 상처를 헤집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부드러워질 수 있는 지, 얼마나 유순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여자다운 여자로 변할 수 있는지 내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고 싶다.
나란 사람. 평생을 정으로 쪼아도 다듬어지지 않을 드센 여자라는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오직 하나뿐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리라. 아름답고 싶다는, 불가능해 체념했던 소망. 어느 소설가는 아름다움을 ‘앓음다움’이라 표현했는데, 나는 아름다움을 ‘앓은 다음’이라 표현하고 싶다. 앓을 만큼 앓은 뒤, 더 이상 아플 것이 없을 때 그때는 아름다워지는 것 말고 달리 할 것이 없을 테니까. 말갛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리라.
부산의 한 서점에서 작가와의 만남시간이 끝난 뒤 사인을 받으려고 책을 내밀다 “참 곱게 나이 드셨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유명한 분의 칭찬이라서 얼떨떨했다. 천금짜리 보증수표보다 든든했다. 나는 나 자신이 털과 가시로 뒤덮인 무서운 도깨비인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에 말의 긍정적인 힘을 깊이 깨달았다. 그분이 본 게 꼭 내 외관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쁨이랄까 희열 같은 걸 느꼈다. 그래, 다 낡은 거죽과 상처투성이의 마음이지만 내면이 아름다운 인간으로 한번 거듭나보자. 나는 진정으로 마음이 향기로운 유순한 여인이 되고 싶다. 내 유년의 시간이 너무 황폐하고 거칠어서 감히 꿈도 못 꾸던 삶을 내 나이 예순여섯에 비로소 꿈꾸어본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데 늘 상대를 분노하게 했던 지난 시간들이 부끄럽다.
지금 남편은 컴퓨터를 나에게 내어주고 소파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 결코 미남은 아니지만 이마가 반듯해 정직하게 보였고 눈에서 풍기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두 남자, 아버지와 형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하고 양심적일 것 같은 분위기, 무엇보다 그의 깊이가 좋아 생의 절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다.
엄마의 몫까지 살게 해준 고마운 사람. 모르는 게 있으면 다 가르쳐준다. 내 인생의 멘토 같은 남자라 말할 수 있다. 거칠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내 삶이 오늘 정도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순전히 남편 덕이다. 작은 분노도 못 견디는 내게 참는 법을 배우라며 끝없이 인내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오전 내내 컴퓨터로 클래식을 들었다. 서당 개 3년의 풍월로 조금은 알아듣지만 여전히 나는 부르기 듣기 모두 음치다.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흐르자 남편이 설명을 곁들여준다. 보통 교향곡은 4악장인데 2악장에서 끝이 나서 미완성이라고 한다고.
다 늙은 마누라를 여태 여보나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숙아”라고. 세상 모든 남자가 부르는 이름으로는 부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만하면 엄마의 몫까지 살지 않았나 싶다. 우리라고 살면서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 왜 없었을까마는, 아니 수없이 많은 그날이 있었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조용한 바람이 늘 우당탕탕 용 바람을 막아주었다.
모든 것은 스치고 스쳐 지나가고 흐르고 흘러 사라져가는 것. 잡초 없는 정원은 없는데 결벽증처럼 잡초를 없애려 한 우를 범했다. 잡초도 같이 자랄 수 있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싶다. 꽉 끼는 옷을 입고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도 버리고 내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고통을 견디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며 끝내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삶이다. 주어진 건강에 감사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남편과의 이별을 늘 염두에 두고 후회 없도록 서로가 서로의 골동(骨董)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눈앞에 아버지를 두고 한없이 그리워했던 유년의 아픔도 뒤돌아보니 아픔만은 아닌 것 같다. 구메구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기억들도 있다. 이제 기억의 편식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왜 그리 모진 시간만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아파했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과거와 현재의 까무룩했던 경계에도 선을 긋고 싶다.
어미의 마음으로 헤아려보니 엄마는 내가 아파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란 변명 같은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불효한 여식이다. 그래도 나 이렇게 살아 있음에 눈부신 삶이 감사하다. 늦게나마 지나간 시간을 털어버리고 살아갈 용기와 기회를 준 내 운명에 고개 숙여 감사한다. 매 순간의 희로애락을 감지하며 살 수 있음이 좋다. 살아 있어서 참 좋다. 볕이 눈부신 날은 더 좋다.
자수정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고 검색창에서 자수정을 쳐 봤다. 자수정은 곧 내 아버지로 연결된다. 내 유년으로 연결되면서 수많은 행복하고 아픈 기억들로 이어진다. 잊을 수 없는 영화의 장면이자 절절하고 사무친 그리움이다. 나한테 고향 같은 단어인데 몇 줄 읽다 말고 검색창을 닫아버렸다. 명색이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자수정 광산 집 둘째 딸인데 수정으로 된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수정 곰 마스코트는 이미 버렸다.
누구는 집에서 훔쳐 나온 소 한 마리로 세계적인 거부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도 자식대에까지 상처만 남기고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규소가 진흙 속에서 농익어 5000만년을 견딘 후 자수정이 된다는 구절,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 황토에서 자수정이 출토되며 황토에서 출토되는 자수정이 가장 상품(上品)이라는 구절에서는 원망이 아닌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오늘날 세계에서 내 산에서 나는 수정만큼 좋은 돌은 없다”던 아버지의 말을 허풍이라고 경멸했었다. 아버지 손잡고 따라가서 본 광산의 황토는 늘 아버지가 캐오던 수정에 묻어 있었다. 수정에 묻어온 쫀득쫀득한 황토를 씻을 때마다 행여 옥에 티라도 생길까봐 노심초사했던 기억, 요즘 같으면 질 좋은 황토만으로도 충분히 큰돈이 될 것인데 하는 아쉬움도 생겼다.
그토록 귀한 축복을 축복인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신 가여운 아버지는 내 속에서 끝없는 그리움의 용광로였다. 울 때도 아부지만 부르면서 울었던 너무도 애절한 이름이다.
아무리 더듬어도 다시는 찾아낼 수 없는 아버지의 향기가 내 평생을 목마르게 했다. 입학식 날 마지막으로 기댔던 아버지의 등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더 원망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대절한 시발택시를 타고 부산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하바나라는 빵집에서 맛있는 사탕이랑 케이크를 사다주셨고 한 말들이 통으로 사온 쇼트닝에 튀긴 은어를 신문지 깐 큰 채반에 놔두면 시 때 없이 들락거리면서 먹었다. 집에서 잡은 염소 고기와 송이를 양념에 버무려 구우면 엄마의 몫까지 먹어야 된다 싶어 아귀아귀 먹었다. 작은엄마는 그런 내가 못마땅해 가자미 눈으로 째려보면서
“좀 작작 묵어라”고 했지만 “놔둬라”라는 아버지 ‘빽’만 믿고 그러거나 말거나 콧방귀를 뀌면서 더 많이 먹었다. 작은엄마는 내가 엄마 몫까지 아귀아귀 먹는 것을 눈치 챘고 아버지는 끝내 모르셨다. 우리 몫으로 보내준 것을 나는 엄마 몫이라 챙겨놓고 작은집으로 달려갔다.
작은엄마에게 늘 속으로 “니가 뭔데, 우리 아부지껀데” 라면서 지독히도 얄밉게 굴었다. 눈엣가시처럼 굴었다. 순수하고 천진해야 할 나이에 나는 스스로를 자해하면서 살았다. 애답지 않게 악착을 떤 시간이 부메랑이 되어 가슴에 꽂혀있다.
아버지 덕에 공주같이 산다는 사촌 올케언니의 말대로 집에서 목욕을 할 때도 욕조에 일제 향료를 넣었다. 비누며 학용품, 옷, 접는 우산, 달력까지 모든 생필품을 그 당시로는 신기할 정도의 고급품인 일제를 사용했다. 유년기에 내가 누렸던 호사가 내 아버지와 바꾼 것들이며 운명의 신이 내 운명을 바꾸어 직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진정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자수정 광산 집 둘째 딸로서, 아버지의 딸로 대접받고 누리고 산 것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매년 송아지를 잡아 사나흘씩 동네잔치를 벌이던 아버지의 생일.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생일에 초라한 생일상 앞에서 전처 소생의 우리 삼남매를 보고 통곡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 용서를 비는 걸로 받아들였다. 처절하고 완벽한 몰락은 처연하기만 했다. 원망의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을 만큼 초라했다. 인과응보요, 신의 나무람이다. 인륜이 아닌 천륜의 정 때문에 십 몇 년 만에 우리 삼남매와 아버지는 여름 논의 개구리보다 더 처량하게 통곡했다. 타월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던 아버지가 “숙이는 자태 있으면서 와 그래 안 왔노”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아버지도 나처럼 딸을 그리워했구나’ 싶어 놀랍고 서러움에 눈물이 마르도록, 눈뿌리가 아리도록 아버지 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네 딸이 모두 숙자 돌림인데 유독 나에게만 숙아라고 부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숙이라는 내 이름 속에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내 딸만은 야수 같은 세상의 사내들 속에서도 올곧고 말쑥한 여자로 살기를 원하는, 작은 딸을 염려하고 사랑한 아버지의 너무도 간절한 소망을 이제야 알고 눈시울을 적신다.
“자야, 니 얼굴 한번 봤으니 인자 죽어도 한이 없다.”
일본서 온 언니를 보고도 한마디 했는데 끝내 아버진 낳자마자 버리다시피 한 남동생을 보고는 너무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는지 들먹이지를 못했다. 피의 부름, 피의 끌림을 서로 모르고 그리워하면서, 원망하며 메마르게 산 시간이 억울해 처음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날처럼 울었다. 아버지가 속으로 간절하게 작은딸을 그리워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몇 번이고 찾았을 텐데 나는 긴 시간 고향마저 지우고 살았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지워진 자식인 줄 알았다. 아버지 품에 한번 안겨보고 싶었는데 못했다. 너무 낯설어서 끝내 못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연민을 금할 수가 없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지만 아무도 그 누구도 이제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쓴 이 글로 인해 내 동생들이 마음 아플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동생들도 이제 다 나이를 먹었고 이렇게라도 토해내야 될 진실, 한번은 털어내야 할 요철이란 것을 알 것이다. 아니, 내 아픔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우리가 선택한 삶은 아니지만 살아 숨 쉬는 한 오롯이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알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삶, 울어보지 않은 삶은 없는 법.
에필로그
“어머니! 엄마, 엄마아~ 살아생전에 한 번도 못한 말을 이제야 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내 죄는 용서를 빌어서도 변명을 해서도 안 되는 줄 압니다. 다만 이제야 너무 늦게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내 마음을 찾아내어 보여드리오니 웃으며 봐주세요. 그리고 가신 그곳에서는 부디 편안하십시오.”
변명 같은 이 글을 뒤늦게 어머님의 영전에 진혼(鎭魂)의 서(書)로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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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해는 동쪽에서 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서 제일 무섭고 싸움을 잘하고 별난 남자아이와 싸운 적이 있다. 반에서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사내아이와 여자인 내가 죽어라고 싸워서 내가 이겼다. 그때 이기려고 악착을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끔찍하게 남아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밖에서까지 지면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아 살아내기 위해 이겨야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내시경을 통해 다 헐어버린 위장을 보는 것 같이 아리면서도 슬픈 기억이다. 그렇게 엄한 곳에다 화풀이를 했다. 어릴 적의 삶 자체가 자해였다. 아무 곳에도 기댈 수가 없게 된 아이의 정서는 억세지고 삭정이처럼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를 닮지 않으려고 평생 안감힘을 썼다. 어쩌다 내 모습이 엄마를 닮았다 싶으면 웃다가, 신문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다가, 누웠다가, 앉았다가도 얼른 자세를 바꾼다.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다.
뛰어난 수재는 아니었지만 나름 공부도 했고 운동도 무용도 작문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악착을 떨었다. 운동회 때마다 본부석 처마 끝에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크기로 붙어있는 당신의 이름표 밑에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나를 각인시키고 싶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악착을 떨어야 하는 것이 서러웠다. 그 시절 기억 속의 내 모습은 아주 아망스러운 계집애였다. 그게 너무 아프다. 운동회 때 나만큼 상을 많이 탄 아이가 없었다. 일등을 할 때마다 세 권씩 더해지니 나는 항상 상으로 열 몇 권의 공책을 아름 안고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스럽게 내놓고 의기양양해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모든 경기에서 일등을 했고 특히 달리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고등학교 1학년인 1962년 5월, 100m를 12.8초의 기록으로 뛰어 제2회 경상남도 도민체육대회에 군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그땐 모두가 가난했다. 나라도, 학교도, 백성도, 전부 도민 체육대회에 참석했지만 러닝화를 못 신고 천으로 만든 덧버선을 신었다. 출발선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회 규정상 스파이크를 신지 않으면 참가자격 자체를 박탈한다고 했다. 체육선생님이 초주검이 되어 어디선가 겨우 빌려온, 발에 맞지 않아 헐거운 스파이크를 신고 달려 등외를 해보는 새로운 기록도 세웠다.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러 간 작은딸이 대견했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처럼 먼 산을 보는 척하면서, 드신 것도 없이 입맛을 다시면서 작은엄마의 눈치를 보더니 “숙이, 돈 좀 줘라”고 말했다. 얼마간 셋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지못해 작은엄마가 서랍을 열고 몇 푼 꺼내주었다. “더 줘라”는 아버지의 말에 작은엄마는 “돈이 어딨노”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돈이 없다니, 개가 들어도 웃을 소리를 작은엄마는 눈 하나 까딱 않고 했다. 나 또한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몇 푼. 말 해놓고 보니 참 적절한 표현이다. 돈을 받아 쥔 순간 확 열이 올랐다. 아버지가 말한 ‘돈 좀’과는 거리가 먼 액수였다. 엄청 부자인 아버지의 ‘돈 좀’은 쥐꼬리만큼은 절대 아니란 걸 나는 안다. 나는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의 부를 누릴 당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받아도 되지만 아버지 돈을 받고 싶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울었지만 이번에는 버텼다.
“니 돈이가, 울 아버지 돈이지.”
속으로 비웃으면서 기싸움에 돌입했다. 다시 셋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흐르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고 집히는 대로 돈을 쥐어서는 보란 듯이 내게 주었다. 나는 그제야 의기양양해서 “아버지, 자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아버지 쪽으로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작은엄마 당신의 자식이라면 아마 아버지 몰래 듬뿍 더 쥐여주었을 것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양반이다. 도민체육대회가 열리는 진해에 도착하는 즉시 아버지께 엽서를 보냈다. 작은엄마의 안부는 일부러 안 적었다. 그 때문에 돌아와서 작은엄마와 다투었다. 그렇게 덫을 쳐놓고 싸웠다.
“한 줄 만 더 적으면 내 안부도 물을 낀데.”
내 아버지 돈으로 인색하게 굴 때는 언제고 내가 왜? 나는 일부러 그 한 줄을 안 적었다. 작은엄마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걸 알고 한 짓이다.
“엄마한테는 아예 엽서도 안 보냈는데요.”
나는 적어도 사랑받은 만큼은 줄 줄 알았다. 작은엄마라서 싫은 게 아니라는 말은 속으로 삼켜버렸다. 속으로 삼키는 전문가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비록 낙선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남녀공학인 학교에서 학생회장에도 출마했다. 아버지에게 일언반구도 안 했다. 뒤늦게 교장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아버지가 나를 불러 칭찬을 해주었을 때 참으로 낯설었다. 만날 작은엄마의 고자질만 듣고 나를 나무라기 위해서 찾았던 아버지가 칭찬을 위해, 오로지 칭찬을 하기 위해 나를 불렀을 때는 남의 옷을 입은 듯 그 상황이 헐겁고 어색했다. 언젠가 아버지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안다고 믿고 앙앙 울었다가 된통 당했던 때만큼 그 상황도 낯설었다. 아버지 방을 나서면서 “내일도 여전히 해가 동쪽에서 뜨는지 지켜봐야지”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큰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큰집도 그 동네에서는 고래 등 같은 집이었지만 가난했다. 큰아버지도 아버지처럼 첩을 뒀고, 동병상련 때문인지 큰아버지에게 작은엄마는 입 부조, 돈 부조를 많이 한 것 같다. 큰아버지와 작은엄마는 서로 ‘계수씨’ 해가면서 사이가 아주 좋았다.
큰아버지의 환갑잔치도 아버지 돈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아마 큰형님을 부모 대신이라 생각한 것 같다. 내겐 두 분의 백부가 계시다. 중부께서는 위아래의 형제들과 달리 내외간에 금실이 아주 좋으셨다. 전깃줄로 엮어 만든 까만 시장 소쿠리를 들고 두 분이 나란히 장을 보러 오시면 엄마는 정성스레 대접을 했다. 언젠가는 엄마가 국수를 맛있게 말아 드렸는데 중부께서 “제수씨, 미안심더마는 찬밥이라도 있으면 밥을 주소. 평생을 국시만 먹고 살아서 국시라카면 보기도 실심더” 라고 말했다.
너무 가난해 국수만 먹고 살았다는 중부의 말에 나는 놀랐다. 우리 집에서 된장이랑 간장을 가져간 이유가 가난 때문이었으며, 그 정도로 가난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보다는 가난해도 그냥 동서지간에 워낙 사이가 좋아서 서로 나눠 먹는 줄로만 알았다. 엄마랑 중모님이랑 백모님은 마치 자매간처럼 사이가 좋았다. 특히 중모님과는 동갑이었다. 일년 상간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친자매처럼 지냈다. 두 분은 다 같이 참 고우셨다. 돈을 물 쓰듯 흥청망청 쓰면서 복판 큰집의 가난은 모른 척한 아버지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복판 큰집에서는 감말고는 얻어먹은 기억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가난해서 조카가 가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감이라도 열리는 철에는 감을 따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엄마는 늘 근심 어린 얼굴이었고, 작은집에 가면 아버지는 있었지만 마음대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옛날의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여섯 살 때처럼 논밭길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거꾸로 우리 집에서 할머니가 있는 큰집으로 갔다. 세상에서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이는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그랬다.
“아이고 이게 누고? 웬 선머서마고.”
새로 나온 예쁜 나일론 스웨터랑 코르덴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곧잘 선머스마라고 했다. 당시에는 여자아이들은 바지를 거의 안 입었다. 할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고 엉덩이를 토닥거리시면서 아버지가 출장 때 사온 계피과자며 유가, 바람초사탕이랑 미숫가루를 벽장에서 꺼내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유난히 눈이 고우셨다. 내 슬픈 마음 탓인지 몰라도 할머니의 고운 눈길은 늘 슬퍼 보였다. 큰집의 사정이 갈수록 나빠지자 아버지는 할머니와 기제사를 막내아들인 자신의 집으로 모셔왔다. 등교하기 전에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고 아버지께도 그랬다. 잘사는 막내아들 집에서 여생을 편히 지내시게 된 할머니는 뼈를 둘러싼 가죽과 돌기처럼 불거져 나온 핏줄뿐인 손으로 동생과 나를 쓰다듬어주시곤 했다. 우리를 향한 할머니의 말할 수 없는 연민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초등 5학년이던 초가을에 돌아가셨다. 복판 큰집 오빠의 등에 업혀 큰집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군대 간 장손인 큰집 오빠가 휴가 나올 때까지 경각간인 할머니 명줄을 붙잡아두기 위해 의사가 대기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링거를 꽂은 채로 닷새를 버텼다.
그 닷새를 나는 목이 쉬도록 울며 보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최고의 상여를 만들었다. 화장사의 주지스님을 모셔 와서 사흘 밤낮 동안 우리는 종이로 연꽃을 만들었다. 흐느껴 울면서 만들었다. 할머니를 극락에 보내줄 상여에 매달 꽃이라는 말을 듣고 열두 살 계집애는 눈을 비벼가면서 종이 연꽃을 예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와 효를 과시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제 내가 의지할 그 무엇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서러움에 목이 찢어지도록 울었다. 발인제 때 상여에 매달려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울었다.
큰집 앞 간주마당에서 발인제가 있었다. 발인 전날 쌀 백 되로 떡을 만들어 백 가구에 나누어주면 할머니가 극락 가신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아버지는 부랴부랴 쌀 백 되로 시루떡을 만들어 온 동네에 돌렸다.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동네가 다반사고 특별한 경우에도 밤 열 시가 되면 불이 꺼지던 시절이라 발전기를 동원해서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큰집 앞 간주마당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긴 대나무 작대기 끝마다 전구를 달아 간주마당에 전구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호상이기도 했지만 대단한 동네 잔치였다.
아버지의 부와 할머니가 낳은 3남2녀와 그 자손들까지 할머니 다복의 상징이 되어주었다. 모든 서러움을 드러내놓고 울 수 있는 기회라 맺힌 설움을 다 토해버리겠다고 작심한 듯 고작 열두 살의 아이는 그렇게 목이 아프도록 유별나게 울었다. 할머니 상여를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영악하게 진실 반, 위선 반의 울음을 울었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의지할 곳이 없어진 내 처량한 모습을 아버지가 제발 좀 봐주길 바라면서 서럽게 울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유별난 아이였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 많고 많은 손자 중에서 유독 너무 많이 울어서 사람들은 “숙이가 어지간히도 할매를 좋아했구나”라고들 말했다.
혼인
우리 할머니였으니까 좋아한 거야 당연하지만 할머니는 내 안식처였다. 졸지에 나는 둥지를 잃어버린 새가 되었다. 이제 어디에다 내 마음을 둬야 할지 막막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제각각의 삶에 빠져 날 쓰다듬고 사랑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의 손길에 목이 말랐다. 사랑에 허기져 꼬챙이처럼 말랐다. 학교에서 돌아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가 싫어서 책가방을 방 한가운데에 훌쩍 던져버리고는 논길을 가로질러 할머니에게 가곤했는데 이젠 갈 곳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초상을 치르고 삼우제까지 마쳤다.
삼우제 날 큰집 기와지붕 위로 둥글고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아침까지 내린 비 탓이다. 누구인지 기억엔 없지만 지붕 위에서 초혼을 할 때 무지개가 곱고 선명했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 슬픈 중에도 할머니가 극락에 가셨을 거라는 위안을 얻었다. 장례 중에도 작은엄마는 처지를 망각하고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중모 다음은 내 엄마가 설 자리, 그런데 중모와 엄마의 중간에 버티고 서 있던 그 모습. 차라리 당당하게 밀치고 엄마 앞에 서든가, 감히 그러지는 못하면서 남편의 사랑을 빌미로 자기가 엄마 앞자리에 서겠다는 예절 없이 어리석고 오만방자한 의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을 똑똑히 봤고 그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무엇으로 사느냐는 팔자소관이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자신의 할 탓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다만 그 어리석음을 연민할 뿐이다.
1935년 봄 동부 경남의 Y군 북부동 김모씨 집. 부자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범눈썹 하나 부러울 게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다. 매파의 소개로 낮에 다녀간 셋째 사윗감이 너무도 흡족해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포목점을 하는 김씨의 2남4녀 중의 셋째 딸 금수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속설대로 어여쁜 외모였다. 내리다리 딸 셋을 낳고 남동생을 얻어 고추밭에 터를 판 귀여움까지 더해 마냥 곱게 자란 처녀였다.
낮에 온 셋째 사윗감은 양복 입은 신사보다 갓 도포 쓴 사람이 훨씬 더 많던 일제강점기임에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에다 하이야를 대절해 타고 왔고 라이방(선글라스)까지 낀, 그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멋쟁이에다 엄청 미남이었다. 금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셋째 사윗감을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하고 만다. 거기다가 일본을 왕래하면서 사업을 하고 삼형제 중의 막내라서 결혼과 동시에 제금내어 줄 거라는(따로 살림을 내주다) 조건은 더 이상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Y군과 U면은, 비록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라 해도 걸어서 한나절 남짓한 거리다보니 찾아가서 그쪽 사정을 알아보는 데는 그다지 힘도 안 들었고,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다 주변에서 알아본 결과 일본을 다닌 것도 맞고 매파의 말과도 별로 다를 게 없어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금은 패물도 부족함 없이 혼수로 받았다.
근데 막상 시집이라고 가고 보니 상황은 영 좋지가 않았다. 동생이 일본을 오가면서 번 돈으로 형은 호사를 누렸고 형님의 손에서 동생의 돈은 오리무중이 되고 도저히 제금을 내어줄 형편이 못 되었다. 당장 먹고살기도 어려울 정도인데다가 가정을 꾸렸으니 혼자 달랑 일본으로 갈 처지도 못되는 그야말로 백수의 처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혼수로 받은 금은 패물마저 큰형님의 빚을 갚아야 한다며 내놓으라 했다. 체면 유지를 위해 빚으로 잔치를 했고 패물은 기어이 내놓아야 했다.
마침 당시에 경상남도 경찰국에 근무하던 금수의 사촌 오라비의 도움으로 U읍에서는 이름도 없고 실업자이던 사람이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모 버스회사의 서기로 취직이 되었다. 그때부터 돈은 절로 굴러들어 왔고 부부간의 금실 또한 남이 부러워 시샘을 할 정도로 모든 게 순조롭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 같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전야는 하룻밤 전이니 부부가 행복했던 시간이 그다지 길지가 않았다는 뜻이다. 위로 아들을 셋이나 낳았지만 건진 자식은 하나 없이 잃었고 네 번째로 건진 게 딸이었다. 그게 흠이었다. 그게 그들 부부의 불길한 삶을 알리는 예고편이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남자는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바람둥이였다. 이미 혼전에 딸을 하나 두었는데 아이는 엄마를 따라 이북으로 갔고 가끔 서신을 주고받다가 전쟁 후로는 소식이 끊겼다.
집 근처에 자그만 집을 사서는 작은댁을 두는가 했더니 다시 처가 덕으로 취직한 차부에서 만난 버스차장과 눈이 맞아버린다. 그리고 금수의 삶은 영원히 꼬이고 만다. 애초에 애정이 없는 사이였다면 쉬 단념을 했을 텐데 워낙에 부부 금실이 좋았던 터라 친정에서도 저러다 말겠지 한 것이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만 것이다. 바람둥이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부부간의 좋은 금실로 착각했으니 모든 게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금수의 어머니는 머리 검은 짐승은 절대 거두는 게 아니라면서 죽을 때까지 셋째 사위를 원망했다.
또 다른 여자
내가 중학 1년이 되자 아버지는 또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일제 말기에 우연히 자수정 사업에 손을 대어 큰돈을 벌게 되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동업자가 본국인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아버지는 광산을 독차지하게 된다. 돈을 번 게 아니라 갈퀴로 끌어모으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서른이 넘어 얻은 맏딸보다 겨우 한 살 위인,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무려 서른두 살이나 아래인 분꽃같이 예쁜 스무 살짜리 기생을 데리고 왔다. 언니가 고교 3학년이고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후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 사이에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한 사람은 ‘내가 먼저’를 내세웠고 다른 한사람은 ‘너나 나나 같은 첩’이란 것이 싸움의 테마였다. 그건 그래도 아버지의 문제지 엄마의 문제가 아니어서 견딜 수가 있었다.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세 명의 마누라와 주안상을 차려놓고 음주 가무를 즐기며 화투판을 벌이고 놀 때였다. 정말 폭발할 것 같았다. 혐오와 분노의 감정이 도를 넘어버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엄마가 더 미웠다. 속으로 왜 그렇게 사느냐는 소리가 수도 없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 왔지만 뱉지를 못했다. 나는 그렇게 할 말을 못하고 안으로 삭이면서 살아야 했다.
“놀아도 아버지 집에서 놀지 제발 내가 사는 우리 집에선 놀지 말라”고….
화투판의 담요를 뒤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참는다는 것은 속으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이었다. 분노의 억제는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밝고 명랑하고 선생님께는 늘 칭찬을 듣던 소녀가 집에만 오면 아무거나 물어 뜯어버리고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사나워졌다. 저러고 싶을까? 정말 저러고 싶을까? 저렇게밖에는 못 사는 걸까? 라는 의문이 내가 엄마를 더 미워하게 된 동기가 된다. 나는 칩거를 일삼는 묘한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은 허구한 날 쌈질을 일삼더니 결국 셋째 부인은 갓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영영 떠나고 말았다
“셋째 마누라는 꽃첩이라는데 나는 천덕꾸러기다. 구더기보다 더 바글거리는 자식새끼들 속에서 내 자식을 천덕꾸러기로 키우지 않겠다”고 아주 결연하게 선언을 하고는 떠났다. 떠난 후로 소식 한 장 없이 50년이 지났다. 말로는 늙은 부모를 봉양할 길이 없어 기생이 되었다 했다. 첩으로 생활하는 딸을 따라 다니는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무서울 정도로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이의 선택은 참으로 훌륭했다. 행불행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또 내가 막내 그 아이의 현재 처지를 모르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이의 소망대로 가여운 그 아이는 어느 손 귀한 집에서 반드시 행복하게 살리라 믿는다. 현재 그 동생은 행불로 처리되어 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젊고 미모인데다 엄마에겐 더없이 공손했다. 말하자면 적의 적은 동지라는 생각 때문이었지 싶다. 무엇보다 내 엄마에게는 자식뻘이었고, 그의 자식 준식이는 엄마 손으로 받아냈고 산후 조리도 엄마 손으로 했다. 남매 중 유일하게 내가 그 아이를 안아본 사람이다. 그 살닿음 때문인지 얼굴도 기억 못하는 동생 때문에 마음 아플 때가 있다. 기억나지 않는 한 생명을 위해서 가끔 기도한다. 누나라는 이름으로.
이혼 중재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언니가 결혼을 했다. 아버지 광산에서 캔 자수정을 수입하던 재일교포 G모씨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 집안은 장관이며 대학 총장을 낸, 말하자면 명문대가다. 일본에서 황실을 상징하는 보라색 자수정의 인기는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런 일본에서 아버지의 자수정을 원석으로 수입해 세공을 해서 팔아 큰돈을 모은 사람이 언니의 시아버지가 되고 뒷날 준재벌의 반열에도 오른다. 한때 코닥칼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한국 후지칼라를 창업한 분이다. 부산 성지곡 수원지 일대의 땅을 사서 일본인 기술자들의 사택과 임직원들의 관사를 짓는 등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언니는 당시 우리 고향의 자유당 출신 안모 의원이 서울로 데려가서 이화여대나 서울대학교에 입학시켜 자기 집에서 데리고 있겠다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서울의 대단한 무역회사 사장 아들과 결혼을 했다. 나는 그런 언니에게 결혼은 공부를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일찍 시집가지 말고 대학을 택하라고 몇 번이고 권했지만 당시 서울의 무역회사 사장 아들은 우리 같은 시골뜨기들에게는 대단한 로망이었다. 재단사와 미용사가 부산으로 내려와서 와서 자고 먹고 하면서 언니 옷을 만들고 피부를 손질해주었다. 언니는 집에서 요즘 말로 스킨케어를 받았고 재단사가 재단을 해서 정성껏 만든 비싸고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고향 읍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대 초 동부 경남의 작은 시골에 외제 세단이 넉 대나 나타났을 때 그것만으로도 언니의 결혼식은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위로 아들 셋을 어려서 다 잃어버리고 네 번째로 건져 애지중지하던 달덩이 같은 딸을 서울의 큰 부잣집으로 시집보낸 아버지는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달리는 말 위에서 채찍이라도 쥔 듯이 기고만장했다. 아버지는 손자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인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의 의미를 몰랐다. 당신 자신을 모르는데 상대를 알 수가 없었으니 뒷날 빼앗기다시피 광산을 사돈에게 넘겨주고 만다.
아버지는 “오늘날 나보다 잘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케라”라며 일본에서 야간 중학교 1년 다닌 학벌도 부끄럽지 않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의 교만이었다. 아버지의 진면목을 파악한 상대는 아버지가 맘 놓고 바람을 피울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자수정이야 나오든 안 나오든 아버지가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리바리 일본서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그 흑심을 모르고 이제 사돈도 되고 했으니 네 돈 내 돈 할 것 없이 모조리 우리 돈이라는 생각으로 갖다 쓴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생각대로 아버지 것도 사돈의 것이 되어 자수정 광산은 사돈의 손으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언니는 당신에게 목숨 같은 존재라고 아버지가 직접 말했다. 광산에서 몇 달을 공을 쳐도 우리 절자(언니의 아명) 얼굴만 보면 만 가지 근심이 다 가신다고 했다. 그래서 더 아낌없이 의심없이 당해준 건지도 모른다. 언니는 아버지에게 살가운 만큼 소중하고 버거운 자식이었다. 그런 존재인데도 언니가 엄마를 위해 중간에서 아무 역할도 않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됐다.
언니가 결혼을 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니까 아버지와 작은엄마는 내가 좀 만만하지만 화통하고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협상을 제의해왔다. 아버지와의 별거를 가까스로 일상으로 받아들여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겨우 아문 상처를 들쑤셨다. 여식의 마음으로 아비의 마음을 믿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버지를 받아들이려고 죽을힘을 다한 내 노력, 내 믿음, 그래도 아버지라고 믿고 버틴 시간들이 산산조각이 난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토록 잔인한 말을 차마 당신의 입으로 직접 하지 못하고 작은엄마를 내세웠다. 나에게 엄마와 아버지의 이혼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딸에게, 그것도 이제 겨우 중학생인 딸에게 부모 이혼을 중재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완벽하게 우릴 버릴 각오를 했다고 생각하니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마치 우주의 미아가 된 듯했다. 코앞의 아버지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닿을 수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거리는 물리적으로 재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자로 재는 것이었다. 두 번의 배신이었다. 아니 수십 번의 배신이었다. 엄마 몰래 참 많이 울었다. 툭하면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딸자식 단속하는 아버지 보란 듯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도 버젓이 남의 첩이 되겠다는 다짐까지 했던 적이 있다. 천륜까지 끊으려 한 셈이니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아버지와 헤어지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어쩌면 몸보다 마음이 더 먼저 떠났는지도 모른다.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당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더러 주는 대로 받아먹고 제발 좀 떨어져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눈앞에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 없이 산 세월이 10년여나 되고 보니 나는 이참에 차라리 잘됐다 싶어 부산으로 가서 서로 보지 말고 맘 편히 살자고 엄마를 졸랐지만 엄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민적이 말한다. 민적 쥐고 살란다.”
그러니까 호적을 파는 일은 죽어도 않겠다고 막무가내였다. 황소고집이었다.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 허울뿐인 아무개의 본처라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고 작은엄마가 아버지 호적에 얹히는 것만은 용납 않겠다는 의지였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가 버틸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자 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떠난 남자의 여자로 머물겠다는 엄마의 고집이 너무 구질구질해서 싫었다. 엄마도 나처럼 배가 아닌 마음이 고프다는 걸 그땐 까맣게 몰랐다.
아버지가 미워진 건 오래지만 이젠 정말 엄마까지 미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미워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나를 지치고 힘 빠지게 했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엄마 제발 그러자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엄마의 몫이니까. 어떻게 우리 좋겠다고 싫다는 엄마더러 이혼을 강요할 수 있겠나? 이 세상에서 엄마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에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누군가가 엄마를 건드리면 성난 살쾡이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가 싫었다. 남의 동정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민적을 쥐고 있다고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한참 자라는 자식들의 상처 같은 건 염두에 없는 것 같아서 엄마가 더 미웠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엄마에게까지 버림받은 것 같았다. 협상에 실패한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를 당신의 호적에서 파버렸다. 협상 제의는 그냥 변명의 여지를 얻기 위한 요식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혼 조건으로 지불할 돈보다 아버지의 재력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시절에 담당 공무원을 구워삶는 돈이 훨씬 적은 액수일 테니까. 속으로 엄마가 응하지 않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는 아주 옹골지게 당한 셈이다. 저들의 말이 구실을 찾기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걸 알았던 몰랐던, 이렇던 저렇던 엄마가 당한 건 사실이다.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지른 아버지도 밉고 그렇게 마지막 빌미까지 준 엄마도 미웠다. 어린 딸자식에게 부모의 이혼 중재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두 사람이 엄마의 호적을 몰래 파자고 음모를 꾸미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속에 흐르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라는 피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뽑아내버리고 싶었다. 또 엄마 몰래 호적을 파놓고 안도하는 한편으로 들킬까봐 조마조마했을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치가 떨렸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이 그런 사람과 핏줄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사랑할 수 없게 된 증오는 아버지에서 엄마에게로 옮겨졌다. 아니 나를 낳아준 내 근원인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내 마음은 광야처럼 사막처럼 허허로웠다. 완벽하게 버림받은 결과가 아닌가. 실속은 실속대로 채우고 통쾌하게 차버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마저 놓친 엄마를 나는 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이해해주기는 더더욱 싫었다.
결국 빈손으로 밀려난 엄마와 연결된 운명의 끈에 묶여 휘둘리는 내 처지가 죽도록 싫었다. 엄마가 꾸중이라도 할 때는 대체 당신은 잘한 게 뭐가 있냐고 속으로 대들었다. 평생을 아버지와 엄마를 증오하는 모질고 모진 병에 걸려 살았다. 행여 엄마의 팔자를 닮을까봐 엄마와 살이 닿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의 긴 머리를 자를 때도 오물인 듯 몸에 닿을까 대충대충 잘랐는데 그 이상하게 자른 머리를 다듬지 못하고 염습(殮襲)대에 누워 있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끝내 내게 골병이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한들 그건 말장난일 뿐이다.
가여운 내 엄마를 저승으로 보내면서 소 풀 뜯어먹은 머리 모양으로 보내놓고 나는 지금 천벌을 받을 거라는 회한의 두려움에 빠져있다. 원래 손재주라고는 없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했더라면 회한은 없을 텐데. 용서를 빌 수도 없고 빌어서도 안 되는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박애가 천지를 덮고 부처님의 자비가 세상을 다 싸안아도 내 허물 내 죄는 가릴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평생에 단 한 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신다면 내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젊어지는 것도 아니다. 엄마의 머리를 정성을 다해 곱게 자르고 손질해서 여자로서 엄마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다. 본래의 고운 모습으로 저승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또 다른 간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서울 언니네 집에서 보내고 왔더니 또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엄마를 어떻게 꼬였는지 셋이 공동 투자로 극장을 짓고 있었다. 이미 극장 짓기의 기초공사가 진행 중이다. 참으로 전광석화 같은 진행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고 엄마의 어리석음에는 혀를 내두르고 발을 구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셋이서 공동으로 투자해서 극장을 지어 셋이서 수입을 공분하자는 그들의 꼬임에 엄마가 넘어가서 우리 집에서 제일 문전옥답인 엄마의 논을 팔아서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극장을 짓는 데 얼마의 돈이 들었으며 나머지 두 사람 즉 아버지와 작은엄마가 확실하게 자기들 지분대로 투자했는지는 확인도 않고 그들의 말만 듣고 당장에 땅문서를 내주었다니,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큰딸이든 작은딸이든 자식들과 의논 한 마디 없이 원수 같은 그들을 믿고 땅문서부터 덜렁 내주었는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당신 땅이라 해도 그렇지. 그렇게도 그들의 내부 조직원이 되고 싶어하는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 내 마음은 엄마로부터 더 멀어져갔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의논해서 결정해 이미 일이 시작되고 있는데 따질 수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자수정 광산은 바람 값으로 앞당겨 쓴 돈 때문에 거저 주다시피 사돈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뒤였다. 광산을 넘겨주는 대가로 당시 매월 1만5000원씩 받기로 했지만 그마저 구두 약속이라 얼마 안 가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해버려 광산만 내주고 그야말로 닭 쫓든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교사의 급여가 대략 2500원에서 3000원 사이였으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언니의 시아버님 때문에 결국 아버지는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하자, 다시 잔머리를 굴려 자기들 몫이 아닌 엄마의 돈으로 극장을 지어 끝내는 엄마를 내치고 자기들만의 몫으로 만들고 말았다.
가서 이혼조건으로 아버지가 해주겠다는 돈으로 충분히 지낼 수가 있으니 깨끗이 정리하고 부산으로 떠나자는 딸자식의 간절했던 소망은 무시하더니 불법적으로 당신의 호적까지 파버린 인간들을 믿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나. 또한 엄마와 아버지는 완전히 작은엄마의 손바닥 안에 있는 손오공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기는 아버지보다 단연 엄마가 한 수 위였다. 참으로 절묘한 부창부수가 아닌가? 내외 아닌 내외가 한 여인이 쥐고 있는 실오라기에 매달려 춤추는 마리오네트였다. 나를 알고 적을 아는 작은엄마는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엄마의 한없는 바보스러움과 아버지와 작은엄마의 한없는 후안무치가 다 싫었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면 단위의 작은 도시였지만 극장은 그런대로 흥행이 되었다. 문제는 작은 엄마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었다. 당신네 돈은 아까워서 공동투자라는 명목으로 엄마를 끌어들일 때부터 이미 그이의 머릿속에 엄마는 어떻게 요리하면 된다는 매뉴얼이 다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매일 손님은 드는 편인데도 돈이 안 되자 극장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사업부장이 이의를 제기했다가 작은엄마에 의해 단칼에 날아가버렸다. 그런 이의를 아버지 앞에서 제기할까봐 극장 구석으로 불러 ‘너가 뭐라고 그런 것 신경 쓰느냐, 너는 프로그램이나 좋은 것 잡으면 그걸로 돈값 하는 것이다’라고 호되게 야단을 쳤다. 좌석 수에다 관람료를 곱하면 바로 답이 나오는데 날마다 적자라는 희한한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는 작은엄마가 속인다고는 생각도 못하고 작은엄마의 뜻대로 프로그램 담당자인 사업부장을 내쳤다.
돈이 될 만한 프로그램은 중간에서 사업부장이 농간을 부려 엄청난 프리미엄을 붙이다보니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장사였다. 그 장사를 계속할 수만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사업부장을 해고해버렸으니 프로그램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옥돌만 캐온 시골 사람인 아버지가 극장에 대해 아는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작은엄마 역시 뾰족하게 경제나 장사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 것이라면 무엇이든 빼앗아버려야 직성이 풀리고 더욱이 본처에서 난 장남이 있으니 죽어도 자기 몫만은 챙기겠다고 혈안이었던 것 같다.
옥답을 팔아 극장에 투자라고 해놓고 작은엄마의 술수에 말려들어 한판 싸우고는 들어앉아버렸으니 아무리 나이 어린 자식이지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싫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단 한 번도 엄마의 지분을 챙겨주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엄마가 한 번도 자신의 지분을 챙기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늘 하던 대로 생활비만 받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끝내 사돈에게 구걸을 하려했다.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사돈 맺자고 언약을 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인 유혹이었고 그 유혹에 넘어가 아버지는 무장해제를 당했고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찍 소리 한 번 못하고 넘겨줬다. 도대체 어떤 셈법으로 계산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놓고 당신보다 더 어리석은 전처의 논을 빼앗다시피 해서 극장을 지었지만 작은엄마의 수를 읽지 못한 아버지는 언젠가 친정 올 언니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사위에게 매달릴 심산이었다. 대체 아버지의 속수무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누가 감당할 것인지를 아버지 스스로도 몰랐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와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곳이 있다는 걸 아버진 끝까지 눈치를 못 챘을지도 모른다. 아니 눈치를 챘다 한들 이미 때는 늦어버려 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자주 당신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시는걸 보고 들었다.
이별의 끝
아무리 시골의 작은 극장이라 해도 주먹구구식으로 돈만 뒤로 빼돌려서는 될 리도 없었고 차차 텔레비전 문화가 발달하면서 극장은 한물간 애물단지가 되어 고향이라고 찾아가면 흉물처럼 아버지의 전생을 상징하듯 그렇게 남아 있었는데 얼마 전에 언뜻 보니까 몇 십 년 만에 음식점으로 바뀐 것 같았다. 좌석 때문에 경사지게 지은 건물을 어떻게 식당으로 개조했는지는 모르지만 몇 십 년간 방치되었다가 식당으로 변신한 낡은 극장 건물 위로 아버지의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삶이 교차했다. 어리석음도 죄였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처음으로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엄마의 표정엔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담고 싶지 않은 엄마 마음 밑바닥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어리석었던 엄마가 자신의 속내를 그토록 완벽하게 감춘 모습이 낯이 설었다. 엄마는 오만가지의 회한을 무표정으로 포장해버렸다. 같은 여자다 보니 그 신산했을 삶을 구구절절이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강보에 싸인 막내손자를 데리고 엄마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3000년 메마른 논바닥처럼 갈라 터져버렸을 당신의 마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고 회한을 다 풀어주기만을 바랐다. 찌꺼기도 미련도 무엇 하나 남기지 말고 다 태워버려 주기를 빌었다. 그날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거짓 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엄마의 삶을 생각하며 울었다. 고향 가는 길목에서 이모는 우는 나를 보고 “울지 마라, 꼴 보기 싫다, 그놈 잘 자빠졌다, 와 우노, 그것도 애비라고 우나”라며 화를 냈다. 언니의 모진 삶을 지켜본 이모의 입장, 더욱이 우리가 어려서 기억 못하는 엄마의 아픔을 보아 다 알고 있을 이모가 치를 떠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나는 엄마 때문에 운다는 말은 못했다.
아이들 채비를 해놓고 오후에 가니 그동안을 못 기다리고 아버지는 관 속에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얼마나 채근을 했으면 살아생전에도 그렇게 인색하더니 죽어서까지 인색했을까. 마음은, 그것도 부모의 정은 나눈다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아주 다른 신속한 조치였다. 울지 않을 것 같았는데 참으로 기막힌 천륜의 이름으로 나는 또 통곡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작된 이별의 끝이었다. 모든 헤어짐은 서러움이 되었다. 원망뿐이어야 할 주검 앞에, 그 주검마저 병풍 뒤로 숨겨버린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울다 생각하니 아버지는 우릴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마저 당신 뜻대로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결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의 말년은 불쌍하고 가여운 것이었다. 철의 장막도 죽의 장막도 아닌데 서로간의 거리는 너무 멀어 셈조차 못할 만큼 떨어져있었다. 아버지의 어리석음은 당신이 내친 자식들이 당신의 주검 앞에서 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잃어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곡하는 자식에게 작은엄마는 뭐가 그리도 남부끄러운지 “고만 울어라, 이웃에 남부끄럽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내 마음과 몸이 얼음장같이 굳어버리면서 울음도 뚝하고 멎어주었다. 흐느낌까지도 완벽하게 정지해주었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오랜 시간을 돌부처가 되어 앉아 있었다. 어이없기가 한이 없었다. 작은엄마는 본처의 딸이 와서 대성통곡하더라는 이웃의 소문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리도 작은엄마를 부끄럽게 했을까? 주검 앞에서도 가식적이라면 살아서의 삶은 어땠을까를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런 삶을 아버지는 사랑이라 믿었을 것이고 그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우를 범했다면 경제적인 것을 떠나 아버지의 생 그 자체는 실패가 맞다. 온 세상 천지에 불쌍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아버지,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들 모두가. 대체 아버지든 엄마든 작은엄마든 부모에게서 배울 것이 없는 삶이 부끄럽고 서러웠다. 어제오늘 한 다짐이 아니지만 아무도 그 누구도 닮지 않으리라 또 다짐을 했다.
할머니 때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나는 실패해 몰락한 삶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눈여겨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가 잠든 선산에 묻힌 아버지는 이제 그곳에서마저 내침을 당할 지경이라 하니 거처 하나 못 남긴 당신의 자식들을 보면 지하의 혼백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부귀영화는 간 곳이 없고 죄만 오롯이 자식들의 울음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사는 집으로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내 손자들이 그것들 집에 제사 지내러 가는 꼴만은 죽어도 안 보겠다”면서.
모처럼 보고 싶었던 당찬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진작에 좀 그랬으면 얼마니 좋았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는 엄마가 싫었다. 미운 사람은 고깔을 모로 써도 밉다더니 정말 그랬다. 엄마의 뜻대로 동생이 아버지의 제사를 모셔왔다.
내 가여운 동생은 죽어 사진 속에만 남은 아버지와 태어나 처음으로 한집에서 살아보게 되었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작은엄마의 배속에도 다른 동생이 있었으니 나보다 더, 아니 아예 아버지의 입김 같은 것은 맡은 적도 없다. 그래서 환갑이 지난 동생만 보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막상 아프다고 말하고 나니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지 주르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말이 아버지지 아버지를 모르고 산 동생이다. 나처럼 아망스럽게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정 자체를 아예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생인들 왜 사무치는 부정의 그리움이 없었을까. 눈앞에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 사랑을 모르고 살았으니 골수에 사무친다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일 것이다.
올케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장남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물려받은 재산도 없으면서 평생을 딴살림을 했는데 제사를 모셔야 되는 상황에 수긍이 안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아버지 제사는 엄마를 모시고 있는 내 동복동생이 모셨다. 그러나 첫 제사에 가보고는 그만 화가 났다. 아버지가 엄마의 한때의 남편은 맞지만 아버지 사진을 걸어놓고 이런저런 제수 준비를 하는 엄마를 보자 그만 부아가 치솟았다. 영정 속에서 마치 부라린 듯 보고 있는 아버지도 미웠다. 엄마에게 과연 속이 있는지 궁금했다. 올케 말에 의하면 올케가 사온 생선이 맘에 안 들었는지 당신이 직접 가서 더 큰 것으로 다시 장만했다고 한다. 이제 그 속을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올케나 동생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그 뒤로 20년 가까이 다시는 아버지 제사를 챙기지 않았다. 제사 준비를 하는 엄마를 조롱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첫 제사 때도 엄마에게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어이없는 것은 작은엄마는 작은엄마대로 제사를 모신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은 자신이니까 마땅히 그러고 싶어서, 그래야 된다는 명분으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 어리석음의 극치를 어이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이미 망자가 된 상대에 대한 배려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작은엄마의 사랑은 배려가 없었고 늘 자기중심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죽어서도 두 집을 오가며 제삿밥 드시기에 분주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보니 옷 입은 모양새가 바를 리 없었다. 삶의 실패는 죽음에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죄 없는 형제들 간에 막혔던 물꼬가 열렸으니 어쩔 수 없이 엉켜 있는 서로의 상처를 매만져주면서 여느 형제간처럼은 못 지낼지라도 내 동생임에 틀림없으니 연민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보듬고 싶다.
10여 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한 몇 년 전 봄날, 운동장 한가운데 웬 멋진 남자가 서 있는데 얼마나 멋지던지 후광이 다 비치는 듯해서 가까이 가보니 내 동생이었다. 세상 말로 이복이라는~. 다가가서 “내 동생 한번 안아보자” 면서.
동생을 안은 누나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어릴 적에 치고받고 참 많이도 싸웠지만 싸우면서 정이 든 동생을 얼마 만에 안아봤는지 모른다. 물보다 진한 핏줄의 뜨거움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 손에 들어간 작은누나의 연애편지를 몰래 빼내주고 누나가 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때 누나를 위해 부지런히 선거운동을 해준 동생이다. 공동의 기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집안이 기우는 것을 보고 같이 걱정했다. 주어진 운명 때문에 ‘이복’이라는 형벌을 지고 있지만 그저 내 동생일 뿐이다. 동생이 밉지 않은 내 마음을 보면서 왜 그토록 엄마만을 미워했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
숨을 곳이 없었다
뒤늦게 운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모르게 울려고 몰래 울다가 내 죄는 숨어서 울 곳조차 없을 만큼 엄청나다는 걸 알고 뚝 하고 울음을 멈춘다. ‘울 자격은 있느냐?’는 스스로의 물음이 내 울음을 울대 밑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나이 들어 엄마가 몸이 아파 아야 아야 해도 못 들은 체했다. 엄마의 모든 게 그냥 무조건 싫었다. 웃는 것도 미웠다. 그렇게 매몰찬 딸년이었다. 엄마가 가여울수록, 연민을 느낄수록 미움만 불거져나왔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될 만큼.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부터 엄마는 저승과 이승의 중간, 그러니까 육신은 이승에다 놔두고 영혼은 이미 저승으로 떠나보낸 삶을 살았다. 허리가 굽고 또 목이 굽어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은 디귿자 모양이었다. 산 자가 아닌 인간이 만든 어떤 조형물 같았다. 입에 올리기조차 억울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이승을 하직하기 위한 엄마의 마지막 사투를 보고 태어나 두 번째로 엄마 때문에 오열했다. 처음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울고 싶을까 웃고 싶을까, ‘축 사망’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둥실둥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까?
나는 그때처럼 무표정한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음이었다. 남편도 뭣도 아니면서 또한 남편일 수밖에 없는 남자. 당신의 삶을 무참히 짓이겨버린 남자의 죽음 앞에 엄마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의 어떤 감정도 자식들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않음을 안 이상 혼자 있게 해야 했다.
자식 때문에 망설이지도 말고, 눈치도 보지 말고, 통곡이든 저주든 원 없이 하게 해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그날 이후 나는 두 번째로 아프게 울었다. 그냥 명줄 하나 놔버리면 한 맺힌 세상을 훌훌 벗어날 텐데 무슨 질긴 미련이 있어 저리도 아픈 육신으로 이승의 문턱에 매달려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가엾고 불쌍한 엄마 때문에 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울지 말고 바로 용서를 빌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동생 집을 나서면서 흐느낀 울음은 온밤 내내 베개가 다 젖도록 이어졌다. 오열을 안으로 안으로 집어삼키면서 그렇게 울었다.
“형님 아무래도 좀 오셔야 될 것 같아요.”
올케의 전화를 받고 나는 넋을 놓아버렸다. 연세로는 호상이지만 매몰차기 짝이 없었던 딸년은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죄를 빌어야 되겠는데 방법을 몰라 쩔쩔매다가 그예 엄마를 보내고 말았다. 죄스럽고 서러운 게 아니라 무서웠다. 이제 영원히 용서를 빌 수가 없게 되었다.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막막했다. 예감으로 다가온 무서움이 두렵고 두려웠다. 그냥 보내면 안 되는데 절대로 그대로는 보내서는 안 되는데 앉은뱅이처럼 맴맴 돌고 구르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다. 대체 잘못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은 그랬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가서 본다고 내 죄가 사해지진 않을 거라는 모진 생각에 내일 아침에 가자고, 모질고 독한 딸년이었다. 인정머리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전화벨이 울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 벨소리가 울리는 이유는 딱 하나. 엄마의 부음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딸년의 속내를 알고 임종을 허락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사는 것이 이런 거구나. 이게 삶이라는 거구나. 허허허 하는 헛소리 같은 웃음, 같잖은 헛웃음만 나왔다.
이다지 보잘것없는 것이 삶이구나. 이렇게도 시시하고 어이없는 삶을 감내하기 위한 엄마의 처절했던 생에 화가 났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옛날 아버지가 이유도 없이 엄마를 때리던 그 밤처럼 비명이 터져나오려 했다. 기억 속 엄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죽음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삶이 허망하고 허망했다.
“이 문디 같은 세상 이 개 같은 세상아.”
“야 이 더러운 세상아.”
하늘을 향해, 세상을 향해 팔이 빠져나가도록 삿대질하고 싶었다. 울지도 못하고 삿대질은 더더욱 못하고 그냥 그 말만 속으로 부르짖었다. 온천지가 문디(문둥이) 같고 개 같았다.
영락(永樂)공원 어디에도 영락은 없었다. 죽음이 영원한 기쁨이고 즐거움이라면 울 이유가 없다. 온갖 죽음이 바글거렸다. 스치고 스쳐 사라져가는 것이 삶이었다. 미래의 죽음과 현재의 주검들이 혼재하는 아수라였다. 세상 모든 효자의 통곡의 물결 위로 주검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통곡들 위로 내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울음이 더해졌다.
여전히 세상은 어제 그제처럼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 엄마가, 불쌍하고 가엽고 원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내 엄마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딸년에게까지 구박만 받던 내 엄마가 파란만장한 생을 닫았는데 나는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상은 무정하고 무심했다. 평생 한 맺힌 삶을 산 한 인생이 죽었는데도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 좋은 날씨마저 야속하고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니면 알라 신이든 간에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엄마의 한을 좀 풀어줄 줄 알았는데 맺히고 맺힌 한을 고스란히 껴안은 엄마를 보내고 세상을 저주하면서 죄 없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내 죄를 감추었다. 그러는 자신이 어이없어 더 꺼이꺼이 울었다.
영정 속의 엄마 인상이 참 사납다. 며칠 전 엄마의 사진 보따리 속에서 올케랑 고른 그 사진이 아니다. 올케가 바꿔치기한 모양이다. 왜 하필이면 저토록 고약한 사진으로 바꿨을까? 엄마가 얼마나 고왔는데. 이유가 있겠지, 복사하기가 까다롭다던가. 그러고 싶지 않은 올케의 마음도 이유가 될 수가 있고, 온순하고 고운 모습의 사진으로는 자신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나타낼 수가 없어 그랬다고 이해한다. 나도 남의 집 며느리니까. 그래도 올케가 안 그랬으면 누구보다 올케 자신을 위해 좋았을 것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이 마당에 영정의 사진이 뭐 그리 대수일까. 목숨을 버렸는데. 삶을 송두리째 버렸는데. 엄마의 사진 위로 올케의 마음이 겹친다.
3년 전 11월, 엄마는 그렇게 삶을 닫았다. 마음 아파 낳은 자식, 배 아파 낳은 자식의 배웅을 받으면서 편하고 복되게 삶을 거두었다. 이제 엄마는 이승에서의 버겁고 무거웠던 삶의 고리에서 풀려나 가신 그곳에서 안락을 누리실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남편의 사랑은커녕 버려지고 내쳐진 여인으로 살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마저 잊어버려 삭정이가 되어버린 엄마는 아들 며느리를 참 많이 힘들게 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엄마를 두둔할 수만 없어 또 그렇게 엄마를 탓했다.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면서 불쌍한 엄마를 구박했다. 사랑과 연민은 내 마음 어느 구석에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끝내 그걸 찾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모질게 엄마를 보냈다. 엄마를 미워할 때마다 그게 나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모진 형벌이 되어 돌아올지는 짐작도 못했다. 그 모든 시간은 결국 자해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작은집 동생들 기억 속의 큰엄마는 내 기억 속의 엄마와는 달랐다. 소풍 가는 날 맛있게 김밥을 싸준 사람은 언제나 큰엄마였고, 큰엄마가 담근 맛있는 김치를 달라고 보시기를 들고 끼니때마다 가도 싫은 소리 한번 않고 주셨다고. 큰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져준 동생들이 고마웠다. 나 역시 작은엄마에 대한 원망은 버린 지 오래다. 인륜은 천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륜과 천륜의 사이
엄마는 한때 시앗의 딸을 내 딸처럼 애지중지 업고 안고 키운 적이 있다. 이웃 사람들이 속없는 이라고 쑤군거려도 “자슥은 안 밉다”면서 늘 등에 붙이고 다녔다. 돌아가시기 전 몇 번이나 “가를 와 그래 먼데로 시집보냈노”라고, 빤히 알면서도 짓궂게 “가가 누구냐”는 내 말에 바로 대답은 못하고 “와 해필 그 먼 전라도로 보냈노”라면서 기억에조차 가물가물할, 당신이 업어 키운 이복동생을 찾았다. 그땐 그게 그 아이에 대한 엄마의 보고 싶음, 이승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었던 엄마의 마지막 마음인 줄을 몰랐다. 엄마의 부음을 듣고 순천에서 화환 먼저 보내고 밤늦게 도착한 동생이 큰엄마의 빈소에 엎드려 울 때, 그때야 엄마의 속뜻을 짐작했지만 모든 게 만시지탄이었다. 동생은 큰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아픔으로 묶인, 가닥이 다른 모녀의 끌림을 보았다.
“엄마, 희숙이 왔네.”
엄마는 이미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여든에 찍은 주름살뿐인 사나운 눈으로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 앞에서 차마 드러내 보이지 못한, 가슴 아파 낳았기에 더 아프게 그리웠던, 한때 당신이 사랑으로 품었던 여식을 내려다볼 뿐 말이 없었다. 반세기 전쯤 동생이 네 살 때의 일이다. 당시의 의료기술은 참으로 열악했다. 아니 모든 삶의 조건이 열악했다. 며칠 동안 감기에 걸린 것처럼 시름시름 앓던 동생이 숨을 몰아쉬면서 방금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엄마가 업고 병원으로 갔는데 법정 전염병인 디프테리아라고 했다. 밤을 넘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이미 위로 줄줄이 아들 셋을 병으로 잃은 적이 있는 엄마는 사색이 되었다. 친엄마보다 엄마가 더 기함을 했다. 소식을 들은 작은엄마는 안 그래도 내 발목을 잡은 귀찮은 것들 죽거든 둘둘 말아서 남천냇가 방축 밑에 갖다 버리든지 알아서 하라면서 모른 체했다. 설마 그 말이 진심일까마는 어리석은 엄마는 그게 작은엄마가 동생을 엄마에게로 떠넘긴 것인 줄도 모르고 사색이 되어 모진 년이라는 둥 벼락 맞을 년이라는 둥 하면서 최후의 방법으로 오늘밤 안으로 울산에 가서 약을 구해오면 혹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트럭과 운전사를 구해서 한밤중에 울산으로 약을 사러 보냈다.
당시만 해도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로 사람이 죽었다. 시골이라 택시란 게 없었다. 트럭 따로 기사 따로 겨우 구했다. 어쨌든 그 덕분인지 제 명 덕분인지 동생은 울산서 사온 약으로 주사를 맞고 고비를 넘겼다. 엄마는 그렇게 판판이 작은엄마에게 당하기만 했다.
길흉화복이라 했다. 이 세상 70억 사람은 모두 다 자신의 고통이야말로 절체절명의 고통이고 자신의 행복이야말로 지고지순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백인백색, 천태만상, 천층만층 구만층이라는 세상에서 나만의 절대적인 고통도, 행복도 없다는 것을 그날 엄마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는 동생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 아픔이 너무 커서 동생들이 겪었을 고통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 통증이 치밀고 올라와 통곡이 되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내 죄가 아닌 죄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을까? 저 죄 없는 아이들이.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다지 아픈데 가여운 내 동생들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내 아픔이 엄살같이 느껴졌다.
미움의 화살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어리석고 불쌍한 아버지는 땅속에서 백골이 되어 자식들이 쏘는 원망의 화살에 수없이 죽음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부모 잘못 만난 게 원죄가 된다. 각각이 원죄를 지고 태어났으니 원망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