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놓고 여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등 쟁점에 대한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FTA에 대한 불확실성은 ‘FTA 괴담’이 돼 시민들에게 겁을 준다.
- 한미 FTA 체결이 가져올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그 누구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LG경제연구소는 10월12일 한·EU FTA 체결 이후 3개월간 교역 실적을 근거로 한미 FTA의 영향을 예측했다. 이 보고서는 “ASEAN과의 FTA 경험에 비춰볼 때 한·EU FTA와 한미 FTA는 우리 수출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편집자>
10월14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3개월간의 한국과 EU 간 교역 추이가 양국 교역 전망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살펴보고, 아울러 이미 발효 후 4~7년이 지난 ASEAN, 칠레 등과의 FTA 경험이 EU 및 미국과의 FTA에 주는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한-EU 무역수지 악화, FTA 결과로 보기 어려워
7월은 한-EU FTA가 발효된 첫 달일 뿐 아니라 한국이 EU와의 교역에서 최초로 월간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한 달이다. 8월에는 소폭의 흑자로 돌아서기도 했으나 지난 9월 역시 약 8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한-EU FTA가 상대 지역에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나쁜 FTA’일지 모른다”는 우려, 한발 더 나아가 “한미 FTA 역시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개월간의 교역 추이를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비관적 전망은 다소 섣부른 것으로 판단된다. 지난 3개월간의 한-EU 간 교역 추이만을 떼어서 보면 EU에 대한 수출은 줄고 수입이 늘어 마치 한-EU FTA가 양자 간의 무역수지를 뒤바꿔놓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관찰 시점을 2010년까지 확대하고 EU뿐 아니라 전 세계와의 교역 변화를 함께 고려하면 사뭇 다른 움직임이 나타난다.
즉, 대(對)EU 수출증가율의 마이너스 전환은 2011년 6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원인도 FTA 체결 때문이라기보다는 1년 전인 2010년 6월과 7월의 대EU 수출이 1년 전에 비해 42.1~42.2%나 늘어난 데 따른 부(負)의 기저효과와 올해 2분기 이후 급격히 악화된 EU 경제상황이 맞물린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
이 기간 대EU 수입은 전년 대비 기저효과뿐만 아니라 개별 품목 구성 면에서도 특이점을 보여준다. 7월과 8월 두 달간 수입증가세가 가장 두드러졌던 품목들을 살펴보면 항공기와 무기류(MTI 3단위 기준)가 1~2위를 기록했다. 항공기는 7~8월 두 달 동안 2010년 전체 수입액의 배가 넘는 금액의 수입이 이뤄졌으며, 무기류 역시 두 달간의 수입액이 2010년 전체 수입액을 넘어섰다( 참고).
따라서 지난 3개월간 한-EU 간 수출입에서 나타난 움직임은 일상적이고 중장기적인 구조변화의 시작이라기보다는 다소 예외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EU FTA가 앞으로 어떤 경로를 밟아갈 것인지를 판단하려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교역 결과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2004년과 2007년에 우리와 먼저 FTA를 체결한 칠레 및 ASEAN의 사례에 관심을 둘 만하다.
성공적인 칠레 vs 기대에 못 미친 ASEAN
칠레와 ASEAN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한-칠레 FTA는 발효 직전 5억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대칠레 수출을 발효 4년 만에 31억달러까지 6배나 끌어올린 반면, 한-ASEAN FTA는 발효 4년이 지나도록 320억달러였던 수출을 532억달러로 1.7배 증가시키는 데 그쳤다. 수입 역시 칠레로부터는 4배나 늘어났지만 ASEAN은 1.5배 증가에 불과했다( 참고).
FTA 활용률, 즉 전체 수출입에서 FTA 관세 양허 혜택을 받는 거래의 비중 면에서도 두 나라는 상당히 다르다. 한-칠레 FTA의 경우 수출 활용률은 85%, 수입 활용률은 94%에 달하는 반면, 한-ASEAN FTA는 각각 29%와 68%에 불과하다.
칠레와 ASEAN의 어떤 점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이 두 나라와의 교역사례는 FTA 성과를 판단할 때 고려해야 할 다양한 조건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거시 경제적 여건의 차이다. 한-칠레 FTA가 발효된 2004년 이후 몇 년간 세계경제는 상당한 호황기를 누린 반면, 한-ASEAN FTA는 발효 이듬해인 2008년부터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복병을 맞이했다.
둘째, 교역 주체의 차이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칠레의 경우, 먼 거리와 높은 물류비가 진입장벽 역할을 해 웬만한 규모의 거래가 아니면 교역 자체가 이뤄지기 어려웠다. 그 결과, 칠레와의 교역은 대부분 규모가 큰 업체들에 의해 주도됐고, 자연히 FTA 활용에 필요한 정보 수집이나 행정절차 진행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멀지 않은 ASEAN과의 교역은 다양한 품목에 대해 크고 작은 규모의 업체들이 자유롭게 참여함에 따라 중소규모 업체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교역구조와 이에 따른 생산 분업 구조의 차이에 기인하는 바도 상당히 컸다. 한국과 두 지역 간 교역품목을 상품의 특성에 따라 기초재(primary goods), 부분품(processed goods), 부품(parts · components), 자본재(capital goods), 소비재(consumption goods)로 나눠 분석한 결과, 대칠레 수출은 최종재, 즉 자본재(29.7%)와 소비재(38.7%)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반면, 한국과의 생산 분업이 활발한 ASEAN으로의 수출은 중간재에 해당하는 부분품(30.5%)과 부품(39.1%)의 비중이 훨씬 컸다. 즉, ASEAN으로 수출된 품목 중 상당수는 재수출을 위한 중간재로 쓰인 탓에 FTA 체결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관세를 유예받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다( 참고).
EU 및 미국과의 교역구조 볼 때 긍정적 전망
칠레와 ASEAN에 대한 교역에서 보이는 이 몇 가지 특징은 EU 및 미국과의 FTA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먼저, 거시경제 여건이다. 현재의 세계경제 상황이 한-ASEAN FTA 발효 직후인 2008년보다 그다지 나을 바가 없다는 점에서 EU, 미국 등과의 FTA 역시 기대만큼의 혜택을 제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교역주체 측면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전망이 가능하다. 미국이나 EU와의 교역은 대체로 규모가 큰 업체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EU FTA 발효 이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60%에 가까운 수출 활용률을 기록했다는 점 역시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셋째, 교역구조 측면 역시 긍정적이다. 대EU 수출 품목의 67%가 최종재이고, 미국 역시 그 비율이 65%에 달하기 때문이다. 다만 EU의 경우, 수입 측면에서도 최종재 비중이 50%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는 점에서 수출과 수입이 함께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
물론 FTA 발효 이후 회원국들 간의 교역 변화는 위의 여러 요소가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만큼 정확한 전망을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거대경제권과의 FTA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좌절하기보다는 우리 앞에 놓인 이 새로운 도전이 기회로 활용될 여지 역시 적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