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은 폭압적이다. 소수민족의 고유한 정체성, 문화, 표현의 자유를 뺏고 일자리마저 앗아간다. 인구 수가 많은 티베트, 위구르, 몽골족이 반기를 들고 있다. 이들은 이제 뼛속까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
- 현 소수민족정책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폭력을 고수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거대한 제방도 내부의 균열에 무너질 수 있다.
지난 2009년 7월 무장한 중국 경찰이 위구르인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2008년 3월처럼 승려의 시위가 짱족(藏族·티베트족과 같은 의미)의 시위로 번지는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일본을 방문한 달라이 라마는 11월7일 “연이은 분신 사태는 중국 당국의 문화 말살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11월4일 G20 정상회의가 열린 프랑스 칸 인근 니스에서도 티베트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중국산 고추의 원산지 가운데 하나인 신장(新疆) 웨이우얼(維吾爾·위구르) 자치구는 11월1일 발생한 규모 6.0의 지진으로 뒤숭숭하다. 이재민이 12만명이나 발생했다. 이곳에서는 테러가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10여 건의 테러가 발생한 데 이어 2009년 7월에는 한족(漢族)과 위구르족이 충돌한 유혈사태로 197명이 사망했다. 이어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자치구 수도인 우루무치에서는 한족 여성과 어린이를 겨냥한 주사 테러가 발생했다. 이후 한족들이 보복에 나서면서 계엄 상태로까지 사태가 악화된 바 있다. 2010년 8월 우루무치에서는 삼륜전동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티베트·위구르·몽골족의 반란
올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7월 경찰서 습격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다시 계엄령 속에서 연쇄 폭발과 무차별 흉기 난자 사건이 터졌다. 10월에는 한족 학생과 위구르 학생 간 충돌로 수십 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은 한족 학생들이 위구르 학생들을 집단 폭행한 것에서 비롯됐다. 망명 위구르 단체인 ‘세계위구르회의’의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9월 “중국 당국이 2001년 이후 위구르족 7000명 정도를 수감했다”고 주장한다.
네이멍구(內蒙古)의 상황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 5월 네이멍구 자치구 남부 츠펑(赤峰)시에서는 수백 명의 몽골인 학생과 유목민이 시위를 벌였다. 메르겐이라는 유목민이 석탄을 실은 트럭 행렬을 저지하려다 한족이 모는 트럭에 치어 숨졌는데 이에 항의하는 성격이었다. 평소 몽골 유목민들은 한족 탄광 노동자의 유입으로 생활터전인 목초지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악의적인 살해까지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어 몽골 유목민 두 명이 광산업체의 한족이 모는 트럭에 치여 숨졌다. 6월 초까지 네이멍구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참여하는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중국 당국은 결국 네이멍구 자치구 여러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다.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다. 이 중 티베트, 위구르, 몽골족의 독립 요구가 거세다. 이들 종족이 이미 독립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는 청나라 때 중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 영국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분리를 시도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립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1951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을 받아 국가 주권을 상실했다.
신장은 청나라 건륭제가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준 지역이다. 그러나 신장도 1911년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독립을 한 바 있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우루무치를 점령하면서 주권을 잃었다. 신장 위구르족은 인접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 국가에 거주하는 위구르족과 힘을 합쳐 동투르키스탄 국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1933년 파미르고원 카슈가르에서 동투르키스탄을 건국했던 경험도 있다.
“중국에서 떨어져나가고 싶다”
이들 지역에선 자기민족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의 중국 전체 인구 비율은 8.4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자치구 내 민족 구성은 달라서 쓰촨성 시짱 자치구에서 짱족의 비율은 전체의 94%에 달한다. 짱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 중 가장 인구가 많아 1800만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45% 정도가 시짱 자치구에 거주하고 있다. 위구르 자치구의 경우에는 위구르족 비율이 45% 선이다. 그 뒤를 41% 정도인 한족이 잇고 있다. 네이멍구에서는 인구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한족이 79%를 차지하고 몽골족은 17% 정도다.
이들 종족이 중국의 국경선 부근에 주로 거주하는 점도 중국 당국에는 부담이다. 짱족은 중국 안팎의 국경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위구르족도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인접한 국경 지역에서 산다. 몽골족 역시 같은 민족 국가인 몽골에 인접한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나라의 자기 민족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떨어져 나와 민족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원심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것이다.
민속공연을 하고 있는 짱족.
중국 내 민족 갈등은 세계적 관심사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이해관계 관점에서도 그렇다. G2로 성장한 중국이 부담스러운 미국과 주요 선진국은 ‘중국의 분열’을 원한다. 1995년 미국 국방부는 덩샤오핑 사후 2년 안에 중국이 구소련과 비슷하게 분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정책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이 보고서는 덩샤오핑 이후 상황전개 시나리오로 기존 노선 유지, 좀 더 적극적인 자유화 개혁 추진, 구소련과 유사한 분열 직면으로 진단 내린 다음에 각각의 가능성을 30%, 29%, 50%로 내다봤다. 그만큼 분열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인데, 이것은 미국 정부가 중국의 분열을 원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마 일본 역시 마찬가지 기대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국의 분열을 원한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크고 강한 중국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남북한 통일을 하는 데에도 유리할 듯하며 나아가서 고토 회복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내에 같은 민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심정이 이렇다면 중국 주변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티베트도, 중앙아시아 각국도, 몽골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으로 바로 이 점이 중국 정부를 더 경계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대륙에 살면 성격도 대륙적이다?
흔히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는 땅에 대한 욕심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대륙에 사는 사람은 성격도 대륙적일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부자가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아등바등하듯이 중국도 마찬가지 행보를 보여왔다. 언제나 땅을 더 넓히려고 애써왔고 그것을 지키는 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소수민족의 협력을 자양분으로 집권할 수 있었다. 대장정 때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때에 소수민족의 도움이 컸다. 항일전쟁 기간 중 화북지역 전투의 최전선을 책임졌던 국민혁명군 제8로군에는 다수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형성됐다. 그래서 민족 평등, 민족 구역 자치, 불가분리를 기본원칙으로 했다. 문제는 불가분리의 원칙이다. 본래 이 원칙은 타이완을 겨냥해서 설정한 것이다. 타이완 인구의 84%를 타이완족이 차지하는 상황에서 민족의 분리를 허용한다면 통일도 물 건너간다고 본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다른 소수민족에게도 분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의 방침이다. 이 원칙은 소수민족정책 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우호적인 분위기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초반은 분위기가 좋았다. 민족 간 평등과 자치를 보장하는 원칙하에서 조선족자치주 등 소수민족 자치구(주)가 속속 만들어졌다. 민족교육을 허용하는가 하면 자치구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변화가 찾아왔다. 1958년 대약진운동 이후 동화(同化)정책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소수민족 출신 간부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당연히 소수민족 관련 기관들의 활동도 정지됐다. 그러면서 등장한 단어가 ‘민족융합’이었다. 1966년 문화혁명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4구(구 사상, 구 문화, 구 풍속, 구 습관) 파괴’라는 미명 아래 소수민족의 언어 교육과 방송이 중단됐다. 소수민족 문화예술은 봉건주의고 자본주의이며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수민족에게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부터 소수민족은 중국 당국의 폭압에 신음해야 했다.
암흑기가 끝난 것은 개혁개방 이후다. 1978년 무렵부터 소수민족 출신 간부에 대한 복권이 이뤄졌고 소수민족 문제를 다루는 기관들도 정상화됐다. 민족구역 자치기관의 민족대표 선출도 허용됐고 소수민족 간부 양성도 재개됐다. 자치구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다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잃은 인심이 회복될 기미는 없다. 소수민족들은 중국 정부에 속은 뒤라 정부가 하는 일은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중화민족 vs 대한족주의
당근과 채찍! 중국 정부도 소수민족에게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해왔다. 민족자치를 허용하면서도 분리 독립 움직임에 대해서는 선제적으로 또는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가 궁극적으로 이뤄내려 하는 것은 ‘중화민족(中華民族)’의 구현이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중화민족이라는 명칭을 쓴다. 중화 속에서는 모든 소수민족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논리다. 중화민족 개념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적 근거로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이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같은 것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소수민족들은 중화민족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자기 고유의 주체성을 버리도록 강요받는 것으로 여긴다. 이들은 중화민족을 ‘한족의 확장형’ 또는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로 격하한다. 중국 정부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소수민족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상쩍은 공정들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롯해 북방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 남방공정, 서남해양공정까지 추진 중이다.
북방공정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사업이다. 서북공정은 신장과 위구르 자치구의 역사를 중국사로 만드는 일이다. 중국 정부는 2005년부터 신장공정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1986년 덩샤오핑의 지시로 일찍부터 시작된 서남공정은 티베트 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인다. 8세기 티베트 역사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한족과 짱족의 뿌리가 같다는 한장동원론(漢藏同源論)까지 동원한다. 우리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내세운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다)와 비슷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남비엣이 기원전 196년부터 112년 사이에 조공을 바친 역사에 근거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남방공정도 추진 중이다. 또한 황해, 남중국해, 동중국해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해안변경공정까지 실행하고 있다.
이러한 공정의 목적은 분명하다.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합하는 이유는 뭘까? 중화민족 내지 중국인이라는 단위로 모든 민족을 묶어내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수민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모두 뺏으려는 목적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인구의 8.48%에 불과한 하잘것없는 소수민족들. 하지만 5개 자치구(自治區), 30개 자치주(自治州), 120개 자치현(自治縣), 1256개 자치향(自治鄕)에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덩어리는 중국 전체 국토의 63.7%에 달한다. 이들 지역에서 소수민족을 인구 소수집단으로 만들어버리고 한족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영토로 만들려는 것이 궁극의 목표인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만 하더라도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에 달한다. 네이멍구 자치구는 중국 전체 면적의 12%에 육박한다. 황무지로 알려진 이들 지역은 최근 자원의 보고로 떠오르고 있다. 네이멍구 자치구는 석탄, 희토류, 천연가스 생산지로 변한 지 오래다.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내 최대의 원유 및 천연가스 생산지다. 이곳의 매장량은 원유 208억t, 천연가스는 10조8000억㎥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전체 원유의 30%, 천연가스의 34%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한족(漢族)에 의한 경제적 착취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내놓은 시책이 ‘12·5 규획(2011~2015년)’의 ‘흥변부민(興邊富民)’ 프로젝트다. 변경을 부강하게 만들고 소수민족을 부유하게 한다는 그럴듯한 포장 속에 민족융합의 칼을 숨겨놓은 시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민족 지역의 경제 발전, 민생 안정, 복지 확대와 함께 국민의식교육 강화, 종교 활동 관리, 분리 독립에 대한 강경한 대처, 당 간부와 관료의 책임행정 강화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변경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 서부대개발(西部大開發) 사업이다. 이 사업에는 서부의 전기를 동부로 보내는 ‘서전동송(西電東送)’,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보내는 ‘서기동수(西氣東輸)’, 시닝과 라싸를 철도로 연결하는 ‘칭짱철도(靑藏鐵道)’, 남부의 수자원을 북부로 보내는 ‘남수북조(南水北調)’가 포함돼 있다.
이 네 사업을 찬찬히 뜯어보면 궁극적 목표가 변경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경의 자원을 빼내가는 데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세계 최대 싼샤(三峽) 댐을 만든 것도 이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서부대개발 사업의 주체는 학력과 경력이 풍부한 한족이다. 소수민족은 언어소통과 능력 부족을 이유로 소외된다. 결국 누가 최대 수혜자인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칭짱철도 사업은 한족의 신장 자치구 진출과 짱족의 신장 이탈을 돕고 있을 뿐이다.
흥변부민이나 서부대개발을 추진하는 중국 정부의 속내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소수민족들이 본격적으로 독립을 감행하기 전에 통합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심정이다. 이면에는 다시 일어서는 중앙아시아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고 거대 왕국을 형성했던 중앙아시아는 오랫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한 뒤 막대한 천연자원 수입을 기반으로 옛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다. 그 선두가 카스피해 유전을 기반으로 하는 카자흐스탄이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천연가스와 원유, 금이 풍부하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세계 4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한다.
망명한 위구르 여성 지도자 레비야 카디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사랑의 10가지 조건’의 한 장면.
중국 내에 자기 민족이 거주하는 인접 국가는 중국의 분열을 내심 원한다. 분열의 와중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거나 국가를 재건하고 싶기 때문이다. 중국 내에서 한족에 의해 착취를 당하는 소수민족이 분리 독립 의지를 표출하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적 관심과 지원이 더해지는 경우 중국 내 소수민족 분규는 간단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소련의 경우처럼 동시다발적 분리 독립으로 가려면 또 다른 계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왜 중국에서는 구소련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정권의 붕괴다. 다시 말해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종결인 것이다.
구소련이 급격한 정권 붕괴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최근 러시아의 푸틴 총리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을 중심으로 유럽연합에 비견할만한 유라시아연합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다시 통합의 고삐를 죄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독립할 당시 러시아는 민주화 열기 속에서 내부 권력구조를 재정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중국 정부가 앞으로 이런 내부 혼란에 봉착한다면 불가항력적으로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가 소수민족 갈등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중국 민주화’는 곧 ‘중국 분열’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은 아마 지구상 모든 민족을 중화민족으로 만들고 세계사를 모두 중국사로 만들어야 끝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공정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수민족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폭압적 소수민족정책을 그대로 고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후퇴하면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경제가 아무리 성장하더라도 인권을 가혹하게 억압하는 2류 국가에 머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영원히 끌고 갈 수는 없다. 수백만 경찰과 군대를 거느린 지금의 중국 독재정권도 언젠가 변화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옌볜 조선족 자치주와 중국 동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조선족 자치주와 중국 동포의 존재는 향후 중국 역사의 전개에 따라 우리에게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 동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 동포에 대한 관점과 같아져야 한다. 잘사는 동포도 못사는 동포도 모두 우리 동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중앙아시아가 다시 일어서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이 이미 각축전에 들어섰다. 미국은 카자흐스탄 유전 개발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키르기스탄 마나스에 군사적 교두보까지 마련했다. 중국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중앙아시아 각국과 역사적 문화적 인연이 깊다. 몽골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국가는 우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길 원한다. 몽골만 하더라도 중국이 추진하는 역사공정의 희생자다. 몽골인의 관점에서 자랑스러운 칭기즈 칸의 역사를 이웃의 초강대국이 뺏어가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동북공정을 당하는 우리와 똑같은 처지다. 몽골 국민은 미래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사막화’와 ‘중국’을 꼽는다. 몽골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친미(親美) 노선을 펴고 있고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접근법은 자원 확보라는 단위 사업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것을 전술과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달라이 라마 초청하고 할 말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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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처럼 중국 정부 눈치나 보면서 소수민족 문제에 동조하거나 침묵해선 안 된다. 우리의 시각, 민족자결과 인권이라는 보편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본도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는데 우리는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것은 주권국으로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며 정의롭지도 못한 일이다.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할 말을 해야 북한 문제나 통일 문제에서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