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박원순·노무현과의 만남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ahnkw@snu.ac.kr

    입력2011-11-23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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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정부 시절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경환(63)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와 샌타클래라대에서 법학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필자는 한국헌법학회 회장,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운영위원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등을 맡으며 시민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학계와 관계, 시민사회를 두루 거친 그가 자신이 본 한국 정치·사회의 이면을 고백한다. <편집자주>
    11월25일로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설립 열 돌을 맞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10년은 유럽의 50년에 비견될 정도로 긴 시간이라고도 한다. 그럴듯하다. ‘괜찮게 사는 나라’치고 사회 변화의 속도나 역동성에 있어 대한민국과 비교할 나라는 없다. 선진국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세계사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느닷없이 대한민국이 경제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그러니 압축 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앞만 보고 내달리다보면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갑자기 경제선진국이 된 나라가 경제력에 상응하는 인권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5년도 길다. 5년의 재임 기간을 통틀어 흔들림 없이 국정을 주도한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다. 인권도 우리 사회에서 엄연한 권력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정권의 성격에 따라 인권이 부침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權’이란 글자는 원래 저울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해득실을 저울질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권력의 본령이다. 법가(法家)의 완성자, 한비자는 공리와 해악을 정확하게 저울질하는 지혜로운 권능을 거듭 강조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조류와 사회통념에 따라 인권의 범주나 내용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시대의 변화를 재고 담는 지혜가 바른 권력의 핵심이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설립돼 10년이 지나면 지위가 안정돼 있어야 한다. 인권이라는 권력을 담당하는 인권위도 그런가? 답은 국민의 의식 속에 자리한 인권위의 위상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 인권위가 국민에게 제대로 봉사하고 있는가? 국민은 인권위의 존재와 비중을 느끼고 있는가? 다른 국가기관에 대해 당당하고 타 기관도 인권위의 업무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가? 이 모든 기준에 비춰볼 때 인권위는 아직 국정과 국민의 일상 속에 든든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권 교체가 가장 큰 이유다. 그동안 속칭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뀌었다. 인권이 정권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통념은 인권을 진보정권의 특징처럼 여긴다. 보수정권이 표방하는 인권 항목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저 ‘인권은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다’‘인권 주장도 법과 질서를 유린해서는 안 된다’ 등속의 부정적인 관념이 보수의 특성으로 인식될 뿐이다. 정권이 진보든 보수든 시대 발전에 따라 인권은 진전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시대의 진보에 조응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출범 10년 인권위

    설립 후 최초 6년 동안 인권위는 비교적 순항한 편이다. 유엔총회 결의에 따른 권고를 받아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설립됐다. 인권위법 제정 과정에 시민단체의 역할이 지대했다. 우리나라 입법사에서 법률이 입안·제정되는 과정에 시민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 인권위의 규모나 활동은 돋보였다. 규모에 관해서는 설립준비기획단을 이끈 김창국 변호사의 배포와 조용환 변호사의 치밀함이 크게 기여했다. 여러 사람의 증언과 자료릍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용환은 내가 만난 무수한 후배, 제자 중에 지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다.



    2001년 11월, 인권위 출범과 함께 그동안 언로가 막혀 있던 각종 청원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신생 국가기관의 사명감도 빛났다. 무엇보다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인권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표방한 진보정권의 후원 내지는 관용이 결정적인 원군이 됐다. 그러나 때때로 인권위가 제시하는 낯선 가치와 기준에 대한 국가기관과 대중의 불편함이 누적됐다. “이해가 백배가 되지 않으면 법을 바꾸지 않고 공이 열배가 안 되면 그릇을 바꾸지 않는다(利不百, 不變法; 功不十, 不易器)”는 상군서(商君書)의 구절처럼 오래된 제도와 해묵은 통념은 선뜻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런 중에 일어난 정권 교체는 그동안 과도했던 인권위의 행보에 대한 정당한 제동이라는 명분을 제공했을 것이다.

    여느 정무직과는 달리 인권위원회의 정무직, 즉 장관급인 위원장과 차관급인 3인의 상임위원은 임기 3년이 보장돼 있다. 그러나 현임 현병철 인권위 위원장에 앞서 위원장을 맡은 전임자 4명 중 법정임기를 채운 사람은 초대 김창국 변호사뿐이다. 이 사실만 봐도 인권위는 안정된 기관이 아니다. 2대 위원장으로 임명된 최영도 변호사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한 언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만에 물러났다. 일단 제기되면 좀체 해명되지 않는 것이 의혹이다. 그의 뒤를 이어 3대 수장이 된 조영황 변호사는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자리에서 옮겨왔다. 김창국, 최영도 두 변호사는 주류 법조인 출신이고 인권위 설립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를테면 창업공신에 속했다. 시민단체 대표를 역임했고 지지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누구도 토를 달 여지가 없었다.

    조영황 변호사는 사정이 좀 달랐다. 그는 외인부대 출신이다. 중졸 학력으로 독학 끝에 변호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을 갖춘 그는 기득권자·엘리트 법조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비주류, 소수자 출신의 법조인인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위원장이라는 자리

    박원순·노무현과의 만남

    2006년 10월 안경환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인권위 위원장 임명장을 받고 있다.

    조 변호사는 1988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뒷마무리에 관여해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기인 1986년 6월 일어난 성고문의 주범이었던 문귀동은 1987년 시민항쟁의 결과로 기소된다. 대법원은 불기소처분에 대한 원심결정을 파기하고 재정신청을 받아들인다. 인천지방법원은 검사 역을 맡을 변호사를 구해야 했고, 조영황은 자신의 표현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 역할을 맡았다. 대부분의 ‘인권변호사’가 원심에 관여했기에 검사 역을 수행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변협 지도부의 호소와 간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문귀동의 유죄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조영황 위원장도 1년6개월 만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정말 힘들었다”는 게 후일 필자에게 털어놓은 그의 고백이다. 처음부터 그는 인권위원장 자리에 애착이 없었다. 전문지식과 경험도 모자란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당초 그는 인권위원장을 비교적 한가한 ‘비상근’ 정도의 자리로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취임해보니 거의 매일 언론과 시민단체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각기 입장이 다르고 개성 강한 위원들의 성가신 주문과 공격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참여정부에 기용되기 전 이미 은퇴해 향리에서 군법원의 판사로 근무하며 순박한 촌로를 자처한 그였다. 그런 그가 연일 부대끼다보니 지병도 도졌다. 버티다 못해 어느 날 ‘느닷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노무현 대통령도 기관으로서 인권위를 크게 중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정치철학과 노선이 같은 전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설립됐고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경력과 이상에도 부합하는 기관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의와는 무관하게 인권위는 성가신 존재였고 따라서 때때로 견제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불평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전산망(NEIS)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많다는 의견을 인권위가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대통령은 크게 노했다고 한다. 또한 인권위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선배 법조인이라는 사실에 심리적인 불편함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노 대통령에게 인권위원장은 자신의 측근을 앉힐 정도로 중요한 자리는 아니었다.

    현재까지 위원장에 임명된 다섯 사람 모두 법률가라는 사실은 인권위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물론 법률가 출신 인권 수장은 장점이 크다. 선진국을 봐도 법률가가 인권전문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직 대법원장 중 인권위원장을 임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와 정서가 확대되면 검찰이 바로 인권옹호기관이고 법무부가 인권업무를 총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비약할 수 있다. 인권은 법의 문제이지만, 법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 노조지도자, 언론인, 성직자, 정치가, 외교관 출신도 인권위원장이 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만 한다.

    갈라진 세상

    2009년 6월30일, 인권위 위원장 3년 임기를 몇 달 남기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종전의 교수생활로 즉시 복귀할 것으로 기대했다.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하는 교수의 특권을 되찾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정부에 동원된 3년 정도야 짧은 시간이 아니겠느냐? 떠나는 순간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도 했다. 젊은 시절의 군대 생활처럼 되돌아보지 말자. 내가 잊으면 세상도 나를 잊을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면서도 나는 언젠가는 인권위 시절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길 요량으로 약간의 메모를 해두고 있었다. 실제로 쓰는 일은 한참 후의 일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다짐해도 헛된 일이었다. 세상은 나의 다른 측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전직 인권위원장, 이명박 대통령과 ‘맞짱 뜬’ 투사로 기억하고 끊임없이 그 사실을 환기시켰다. 갈라진 세상의 인심과 정서가 고스란히 나의 일상에 투영됐다.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내 믿음과 주장은 양쪽에서 다 배척받았다. 종전에는 그처럼 빈번하게 들어와서 사양하기에 바빴던 주요 언론의 기고 요청과 대학 및 기관들의 강연 요청도 딱 끊어졌다. 나의 과민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한 일도 더러 일어났다. 출국수속을 하러 공항에 나갔다가 비로소 유효기간이 한참 남은 내 여권이 나도 모르게 ‘직권말소’된 사실을 알게 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내 스스로 인권위와 정서적으로 완전히 절연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재임 중 기구가 축소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는 자괴감이 나를 심히 괴롭혔다.

    지난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주위의 요청에 따라 박원순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 나도 박원순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운동의 표적이 됐다. 젊을 때부터 공부는 하지 않고 정치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거나, 박사학위도 없이 박사 행세를 한다거나 등등의 인신공격이었다.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꾸할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니다.

    내게 박원순은 죽은 조영래가 남겨준 사람이다. 내가 쓴 ‘조영래 평전’(2006)의 프롤로그(1990)와 에필로그(2005)에도 박원순이 등장한다. 1987년 봄 미국에서 귀국해 학교에 부임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 소규모 모임이 있었다. 고정된 주제 없이 세상과 신변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모임으로 조갑제와 조영래가 핵심 멤버였다. 조갑제는 우리 모임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짧은 꽁트를 써서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조영래의 측근은 아니었다. 박원순과도 막역한 사이는 아니다. 다만 한국 현대사에서 법률가로서 두 사람만큼 창의적인 발상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을 보지 못했다.

    내 시대의 지인들은 조영래가 응당 대통령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나는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서 최적의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그를 지지했고 누구 못지않게 그의 당선을 기뻐한다.

    참여연대와의 인연

    1994년 봄, 박원순이 학교로 찾아왔다. 법률가 중심의 시민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실무진은 갖춰져 있다고 했다. 거리에서 법정으로 무대를 옮겨 세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나가겠다는 조영래 후계자의 발상이었다. 그보다 몇 해 앞서 나는 동기생 친구들이 주도해 만든 경실련의 회합에도 더러 참석했고 잡지 편집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주로 경제정책을 제시하는 일이라 내가 기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법적’ 해결방식이라는 박원순의 제안은 솔깃했다.

    그러나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뜻 있는 젊은이 10여 명의 인생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짧게나마 고교시절 끼니를 거른 경험이 있고, 사회운동에 몸담으면서 가족의 생계를 팽개친 무수한 ‘지사’를 주변에서 보아온 나다. 한때 기업에서 일한 경험도 직업으로서의 시민운동이 겪을 난관을 가중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일시적인 자원봉사자가 아닌 ‘직장인’ 상근간사들의 봉급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가족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봉급도 과외 수입도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매주 동아일보에 ‘법과 문학 사이’를 연재하고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푼돈이나마 고료 수입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수중의 돈을 일부 털어 넣는 일 정도였다. “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박원순은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과 낙관론으로 나의 다그침을 피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에게 묘책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후일 그가 자신의 집을 처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쨌든 내 기준으로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그의 낙관론이 쉼 없이 희망을 제작해내는 성과를 목도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행보에 끌려들게 되었다. 그래서 참여연대에 이어 그가 만든 ‘아름다운재단’에도 이름을 걸었다.

    어쨌든 나는 다분히 명목에 그친 참여연대의 초대 집행위원장에 추대됐다. 나이와 지위에 따른 배려였다. 용산역 앞 허름한 4층짜리 건물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불과 100명도 안 되는 내방객 중 얼마 전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 후일 국무총리가 된 이수성, 두 분도 포함돼 있었다. 이수성 교수와 이회창 총리에게 그 자리에 와주십사고 초청장을 들고 간 사람은 나였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도전하고 자리를 떠난 이회창 총리가 몇 개월의 침묵 끝에 정식으로 언론에 재등장할 때 나는 곁에 있었다. ‘신동아’ 1995년 신년호를 통해 그와 공개대담을 나누는 ‘특혜(?)’도 누렸다.

    낙천·낙선운동

    박원순의 참여연대에서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집행위원장에 이어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리도 맡았지만 의제 형성이나 추진은 물론 운영에도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시민운동 현장의 기류와 후배들의 생각도 많이 배웠다. 참여연대는 재벌을 상대로 한 전쟁 등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나는 참여연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출범하면서 명목상으로나마 갖고 있던 직책을 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낙천·낙선운동이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헌법이론을 동원해 법리논쟁을 벌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보다 원천적인 ‘도덕적 정당성’에 의문이 들었다. 박상증 당시 대표도 특정인을 당선시키겠다는 운동이 아니라 떨어뜨리겠다는 목적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강하게 반대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순수한 시민운동에 도덕적인 부담이 된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 게다가 현실적인 효용에도 회의가 들었다. 지역구도가 강고한 호남과 영남지역에서는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수도권 지역, 그것도 한계상황에 서 있는 몇몇 사람에게 약간의 타격을 주는 것으로 운동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실패할 경우 짊어질 좌절감과 사회적 비난은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성패를 떠나 구태의연한 정치세계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 의미는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때 내가 세상을 읽고 나서는 방법과 수준이 참여연대의 핵심세력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박원순·노무현과의 만남

    참여연대는 2000년, 400여 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한 ‘총선시민연대’를 발족하고 낙천·낙선운동을 벌였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탄생한 것이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상황이 전혀 다른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의 경우처럼 엄격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의 성격에 따라 단체의 활동 방향과 한계를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다.

    2006년 10월30일 아침, 청와대에서 인권위 위원장 임명장을 받기 이전에 나는 노 대통령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같은 해에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와 내가 그 시절 만난 적이 있고, 그가 나를 분명히 기억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있긴 했다. 한동안 나는 부산상고 인근에서 자취생활을 했는데 집주인 아들과 나의 룸메이트가 같은 학년의 상고생이었다. 그들을 찾아오는 친구가 많이 있었고 때때로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중에 진영 출신의 노무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정확하게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도 있고 어렴풋이 맴도는 친구도 몇몇 있는데 그 속에 노무현은 들어있지 않다. 아마도 그와의 인연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쓴 중간 인물의 창작이거나 생산적인 기억인지도 모른다. 사업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사소한 인연도 극도로 확대 재생산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그분이 야당의원이던 시절 좀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연구소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자문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거절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나는 정치인의 사적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다. 개인적인 차원의 만남까지야 완강하게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런 제의는 많지 않았다. 중간에 사람을 내세워 접촉해 온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비중 있는 정치인 본인이 직접 요청해 온 경우는 없었다.

    내가 인권위원장의 제의를 받기 전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참여정부의 각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내 의사를 물어온 적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도 주된 대상자에 끼워 들러리로 세운 여러 후보 중 하나였을 것이다.

    2002년 12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나는 기뻐했다. 나의 지인 대부분이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고 그의 당선을 확신했다. 비록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모든 의미에서 소수정부인 그가 이끄는 참여정부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금실 변호사가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데 본인이 결심을 못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학교로 초청해 점심을 나눴다. 강 변호사를 정식으로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각종 개혁과제가 산적했을 텐데 장관직을 맡게 되면 나도 성원하겠노라고 격려했다. 그는 장관에 취임한 후 법무정책위원회를 구성해 나를 위원장에 위촉했다. 나의 요청대로 현직 차관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정부위원회의 통례에 비춰볼 때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검찰개혁 등 많은 개혁 과제를 수행할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탄핵 정국

    2004년 4월,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의결이 있었다. 실로 엄청난 일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상식에 벗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재직한 학교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직책보다 노무현이라는 인간에게 경멸에 가까운 냉소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히 탄핵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이나 선배 중에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할 헌법학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때 가까운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문재인 당시 수석을 그때 처음 대면했다. 그의 인품과 성실함에 대해서는 부산의 법조인들로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강금실 장관도 함께 자리했다. 비중 있는 헌법교수 중 대통령 편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다면서 문 수석은 나의 조언을 구해왔다. 차마 직접 나서달라고 요청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이태 전 헌법학회 회장을 지냈지만 주류 학계 내에서 영향력은 미미했다. 게다가 작은 기관의 장인만큼 기관 정서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소신으로 처신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표적인 헌법교과서 집필자를 한두 사람 추천하면서 직접 접촉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접촉한 원로 교수들에게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낙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심하다 전화를 걸었다. 도움이 되면 내 이름을 써도 좋고, 필요하면 내가 직접 헌법재판소에 나가겠노라고 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학장이던 나는 내심 학장직 사표를 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임기 말인데다 여교수·타교 출신 교수·비법학 전공자 교수·외국인 교수의 채용 등 당초 학장으로서 계획했던 일은 대체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박원순·노무현과의 만남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1984년 미국 샌타클래라대 법학 박사

    제4대 국가인권위 위원장(2006.10~2009.06)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 ‘법과 사회와 인권’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평전’ 등


    소장파 교수들이 주축이 된 학회들이 연이어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이름은 공표되지 않았다. 내가 입장을 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장교수들이 힘을 얻어 지원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된 이야기다. 나는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후배, 제자들의 개인적인 소신과 행동을 한쪽 방향으로 유도할 생각을 품은 적도 없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일이 문재인의 회고록 ‘운명’에 짧게 언급돼 있어, 그가 그 일을 잊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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