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60년 전 한국 민주주의 비관한 ‘더 타임스’ 사설의 오류

  • 이성춘│전 한국일보 이사·논설위원 choonls@yahoo.co.kr

    입력2011-11-2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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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영국 대표 일간지 ‘더 타임스’가 한국 민주주의를 비관하는 사설을 실었다.
    •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독설이었다. 한국 정치인, 언론인들에 의해 많이 인용된 이 문구는 부산정치파동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록을 확인한 결과 실제로는 이와 상관없이 영국의 정치상황과 국익에 따라 쓴 사설임이 드러났다.
    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1952년 1월 이승만이 제출한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가 부결하자 무장우익단체들이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소생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들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951년 10월1일자 영국 ‘더 타임스’ 사설)

    대한민국이 민주헌정 체제를 시행한 지 올해로 63년이 된다. 그동안 권력자들의 독선과 횡포로, 다수 의석을 내세운 집권당의 밀어붙이기로, 또 여야의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한 정쟁(政爭)과 충돌로 민주헌정이 훼손되고 정치가 파탄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제구실을 못하는 정치를 두고 언론과 지식인은 온갖 비판과 야유를 했다. 껍데기 정치, 날치기 정치, 밀실(密室) 정치, 줄서기 정치, 거수기(擧手機) 정치, 사생결단의 치킨게임 정치, 폭력 정치 등이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야유와 독설(毒舌)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앞에서 인용한 ‘쓰레기더미에서의 장미꽃’일 것이다. 이 말처럼 민주정치와 관련해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뒤흔들고 가슴에 큰 상처를 준 말은 없을 것이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날 리가 없다. 이는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민주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직격탄을 쏜 것이다. 엄연한 민주헌정 국가에 대해 이러한 야유와 지적은 너무나 끔찍한 혹평(酷評)이자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이 사설은 1952년 부산에서 발생한 정치파동을 계기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혼합한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강제로 통과시킨 사건이다.

    6·25전쟁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수백 명의 언론인이 내한해 취재활동을 벌였다. 그중에는 세계적인 권위지인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 런던 타임스라고도 함)의 특파원도 입국해 영국군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英聯邦) 부대의 전투상황을 취재했다.



    ‘더 타임스’ 특파원

    귀국을 위해 부산에 들른 ‘더 타임스’ 특파원은 이 대통령의 독재를 위한 반민주적 소동을 보고 놀랐다. 전선에서는 유엔군 장병들이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그 기자는 귀국 후 6·25전쟁에 관한 르포와 함께 이 대통령이 벌이는 비(非)민주적 작태에 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했을 게 분명하다. 이어 더 타임스는 사설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낫다”는 비유를 들며 한국 정치권에 한 방 먹인 것이다.

    이러한 혹평은 그 후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국가보안법 파동, 3선 개헌안 등 숱한 국회 날치기 처리, 3·15부정선거 등으로 정치가 파행을 겪을 때마다 이를 개탄하는 의미에서 어김없이 인용(引用)되어왔다. 이 경구(警句)는 정치학자, 언론인, 지식인이 많이 써왔다. 필자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인용했다.

    중동에서의 타격

    그런데 필자는 얼마 전 피난 시절의 국회활동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던 중 ‘더 타임스’의 ‘쓰레기더미의 장미꽃’ 사설이 한국의 정치파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을 확인했다. 우선 시기적으로 파동이 벌어지기 8개월 전에 실린 것으로 집필의도와 내용 역시 한국의 정치상황과는 관계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당시 유엔과 공산 측 사이의 휴전협상과 관련해 영국에 유리하고 편리한 국익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가 무망(無望)하다고 멋대로 단정한 것이다.

    그러면 ‘더 타임스’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사설을 쓰게 된 배경은 뭔가.

    북한의 남침 당시 영국의 집권당은 클레멘스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었다. 영국은 전쟁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군에 대한 침략 중지 요구, 침략자 규정, 규탄 결의안, 유엔군 파병안을 전폭 지지했다. 이어 참전 16개국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육군 1개 여단과 해군함정 등)을 보냈다.

    그러나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6·25전쟁이 1년쯤 경과하자 자유-공산진영의 관련국들은 전쟁 피로증에 휩싸였다. 소련은 북한과 만주 지역에 대한 미국의 원폭(原爆) 투하 가능성과 이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중공(당시 표현)은 소련이 무기와 탄약 등 군원(軍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데 불안해하면서 인해(人海)전술에 따른 병력 손실로 고민했다.

    미국에서는 경기침체 속의 전비(戰費) 증가에 따른 조세부담에 대한 비판과 함께 휴전론이 고개를 들었다. 영국에서도 피로증이 심상치 않았다. 맥아더의 한만(韓滿)국경 진격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저지되고 유엔군이 고전(苦戰)하자, 영국 조야(朝野)는 맥아더 성토와 함께 영국 군대의 철수를 제기했다.

    영국이 전쟁의 조속한 매듭을 원한 데에는 국내외적으로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첫째 전반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세수(稅收) 감소로 국방예산의 증액을 뒷받침해야 하는 재정이 부족했다. 노동당 내각에서는 전비 확보 문제를 놓고 수개월째 각료 간의 논쟁이 지속되었다. 복지비용을 놓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애틀리 총리는 직계인 휴 케이즈켈(뒷날 노동당수 역임)을 재무상에 임명하고 그동안 무료였던 병원의 처방전 발급, 틀니와 안경 제공 등에 대해 유료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서민과 노인층이 크게 반발했다.

    둘째는 경기침체와 내각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미 하원의 해산을 단행하고 10월25일 총선거를 실시할 예정이어서 애틀리로서는 민심 잡기가 시급한 형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첫째, 이란의 석유 국유화, 이집트의 반(反)영국 데모 등 중동사태의 수습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외세 배격을 내걸고 취임한 이란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그해 3월 영국 소유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현 브리티시 석유회사·British Petroleum)에 대해 국유화 조치를 단행해 영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자극 받은 이집트인들은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수에즈운하를 되찾자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도 카이로를 비롯해 운하에 인접한 알렉산드리아와 포트사이트 등에서는 연일 반영 데모가 계속됐고 7월부터는 폭동이 빈발했다. 따라서 영국의 관심은 중동에 집중됐고 운하 방어를 위한 병력 증파론(增派論)이 제기됐다.

    ‘쓰레기더미의 장미꽃’

    둘째는 중공과의 관계였다. 1949년 10월1일 중공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내쫓고 중국 본토를 석권하자 영국은 아편전쟁 때 조차(租借)한 홍콩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 중공을 승인했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중공은 영국의 적이 됐다. 영국은 중공이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런 분위기와 여론을 반영하듯 영국의 대표 신문인 ‘더 타임스’는 1951년 10월1일자에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Korea)’라는 제목의 비교적 긴 사설을 실었다. 사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어 어느 쪽도 승패를 단정할 수가 없다. 휴전에 대한 양측의 견해가 너무나 달라 잔인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은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유엔의 목표는 1946년 총회 결의대로 한국에 통일되고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있다. 하지만 한국은 먼저 중공군을 격퇴하지 않고서는 통일을 이룩할 수 없으며 설사 이뤄진다 해도 여러 해 동안 유엔의 보호가 필요할 것이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건전한 민주주의가 소생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만일 이 전쟁을 휴전으로 이끄는 데 두 개의 한국으로 나누는 것이 해법이라면 전쟁 이전과 같이 38도선으로 나누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유엔에는 단지 두 가지 선택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이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떠한 비용과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아니면 38도선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유엔 회원국들과 미국 의회에서 거부당한 만큼 많은 사람은 후자(後者)를 선택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설은 우선 민주주의를 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한심한 한국에서 과연 전쟁을 계속해야 되는가. 지켜야 할 가치도 없는 한국에서 우방국 장병들이 계속 피를 흘려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대신 이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의 피 끓는 휴전 결사반대의 외침은 철저히 묵살했다. 한마디로 공산군의 기습 남침에 따른 동족상잔의 전쟁, 수많은 한국 국민과 국군 및 유엔군의 죽음과 부상, 북한의 반(反)민족적, 반인류적인 죄악과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은 채 공산 측 주장대로 양측 군대의 38도선 복귀와 휴전을 촉구한 것이다.

    이런 논거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약소국을 무력으로 강점해 착취와 수탈을 자행했던 영국의 오랜 제국주의, 대국(大國)주의 근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더 타임스’의 사설은 침략당한 대한민국은 분노와 억울함도, 또 천문학적인 피해도 눈을 감고 잊어버려야 하며, 공산 측의 침략 자체를 덮어버리고 38도선에서의 한반도 영구 분단에 동의하라고 권고한 셈이다.

    “영국 정부 공식 입장 아니다”

    ‘더 타임스’가 발행된 지 며칠 후 당시 이묘묵(李卯默) 주영공사는 정부 훈령에 따라 이 신문 발행인과 편집인에게 엄중 항의했다. 이와 함께 그는 외무성을 방문하고 “타임스가 권유하는 38도선 휴전과 한반도 분할이 영국의 공식 입장인가”라고 따졌다.

    다음 날 영국 외무성은 짤막한 발표문을 냈다. “타임스의 주장은 정부 방침과 다르다. 영국은 정전선(停戰線)을 현재의 전선(戰線)으로 할 것과 앞으로도 유엔 우방국들과 보조를 맞추는 데 조금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타임스 사설이 나온 지 8개월 뒤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측근 및 추종자들은 대통령의 연임과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을 짓밟는 사상 유례가 드문 민주헌정의 유린극(蹂躪劇)을 펼친다. 정치파동은 훗날 두고두고 한국의 민주헌정과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후유증을 남겼다. 영국의 국가주의 관점에서 쓰인 ‘쓰레기더미의 장미꽃’ 운운하는 사설은 피난 수도에서 펼쳐진 정치파동에 대해 적절하고 신랄한 경구, 평구(評句)로 둔갑되어 되살아났다.

    이 말이 언제부터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정치파동 중이나 혹은 이후 언론과 야권(野圈)에서 ‘쓰레기더미의 장미꽃’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며 “이러니 한국은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꼬집은 게 아닌가”라고 개탄했고 그 후 정치가 요동을 칠 때마다 혹평하거나 자괴(自愧)하는 심정으로 인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제의 ‘더 타임스’ 사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극언을 한 지 올해로 만 60년이 된다. 돌이켜 보면 역사는 우연투성이다. 자기 나라의 이익수호를 위해 한국의 운명이야 어찌되건 말건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쓴 사설이 훗날 빚어진 대한민국 초유의 정치대란인 부산정치파동에 대입됨으로써 참으로 절묘한 비유로 이 땅의 파행 정치를 질타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지난 60년간 정치가 길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통렬하게 야유하는 데 사용된 이 표현은 앞으로도 정치가 표류하고 왜곡과 혼란을 되풀이할 때마다 인용돼 여전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헌정, 민주정치가 63년간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만큼 이제는 이런 모욕적인 야유에서 졸업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면서 바른 민주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정당과 정치인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함께 주권자인 온 국민의 부단한 채찍질과 감시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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