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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60년 전 한국 민주주의 비관한 ‘더 타임스’ 사설의 오류

  • 이성춘│전 한국일보 이사·논설위원 choonls@yahoo.co.kr

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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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영국 대표 일간지 ‘더 타임스’가 한국 민주주의를 비관하는 사설을 실었다.
  •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독설이었다. 한국 정치인, 언론인들에 의해 많이 인용된 이 문구는 부산정치파동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록을 확인한 결과 실제로는 이와 상관없이 영국의 정치상황과 국익에 따라 쓴 사설임이 드러났다.
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1952년 1월 이승만이 제출한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가 부결하자 무장우익단체들이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소생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들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951년 10월1일자 영국 ‘더 타임스’ 사설)

대한민국이 민주헌정 체제를 시행한 지 올해로 63년이 된다. 그동안 권력자들의 독선과 횡포로, 다수 의석을 내세운 집권당의 밀어붙이기로, 또 여야의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한 정쟁(政爭)과 충돌로 민주헌정이 훼손되고 정치가 파탄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제구실을 못하는 정치를 두고 언론과 지식인은 온갖 비판과 야유를 했다. 껍데기 정치, 날치기 정치, 밀실(密室) 정치, 줄서기 정치, 거수기(擧手機) 정치, 사생결단의 치킨게임 정치, 폭력 정치 등이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야유와 독설(毒舌)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앞에서 인용한 ‘쓰레기더미에서의 장미꽃’일 것이다. 이 말처럼 민주정치와 관련해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뒤흔들고 가슴에 큰 상처를 준 말은 없을 것이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날 리가 없다. 이는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민주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직격탄을 쏜 것이다. 엄연한 민주헌정 국가에 대해 이러한 야유와 지적은 너무나 끔찍한 혹평(酷評)이자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이 사설은 1952년 부산에서 발생한 정치파동을 계기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혼합한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강제로 통과시킨 사건이다.

6·25전쟁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수백 명의 언론인이 내한해 취재활동을 벌였다. 그중에는 세계적인 권위지인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 런던 타임스라고도 함)의 특파원도 입국해 영국군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英聯邦) 부대의 전투상황을 취재했다.



‘더 타임스’ 특파원

귀국을 위해 부산에 들른 ‘더 타임스’ 특파원은 이 대통령의 독재를 위한 반민주적 소동을 보고 놀랐다. 전선에서는 유엔군 장병들이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그 기자는 귀국 후 6·25전쟁에 관한 르포와 함께 이 대통령이 벌이는 비(非)민주적 작태에 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했을 게 분명하다. 이어 더 타임스는 사설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낫다”는 비유를 들며 한국 정치권에 한 방 먹인 것이다.

이러한 혹평은 그 후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국가보안법 파동, 3선 개헌안 등 숱한 국회 날치기 처리, 3·15부정선거 등으로 정치가 파행을 겪을 때마다 이를 개탄하는 의미에서 어김없이 인용(引用)되어왔다. 이 경구(警句)는 정치학자, 언론인, 지식인이 많이 써왔다. 필자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인용했다.

중동에서의 타격

그런데 필자는 얼마 전 피난 시절의 국회활동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던 중 ‘더 타임스’의 ‘쓰레기더미의 장미꽃’ 사설이 한국의 정치파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을 확인했다. 우선 시기적으로 파동이 벌어지기 8개월 전에 실린 것으로 집필의도와 내용 역시 한국의 정치상황과는 관계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당시 유엔과 공산 측 사이의 휴전협상과 관련해 영국에 유리하고 편리한 국익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가 무망(無望)하다고 멋대로 단정한 것이다.

그러면 ‘더 타임스’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사설을 쓰게 된 배경은 뭔가.

북한의 남침 당시 영국의 집권당은 클레멘스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었다. 영국은 전쟁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군에 대한 침략 중지 요구, 침략자 규정, 규탄 결의안, 유엔군 파병안을 전폭 지지했다. 이어 참전 16개국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육군 1개 여단과 해군함정 등)을 보냈다.

그러나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6·25전쟁이 1년쯤 경과하자 자유-공산진영의 관련국들은 전쟁 피로증에 휩싸였다. 소련은 북한과 만주 지역에 대한 미국의 원폭(原爆) 투하 가능성과 이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중공(당시 표현)은 소련이 무기와 탄약 등 군원(軍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데 불안해하면서 인해(人海)전술에 따른 병력 손실로 고민했다.

미국에서는 경기침체 속의 전비(戰費) 증가에 따른 조세부담에 대한 비판과 함께 휴전론이 고개를 들었다. 영국에서도 피로증이 심상치 않았다. 맥아더의 한만(韓滿)국경 진격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저지되고 유엔군이 고전(苦戰)하자, 영국 조야(朝野)는 맥아더 성토와 함께 영국 군대의 철수를 제기했다.

영국이 전쟁의 조속한 매듭을 원한 데에는 국내외적으로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첫째 전반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세수(稅收) 감소로 국방예산의 증액을 뒷받침해야 하는 재정이 부족했다. 노동당 내각에서는 전비 확보 문제를 놓고 수개월째 각료 간의 논쟁이 지속되었다. 복지비용을 놓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애틀리 총리는 직계인 휴 케이즈켈(뒷날 노동당수 역임)을 재무상에 임명하고 그동안 무료였던 병원의 처방전 발급, 틀니와 안경 제공 등에 대해 유료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서민과 노인층이 크게 반발했다.

둘째는 경기침체와 내각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미 하원의 해산을 단행하고 10월25일 총선거를 실시할 예정이어서 애틀리로서는 민심 잡기가 시급한 형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첫째, 이란의 석유 국유화, 이집트의 반(反)영국 데모 등 중동사태의 수습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외세 배격을 내걸고 취임한 이란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그해 3월 영국 소유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현 브리티시 석유회사·British Petroleum)에 대해 국유화 조치를 단행해 영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자극 받은 이집트인들은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수에즈운하를 되찾자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도 카이로를 비롯해 운하에 인접한 알렉산드리아와 포트사이트 등에서는 연일 반영 데모가 계속됐고 7월부터는 폭동이 빈발했다. 따라서 영국의 관심은 중동에 집중됐고 운하 방어를 위한 병력 증파론(增派論)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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