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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60년 전 한국 민주주의 비관한 ‘더 타임스’ 사설의 오류

  • 이성춘│전 한국일보 이사·논설위원 choonls@yahoo.co.kr

전쟁 피로증 심해지자 한국 정치상황 탓하며 휴전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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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더미의 장미꽃’

둘째는 중공과의 관계였다. 1949년 10월1일 중공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내쫓고 중국 본토를 석권하자 영국은 아편전쟁 때 조차(租借)한 홍콩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 중공을 승인했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중공은 영국의 적이 됐다. 영국은 중공이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런 분위기와 여론을 반영하듯 영국의 대표 신문인 ‘더 타임스’는 1951년 10월1일자에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Korea)’라는 제목의 비교적 긴 사설을 실었다. 사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어 어느 쪽도 승패를 단정할 수가 없다. 휴전에 대한 양측의 견해가 너무나 달라 잔인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은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유엔의 목표는 1946년 총회 결의대로 한국에 통일되고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있다. 하지만 한국은 먼저 중공군을 격퇴하지 않고서는 통일을 이룩할 수 없으며 설사 이뤄진다 해도 여러 해 동안 유엔의 보호가 필요할 것이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건전한 민주주의가 소생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만일 이 전쟁을 휴전으로 이끄는 데 두 개의 한국으로 나누는 것이 해법이라면 전쟁 이전과 같이 38도선으로 나누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유엔에는 단지 두 가지 선택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이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떠한 비용과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아니면 38도선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유엔 회원국들과 미국 의회에서 거부당한 만큼 많은 사람은 후자(後者)를 선택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설은 우선 민주주의를 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한심한 한국에서 과연 전쟁을 계속해야 되는가. 지켜야 할 가치도 없는 한국에서 우방국 장병들이 계속 피를 흘려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대신 이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의 피 끓는 휴전 결사반대의 외침은 철저히 묵살했다. 한마디로 공산군의 기습 남침에 따른 동족상잔의 전쟁, 수많은 한국 국민과 국군 및 유엔군의 죽음과 부상, 북한의 반(反)민족적, 반인류적인 죄악과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은 채 공산 측 주장대로 양측 군대의 38도선 복귀와 휴전을 촉구한 것이다.

이런 논거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약소국을 무력으로 강점해 착취와 수탈을 자행했던 영국의 오랜 제국주의, 대국(大國)주의 근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더 타임스’의 사설은 침략당한 대한민국은 분노와 억울함도, 또 천문학적인 피해도 눈을 감고 잊어버려야 하며, 공산 측의 침략 자체를 덮어버리고 38도선에서의 한반도 영구 분단에 동의하라고 권고한 셈이다.

“영국 정부 공식 입장 아니다”

‘더 타임스’가 발행된 지 며칠 후 당시 이묘묵(李卯默) 주영공사는 정부 훈령에 따라 이 신문 발행인과 편집인에게 엄중 항의했다. 이와 함께 그는 외무성을 방문하고 “타임스가 권유하는 38도선 휴전과 한반도 분할이 영국의 공식 입장인가”라고 따졌다.

다음 날 영국 외무성은 짤막한 발표문을 냈다. “타임스의 주장은 정부 방침과 다르다. 영국은 정전선(停戰線)을 현재의 전선(戰線)으로 할 것과 앞으로도 유엔 우방국들과 보조를 맞추는 데 조금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타임스 사설이 나온 지 8개월 뒤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측근 및 추종자들은 대통령의 연임과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을 짓밟는 사상 유례가 드문 민주헌정의 유린극(蹂躪劇)을 펼친다. 정치파동은 훗날 두고두고 한국의 민주헌정과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후유증을 남겼다. 영국의 국가주의 관점에서 쓰인 ‘쓰레기더미의 장미꽃’ 운운하는 사설은 피난 수도에서 펼쳐진 정치파동에 대해 적절하고 신랄한 경구, 평구(評句)로 둔갑되어 되살아났다.

이 말이 언제부터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정치파동 중이나 혹은 이후 언론과 야권(野圈)에서 ‘쓰레기더미의 장미꽃’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며 “이러니 한국은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꼬집은 게 아닌가”라고 개탄했고 그 후 정치가 요동을 칠 때마다 혹평하거나 자괴(自愧)하는 심정으로 인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제의 ‘더 타임스’ 사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극언을 한 지 올해로 만 60년이 된다. 돌이켜 보면 역사는 우연투성이다. 자기 나라의 이익수호를 위해 한국의 운명이야 어찌되건 말건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쓴 사설이 훗날 빚어진 대한민국 초유의 정치대란인 부산정치파동에 대입됨으로써 참으로 절묘한 비유로 이 땅의 파행 정치를 질타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지난 60년간 정치가 길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통렬하게 야유하는 데 사용된 이 표현은 앞으로도 정치가 표류하고 왜곡과 혼란을 되풀이할 때마다 인용돼 여전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헌정, 민주정치가 63년간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만큼 이제는 이런 모욕적인 야유에서 졸업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면서 바른 민주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정당과 정치인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함께 주권자인 온 국민의 부단한 채찍질과 감시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신동아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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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춘│전 한국일보 이사·논설위원 choonls@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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