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문명의 축이 이동한다” 여전히 유효한 량수밍(梁漱溟)의 동서문화론

  • 김수연│서울대 HK연구교수·중국문학 kimsy826@lycos.co.kr

    입력2012-01-19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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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후의 유자(the Last Confucian)’ 량수밍은 ‘포스트 근대’에 중국사상, 특히 공자사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내려고 했다. 량수밍은 전체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볼 때 20세기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 애쓰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1단계’에서 ‘자기 의욕을 환경조건과 조화시키는 2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물질문명을 발전시킨 서구문명이 근대화를 선점했지만, 중국문명은 이미 그 단계를 뛰어넘어 조화의 2단계로 넘어갔다고 본 것이다.
    “문명의 축이 이동한다” 여전히 유효한 량수밍(梁漱溟)의 동서문화론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량수밍.

    1910년대는 서구문명에 대한 ‘믿음의 상실시대’였다. 그 믿음에 대한 상실의 결정적인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19세기 이래 팽창해온 서구 근대문명이 갖는 모종의 경향성에 대한 회의였다. 극단적 경쟁주의, 물질주의, 실증주의, 이원론, 개인적 이기주의 등은 여전히 서구문명의 화려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미 후각이 민감한 사람들은 그 속으로부터 곪아가는 종기 냄새를 맡았다. ‘서구의 몰락’(1918~1922)의 저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유럽·아메리카 문화는 딱딱한 겉껍질만을 남겨놓고 사라질 것으로 보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서구문화의 몰락’ 원인을 분석했다.

    서구문명에 대한 불안감은 주로 서구인들 사이에 퍼져 있지만 이는 비(非)서구인에게도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서구를 모델로 사회변화를 한창 추구하던 민족과 국가에 서구사회와 그 문명의 위기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자신의 문명에 대한 실의감과 공허감은 19세 후반~20세기 초 비서구인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19세기 문명담론은 비서구 지역 문명의 ‘낙후성’에 대한 승인을 요구했고, 이는 당시 서구와의 각종 불평등 조약만큼 불합리했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서구의 기술을 중심으로 한 물질문명과 생활방식, 제도 등 서구문명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정신적 측면에서는 ‘가치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야기했다.

    전족(纏足)과 정신질환

    20세기 초 중국에서 중국인의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는 ‘전족(纏足)’과 ‘정신질환’이었다. 전자가 기존 중국문명의 병태성에 대한 기호였다면, 후자는 그러한 병태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중국인의 심리적 질환이었다. 이는 서구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물질의 시간차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근대화 이원성의 결과였다. 이러한 문제가 중국사회의 주요 의제로 제기된 것은 1910년대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으로 동양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중국사회의 과제는 이러한 제도에 걸맞은 정신문화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앞서 말한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서구 사회 내부로부터 제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 지식계의 일부에서는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동양문화, 특히 중국 전통문화의 장점을 입히기도 했다. 이는 중국과 일본 지식계의 주목을 받았다.



    “문명의 축이 이동한다” 여전히 유효한 량수밍(梁漱溟)의 동서문화론

    인도는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자연을 정복해 물질적 욕구를 채워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흥했다고 량수밍은 분석한다.

    1911년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잡지인 ‘동방잡지(東方雜誌)’는 서구와 일본에서의 이러한 동양문화론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번역, 소개했다. 그중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서신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연설문도 포함돼 있었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이자 작가인 디킨슨(G. Lowes Dickinson·1862~1932)의 ‘지나인 존의 편지’와 일본 도다(戶田) 박사의 ‘동서양 사회의 근본적 차이’와 같은 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지식계에는 동서문명 혹은 문화 전반을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 내에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쇼펜하우어의 인생철학, 니체와 베르그송 등의 철학과 같은 서구와 일본의 외래담론이 소개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혁명과 같은 세계적인 변화와 중국 내의 공화체제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중국 내에서 사상논전이 전개됐다. 동서문명의 문제도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는 ‘동방잡지’와 ‘신청년’ 등 신문화파 진영의 잡지를 비롯해 여러 언론매체가 참여했다. 또 중국 내 지식인과 서구 유학파, 서구학자 등이 직간접적으로 동서문화 담론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을 간단한 당파적 논쟁에서 좀 더 체계적인 학술 담론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최후의 유자(the Last Con-fucian)’이자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량수밍(梁漱溟·1893~1988)이다.

    량수밍은 1893년 베이징(北京)의 쯔진청(紫禁城)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량지(梁濟·1858~1918)는 몽골족 출신으로 내각중서(內閣中書) 등의 직위에 올랐지만 개혁파 못지않게 서학과 서구제도의 도입을 주창했다. 즉 중국과 서구문명의 충돌에서 중국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에 대한 학습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러한 부친 영향을 받아 량수밍도 일찍이 소학(초등학교)부터 서학을 접하고, 중학시절에는 반청(反淸) 혁명조직인 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그 기관지인 ‘민리바오(民立報)’의 편집 기자를 맡기도 했다. 량지와 수밍 부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서학을 중시하고 개혁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사상적으로 중국의 덕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인생의 가치문제에 그 누구보다도 천착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동아시아 근대화의 이원성에 따른 긴장이 이들 부자의 사유 속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이 이원성의 긴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912년 량수밍의 두 차례 자살시도와 1918년 량지의 자살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동서문화 조화론 vs 서구화론

    그 결과 량수밍은 1913년부터 불교에 심취해 불학(佛學)을 연구하는 한편 베르그송,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저서와 옌푸(嚴復)의 여러 서구 번역서를 읽었다. 그 결과물이 1916년 ‘동방잡지’에 발표한 ‘구원결의론(究元決疑論)’이다. 이 글을 계기로 1917년에 베이징대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초빙을 받아 베이징대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1918년 60세 생일 전날 부친 량지가 중국사회의 타락한 도덕기풍을 비판하면서 평소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세인에게 삼가 알림(敬告世人書)’이라는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충격을 받은 량수밍은 불교를 버리고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동시에 베이징대에서 공자철학연구회를 설립하는 한편, 동서문화에 대한 연구와 강연을 진행하고 1921년 ‘동서문화와 철학’을 출판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량수밍의 ‘동서문화와 철학’이 당시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국 개혁과정의 문제점이 응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자체가 세계적인 사상조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는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조를 이끌던 니체와 베르그송의 철학, 상호부조론을 제창한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Kropotkin), 대표적인 ‘생의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R. C. Eucken)의 사상이 소개됐고 듀이, 러셀, 타고르 등 사상가들과 일본의 와세다대 철학교수인 가네코 우마지(金子馬治)와 기타 레이키치(北聆吉), 그리고 ‘구유심영록(歐游心影錄)’을 발표한 량치차오(梁啓超) 등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사상적인 주제로 문제화됐다. 이들은 전후 세계사상과 문명의 전환을 전제로 세계개조의 방향을 모색했는데, 동서문화론 역시 바로 그러한 사상적 의제로 제기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조류의 전환 속에 제기된 중국의 동서문화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동방잡지 편집자 두야취안(杜亞泉)을 대표로 하는 ‘동서문화 조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청년’의 편집자 천두슈(陳獨秀)와 후스(胡適) 등의 ‘서구화론’이었다. 두야취안은 동서문화를 각각 정적문화와 동적문화로 구분하고, 두 문화의 조화를 통해 동서문명의 위기와 중국 근대화의 이원성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천두슈와 같은 서구화론자는 중국문명과 서구문명은 근본정신이 다르기 때문에 절충적 조화는 불가능하며, 중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중국문명에 대한 부정과 서구문명의 학습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전은 심도 있는 분석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5·4운동을 거치면서 ‘포스트 세계대전’ 시대에 중국 개조의 길과 관련된 다양한 사상분화를 야기했다.

    문화 유형론과 세 가지 문화정향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은 당시 다양한 동서문화의 비교 관점을 비판하며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구축했다. 여기서 ‘독특함’은 우선 그의 방법론에서 보여준다. 당시 동서문화론은 주로 ‘현상적’ 설명(즉 동적·정적, 자연정복, 과학, 민주, 산업 등) 또는 객관적 설명(인문지리적 설명)에 치우쳐 있었다. 그는 동서문화의 차이에 대한 발생학적 근본 원리나 총체적인 근거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러한 현상적 차이점들을 초래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로서 ‘문화의 방향’이라는 관념을 제기했다. 각 문화는 고유의 원리에 입각해 특정한 전개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화의 고유한 성격과 그에 따른 발전 방향이라는 그의 관점은 역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동서 종교문화를 연구한 막스 베버나, 같은 시기 서구몰락의 원인을 분석한 슈펭글러에게 공히 보이는 특징이다. 이는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 문화결정론은 아니더라도 문화의 정신적 특징으로부터 그 전개방향과 성격을 설명하려는 경향의 산물이다. 여기서 량수밍이 말하는 문화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인류(혹은 민족)의 생활양식이다. 나아가 량수밍은 생활에 대해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에 의하면 전체 우주는 하나의 생활이다.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찰나로 이루어진 생활의 지속이다. 그리고 생활의 근본은 ‘의욕’ 그 자체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욕’은 바로 쇼펜하우어의 ‘의지(will)’ 개념에 가깝다. 전체 생명은 바로 이러한 ‘의욕’의 맹목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장애와의 투쟁이 바로 생명의 과정이다.

    즉 의욕은 생활세계에 대한 의욕이고, 생활세계에 대한 의욕은 바로 의욕 대상을 목표로 장애를 극복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생활방식인 문화는 의욕의 그러한 대응방식이다. 문화의 차이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장애물의 차이와, 그로 인한 ‘의욕 방향’의 차이, 그리고 의욕이 그 만족을 방해하는 장애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점이다.

    량수밍은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문화를 세 가지로, 즉 세 가지 정향(定向)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첫 번째 정향 :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 애쓰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다. 즉 분투하는 태도다. 문제에 부딪히면 늘 분투를 통해 국면을 바꾸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②두 번째 정향 : 문제에 부딪히면 해결하려 하지 않고 바로 그 상황에서 자기만족을 구한다. 즉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은 단지 자기 의욕을 환경조건에 조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③세 번째 정향: 문제에 부딪히면 문제 혹은 욕구를 근본적으로 취소하려 한다. 즉 첫 번째처럼 국면을 개조하려 하지도 않고, 두 번째처럼 자기의 생각을 바꾸려하지도 않는다. 단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취소하려고 한다. 이는 욕망에 대한 금욕적인 태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문제의 성격과 난이도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도 앞을 향한 분투, 조화론적 적응, 회피적 태도 세 가지로 정향된다. 량수밍은 이러한 각각의 태도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면 세 가지 생활양식, 즉 문화유형이 나타난다고 봤다. 그렇다면 문제의 성격과 그에 따른 대처 방안의 차이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각각의 문화는 우열관계가 있을 수 없다. 모두 합리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문화정향을 토대로 량수밍은 서구, 중국, 인도 문화의 성격을 비교, 분석한다. 특히 위 세 가지 정향은 각각 사유의 네 가지 차원(형이상학, 종교, 인식론, 인생철학)과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데, 그 결과 중국과 서구, 그리고 인도는 각기 다른 문화차원을 발전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다른 문화를 발전시킨 중국, 인도, 서구

    “문명의 축이 이동한다” 여전히 유효한 량수밍(梁漱溟)의 동서문화론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서구문명에 대한 중국 내 사상 논전을 촉발했다.

    량수밍에 따르면, 서구는 처음에는 종교가 자못 성행했으나 비판을 받고 세력이 약화됐다. 형이상학도 처음에는 매우 성행했으나 인식론이 성행한 이후 약화되고, 결국 인식론이 서양철학의 중심문제가 됐다. 즉 서양은 처음 내적·외적, 자연·사회, 실체·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지만, 점차 외적인 자연과 고정된 실체에 보다 관심을 집중하면서 첫 번째 정향을 향해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유는 서양인, 특히 근대 서양인이 이지(理智)적 활동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연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분석하고 미세하게 나누어 계산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도 경계를 긋고 타산하는 태도를 취해 기계적인 관계를 이룬다. 또 정신생활 측면에서 이지가 일체를 압도해 종교가 타도되고 형이상학이 전복됐다. 지식 방면에서도 그들은 많은 과학적 성취가 있었고, 예술도 과학화했다. 이와 같이 서양인의 생활에서 이지가 중요한 도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인생철학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 량수밍의 결론이다.

    한편 중국문명에서 가장 발전이 없는 부분은 종교와 인식론이다. 중국인은 처음부터 서양처럼 ‘자아’를 인식할 수 없었고, 서양처럼 인간과 자연이 대립적으로 분리되지도 않았으며, 서양처럼 사람 사이에 경계가 분명하게 정해지지도 않았다. 더욱이 서양과 같이 지식(과학)이 발달해 그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량수밍은 이는 중국이 제2 정향(의욕과 환경조건의 조화)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신 중국에서는 독특한 형이상학과 인생철학이 발전했다. 중국의 형이상학은 우주 본체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서양 및 인도의 그것과 같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형이상학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자체를 탐구하고, 우주 자체의 변화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자신을 변화시켜 대상 및 환경과 조화시키려 했는데, 량수밍은 이러한 태도가 바로 인륜(윤리)의 문제에 매우 적합하다고 봤다.

    인도문명은 인생철학은 거의 없으며 주로 종교문화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것에 수반해 형이상학이 흥기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었고, 인식론은 자못 상세한 편이다. 이는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자연을 정복해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채워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량수밍은 인도문화가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보다는 그것을 초월한 영구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출세를 지향하는 제3 정향(욕망의 취소)으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 방향을 인류 역사의 전개과정과 결부해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서구문명이 추구한 제1 정향이다. 외부세계의 곤경과 도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1 정향과 같이 진취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따라서 외부세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물질문명을 발전시킨 서구문명의 성취는 근대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문화는 일찍이 제1 정향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고, 곧바로 제2 정향으로 나아갔으며, 인도문명은 제1 정향과 제2 정향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 바로 인류의 고등문명에서나 의미 있는 제3 정향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이 문화 방향의 차이로 인해 동서 간 접촉이 없었다면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각각 제2 정향과 제3 정향을 지향하고 있을 것이고, 서구적인 근대문명을 창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량수밍은 동서문명이 접촉하면서 세 가지 정향의 문제는 각 문명 관점이 아닌 인류문명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인류 전체 역사 발전의 단계에 맞게 새롭게 자신의 태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인류문화의 3단계와 세 가지 태도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 량수밍은 인류문화의 3단계와 인류문화의 세 가지 태도를 연계해 역사철학을 구성했다. 즉 인류에게 중요한 문제는 물질적 문제, 내적생명에 대한 문제, 생사를 초월한 본체에 관한 문제인데, 물질적 문제를 연구해 적극적으로 극복하려 한 문명이 바로 고대 서구문명이었다. 물론 서구 근대에 이르러 가장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내적생명에 대한 직각(直覺)적 연구를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해 일정한 성과를 이룬 문명은 고대 중국문명인데, 이제 다시 흥하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사를 초월한 우주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고대 인도문명에서 가장 큰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먼 장래에 부흥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 가지 문화 정향은 문제의 변화에 따라 태도도 변화한다. 량수밍은 근대에서 서양문화의 승리는 단지 인류가 직면한 문제에 적절했기 때문이고,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실패는 그 자체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현 시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그는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서구와 같은 근대문명은 오직 서구문화의 내적인 정향의 결과이며 타문화에서는 불가능했다는 결론을 낸다.

    그러나 베버와 달리 량수밍은 전체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볼 때 20세기의 현 단계는 바로 제1 정향에서 제2 정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봤다. 즉 인류가 직면한 문제가 제1 정향과 같은 태도가 아니라, 제2 정향과 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서구문명의 변화였다.

    그에 따르면, 서구는 일찍이 자유도시의 수공업과 가족적이고 소자본 중심의 소비경제였는데, 인생태도의 변화 결과 기계가 발명되면서 대자본 중심의 공장제 생산이 발흥했다. 동업조합인 ‘길드’와 자유도시가 파괴되고 생산 본위의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가가 출현했다. 또 분업 생산방식으로 인해 자유경쟁과 이기심을 긍정하게 되고, 노동자 처우 등을 규정한 각종 규범과 질서가 파괴되면서 빈부 격차 등의 불합리한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서구문명의 현 단계는 개인본위·생산본위 경제에서 사회본위·분배본위로 전환하고 있으며, 주요 문제도 사람과 물질 사이의 문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로, 물질적 불만족에서 정신적 불안정의 문제로, 물질 취득의 문제에서 물질 향유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구의 학술사상도 변화하고 있는데, 이성과 의식 중심에서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문제로, 상호경쟁에서 상호부조 관점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지식 중심에서 정서 및 의미의 추구 방향으로, 이지 중심에서 직각 중심으로, 지식 추구에서 행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즉 인류문화는 이제 첫 번째 길을 걸은 뒤 두 번째 문제로 진입했는데, 이는 중국적 태도가 마침내 진정으로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결국 중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중국적인 태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인도의 태도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며, 서양문화도 전적으로 수용하되 근본적으로 개조를 거쳐야 한다고 봤다.

    량수밍은 미래문화가 동서문화의 융합을 통해 형성될 것이라는 관점은 각 문화의 근본적인 정신 차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각 문화의 장점만을 서로 취하자는 주장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나 항상 일정한 태도를 취하며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량수밍은 미래문화는 하나의 태도가 요구되며, 현재 추세로 볼 때 그것은 중국적인 태도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서구문명에서 중국문명으로

    량수밍의 이러한 동서문화론은 어떤 면에서 막스 베버의 세계종교론과 비교될 만하다. 우선 베버와 량수밍이 동서문명을 비교 연구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같은 시기였다. 또 이들의 동서문명을 바라보는 두 시각은 공히 20세기 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문제의 출발점은 다를지 모르지만 기존의 문명연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좀 더 근원적인 분석방법론을 모색한 점은 비슷하다. 특히 두 사람은 단순한 인상주의적 비평이나 단편적인 비교 차원을 넘어,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의지 같은 주관적 요인을 중심으로 한 역사철학적 성격도 공통적인 특징이다. 즉 그들은 모두 서구, 중국, 인도 등 인류의 대표적인 문명을 생활태도와 의식구조, 종교적 세계관과 연계해 적극적인 현실지배(극복), 현실적응, 현실회피 모델로 비슷하게 유형화하고 각 문명의 발전 경향을 분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구 근대문명을 중심으로 인류문명의 발전방향을 각자 다른 관점에서 고찰했다. 베버는 근대세계의 지배적인 문명 형태가 왜 동양이나 기타 비서구 지역이 아닌 서구사회에서만 나타났는지 밝혀내고자 했다. 그에 비해 량수밍은 근대문명은 왜 서구적 태도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서구문명의 문제점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향후 문화는 왜 중국적 태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지 밝히고자 했다.

    바꿔 말하자면,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은 문제의 출발점을 베버와는 다른 역사적 시점에 두고 있다. 즉 베버가 근대의 대표적인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서구사회에서 나타났고, 근대적 기업가와 노동자의 경제윤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했다면, 량수밍은 바로 그러한 근대문명 이후에는 어떤 문명이 세계의 흐름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찾아 나섰다. 따라서 베버의 주요 관심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시점에 있었다면, 량수밍은 ‘포스트 근대’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베버가 근대의 형성에서 왜 종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논증하는 것이라면, 량수밍은 포스트 근대에 왜 중국사상, 특히 공자사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혀내려고 했다.

    주의할 점은 두 사람의 논의의 출발점은 바로 근대문명이며, 중심적인 비교 잣대는 바로 서구의 근대문명이라는 점이다. 동서문명, 문화론은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동등한 의미에서의 가치중립적인 비교는 아니다.

    특히 베버의 종교사회학은 19세기 서구의 동양학적 관점과 자료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량수밍의 동서문화 비교도 20세기 초 다양한 근대 사회론과 동서문화 비교론의 담론 안에 위치해 있다. 결국 두 사람의 시각은 서로 다르지만, 그 자체는 같은 시기 동서문명의 충돌이라는 하나의 ‘장(場)’ 안에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이들이 각각 부여잡고 있는 ‘서양’ 혹은 ‘동양’ 중심적인 가치, 그 준거틀은 20세기 근대문명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쟁점이었다. 나아가 21세기 세계의 문화 향방과 관련해 보자면, 이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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