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역 국회의원 부인이 국세청에 김학인 로비 의혹 제보
- “차용증과 돈거래, 로비자금 세탁과정으로 판단했다”(국세청 관계자)
- “정치권 인사가 김학인을 EBS 이사로 추천”(방통위 관계자)
- 2010년 국세청 문건, 2011년 검찰 첩보엔 ‘정용욱’이 없다
- 국세청 문건은 한나라당 J 의원, 검찰 첩보는 최시중 위원장을 로비 대상으로 지목
- “개인적인 돈거래를 왜 캐고 다니나”(김 이사장, 여의사)
검찰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횡령한 자금으로 서울 서대문구, 강남 일대의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십수억 원의 자금을 환치기 수법으로 중국으로 빼돌려 부동산을 구입했다. 김 이사장은 또 지난해 8월에는 EBS 방송센터가 입주해 있는 한국교육개발원 소유의 부동산을 개인 자격으로 낙찰받았다. 낙찰 금액은 732억여 원이었다. 김 이사장이 현재 보유한 자산은 대부분 부동산인데, 장부상 가치로만 230여억 원, 실거래가 기준으로는 40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12월 15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가 한예진을 압수수색하면서 시작됐다. 처음부터 검사 3명을 투입하는 총력전이 전개돼 검찰 주변에선 대형사건의 시작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검찰이 수사 착수 단계에서부터 김 이사장의 개인비리 수사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미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수사의 종착점이 김 이사장이 지난 수년간 벌인 각종 정·관계 로비 의혹이란 얘기가 공공연히 제기돼왔다. 김 이사장이 2009년 EBS 이사에 선임되는 과정과 2008년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과 현 정부 실세 정치인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었다.
1월 3일 한국일보가 김 이사장을 잘 안다는 한 인사의 입을 빌려 “김 씨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도움으로 2009년 EBS 이사로 선임됐으며 그 과정에서 최 위원장 측근인 정모 씨에게 수억 원을 건넸다”고 보도하면서 이러한 의혹들이 한꺼번에 수면으로 떠올랐다. 당시 기사에서 언급된 ‘정모 씨’가 최 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리는 정용욱(48) 전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보좌관임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더욱 커졌다. 최 위원장의 보좌관 출신인 정 씨는 지난해 10월 방통위에 사표를 낸 뒤 동남아로 출국했고 현재 태국을 거쳐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초 국세청이 정밀 내사
느닷없이 시작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김 이사장을 둘러싼 정·관계 로비 의혹은 2010년 초부터 정치권과 사정기관 주변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신동아’는 2010년 7~8월경 국세청에서 만들어진 김 이사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관련 문건을 입수해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당시 ‘신동아’가 입수했던 국세청 문건의 제목은 ‘김학인 EBS 이사 선임 관련 정치권에 비자금 제공 의혹’인데, 2010년 3월경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건은 사정기관이 김 이사장에 대해 정밀 내사를 진행해 작성한 최초의 문건으로 판단된다. 당시만 해도 김 이사장은 사정기관 주변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국세청 문건에는 김 이사장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17대 총선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유력 정치인(J 의원, 한나라당)과 친분이 있으며, 2009년 9월 EBS 이사로 선임되었음. 한국방송예술진흥원에 자신의 내연녀를 경리이사로 두고 장부 조작을 통하여 교비를 횡령하는 등 비자금을 조성하였으며, EBS 이사로 선임될 당시 유력 정치인(한나라당 J 의원)을 통하여 방송통신이사회 등에 금품 로비한 혐의.”
우선 이 문건은 김 이사장이 EBS 이사 선임과정에서 최근 의혹이 제기된 정용욱 전 보좌관이 아닌, 한나라당 J 의원을 로비 창구로 활용했다고 적고 있음이 눈에 띈다. 문건에는 김 이사장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 최 씨를 포함한 김 이사장의 주변 여성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혀 있다. 김 이사장이 최 씨로 하여금 장부를 조작해 진흥원의 교비를 횡령했고, 또 다른 여성 Y(여의사) 씨로 하여금 비자금을 세탁하게 하는 등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유력 정치인 등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것 등이다. 문건에 등장하는 여의사 Y 씨는 김 이사장이 정 전 보좌관 등 방통위 최고위 인사에게 로비를 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 여성으로 언론에 의해 알려진 인물. 현재 검찰도 이 여의사와 관련된 수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의사에 대해서는 최근 이런 보도도 나온 적이 있다.
국세청 문건에 첨부되어 있는 차용증서들. 김학인 EBS 이사는 2006~2007년 초 여의사 Y씨등과 차용증을 쓰고 로비자금으로 추정되는 비자금 수억 원을 건넸다.
정체불명의 수억 원대 차용증
Y 씨에 대한 논란은 국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민주통합당 주승용 정책위의장은 최근 “Y 씨는 특별한 학력이 없는데도 국내에서 한 보건대학원을 졸업한 뒤 울산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Y 씨가 강남에 미용병원을 설립할 때 소요된 수십억 원의 자금 출처도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A4 용지 18쪽에 달하는 국세청 문건에는 김 이사장이 여러 여성과 작성한 정체불명의 차용증, 부동산 거래계약서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국세청 직원과 김 이사장의 비리를 제보한 한 제보자의 대화 내용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녹취록 형태로 문건에 실려 있다. 문건에는 이 대화가 2010년 1월 6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진행됐다고 적혀 있다. 문건에 첨부돼 있는 각종 차용증과 부동산 계약서도 제보자 측이 ‘목숨을 걸고’ 몰래 촬영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제보자는 국세청 측에 “김학인 이사장으로 인해 개인적인 피해를 입은 한 현역 국회의원 부인의 대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 제보자가 주장한 내용들은 최근 수사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난 의혹들과 거의 대부분 일치해 눈길을 끈다. 문건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전 한예진 직원 최 씨를 통해 공금을 빼돌리고 그 돈으로 다수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는 최 씨 명의로 구입한 부동산도 있었다. 문건에는 최 씨 명의로 작성된 부동산 계약서가 여러 장 첨부되어 있다. 문건에서 제보자는 “김 이사장이 비자금으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문제가 될 경우를 대비해 최 씨와 차용증을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건에는 김 이사장이 최 씨와 작성한 차용증 1장 외에도 여의사 Y 씨와 맺은 차용증 2장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주로 2006년 3월~2007년 초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총 3장의 차용증 중 금액을 알 수 있는 것은 2장인데 각각 2억3000만 원(최 씨), 2억 원(여의사 Y 씨)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김 이사장이 여의사와 맺은 차용증의 성격이다.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국세청 조사관 : (여의사 Y 씨와 김 이사장이 작성한 차용증을 보며) Y 씨는 누구죠?
제보자 : Y 씨는 서초동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병원장입니다. …Y씨가 ○○대 최고위 과정을 수료하였고 정치권 인맥이 많은 점을 이용해….
국세청 조사관 : 그럼 김 이사장과 (여의사) Y 씨 간의 차용증서는 무엇인가요?
제보자 : Y 씨가 워낙 인맥이 넓으니까 그쪽을 통해서 비자금을 전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건에 등장하는 제보자의 주장대로라면, 김 이사장은 Y 씨에게 정·관계 로비자금을 건네고 문제가 됐을 경우를 대비해 차용증을 작성해놓았다. 공금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전 한예진 재무담당 최 씨와 차용증을 작성하고 돈을 빼돌린 것과는 용도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당시 이 문건을 작성한 국세청 조사관은 이 보고서를 작성한 직후인 2010년 5~6월경 기자를 만나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보자는 현 정부 실세들과 두루 친한 관계를 맺고 있는 Y 씨가 김 이사장과 내연의 관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Y 씨가 김 이사장을 위해 정·관계에 로비를 해준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를 대비해 차용증을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게 제보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 이사장이 여의사 Y 씨와 여러 장의 차용증을 작성한 시기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세청 문건에 첨부된 차용증이 작성된 2006년 말~2007년 초가 김 이사장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시기와 공교롭게 겹치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2007년 5월 한나라당이 운영한 2개월 과정의 정치대학원을 수료했고 학생회 수석부회장도 맡았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한나라당 신세대 육성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모두 2008년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둔 활동이었다. 김 이사장은 2008년 총선에서 고향인 충북 청주가 아닌 서울 강북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 이사장이 Y 씨를 통해 뿌린 로비자금은 공천을 받기 위한 용도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 2004년 김 이사장이 충북 청주에서 출마했을 당시 선거를 도왔던 전 한예진 직원 H 씨는 “김 이사장이 2004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떨어진 이후 정당 공천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선거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한나라당 쪽 정치인들과 친분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한나라당 J 의원도 그즈음 알게 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돈뿐 아니라 여자도…
앞서 언급했듯이, 국세청에 김 이사장의 비위사실을 제보한 제보자는 김 이사장이 한나라당 J 의원을 통해 정·관계 로비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 내용이 실려 있다.
국세청 조사관 : (김 이사장의) 구체적인 죄목이 뭔가요?
제보자 : 일단 김학인은 한예진의 공금 수십억 원을 경리인 최OO로 하여금 횡령하게 하고 빼돌린 공금을 (여의사 Y 씨 등을 통해) 정치권 등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J 의원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횡령한 공금으로 J 의원에게도 지속적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세청 조사관 : J 의원에게 제공한 구체적인 내용은 있나요?
제보자 : J 의원과 김학인의 관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관계이지요. 또한 J 의원에게 돈뿐만 아니라 여자까지도 제공한 적이 있지요. 그분(제보자의 의뢰인)께서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 또한 OOO라고 OO연합회 부회장과도 (김 이사장이) 친하더군요. 아마 OOO를 통해서도 (정·관계에) 로비했을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신동아’는 국세청 문건을 입수한 직후인 2010년 8월경 의혹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김 이사장, 여의사 Y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당시 기자는 이들에게 차용증의 용도와 목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채무, 채권 관계일 뿐이다. 왜 언론이 개인의 사생활에 간여하나”라며 불쾌해했고 정식 취재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예진 재무담당 최 씨는 당시 이미 한예진을 떠난 뒤여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신동아’는 당시 김 이사장의 EBS 이사 선임과정의 의혹, 공천 로비 의혹을 취재하던 중 방통위 측에서 최근 불거진 의혹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 이사장이 EBS 이사에 선임되는 과정에서 한 정치인이 김 이사장을 추천했다는 증언이었다. 당시 한 방통위 관계자는 “한 정치권 인사가 김 이사장을 EBS 이사로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김 이사장을 EBS 이사로 추천한 정치인이 누구냐. 혹시 J 의원 아니냐”는 질문에는 “말할 수 없다. J의원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통위 측에 따르면, EBS 이사 선임권한을 가진 방통위는 2009년 9월 EBS 이사 선임 당시 자천, 혹은 타천으로 후보를 추천받았는데 김 이사장은 자천이 아닌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후보가 됐다. 당시 EBS 후보로 추천된 인물은 모두 80여 명이었고 그중 9명이 EBS 이사로 선임됐다. EBS 이사를 선임하는 결정 권한은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가지고 있었다.
김 이사장을 누가 EBS 이사로 추천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검찰 수사를 전하는 각종 언론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만약 당시 방통위 관계자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 정치인을 밝혀내는 문제는 김 이사장의 정·관계 로비 사건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 검찰의 고위 관계자는 “그 부분도 수사대상에 올려놓고 확인 중이다”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 관련 수사가 개인 비리에서 정·관계 로비의혹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수사는 쉽지 않아 보인다. 언론 등을 통해 이런저런 의혹이 불거지고 있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고 있어 수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김 이사장이 지인인 여의사 Y 씨를 통해 방통위 고위인사에게 2억 원가량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나와 있지만 검찰은 아직 여의사 Y 씨에 대한 수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아직은 김 이사장의 개인비리를 수사하는 단계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여의사의 경우 범죄혐의가 확인되면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2011년 작성된 검찰 첩보
‘신동아’는 국세청 문건과는 별도로 지난해 8월경 김 이사장의 각종 비위 의혹을 담고 있는 검찰의 첩보문건도 입수했다. 대검찰청 범죄정보담당관실이 작성한 A4 용지 3장 분량의 비교적 짧은 문건이었다. 문건에는 현재 검찰이 들여다보고 있는 김 이사장 관련 핵심 의혹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의사 Y 씨의 병원에서 최 위원장이 무료로 피부 관련 시술을 받았다는 내용, 한예진 재무담당이던 최 씨가 김 이사장을 협박해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한정식집을 받아냈다는 내용, 김 이사장이 거액을 중국으로 빼돌려 부동산 등을 매입했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이 중 상당부분은 이미 검찰수사에서 사실로 확인된 내용들이다. 이와 관련, 최 위원장의 한 측근 인사는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최 위원장이 부부동반, 혹은 혼자서 Y 씨 병원을 찾아 피부 관련 치료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밝혀 문제의 여의사와 최 위원장이 친분이 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는 최근 검찰 수사과정에서 언론에 흘러나와 보도되기도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검찰 첩보는 김 이사장이 여의사 Y 씨를 통해 방통위 측에 거액의 뇌물을 전달했다고 적고 있다. 2010년 작성된 국세청 문건과 마찬가지로, 최근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정용욱 전 방통위 보좌관의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2010년 작성된 국세청 문건에는 J 의원이, 2011년 작성된 검찰 첩보에는 최 위원장 본인이 김 이사장의 로비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다만 두 보고서 모두 김 이사장이 여의사 Y 씨를 통해 정치권에 로비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10년 보고서를 작성한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김학인 이사장 비리를 추적할 당시 김 이사장이 정용욱 전 보좌관을 통해서 로비를 했다거나 정용욱 전 보좌관에게 로비를 했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 이사장으로부터 EBS 이사 선임과정에서 로비를 받았다는 언론보도에 대해 최시중 위원장 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