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후계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유지될 것이나 중장기적으로는 불안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LG경제연구소가 2011년 12월 발표한 ‘북한 김정은 체제 등장과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은 김정은 체제의 중장기 안착 여부 및 그 구체적인 양태와 관련해 네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먼저 김정은 체제가 안정되면서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경우다. 두 번째로 김정은 체제가 안정되더라도 폐쇄성을 지속하면서 이제까지처럼 핵을 담보로 미국과 대치, 협상 국면을 이어갈 수도 있다.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해질 경우, 세 번째 시나리오로 주변국 개입이 유발되는 등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거나 장기화할 수 있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북한체제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북한의 조기 붕괴로 이어지거나 급진적 모험주의가 팽배해 국지전 또는 전면전이 발발하는 경우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한반도리스크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은 단기 충격을 받은 후 곧바로 안정을 되찾아가는 모양새이지만, 동북아 세력균형의 한 축을 담당해온 북한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은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북한 경제는 잇따른 대기근 및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 한국과의 대치국면에도 불구하고 체제 존속 능력에 대한 외부의 회의를 상당부분 희석시키는 데 성공했다. 선군(先軍)정치로 표방되는, 극단적인 군 위주의 자원 배분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적 감시통제체제, 중국의 외교적·경제적 지원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선군체제를 이끌던 강력한 리더십이 갑자기 사라진 지금,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정성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북 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면, 주변국의 한반도 전략목표에 비춰볼 때 어떤 형태로든 개입이 불가피해지며 이는 동북아 안보정세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안보환경은 물론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폭풍권에 놓이게 된다. 그 파장은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같은 돌출성, 일회성 사건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에 지속적이며 구조적인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부상할 수 있다.
북한체제 특유의 폐쇄성 탓에 김정은 체제의 내부 역학관계를 살피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그 체제의 앞날을 심도 있게 조망하기는 더욱 어렵다. 다만 북한체제가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경우를 상정하고, 그 징후(Sign Post)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급변 시 조기회복(Resilience)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한국 경제가 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따른 북한의 권력교체기 때보다 체질에 큰 변화가 있었고, 국제적 이해관계자 역시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경제규모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세계 10위권으로 커졌지만, 금융시장의 빗장이 대부분 열렸으며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도입됐다. 김일성은 한중 수교 2주년에 사망해 당시 중국 경제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지금은 한국 전체 수출의 거의 30%가 중국행(行)이다. 잇따른 선진권 경제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한국 경제의 글로벌화는 더욱 진전될 것이다. 이처럼 달라진 한국 경제의 체질을 감안해 북한 리스크에 대한 내성(耐性)을 진단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한반도 급변 가능성 단기간 내 높지 않아
북한 변수에 대한 한국 경제 및 국제 투자가들의 내성은 그동안 크게 강화됐다. 김정일의 사망 발표 직후 수일 동안의 주식·외환시장 흐름이 이를 말해준다. 이 내성은 잇따랐던 한반도 정세불안이 동북아 지역 내 대규모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과거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한반도 급변사태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란 암묵적 기대가 섞여 있다. 최근 수년간 한반도 정세에 악영향을 끼친 대표적 사건으로는 북한의 핵 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연평도 포격사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정도 급(級)’의 정세불안으로는 한국 경제의 실물경제가 영향을 받지 않았던 만큼, 향후 북한 리스크 분석은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사실 2008년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발병이 알려진 이후 그의 유고사태는 한반도에 급변을 가져올 뇌관의 하나로 간주됐다. 제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북한 특유의 권력체제 탓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즉각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일부 전문가들이 관측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북한과 주변국 외교당국의 움직임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후계 김정은 권력체제가 선대 체제보다 허약하다는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예상이지만, 그 취약성은 구조적인 것이다. 대표적인 취약성으로 아버지와 달리 당 및 군의 최고위직을 승계하지 못했다는 점이 거론된다. 이 취약점은 최고지도자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결정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드러나게 마련인데, 최근 북미 간의 유화적 행보나 중국 공산당의 공고한 지원방침을 감안할 때 취약한 리더십이 시험당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당장 나타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문(弔問)기간 및 향후 최장 3년까지 예상되는 유훈(遺訓) 통치기에 북한은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체제는 전통적으로 대기근이나 미국의 군사적 압박 등 국가적 위기감이 고조된 시기엔 최고권력자를 정점으로 교조주의적 정치, 군사 캠페인을 벌이곤 했다. ‘나라를 이끌었던’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유고란 비상시기에 그가 세운 후계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대의명분은 어느 때보다 강조될 것이며 이런 명분을 거스를 경쟁자 그룹은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 북한 권력체제의 동요는 당장 2012년을 맞이하는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어긋날 수 있다. 북한의 맹방을 자처해온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을 위해 국경 주변의 안정에 주력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미국, 일본과의 세력 접점에 놓인 방파제 같은 북한의 완충적 역할은, 미국과의 갈등국면이 고조되는 현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현 4세대 지도자 그룹(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등)은 2012년 말 5세대 지도자그룹에의 집단 권력이양을 앞두고 있다. 경제운용이나 지역안보 현안에서 ‘큰 우환 없는 중국’을 물려주는 것은 임기 말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이 김정일 사망 후 하루 만에 ‘김정은 후계’를 언급한 조의성명을 발표한 것에도 이 같은 우려가 반영됐을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도 2012년 말 재선투표를 앞두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최우선 한반도 전략목표인 ‘한반도 핵무기 제거나 무력화’를 위해 강온(强穩) 전술을 취했지만, 여전히 답보상태에 놓여 있다. 군사적 압박 카드는 미국의 재정위기나 전쟁 피로감이 확대된 미 유권자들을 고려할 때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의 북미 대화 재개 움직임과 김정일 사망 직후 미 국무부 성명 등을 볼 때 오바마 행정부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압박보다 소극적인 화해제스처를 통해 ‘북핵을 관리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다. 김정은 체제가 연착륙할 경우 핵 협상 파트너가 확정되는 효과도 있다.
한반도 급변, 중장기 시나리오
앞서 김정은 후계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언급했다. 권력체제의 취약성은 무엇보다도 북한 경제의 회생계기를 찾아야 해소될 수 있다. 김정일 체제는 ‘미국의 압박’을 경제적 어려움의 근거로 선전하며 17년을 견뎌왔다. 김정은 체제가 훨씬 부족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똑같은 구실로 장수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이밖에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과의 관계정립, 중국과의 경제특구 공동관리, 남북한 경제협력 등 리더십이 흔들릴 사안이 수두룩하다. 사안마다 여러 선택이 가능하며, 이는 권부 내 이해관계가 다른 그룹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2년 주변국의 정권 교체기가 지난 뒤 김정은 체제의 리더십은 본격적으로 시험무대에 오르게 될 공산이 크다. 북한 권력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릴 경우 불가피하게 미국, 중국 등의 개입이 야기될 수 있으며, 이는 극단적으로 한반도의 급변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김정은 자신의 특성도 현재로선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취약한 리더십을 군부에 대한 의존성을 키워 메우려 할 경우 김정일 체제보다 더욱 핵에 의존하게 되고 주변국과 대치국면은 불가피해진다. 반대로 스위스 유학 시 자본주의 사회 및 경제를 경험한 것을 감안해보면 중국식 개혁개방에 친화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변수를 감안해볼 때 ‘향후 1~2년여가 흐른 시점’에서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다음의 상황 중 하나에 놓일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 개혁개방 : 중국보다 완만하고 실험적인 개혁개방 정책 실시
(나) 기존체제 유지 : 김정일 체제에서처럼 핵을 담보로 미국 등과 대치 국면
(다) 세습체제 동요 : 권력체제 동요 심화와 주변국 개입으로 군사적 긴장 고조
(라) 북한 붕괴 및 파국 시나리오 : 체제 모순 심화로 자체 붕괴 / 군사적 모험주의 팽배
4가지 시나리오는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시기적으로 선후에 놓일 수 있으며, 하나의 시나리오가 다른 시나리오의 배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 김정은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은 낮다는 점에서, 단기적 관점보다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위 시나리오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가), (나)의 상황은 김정은 체제가 2012년 중 적어도 권력자 그룹 내에선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는 가정에 따른 것이다. 이럴 경우 자신의 권력체제를 다지는 데 절대적 우군이 됐던 중국의 강력한 권유 및 경제재건의 필요성에 따라 김정은이 개혁개방 노선에 가까운 행보를 보일 수 있다(가). 2011년 초 북중 간 합의했던 황금평특구 및 나선지구 개발의 진전상황이 (가)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중국은 권부에서 멀리 떨어진 광둥성 해안 어촌에서 개혁개방 실험을 시작했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그보다도 좁고 제한적 범위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점진적 개혁개방은 정보차단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유지해온 김정일-김정은 체제에는 중대한 위협요인이다. 2009년 화폐개혁이 실패하자, 책임자 처벌에 뒤이어 계획경제적 정책들이 부활했던 것에 비춰 상당한 내홍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다.
(나)는 이 같은 체제 동요의 가능성을 우려해 최근 수년간 보아왔던 김정일식 생존전략을 유지할 때의 상황이다. 김정은 체제는 구조적으로 보다 안정되고 이에 따라 핵을 반대급부로 미국과의 ‘벼랑 끝 전술’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입지를 어렵게 하고 김정은 체제의 앞날도 불투명하게 만들 정도의 극단적 모험주의적 도발은 김정은으로서도 기피할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지금의 불안정 국면이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려울지라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를것이다. (나) 시나리오는 향후 북한이 미국 및 한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보이는 태도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 (라)는 김정은 후계체제가 중장기적으로 동요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김정은 리더십의 동요는 북한 군부 움직임이나, 김정은에 대한 관영 언론의 동정보도 등에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의 경우처럼 북한 내 권력체제가 동요하는 상황이 되면 북한 내 핵 통제권이 흔들릴 수 있으며 이는 누구보다 미국이 우려하는 상황이다. 상황 전개에 따라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불가피해질 것이며, 이는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미-일-한국과 중-북한의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그 한복판에 놓인 한국의 안보환경은 극단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다.
북한 군부, 모험주의 빠져들 가능성
김정은 후계체제가 동요할 경우 북한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해결 가능성이 더욱 낮아질 것이다.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중국의 지원도 리더십의 동요 탓에 여의치 않고, 결과적으로 체제 지속성은 내부에서부터 취약해진다. 그 결과 북한 경제가 과거 동독 경제처럼 한순간에 붕괴하거나, 군부 강경세력에 의한 모험주의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라).
앞으로 수년 내 중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경제에 결정적인 위기는 김정은 체제가 안착하지 못한 채 체제위기가 심화되는 (다), (라)의 시나리오에서 비롯된다. 김정은 권력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대외적으로 노출되는 순간부터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은 고조되며,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의 대외적 신인도에 악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이는 (나) 시나리오가 상정하고 있는, 익숙하게 보아왔던 김정일 체제하의 한반도 불안정 국면과는 맥락이 다른 것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국내 금융시장의 단기적인 반응은 과거 북한 관련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정일 사망 이후 충격을 받았던 국내 금융시장은 곧 정상화되는 모습이다.
지난 12월 19일 김정일 사망이 발표된 당일에 코스피지수가 3.4% 하락하고, 원화환율은 달러당 16.2원(1.4%)이 올랐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2월 20일에는 주가가 소폭 반등하고 원화환율은 하락함으로써 일단 충격에서 벗어났다. 김정일 사망 발표 직후 주가 하락 폭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유로존 위기에 따른 불안감이 겹친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19일과 20일 각각 2409억 원, 3240억 원 규모로 국내 주식을 순매도했지만 대규모 이탈 조짐이라고 볼 정도는 아니다. 국내 채권에 대한 투자 역시 19일의 574억 원 순매수, 20일 34억 원의 순매도 등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국채선물에 대해서는 같은 기간 2조6000억 원가량 순매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김일성 사망이 발표(1994년 7월 9일)되었을 당시에도 국내 금융시장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주식시장 개방 초기여서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 규모가 미미했던 데 따른 영향이 크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보유 규모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불거진 핵 관련 이벤트나 서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 직후 국내 금융시장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며칠 내로 충격이 가라앉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99년 6월 연평해전 발생,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강행 등이 사건 발생 당일 주가가 각각 2.2%, 2.4% 하락하고 환율은 각각 달러당 4.1원 하락하거나 14.8원 상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충격이 컸으나 정상을 되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2010년 천안암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경우 당일뿐 아니라 일주일이 지난 후까지 주가 하락과 환율 상승이 지속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남유럽 재정위기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결과다. 북한 관련 사건이 벌어졌을 때 외국인 투자자들도 특별히 대규모로 국내시장을 이탈하는 움직임은 없었으며, 이탈이 나타난 경우라도 제한적인 수준에 그쳤다. 신용평가회사들도 북한 관련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불확실성이 커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예외적으로 2002년 6월 백령해전이 발생한 이후 무디스가 2003년 2월에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negative)으로 바꾼 적이 있을 뿐이다.
실물경기에 대한 단기적 영향 뚜렷하지 않아
이처럼 국내 금융시장이 단기적인 반응에 그쳤던 것은 북한 관련 이벤트가 일회성에 그치고 중장기적으로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은 아니라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본 때문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금융시장의 반응을 볼 때, 외국인 투자자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실물 부문에 대한 영향이 우려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신용평가사들의 즉각적인 반응도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에 위협을 줄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나 북한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나 전쟁 발발 가능성 등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사건이 당장 발생할 위험이 커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과거 한반도리스크 확대가 국내 실물경제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지 않다. 긴장상태가 장기간 지속되기보다는 일시적인 충격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북한리스크가 가장 고조되었던 2006년의 북한 핵실험 발표, 그리고 2010년 연평도 포격 시기의 실물경제 지표들을 살펴보면 산업생산이나 소비 등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소비자 기대지수도 추세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설비투자 지표는 두 사건 발생 시기 중 둔화되었다가 다음달에 반등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설비투자 둔화가 북한리스크 확대 때문이라고 단정할 만큼 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소비에 비해 기업투자가 북한리스크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유인이 큰 것으로 보인다. 소비는 상황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 미래 불확실성에 크게 반응하지 않지만 기업투자는 리스크의 전개방향에 따라 장기적인 수익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투자결정을 미루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김정일 사망이라는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단기 충격을 받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향후 중장기적으로도 금융시장 또는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될 것으로 속단하기는 이르다. 김정은 체제의 안착 여부를 비롯해 북한체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의 전개방향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들의 움직임,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대한 영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긴장 심화 시 코리아 디스카운트 확대
김정은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안착될 경우((가), 또는 (나) 시나리오 경우)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다. (가) 시나리오의 경우 남북한 간에 경제협력이 확대될 수도 있으며 한국 경제에서 북한리스크가 크게 줄어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 시나리오로 흐를 경우, 김정은 체제가 체제안정 목적이건 대외협상 목적이건 대외적으로 강성기조를 띨 가능성이 높아 이제까지처럼 핵관련 문제를 새롭게 야기하거나 주기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도 간헐적으로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이나 채권투자 규모가 커진 상황이어서 외국인 투자자 동향에 따라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글로벌 위기 이후 단기외채는 크게 줄어들고 외환보유액은 크게 늘어나 있는 등 대외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중앙은행과 맺은 외환스와프 라인을 통해 추가적인 외환유동성 확보가 가능해진 점도 외화유동성 부족 문제가 불거질 우려를 낮추는 요인이다.
문제는 김정은 체제가 안착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다. (다)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한반도 내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이 경우 국내 금융시장에서 위험회피 현상이 보다 강해질 것이다. 특히 외국인 이탈이 늘어나고 그동안 하락 추세를 유지해 오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다시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추가적으로 크게 높아진 것으로 인식되면서 국가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바뀌거나 등급 하락이 현실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어 한반도 내 긴장관계가 심화되고 장기화되면 실물경기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부분은 역시 국내 투자다. 투자는 수익을 발생시키는 시기가 장기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중기적 전망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로 금리가 상승하고 신용경색 등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데에도 어려움이 커질 것이다. 특히 외국인 직접투자는 큰 폭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유사한 사례로 중국과 긴장관계가 확대되었던 대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96년 중국의 대만해역 미사일 발사훈련 이후 대만에서는 민간기업의 투자계획이 취소되는 등 전반적인 투자심리가 위축되면서 투자지표가 수 분기 동안 제로성장에 머무른 바 있다.
긴장관계가 고조되고 장기화되면 소비에도 부정적 영향이 커지게 될 것이다. 소비자의 심리가 악화되면서 필수적이지 않은 소비를 자제하는 경향이 나타날 전망이다. 9·11 테러 발생 시기 미국의 소매판매 지표를 보면 의류, 자동차 등 내구재 및 준(準)내구재의 소비가 크게 위축되고 외식 등 여가 관련 서비스 소비도 둔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반면 음식료나 생필품 등 필수적인 재화의 수요는 영향이 없거나 오히려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생필품을 축적해놓으려는 경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는 가계부채 비중이 높기 때문에 금리인상이나 은행들의 대출억제 태도로 인해 채무가계의 부담이 크게 높아지고 이것이 소비를 더욱 억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산효과에 따른 소비위축 현상도 나타날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에 따른 원화가치 하락은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다. 다만 환율상승이 한반도 리스크 확대에 따른 것인 만큼 무역이나 해외수주 관련 계약체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중동사태, 일본대지진의 충격 등으로 거래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수출이 늘어나는 효과도 제한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세 급변 시 심각한 경제혼란 우려
우리 경제와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것은 (라) 시나리오다.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갑작스럽게 북한이 붕괴되면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급진적인 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국지전 또는 전면전 상황이 야기되는 경우에는 우리 경제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발발 시 외국 자본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면서 금융시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자산가격이 급락하면서 1997년 외환위기 이상의 충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투자가 취소되고 무역거래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급격한 북한체제 붕괴 시에도 상당기간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국가신뢰도 하락과 자본유출이 불가피할 것이다. 북한이 조기 붕괴되어 북한 경제를 유지하는 부담이 우리 경제에 떠넘겨질 경우 일차적으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갑작스럽게 폭증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통화증발에 따른 인플레 야기, 외국인 자금의 대거 이탈, 주가 폭락, 금리 및 환율 급등이 예상된다. 국가신용등급도 몇 단계 하락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급격한 흡수통일 시 통일비용이 2조 달러, 즉 우리 GDP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급진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체력이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며 이에 따라 북한 경제가 안정화될 때까지 국내 실물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로선 김정일 사후 금융시장이 빠르게 안정세를 되찾는 등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단기적으로는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수년간 북한체제의 전개 방향과 관련해 상당한 불확실성이 지배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제까지 단기 충격에 그치고 말았던 북한 관련 이벤트와는 달리, 향후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지속적이고 구조적으로 한국 경제를 뒤흔들 수준으로 심각해질 여지가 있다.
현재 유럽 재정위기를 비롯해 세계 경제가 대단히 취약해진 상황이어서 북한 리스크까지 고조되고 현실화될 경우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증폭될 우려가 있다. 과거에 비해 외환보유액이 크게 늘어나고 외환스와프라인도 구축해놓았다는 점이 외화유동성 우려를 완화시키는 요인이다. 앞으로도 북한리스크가 고조되거나 장기화될 경우를 대비해 외환, 재정 면에서 대외충격 흡수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정부, 금융기관, 기업 차원의 비상 대응 플랜을 미리 준비함으로써 허둥지둥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유럽 재정위기 등 대외불안 요인은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아니지만, 북한 관련 문제는 다르다. 우리가 이해당사자의 하나로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향후 전개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한반도의 긴장 고조 방지와 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