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칼럼 필화사건
- “흑백논리 팽배한 세상에서 지식인의 원색은 회색”
- 국민의례 안 하는 국가기관
- 북한 인권문제는 인권위 소관사항인가
2006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안경환 당시 인권위원장(앞줄 왼쪽)이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출범한 인권위는 정권교체와 함께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다.
참여연대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에도 내가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을 비판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간사 회의에서 비공식 안건으로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 문화면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원칙론자들은 문화 칼럼조차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공부한 한 진지한 인문학도는 나를 붙들고 성을 내다 못해 울먹거리며 호소하기도 했다. 내 선의와는 무관하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곡필(曲筆)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주제와 내용이 문제지 매체 그 자체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운동가보다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내게는 적개심보다 균형감이 더욱 중요한 미덕이었다. 특히 자신과 성향이 다른 독자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지식인의 역할 아니겠는가. 흑백논리가 팽배한 세상에서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라는 의식의 중립지대를 구축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지식인의 원색은 회색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조선일보만이 아니었다. 초임교수 시절부터 나는 거의 모든 일간지에 시론 내지는 칼럼을 썼다. 그 신문의 기조에 따라 내 생각이나 글의 논조가 바뀐 예는 없었다. 내 글을 읽고 동조하거나 반박하는 독자의 반응은 있었지만 매체가 미리 내 글의 내용을 문제 삼은 일은 거의 없었다. 한때 한겨레신문에도 고정필자로 칼럼을 썼다. 그중 한 칼럼이 시빗거리가 됐다. 2005년 5월의 일이다. 고려대 학생회 간부들에 대해 학교가 중징계 방침을 세웠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에서는 학교의 처사를 비난하는 성명을 초안해 회람했다. 나는 이렇게 썼다.
“… 고려대학교가 진통을 겪고 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를 수여한 학교 당국의 결정을 학생회가 물리력으로 항의, 저지한 것이다. 일반 학생들은 총학의 탄핵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실로 당혹스러운 일은 전국의 민교협 교수들이 학생 징계에 반대하는 성명을 초안하여 교수들의 동참을 촉구하며 나선 것이다. 초안이기는 하지만 성명서는 심히 균형을 잃었다. 물리력을 행사한 학생들에 대한 꾸짖음은 전혀 없고 학교 당국에 대한 비난만 담겨 있다. … 선생의 역할이 무엇인가? 학생의 폭력을 품어 감싸기에 앞서 강한 질책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연전에 오도된 ‘민주학생 감싸기’의 예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학생운동에 주력하느라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과목에 A 학점을 내준 선생의 큰 ‘정의감’을 찬양하는 학생에게서 심각한 대학의 위기를 느꼈다. 민교협의 성명서가 제기한 내용에도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이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대학과 자본의 유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 모두가 권장하는 ‘산학협동’과 어떻게 다를까? … 삼성의 기업 경영방식에 철학적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없이도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한 후에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경영방식도 있을 것이다. 이 회장의 재산 상속 과정이나 삼성그룹의 노조 정책에 불법이 있었다면 합당한 응징을 법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 (한겨레 2005년 5월 24일 칼럼 ‘학생운동과 선생의 역할’ 중에서)
균형감각의 소유자 vs 기회주의자
당시 나는 연구년을 얻어 외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국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현장감이 떨어지니 칼럼을 중단하자고 했으나 신문사 측에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계속 써달라고 해서 붓을 놓지 않고 있었다. 국내 소식은 전적으로 인터넷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고를 보내며 행여나 신문의 편집방향과 어긋날 경우에는 싣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한겨레 편집진은 논의 끝에 내 글을 실었다. 난리가 따랐다고 한다. 신문사 내부에서는 물론 한겨레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많은 독자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민교협과 한겨레는 협의 끝에 나를 반박하는 글을 게재했다. 나도 민교협 회원이었기에, 제명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평소 나와 면식이 전혀 없던 지방의 한 젊은 교수가 집필했다. 그는 나에게 자본의 앞잡이인 ‘자용교수’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다. 이 소동 이후로도 한 차례 더 칼럼을 쓰고 내 스스로 기고를 중단하는 것으로 해 마감했다. 중단 사유를 알리는 기사가 나갔다. 방학 중에 오지여행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지만 분명히 내가 크게 잘못한 점이 있다. 민교협 성명은 회람한 초안대로 발표됐지만 초안은 어디까지나 초안에 불과하다. 회원 사이에 주고받는 내부 문건인 것이다. 초안에 이견이 있으면 내부에서 토의해야 할 것이지 그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바깥으로 가져간 것이 나의 잘못이다. 내가 단순히 회비만 내는 수동적인 회원이라거나 외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나의 전력을 아는지 언론사에 따라 나의 성향을 ‘온건한 중도’ 또는 ‘균형감각의 소유자’ 등으로 호의적으로 평하거나, 이슈에 따라 진보와 보수 사이를 줄타기하는 기회주의자로 폄하하기도 했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언론사마다 인권위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제각기 달랐다. 통과의례로 던지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내부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파고드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매체가 두 가지 공통된 질문을 던졌다. 첫째, 내부갈등을 어떻게 조정해 기관을 이끌고 갈 것인가. 둘째,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첫 번째 질문은 전직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사퇴한 이유가 내부갈등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언론은 갈등을 부추기거나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만 기사가 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외교적인 모범 답안이 준비돼 있었다. 즉 전임 위원장이 사임한 이유는 오로지 건강과 일신상의 문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인권위에 들어와서 보니 내부갈등은 심히 과장된 것이었다. 인적구성의 다원화가 법적 요구사항인 만큼 인권위에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의 있는 토론을 통해 공동의 지혜를 찾겠다.
2005년 고려대 학생들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명예박사 학위 수여 반대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내게 노골적으로 기대를 거는 언론도 있었다. 내가 취임한 직후 북한 인권에 관한 자료집이 발간됐다. 한 일간지는 이를 지목해 새 위원장의 취임과 동시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보고서는 인권위가 적어도 1년 전부터 준비해왔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취임한 지 며칠 만에 어떻게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일반에 잘못 알려진 바와는 달리 2003년 이래 인권위는 북한 인권문제에 나름대로 관심을 쏟아 국내외 각종 세미나를 개최했고 자료집과 연구보고서를 간행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 정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유로운 인권위
“도대체 이렇게 군기 빠진 국가기관이 있는 줄 몰랐다.”
다른 정부기관에서 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한 공무원이 인권위를 보고 한 말이다. 2006년 11월 어느 날 나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특이한 기관이다. 위계질서는 취약하다. 그게 도리어 기관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의 대가는 고립이다. 최대한으로 어울려야 한다.”
내가 보기에도 인권위의 분위기는 다른 국가기관과 확연하게 달랐다. 옷차림과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과장급 이상은 대체로 양복에 넥타이를 맨, 이른바 정장차림이었지만 나머지는 거의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때로 다소 지나치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었다. 의상이 화려하게 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칙칙하게 초라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검소와 질박이 도를 넘었다. 과장급 이하 직원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선생님’으로 불렀다. 상급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국가기관이나 직장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처럼 타이틀이 없는 일반직원을 ‘아무개 씨’로 부르지 않는다. 위원회 설립 초기에 심도 있는 논의를 한 후 선택한 호칭이라고 했다. 직급의 고하에 상관없이 개개인을 존중한다는 취지였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참신하게 느꼈다. 때로 이런 기준을 따르지 않는 ‘권위적인’ 상사를 비판하는 글이 내부통신망에 실리기도 했다. 나도 그 부류에 속했을 것이다.
인트라넷은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됐다. 나의 재임 중에도 위원회 업무나 고위직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 가끔 올라왔다. 때로는 사실과 상식에 어긋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따금 생각을 달리하는 직원끼리 주고받는 언어에 저속한 표현도 있었다. 그러나 일절 문제 삼지 않았다. 이내 자정(自淨)을 통해 평온을 회복했다. 위원회 활동 초기에는 날선 비판을 제기한 기고자에게 분노한 위원장이 호통을 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신원을 추적하는 조치는 따르지 않았다. 기관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고자의 신원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전산 담당자는 글쓴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트라넷은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이다. 그 자율의 공간에 검열이 따르는 순간 공동체의 민주적 자율성은 매장된다. 절대적인 비밀이 보장돼야 한다. 나는 이를 전산담당자의 업무수칙 제 1호로 강조했다. 재임 중에 감시를 통해 글 쓴 사람의 신원을 추적한 일이 없고, 전산담당자의 입을 통해 이름이 누설됐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온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위원장 집무실에 직원들이 초임 시절 작성한 신상기록부를 비치해두고 수시로 참조했다. 무엇보다 이름과 얼굴을 짝지어 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서식의 세부항목을 채우지 않은 기록부가 적지 않았다. 가족관계, 학력 등의 정보를 기재하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불필요한 개인정보 수집을 자제함으로써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라며 타 기관에 대해서 권고하던 바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느 기관보다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여성부보다도 높다고 했다. 상임위원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여성이었고, 이런 구성은 재임 기간 내내 유지됐다. 인권위법 제5조 4항에 따르면 전체 인권위원 11명 중 최소한 4명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양성평등도를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가 여성이 상위직을 점유하는 비율이다. 인권위는 국제적 기준에 따라 설립된 것인 만큼 여성 할당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인권위의 설립준거 기준인 ‘파리원칙’은 독립성(independency)과 함께 구성의 다원성(plurality)을 강조한다. 인종이나 종교 간의 갈등이 비교적 적은 우리나라에서 다원성의 상징은 성비 균형이다. (장애차별금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장애인도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인권위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비율도 월등하게 높았다. 혼인을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여기는 것은 시대적 추세이지만, 인권위 여성에게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한 것 같았다. 충분히 이유 있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의 인권감수성이 높은 것은 상식이다. 인권위는 여타 직장에 비해 대체로 여성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라고 한다. 응당 그래야만 할 것이다. 아직 여성 수장(首長)이 탄생하지는 않았지만 상임위원의 경우 성비에 대등한 균형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중견간부층에는 현저하게 모자란다. 이 직급과 연령층 여성 중에 유능한 인재가 많다. 그러나 직업공무원 출신은 드물다. 그래서 이들은 별정직, 계약직 등 신분상의 제약이 컸다. 기회 닿는 대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는데 손도 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사람의 일자리마저 잃게 했으니, 두고두고 안타까운 자괴감이 든다.
‘인권위’라는 이름의 섬
2005년 북한인권단체 회원들이 인권위 앞에서 북한 인권실태 고발과 정부 무대응 비판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다.
인권위는 비교적 잘 갖춰진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짜임새가 있다. 이용하는 일반시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소장 자료는 ‘인권’ 일변도였다. 구독하는 시사 잡지도 이른바 진보 성향 일색이었다. 영어자료는 아예 없었다. 위원장실에서 ‘신동아’와 ‘월간조선’‘타임’‘뉴스위크’그리고 영자신문을 구독하도록 했다. 배달 즉시 내가 일별한 후에 자료실로 넘겼다.
차츰 업무를 파악해가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실을 발견했다. 우선 사무실 어디에서도 태극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위원장 집무실은 물론 접객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누군가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창고 안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직원 조회 때도, 공식행사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을 하지 않았다. 국가주의에 대한 반감의 표출로, 전형적인 시민단체적인 성향의 표현이다. 한 시민운동가와 함께 KTV 대담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는 ‘국가폭력’이라는 용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국가와 정부 그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기기에 그 용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일 뿐이라고. 인권위에서 국기를 상징물로 존중하지 않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국가기관으로서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권위의 독립성과는 무관한 일이다. 동시에 흠이 잡힐 일이기도 했다.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해가 바뀌고 한참 지난 후에 새로 취임한 김칠준 사무총장에게 지시했다. 다음 직원조회 때는 시작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도록 하라고. 간부회의에서 논의해보겠다고 답했다. 나는 이런 것은 논의에 부칠 사항이 아니라 기관장이 결정해 실시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국기를 앞에 둔 국민의례만 시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낭송이나 애국가 제창은 생략하도록 했다. 외국에서는 강제 충성안보 선서의 합헌성 시비가 벌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정도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됐다. 일종의 타협이기도 했다. 그 후로 조회에 불참하는 직원이 더러 있었다. 속으로 양심의 자유를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체하고 넘겨주었다. 접견실에는 유엔기와 태극기를 함께 비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외국인의 내방을 받을 때 국기가 없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었다. 유엔기를 비치한 것은 국제화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인권위원장은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식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4대 국경일만 필수로 하고 나머지는 선택으로 했다. 나는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스럽게 다른 정부의 기관장과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 인권위원장은 정부에서 소외되고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가신 존재인 인권위인데 사적 인연이라도 맺어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독립의 대가는 고립이다. 인권위가 기관으로서 방어하는 일만 한다면 모르되 뭔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을 추진하려면 도움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은 모든 기관이 입을 모아 제동을 걸고 나서지 않는가. 어쨌든 나는 인권위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부 행사는 물론 경제계나 외국공관의 행사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그러나 실제로 효용은 별로 없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옳은 자세였다고 믿었다. 내가 이렇듯 바깥일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조직 내부의 안정을 확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안정에는 김칠준 사무총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북한 인권 시한폭탄
인권위 출범 당시에는 북한 인권문제를 인권위의 업무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제적인 기준과 관행에도 맞지 않았다. 유엔 결의로 채택한 국가인권기구(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e, NHRI)의 설립권고안은 이 기구가 어디까지나 자국 내의 인권문제를 다룰 것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에 대해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을 타국이 절대로 관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과 같은 국제인권법의 원리가 개발돼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전형적인 의미의 국가나 국제기구 차원의 행위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거나 인권이사회의 결의로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선임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물론 비정부기구는 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타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감시, 비판, 개선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4조는 “이 법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영역 안에 있는 외국인에 대하여 적용한다”라고 규정해 인권위의 관할권을 한정하고 있다. 국제법적으로 볼 때 북한은 엄연히 독립된 주권과 영토를 보유한 국가다. 즉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북한은 엄연한 외국이고 북한 땅은 외국 영토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이미 두 나라 정부 사이에 이 점에 대해 합의 내지는 양해가 존재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은 여전히 원래의 영토조항을 고수한다. 제3조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을 내세워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고 따라서 북한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도 당연히 인귄위의 업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토 조항은 원천적 정당성을 논외로 하면 평상시에는 실효성이 전혀 없다. 다만 장래 북한정권이 붕괴되고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별도의 헌법 개정을 하지 않아도 이 조항을 바탕으로 북한지역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있다.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권시절의 7·4 남북공동성명 이래 남북한 사이에 합의한 일련의 문서와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들은 헌법 문언의 효력을 사실상 정지시켰다. 한편 1990년 제정 이래 13차례 개정을 거듭한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은 “남한과 북한 간의 거래는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닌 민족 내부의 거래로 본다”고 규정한다. 또한 ‘북한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북한 주민이 북한지역을 벗어나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면 국민에 준하는 보호를 제공할 수 있고, 대한민국 영토 내에 들어오면 용이하게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규범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대한민국의 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외국도 아닌, 특수한 존재로 파악할 수 있다.
북한주민이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인권침해에 대해 인권위가 관할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인권위를 줄기차게 몰아치면서 내세우는 법리다. 헌법 제3조에 따라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인 이상, 설령 북한주민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더라도 인권위법 4조의 적용을 받는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즉시 난관에 봉착한다. 인권위법상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가 국가기관인 경우에만 구제가 가능하다. 북한주민이 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으려면 북한 정부를 대한민국 국가기관으로 인정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어쨌든 북한 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문제를 인권위가 직접, 그리고 실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다분히 정치적인 제스처에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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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가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그해 4월 임시국회의 법사위가 필요성을 제기했고 신속한 예산조치가 따랐다. 그러나 법적조치는 따르지 않았다. 여소야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주도했고 특히 법사위는 법률가, 그중에서도 공안검사 출신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인권위에 북한 인권을 다루라고 주문한 것은 한나라당인 셈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때 인권위법에 명확한 법적근거를 마련해주었더라면 인권위도 고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북한 인권의 개선이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김대중 정부 이래 추진해온 햇볕정책을 견제하는 정치적인 효과를 노렸을지 모른다. 이렇듯 북한 인권문제는 인권 그 자체보다는 정치적 소재로 악용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설립된 인권위가 그 정치적인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됐다. 언론도 햇볕정책에 대한 견해에 따라 극단적으로 양분됐다. 그때 시한폭탄은 설치됐고 2006년 12월 11일, 인권위 입장 발표로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내 앞에도 길고 힘든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