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상층부 지시에 의원은 분자…독립된 역할 못했다”

4선 도전 접고 떠나는 정장선 의원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입력2012-01-19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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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와대 지시와 당론 정해지면 대화·타협 실종
    • “내가 여기 왜 앉아 있나” 자괴감에 인터뷰 중 눈물
    • 조직 동원한 서울시장 후보 패배…‘박원순 충격’에 통합 재촉
    • 출마할 때마다 당명 다 달라…4년마다 당명 개정 부끄러워
    • ‘전대 돈 봉투’ 경험 묻는 질문에 “이전에 간간이 있었고…”
    • 박근혜는 성역 없애고, 안철수는 혹독한 검증 받아야
    “상층부 지시에 의원은 분자…독립된 역할 못했다”
    남자로서 최고 직업은 국회의원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 ‘배지 맛’을 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종종 국회의원 배지를 마약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에서 상대 의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회의장 문을 해머로 부수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배지를 향한 투쟁이다. 공천 파동과 그 후유증이 큰 것도 배지의 묘한 마력 때문이다.

    가산을 탕진해도, 온갖 수모를 겪어도 배지를 달려는 판인데, 3선(選)의 민주통합당 정장선(53·경기 평택을) 의원은 스스로 배지를 떼겠다고 했다. 선거법에 ‘걸려’ 피선거권이 박탈된 것도 아니고, 지역구에서 사실상 그의 공천을 위협할 인물도 없다. 요즘 화두가 된 ‘쇄신’ 기준에도 부합한다. 난장판 속에서도 18대 국회 상반기 지식경제위원장을 맡아 지경위를 고성과 파행, 정쟁이 없는 ‘3무(無) 우수 상임위’로 이끌었고, 대학생이 뽑은 거짓말 안하는 정치인 베스트 5, 시민단체 선정 6년 연속 우수 국정감사 의원에 선정되는 등 그의 의정생활은 모범적이었다. 중도 성향의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이미지에 나이도 젊다. 그만큼 그의 불출마 선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2012년 1월 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 들어서자 정 의원은 기자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건넸다.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 이후 기사가 너무 많이 나와 불편했습니다. 신문 사설에서도 거론돼 다른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 인터뷰를 사양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불발될 뻔했다. 기자는 12월 26, 27일 정 의원과 그의 보좌관에게 두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의 보좌관은 “죄송하다”는 말로 인터뷰를 거절한 터였다. 딱히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정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 크게 보도되자, 다른 의원들의 시선에 무척 곤혹스러워하는 듯했다. 기자는 속으로 ‘너만 독야청청이냐’는, 의원들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정 의원은 기자에게 문자메시지(SMS)를 보내왔다. 인간적인 세심함이 묻어나는 내용이었다.



    “언론에 너무 나가는 느낌이어서 부담돼서 그랬는데, 미안함이 있습니다. 다시 인터뷰하실 수 있으면 하겠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이뤄진 인터뷰는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됐다.

    “해돋이 보러 아내와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동안 연말연초가 되면 송구영신 예배하고 지역구 내 해돋이 행사에 참석했어요. 제주도 가면서도 ‘가도 되나’ 싶더라고요. 오랫동안 참 정형화된 생활에 빠져 있었던 거죠. 아내도 그동안 긴장된 생활이 몸에 배었던지 저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고요. 아내에게 너무 늦게 (이런 행복을) 찾아준 건 아닌가 싶어요.”

    ▼ 불출마 선언을 하니 행복이 보였네요.

    “그런가요? 아시다시피 불출마 이유는 이미 국회 기자회견에서 밝혔고요.”

    그는 2011년 12월 12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다음과 같이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2010년 말 ‘4대강 사업 예산’을 두고 국회가 난장판이 됐을 때, 제도적 보완장치를 만드는 노력을 해보고 그래도 이런 일(국회 폭력)이 생기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11년) 11월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또다시 단독 처리되고 본회의장에서 최루탄까지 터진 것을 보면서 불출마를 심각히 고민해왔다.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작금의 상황에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이후 장세환 민주통합당 의원, 현기환 한나라당 의원 등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도 잇따랐다.

    그는 기자회견 당시 잠시 울먹였다. 기자와의 2시간여의 인터뷰 도중에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두 번 눈시울을 붉혔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여린 감성으로 17년간 선출직만 5번 당선된 그가 참 신기하다고 기자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국회는 늘 파행이 있었어요. 많은 의원이 그런 생각할 겁니다. 흔히 말해 국회가 국민의 갈등이나 욕구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나아진다고 생각하면서도 국민 눈에는 변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국회가 효율성만 따질 순 없지만 너무 비효율적으로 운영됐어요. 국회 파행 속에 법안 수백 건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나…. ‘내가 여기 왜 앉아 있나’하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런 게 반복되니까, 한번 떠나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재래시장 할머니 삶이 선수(選數) 쌓는 것보다 가치”

    ▼ 불출마 이유치고는….

    “비리나 여자문제가 있다는 루머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불출마 이유를 상세히 밝혔죠.”

    ▼ 아닌가요?

    “전혀요. 재작년 겨울인가요, 영하 15도는 됐을 거예요. 평택의 전통시장에 갔는데 손님도 거의 없는 시장에 70세 넘은 할머니들이 하루 종일 앉아 채소를 파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어요. 하루 종일 팔아도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보다 벌이가 시원찮을 분들인데…. 요즘은 이런 분이 더 느는 거 같아요. 빈부격차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까, 이 할머니들의 인생을 책으로 내는 게 선수(選數) 쌓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러나서 돌아보고,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자는 거죠. 꼭 정치만이 국민을 위하는 건 아니잖아요.”

    ▼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책임을 지셨는데요, 신뢰를 받지 못한 이유는 뭐라고 진단합니까?

    “총체적인 정치 문제입니다. 대통령과 여당은 자기 일을 밀어붙이고, 야당은 막을 수밖에 없다보니 대화와 타협이 실종되고, 이런 큰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보자’는 목소리는 묻혀버려요. 국회의원이 헌법기관이고 독자적인 판단과 의견을 중시한다지만, 이런 거대한 한국 정치의 큰 흐름에서 국회의원은 분자 역할밖에 못해요. 존재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의원들은 열심히 하지만 이런 큰 흐름 앞에서 의원 개개인은 기능을 못해요. 안타깝죠.”

    분자(分子)는 ‘불온분자’처럼 흔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어떤 특성을 가진 인간 개체를 일컫는다. 화학 용어로는 물질에서 화학적 형태와 성질을 잃지 않고 분리될 수 있는 최소의 입자다. 원자의 결합체 중 독립 입자로 작용하는 단위체이기도 하다.

    ▼ ‘분자론’이라. 당론이 문제인가요?

    “상층부는 (상대 당과) 대화 못하게 하고, 조직 논리는 강해지고…. 청와대 지시나 당론으로 정해지면 거기에 얽매여 의원은 개개의 독립된 역할보다 분자 역할만 하는 거죠. 주체적인 역할을 못해요. 그렇다고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원들이 공부도 많이 하고, 자리도 많이 찾고, 뛰어다니기도 해요. 의원들 수준은 높아지지만 큰 흐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학법이나 4대강 법안이 올라오면 여야 대치로 사학법은 물론이고 교육 관련법이 심의조차 되지 않아요.”

    ▼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지연) 제도 도입을 강조한 이유를 알겠군요.

    “그럼요. 국회 선진화를 이루려면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해야죠. 재적의원 5분의 3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를 종료하면 됩니다. 한나라당 남경필, 정태근 의원과 계속 의견을 나눴어요. 2월 국회에서 처리됐으면 해요. 그러지 않으면 또 국회 폭력이나 졸속심의가 빈번할 겁니다. 19대 국회는 지금보다 갈등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아요.”

    폭력 국회 막으려 필리버스터 도입

    ▼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괴감, 그래서 나온 답이 ‘도피’인가요?

    “도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3선을 한 나부터 해야죠.”

    ▼ 불출마 선언에 대해 사전에 상의를 했나요?

    “전혀. 의논을 하거나 불출마 이후를 생각했다면 결정(불출마 선언)이 어려웠을 겁니다. ‘(국회의원) 할 거냐 말 거냐’ 이것만 생각했어요.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생각도 안 했어요.”

    ▼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글쎄요. 백수가 과로사 한다더니 바쁘기만 하고…생각을 안 해봤는데 여러 경험도 해보고 싶고요, 일단은 쉬고 싶어요.”

    그나마 2006년에 3억4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사면서 진 빚(1억6000만 원)을 다 갚아 그나마 마음은 홀가분하다며 웃어 보였다. 지난해 둘째 아들이 등록금이 비교적 싼 한국기술교육대에 합격한 것도 다행이라고 했다. 지난해 3월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정 의원 재산은 3억9800만 원이었다.

    “생계를 고민해야 하지만 걱정은 없어요. 의원을 하면서도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해 생활이 불편할 건 없어요. 의원 시절에도 공항 VIP룸은 거의 이용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 집안이 어려워 허리띠 조여 매는 건 자신 있어요(웃음). 두 아들과 집사람도 잘했다고 하고….”

    3남1녀 중 둘째인 정 의원은 군 부사관이었던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운전을 했지만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은 서울서 공부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 중동고에 입학했지만, 당시 이산(離散)의 아픔이 커 지금도 ‘기러기 아빠’는 싫다고 했다.

    ▼ ‘가장’의 불출마에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해병대에 있는 큰아들과 집사람은 잘했다고 해요. 그동안 교사인 집사람이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고생 많았는데 ‘홀가분하다’더군요. 둘째 아들은 ‘노력했는데 잘 안 돼 정치를 그만두려 한다’고 했더니, ‘그럼 정치를 계속해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하기에 순간 잠시 흔들렸어요.”

    정 의원 역시 학부모였다. 자녀 얘기를 해보라고 했더니 교육문제부터 풀어놓았다.

    “공부 좀 하는 애들은 기숙사 생활을 시키는데 아이들이 적응을 잘 못했어요. 우리나라 교육은 경쟁과 성적을 너무 강요해요. 졸업 후에도 무한경쟁 속에 살잖아요. 큰아들이 부산대 러시아학과에 다녔는데 제가 추천했어요. 지경위원장 하면서 러시아를 둘러보니 러시아는 자원과 농업 부문에서 굉장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더군요. 지방에서 생활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지방의 아픔도 체험해보라고 했어요. 둘째 아들은 자동차 튜닝 마니아여서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한국기술교육대에 입학했고요. 자기가 좋아하고 또 블루오션이잖아요. 학부모들을 만나면 자녀를 중동이나 인도네시아, 브라질 같은 블루오션의 전문가로 키우라고 해요. 무조건 서울로 몰리는 것도, 미국과 중국, 유럽에 관심을 갖는 시대는 아닌 거 같아요.”

    이쯤해서 기자는 그동안 그의 정치 역정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대통령비서실 정무과에서 일했고, 1995년 제4대 경기도의회 의원에 선출된 뒤 한 차례 연임하고,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내리 3선을 했다.

    ▼ 대통령비서실에 근무하기 전 민주정의당 공채로 당료 생활을 했죠?

    “그건 별 의미가 없어요. 대략 2년 했나? 그때 이한열 씨 사건도 있었고….”

    그는 더 이상 당료 생활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5년 도의원 생활에 빚 6000만 원

    ▼ 언제부터 출마를 생각했나요?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과장을 하면서 당시 지방자치법을 만들었어요. 미국과 일본, 유럽 모델을 연구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도쿄(東京)에서 지방으로 내려가자는 운동’이 활발했어요. 그걸 보면서 지방자치에 대해 눈을 떴죠. 평택시장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1995년 5월 평택군, 평택시, 송탄시가 합쳐져 도농복합형 통합시가 되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무소속으로 도의원에 출마했죠. 1998년에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소속으로 출마했어요. 무소속의 한계도 느꼈고, DJP 공동정부여서 선택했어요. 5년간 도의원을 하니 빚만 6000만 원 생겼어요. 보좌진도 없으니 혼자 조례 만든답시고 밤새도록 평택을 누비고 다녔죠. 지역 환경신문도 만들고 토론회도 개최하고, 지금 생각해봐도 그땐 참 열심히 했어요(웃음).”

    ▼ 2000년 4월에는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했죠?

    “당시 민주당 이인제 선거대책위원장이 간곡히 부탁했어요. 그전까지는 시장만 생각하고 있어 총선거가 언제 있는지도 몰랐어요. 아마 한나라당과 자민련 후보는 있었는데, 민주당 후보가 약하니까 저를 후보로 영입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돈이 없었어요. 생활비 한번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했는데 참 미안하더라고요. 마침 카드사에서 SMS가 왔는데, 신용으로 1000만 원 대출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어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1000만 원을 대출해 뛰어들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 3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나요?

    “많죠. 주한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평택항 건설, 경제자유구역 같은 굵직한 일이 많았어요. 평택의 격변기에 국회의원을 해 솔직히 힘들었고요. LH공사가 경기침체와 재무구조 악화를 이유로 경제자유구역 사업 시행을 포기한 것과, 쌍용차 무급휴직자 복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맘에 걸려요. 다음 의원이 잘 풀어가겠죠.”

    ▼ 지난해 5월 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야권 통합에 주력했는데요, 그 결과가 민주통합당입니다. 만족합니까?

    “알에서 깨어나 더 큰 세상으로 간다, 전국정당으로 간다는 데 이의는 없어요. 부끄럽지만, 나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때마다 당명이 달랐어요. 이런 현상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당이 외형적으로 커졌지만 문제는 내면입니다. 이번에 만든 당이 안착이 돼갈지는 알 수 없어요. 정당 불신이 워낙 큰데…. 사실 통합은 ‘박원순 충격’이 컸어요.”

    ‘호남 물갈이’ 요식행위로 감동 못 줘

    ▼ 박원순 충격?

    “10·26 재보선에서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로 우리 당 후보(박영선 의원)를 지원하기 위해 선거인단을 조직적으로 총동원했어요. 저는 당 사무총장으로서 총력을 기울였죠. 그러나 현장개표 결과 박영선 9132표(51.08%), 박원순 8279표(46.31%)였죠. 별 차이가 없었어요. 그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시대는 변하는데 우리는 양당체제라는 현실에 안주해 있었던 거죠. 안철수 바람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전체 야권세력을 통합하고 내부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죠.”

    당시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 경선은 현장투표(40%), 사전여론조사(30%), TV토론 배심원 평가(30%) 결과를 합산해 결정했는데, 여론조사와 배심원 평가에서 민주당 박 후보가 뒤졌지만 민주당은 현장 투표로 역전을 노렸다. 당시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현장투표 선거인단 3만 명 가운데 1만5000명이 민주당 추천”이라며 “이 가운데 1만 명만 참여해도 승산이 있다”고 말했지만, 박원순 후보 지지자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자발적으로 투표장을 찾았다.

    ▼ 정당의 위기가 민주통합당을 만들었다는 얘기군요.

    “정당의 위기에 대해선 원론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여당은 밀어붙이고 야당은 막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대화가 안 돼요.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가야 하는데 지역에 안주하는, 지역 정당에 안주하고 소통도 안 되면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호남 물갈이’를 얘기하는데요, 물론 그 지역에서 비교적 쉽게 당선돼 변화가 필요하지만 요식행위 비슷하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바꿔야죠. 필요하다면 선거제도도 바꾸고 국회 기능을 강화하는, 이런 큰 틀에서 움직여야죠. 말 나온 김에, 감사원이 대통령 밑에 있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여야가 머리를 맞대 전체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국회는 대의기관으로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큰 틀에서 바뀌어야죠.”

    ▼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글쎄요. 정당생활을 하면서 의원총회에 출석하지 않고, 선거지원을 안하면 일반 의원은 당에서 잘립니다. 박 위원장은 2년 반가량 의총에 나오지 않고 선거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어요. 성역(聖域)이라는 얘기죠. 안 원장은 정치를 하려면 분명히 입장을 밝히고 검증도 받아야 합니다. 혹독한 검증을 받아야죠.”

    인터뷰 다음 날 정 의원은 한·몽골친선협회 회장 자격으로 몽골을 다녀왔다. 귀국 다음 날인 1월 10일 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인터뷰 당시보다 목소리는 한결 밝았다.

    ▼ 해외에 계신 동안 국내에서는 여야 모두 ‘전당대회 돈 봉투’ 문제로 시끄러웠는데요.

    “그렇더라고요. 터질 게 터졌다고 봐요. 여야를 막론하고 관례적으로 있어온 일이에요. 규모의 문제였지. 이번 기회에 관례처럼 돼 있던 것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 돈 봉투 폐해도 클 거 같은데요.

    “출마하는 사람들도 자유롭지 못하죠. 선거 결과도 왜곡되고, 당 대표가 돼도 발목 잡힐 수 있잖아요?”

    ▼ 돈 봉투를 목격했거나 받은 경험이 있나요?

    “이전에는 간간이 있었고…관례처럼 내려온 것이 정리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 출장 성과가 있었나요?

    “있었죠. 한민족의 시원이라는 러시아 바이칼호(湖)에도 다녀왔어요. 그 지역의 시인을 만났는데, 그 시인의 시가 가슴을 쳐요.”

    기자는 시를 읊어달라고 했다. 불출마를 선언한 그에게 딱 맞는 시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살지 마라/ 기다려라/ 저절로 얻어지는 삶을 살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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