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한미 FTA 앞장섰던 정동영의 변신…이념도 무상, 정치도 무상”

갑옷 벗은 검투사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입력2012-01-1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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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민주당의 FTA 반대 논리 깨려 했다
    • FTA 저지 범국본? 친미, 매판자본 얘기하는데 설명 되겠나
    • 내가 ‘이완용’? 이념 색깔 발언이겠지
    • 나는 경제논리 생각하는 사람, 자유와 평등 문제는 정치인 몫
    “한미 FTA 앞장섰던 정동영의 변신…이념도 무상, 정치도 무상”
    그날따라 유독 서울 도심 광화문 칼바람이 매서웠다. ‘귀가 잘려나갈 듯한 추위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칼바람과 귀가 잘려나갈 듯한 추위도, 잠시 뒤 만날 인터뷰이의 별명에 걸맞은 날씨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왼쪽으로 턱을 살짝 올리며 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매서웠다. 약간 고집스러워 보이는 각진 턱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면, 분명 ‘왜 째려보시나’하고 말했을 것이다. ‘강대국 독무대’라는 국제통상 협상장에 나서는 검투사 얼굴로는 제격이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김종훈(60)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011년 12월 30일 갑옷을 벗었다. 2007년 8월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4년 4개월 만이다. 재임 중 그는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FTA)과 인도·유럽연합(EU)·페루와의 FTA를 잇따라 발효시켰고, 한미 FTA 수석대표를 맡아 협상을 주도했다. 지난해 11월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에야 험난했던 콜로세움을 빠져나왔다. 37년 외무공무원 생활도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난 정권에서 유임한 유일한 장관급 공무원이다. ‘대통령보다 오래한 현직 최장수 고위 공직자’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동시에 ‘매국노’ ‘이완용’ ‘을사 5적’이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들었다. 건국 이래 그처럼 논란의 핵심에 선 외무공무원도 없었다.

    1월 5일 오전 서울 당주동 외교통상부 별관에서 만난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내일 아내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 통상 분야에서 참 오래 일하셨죠?

    “보자, 1993년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하면서 통상 분야에 뛰어들었으니 제법 했네요. 2000년 통상교섭본부 지역통상국 국장과 2006년 한미 FTA 협상 한국 측 수석대표, 이후 통상교섭본부장을 했잖아요? 문민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네차례 정권에서 통상 일을 했네요. 아이고, 참….”

    ‘15소년 표류기’에 심취한 골목대장

    ▼ 예전과 지금, 변화가 있나요?

    “그럼요. 국제통상 분야에서 우리나라 위상은 엄청나게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주로 관세, 통관 현장, 뭐 이런 게 통상문제가 됐는데 요즘은 제도를 규범화하는 논의가 대세입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국제 간 통상은 ‘트레이드 바이 룰(Trade by rule)’, 즉 ‘규범에 따른 통상을 하자’가 정착됐잖아요? 그동안 한국은 늘 남이 만들어놓은 룰을 적용받았는데, 최근 들어 우리가 ‘룰 메이킹’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20 일원이 된 것도 그래요. 우리도 국격(國格)에 맞게 행동해야죠.”

    어린 시절 김종훈의 별명은 ‘골목대장’이었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를 읽고, 분지인 고향 대구를 떠나 더 넓은 바다를 꿈꾼 골목대장. 친구들과 배를 타고 무인도로 가서 공화국을 만들 생각에 한때 해양대 입학을 꿈꿨다. ‘정식’ 선장은 아니지만 ‘통상의 바다’를 만들고 헤쳐나가는 걸 보면, 어쩌면 그는 꿈을 이룬 인물일지 모르겠다. 한쪽에선 ‘FTA 표류기’를 주장하지만. 슬슬 인터뷰 주제를 한미 FTA로 돌렸다.

    ▼ ‘김종훈’하면 ‘한미 FTA’가 떠오르는데요. 한미 FTA, 참 오래 걸렸죠?

    “제가 2007년 8월에 통상교섭본부장 임명장을 받았어요. 2006년 2월 한미 양국이 FTA 추진을 발표하고 나서는 한국측 협상 수석대표로 나섰죠. 제가 본부장 되기 전에 이미 FTA가 타결(2007년 4월) 됐는데, 그 뒤 절차가 이렇게 오래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 본부장 임명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언질은 없었나요?

    “한미 FTA 타결하고 청와대로 가서 설명을 드렸죠. 그 다음 날 협상 타결 발표를 했을 겁니다. 하여튼 수고했으니까, 뭐, 좀, 뭐….”

    ▼ 뭐, 좀, 뭐?

    “‘일(협상)도 뭐 나쁘지 않게 했다’ 이런 평가도 있었고…. 그해 7월 중순부터 ‘본부장을 하면 자네는 잘할 거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 외에는 특별히 저를 불러서 하신 말씀은 없어요.”

    그는 ‘한미 FTA 협상을 그나마 잘했다’고 본 김현종 전 본부장이 자신을 천거한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00년 전 ‘아차’ 잘못

    ▼ 2011년 11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 부수법안에 서명할 때 기분은 어땠나요?

    “특별한 감흥은 없고 ‘참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죠. 협상 타결할 때가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 진짜 어렵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구나’하는 생각…. 한-EU FTA가 국회 통과했을 때에도 광화문 김치찌개 집에서 저녁 먹고 일찍 집에 갔어요.”

    그는 FTA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어갔다.

    “국가든 개인이든 폐쇄적인 사고를 가지고는 자기 꿈도 이룰 수 없고, 남과 관계 설정도 어려워요. 우리도 고구려의 기상이나 신라방, 장보고, 고려시대 해상무역 같은 개방의 역사가 있잖아요? 20세기 초, 그러니까 100년 전에 ‘아차’ 잘못해서, 그 생각만 하면 억울하죠. 이 때문에 ‘개방 잘못하면 먹힌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젠 극복할 때가 됐다고 봐요.

    지난 50년간 우리 모습은 분명 성공 스토리잖아요? 그 성공을 진면목으로 삼고 연장선으로 가야죠.”

    ▼ 공부 많이 하셨네요. 역사까지….

    “개방에 대한 이런 역사는 현재 와서는 FTA와 연결돼요. 적극 활용해야죠. 보통 ‘단절’을 영어로 인설레이션(insulation)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반도(半島)’는 ‘페닌슐러(peninsula)’, 여기서 ‘펜(pen)’은 우리말로 ‘거의’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페닌슐러’가 (거의 단절된) 반도 아닙니까? ‘인설레이션’ 되려다가 한쪽이 연결됐잖아요? 지형이 ‘페닌슐러’라고 나라도 ‘인설레이션’ 되면 진짜 어렵죠(웃음).”

    ▼ FTA 협상 수석대표로 협상할 때는 부인과 ‘인설레이션’ 됐던데요. 여러 협상 일화도 남겼죠?(협상 당시 그는 갈아입을 옷을 전하러 온 부인을 만나지 않았다. 2008년 쇠고기 추가협상 때에는 수전 슈워브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서울광장의 촛불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협상이 잘못되면 한미공조를 깨뜨린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해 눈물을 흘리게 했다.)

    “당시는 정말 긴장의 연속이고,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지나고 나면 그냥 웃으면서 회고할 수 있는 일화들이죠. 많은 생각이 나는데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부적절한 거 같아요.”

    ▼ 왜요?

    “협상 상대도 아직 현직에 있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면 이런저런 이슈를 설명해야 하잖아요. ‘FTA 협상이 발효되면 3년 안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약속이 돼 있거든요.”

    고위 공무원을 그 정도 했으면 ‘외교성 코멘트’도 날릴 법한데, 그는 곤란한 답은 피해갔다. 2시간 인터뷰 내내 질문에 또박또박 답했다. 기자가 ‘솔직하고 담백하다’고 하자, 그는 초등학교 통지표 가정통신란에 항상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의 어린이’라고 선생님이 썼다고 맞받았다. 그는 대화 중 항상 ‘그죠?’하면서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면 다음 말을 이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연설명을 해 동의를 구했다. 협상 전문가로 몸에 밴 화법이려니 했다.

    ▼ 말할 수 없다? 그럼 협상 일화는 왜 언론에 나온 겁니까?

    “음….그러니까. 협상은 늘 그렇잖아요? 자기는 서너 개 있으면 되는데 ‘10개를 내놔라’하고 막 치고 들어가고.”

    ▼ 그렇죠.

    “그러다보면 상대편이 못 줄 거 알지만 막 내놓으라고 조르다가 ‘그러면 나는 이거 포기할 테니 그걸 달라’ 이런 식으로 성동격서(聲東擊西)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나온 거죠.”

    “우리는 검투사, 같이 살자”

    ▼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그런 과정에서….

    “(웃음) 뭐, 제가 어려우니 상대도 어렵죠. 서로 푸념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 심정은 서로 안다고, 그 과정에서 제가 ‘야, 우리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사노?’ ‘우리는 전생에 글래디에이터(gladiator·검투사) 아니었나’하고 말했죠. 그래서 (제가) 글래디에이터가 됐는데, 사실 그 이후 말이 더 중요해요.”

    ▼ 뭔가요?

    “‘너하고 나하고 한 명이 찌르고 한 명이 죽고 그러면 안 된다.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한다’고 했죠. 상대 측(수전 슈워브와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도 성격은 밝고 쾌활하지만 협상장에서는 달라요. ‘한 성질’ 하죠. 고함도 지르고, 협상장 박차고 나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겸연쩍게 웃으며 얘기하고, 뭐 그런 거죠. 그런데 진정성 없이 연출하면 신뢰는 사라져요.”

    “한미 FTA 앞장섰던 정동영의 변신…이념도 무상, 정치도 무상”
    ▼ 쇼를 하면?

    “그렇죠. 쇼맨십이 너무 강해도 안 돼요. 한미 FTA도 8라운드를 했잖아요? 그 중간 중간에 비공식적으로도 만나고, 횟수가 거듭되면서 상대편 마음도 읽겠더라고요. 우선 쉬운 문제부터 털어내고, 양측이 민감한 문제를 놓고 ‘이제 어떻게 할래?’ 할 때는 소프트랜딩(soft landing·연착륙)할 수 있는 ‘랜딩 존(landing zone)’을 찾아야죠. 그때가 중요합니다.”

    ▼ 그땐 어떻게 합니까?

    “수석대표끼리 단둘이 만나 풀어야죠. 대화를 하면서도 ‘이건 논 컨버세이션(Non Conversation), 적지도 마라’고 말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때는 신뢰가 진짜 중요해요. ‘요거는 자신 없는데 돌아가서 협의를 해봐야겠다’ ‘요거는 당신이 포기해라. 죽어도 안 된다’ 뭐, 이런 대화죠. 상대도 비슷하게 털어놓고, 그 비중이 맞는지 보는 거죠.”

    ▼ 잘 됩니까?

    “물론 ‘본국에 돌아가 논의했더니 요건 정말 어렵겠더라’하면 상대도 비슷하게 얘기합니다. 안 되는 것도 있고요. 수석대표라고 해봐야 1급이고, 조무래기 아닙니까.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잖아요?”

    ▼ 한미 FTA는 양국 사정으로 한때 ‘물 건너갔다’고 평가받았는데요. 추가협상 얘기가 나오자 ‘쉼표 하나 고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재협상에 나섰죠?

    “네. 조지 부시 공화당 정부 때 한미 FTA를 타결했잖아요? 그런데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부터 ‘이건(한미 FTA) 안 되겠다’며 부정적이었죠. 미국 민주당이 의회 다수당이 됐고, 민주당은 ‘자유교역은 미국 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무역적자 때문이죠. 사실, 이 문제 하나였다면 설전을 해서라도 민주당의 논리를 깼을 겁니다.”

    美 금융위기로 FTA 협상 분위기 반전

    여기서 잠시 한미 FTA 추진 역사를 돌아보자. 한미 FTA의 물밑작업은 2003년 8월 시작됐다. 한국 정부는 ‘FTA추진 로드맵’을 마련해 거대 경제권과 추진하겠다고 했고, 이듬해 미국이 관심을 표명했다. 한미 양측은 2006년 2월 3일 협상 출범을 선언해 2007년 4월 초 협상을 타결했다. 그러나 FTA 협상결과를 놓고 진통을 거듭했다. 한국에서는 ‘불평등 협상’ 주장이 나왔고, 미국에서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를 이유로 의회 통과에 유보적이었다. 결국 미국은 FTA 전제조건으로 쇠고기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2008년 4월 쇠고기 협상에서 ‘쇠고기 연령제한 해제’가 도출되자, 한국은 ‘촛불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던 한미 FTA는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일자리 창출이 정책 우선순위로 부각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2010년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자동차 분야 등에 대한 추가협상을 원했고, 한국 정부는 태도를 바꿔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양측은 결국 2010년 12월 협상안에 합의했다. 경제 최강국과 무역 강소국. 두 나라의 관세 경계를 허무는 작업은 그만큼 진통이 컸다. 김 전 본부장이 얘기하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다시 인터뷰장으로 돌아가보자.

    ▼ 그럼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쉼표 하나 못 고친다’고 하다가 추가협상에 응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들이닥친 경제상황 때문입니다. 미국은 민간 기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대공황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런데 경제가 어려워지면 보호주의로 빠지거든요. 우리 정부에서도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저쪽(미국)이 원하는 게 뭐냐?’는 얘기가 나왔죠.”

    ▼ 자동차요?

    “네. 미국 자동차 산업이 파산 직전이니까 일단 유연하게 대응할 방법을 찾은 거죠. 큰 틀에서 미국이라는 큰 시장과의 연결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한국 자동차 업계도 ‘조금 양보하고 빨리 (FTA를) 발효시키는 게 낫다’고 했어요. 그땐 마침 도요타 리콜 사태가 생겨 굉장히 어려웠어요.”

    추가협상 결과, 한미 양국은 배기량에 관계없이 모든 승용차 관세를 발효 4년 뒤 철폐하기로 했다. 미국은 관세 2.5%를 발효 후 4년간 유지한 뒤 없애고, 한국은 발효일에 관세 8%를 4%로 인하해 이를 4년간 유지한 뒤 철폐하기로 했다. 기존 체결된 협정문에는 미국은 한국산 3000cc 이하 승용차는 FTA 발효 즉시, 3000cc 초과 승용차는 발효 3년 이내 철폐토록 했다. 반면 돼지고기는 관세(25%) 철폐시기를 2014년에서 2016년으로 2년 연장해 우리 농가가 개방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미국이 원하는 게 뭐냐?”

    “우리 자동차 업계는 (추가협상에) 만족했어요. 그쪽(미국)은 오히려…. ‘포드’는 아직도 뜨뜻미지근해 하죠. 그때는 세계 경제가 어려워졌으니 어느 정도 어저스트먼트(adjustment·수정)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추가협상을) 안한다고 했는데 했느냐’고 하면 ‘미안하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죠.”

    ▼ 2011년 초에는 FTA 번역오류로 미안했을 거 같은데요. ‘책임지겠다’고 하셨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책임져야죠. 회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징계를 하려면 번역한 사무관 대신 나에게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무직이라 징계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집에 가라’고 하면 그게 처벌인 거죠. 번역오류가 불거지자 제가 지시를 했어요. ‘이거 정말 창피하다. 샅샅이 뒤져라’고.”

    ▼ 개성공단 제품 문제는 어떻습니까. 정동영 통합민주당 의원은 ‘한미 FTA 협상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개성공단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훈령을 내렸는데, 김 본부장이 훈령을 묵살했다’고 주장했는데요(정 의원은 ‘위키리크스’ 문서를 인용해, ‘김 본부장이 개성공단을 (협상) 마지막으로 남겨두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한 말도 아닌데, 무슨 국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국회에서도 자신 있게 얘기했어요. 1~8차 협상, 그리고 최종 협상 때도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를 계속 논의했어요. 미국 측에 계속 검토하라고 굉장히 ‘공세적’으로 협상했어요. 기록도 다 있어요. 그럼 왜 마지막에 타결이냐? 중요하니까 그런 거죠. 개성공단 문제는 경제뿐 아니라 한반도 안보정세, 대북관계, 이런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슈잖아요. 상대도 굉장히 예민하고. 결국 막판에 ‘위원회 식’으로 타결했는데, 그게 막판까지 미뤘다가 얼렁뚱땅 한 게 아니에요.”

    ▼ 그 ‘훈령’이 기억납니까?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훈령은 그때 그때 쭉 있었으니까요. 개성공단은 당시 열린우리당에서 굉장히 중요시했어요. 우리 대표단도 매번 스터디를 했어요. 미국도 ‘잘 안다.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한반도 안보, 미국의 대북관계하고 연결된 문제 아니냐’는 거예요.”

    김 전 본부장의 말처럼,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는 발효 1년 뒤 한반도역외가공위원회에서 논의키로 했다. 북미 관계와 핵문제 등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을 쿠바 등과 함께 적성국으로 분류해 북한 제품에 400%의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 사실상 북한과 교역은 단절된 상태다.

    ▼ 한미 FTA 비준안 통과를 위해 ‘트위터’를 통해 인터뷰를 생중계했죠? 국회에서는 ‘끝장토론’도 하셨는데요. 한미 FTA 반대 여론을 의식한 겁니까?

    “솔직히 말할까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라고 있죠? 범국본. 그분들은 1차 협상 때부터 반대 시위를 하던 분들이고 미국에까지 따라왔어요. 앞장서는 분들은 촛불시위 때도 제일 앞에 나와 있었고, 국회 끝장토론에도 나오셨죠. 이해가 안 돼요. 우리는 간접민주주의, 대의정치 아닙니까? 끝장토론도 국회와 행정부가 토론한 게 아니라, 정부와 시민단체가 토론한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대의정치의 진화일까, 아니면 민주주의 절차에 흠결이 생긴 걸까’하고요.”

    김 전 본부장은 지난해 10월 20, 24일 국회에서 한미 FTA 반대 측과 ‘한미 FTA 핵심쟁점 끝장토론’을 벌인 바 있다.

    FTA 반대 측, 이념 개입돼 설명에 한계

    “(토론회에) 참석하신 분들 공부 많이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적극 설명하려고 했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 한계?

    “저는 이념이라고 봐요. 외국투자와 개방을 친미 혹은 매판자본으로 보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설명이 안돼요. ‘경제계 침탈이다’ ‘식민지화 된다’ 이런 말을 해요. ‘트레이드 바이 룰(Trade by rule)’ 시대에. 이런 식으로 상품과 투자의 이동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토론할 때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어요.”

    한미 FTA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른바 ‘독소조항’을 이유로 반대 논리를 편다. 한번 개방하면 과거 낮은 수준으로 환원할 수 없는 ‘래칫(rachet·역진방지) 조항’과 문제가 됐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73일로 규정한 스크린쿼터제를 완화할 경우 ‘래칫 조항’ 때문에 다시 강화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외교부는 공공성이 높은 교육(성인 및 고등교육 일부 제외), 보건, 사회서비스 등 44개 분야를 제외한 서비스·투자 47개 분야에만 적용되도록 해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이다. ISD는 한국에 투자한 미국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 민간기구에 제소하는 제도다. 소송을 제기하면 분쟁 당사자(투자자, 투자유치국)가 각각 1명의 중재인을 임명하고 당사자 합의로 의장 중재인 1명을 임명하는데, 이때 합의되지 않으면 최종 판단은 세계은행(IBRD)의 국제상사분쟁재판소(ICSID)로 넘어간다. 세계은행 총재를 다수 배출한 미국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반대 측의 논거다.

    ▼ 래칫 조항은 어떤가요?

    “‘개방을 너무 많이 해 정부가 공익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이런 걱정 아닙니까? 그래서 공공정책에 해당되는 부분은 오밀조밀하게 예외를 만들어놨어요.”

    ▼ 빠진 부분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우려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반대 측과 토론하면서 저희가 ‘아, 그거 놓쳤구나’한 분야는 없었습니다. 다 설명이 가능했어요. 충분히 대비했습니다. 공공분야 외에 정부가 시장에 맡길 것은 맡겨 제도를 안정성 있게 구사해야 하잖아요? 정부가 무소불위 권력을 갖고 시장에 개입해 막 바꾸면 안 되죠. ‘래칫’은 이런 뜻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한미 FTA) 반대하는 분들, 굉장히 진보적인데 그럼 오히려 정부가 (민간분야에서) 손을 떼라, ‘자유’를 써라, 이런 쪽이 맞지 않나요? 그런데 ‘정부가 민영화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FTA 때문에 못한다는 겁니다. 맞지 않다고 봐요.”

    ▼ ISD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도 재협상을 약속했지 않습니까.

    “ISD 문제는, 사실, 좀 뜬금없어요. 반대 측에서 갑자기 왜 저럴까 싶어요. ISD 조항은 1976년 영국과 투자보장협정(BIT)을 할 때부터 들어 있던 내용입니다. (ISD 중 제일 많이 쓰이는) ‘익시드(ICSID·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 협약’은 세계적으로 147개국이 가입했고, 우리도 1967년 가입했어요. 이 중 볼리비아와 에콰도르가 탈퇴했고, 베네수엘라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탈퇴하지는 않았어요. 이들 나라는 탈퇴 후 국유화 정책을 편 나라들입니다. 아니, 대한민국이 그쪽으로 가야 합니까? 그나마 경청해보니 반대 논리는 딱 세 가지더라고요. ①상대가 미국이니까 잘못하면 깔려죽는다 ②공공정책이 ISD 때문에 위협받는 거 아니냐 ③사법주권이 침해되지 않느냐.”

    ▼ 야5당으로부터 직무유기로 형사고발 당하셨죠?

    “고발은 자유죠. 법이 있으니까 법대로 하면 돼요. 그런데 국제 협정을 체결하면요, 그 협정 이행은 당사국 책임입니다. 미국처럼 이행법 체계로 하거나 우리처럼 법을 개정하는 것 모두 효력은 같아요. 당사국이 책임 이행을 안 하면 국가간 분쟁이 되는 거죠. 투자자가 직접 그 정부를 제소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정부가 완벽하게 다 확인을 하라? 뒤집어 얘기하면 확인하고 분쟁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걸 저보고 완벽하게 다 확인하라는 건데, 그러면 분쟁제도가 왜 필요합니까? 그분들 이야기는 ‘자기들이 했으면 더 잘했겠다’ 그런 생각이겠죠.”

    지난해 11월 30일 당시 야 5당은 김 전 본부장을 형사고발했다. 이유는 이렇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한미 FTA를 이행법을 통해 적용하는데, FTA 협정과 미국 국내법이 충돌할 경우 FTA 협정 효력을 부정해 미국 법원에서 권리주장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협정이행에 필요한 모든 법 개정을 완료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직무를 소홀히 했다.”

    ▼ 지난해 12월 중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8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마지막 날 미국 통상전문지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와 인터뷰하셨죠?

    “네.”

    ▼ ‘30개월 이상 쇠고기 전면 개방을 위한 협의를 요청하면, 한국 정부는 한미 FTA 발효 뒤 협의에 적극적 응한다’고 했는데요. 일부 언론은 미국 쇠고기 수입연령제한 철폐를 시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협정문을 보면 어느 한쪽이 협의를 요청하면 일주일 내에 응하게 돼 있어요. 당당히 응하는 거죠. 우리도 촛불시위 때 추가협상을 했잖아요? 그건 의무사항이에요. 그런데 쇠고기 협정문에는 ‘소비자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한미 양국은 2008년 쇠고기 개방 협의 당시 ‘한국 소비자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여 30개월 미만 쇠고기로 한정했다.

    촛불시위 사진 보여주며 “설명해봐라”

    ▼ ‘신뢰 회복’이 안 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기준을 완화할 수 없다?

    “그럼요. 물론 신뢰 회복에 대한 논거를 찾겠죠.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 금지가 잘 이행되는지, 광우병 걸린 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든지, 그건 것을 제시해야죠. 미국은 분명 우리 ‘소비자가 많이 사 먹으니 신뢰회복이 됐다’고 주장하겠죠. 그럼 ‘값이 싸니까 먹는 거다. 품질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미국이 증명해라’는 식으로 받아야죠. 당당히 응해야지, 궁색한 말로 둘러대면 안 됩니다.”

    ▼ 2008년 쇠고기 협상 당시 심정은 어땠나요?

    “그땐 너무 감성적으로 흐른 거 같아요. 국제적인 안전 기준도 글로벌 스탠더드도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일찍 죽는다, 뇌에 구멍이 송송 뚫린다, 이런 게 국민 가슴에 불을 지른 거죠. 참 어떻게 보면 꿈같은 이야기죠. 그래서 너무 감성적으로 흘렀다는 겁니다. 저도 쇠고기 협상에서 ‘감성적’으로 접근했죠.”

    ▼ 어떻게요?

    “미국 측이 미국산 쇠고기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자꾸 주장하더라고요. 그래서 촛불시위 사진을 보여주면서 ‘과학적으로 설명해봐라’고 했어요. 경제, 통상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죠. 아마 정치하시는 분들이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막힘없던 그가 오른쪽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런 행동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요, 정치학도 끝에 과학이 붙잖아요? 폴리티컬 사이언스(Political Science), 경제학도 이코노믹 사이언스(Economic Science)잖아요. 둘 다 과학인데….”

    ▼ 그래서요?

    “그런데 이 둘의 근저에 흐르는 원칙은 다른 거 같아요. 경제학에서 시장경제는 어떤 기회의 균등을 바탕으로 한 자유경제. 시장경제의 근본이죠. 기회는 균등하지만 결과는 균등할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정치학은 평등이 원칙이죠. 1인 1표제. 그렇죠?”

    ▼ 말씀하시죠.

    “유엔 총회는 1인 1표이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은 1인 1표가 아니거든요. 비중 없는 사람이 반대하면 컨센서스(총의)를 막지 못해요. 저는 거기에서 갈등이 생긴다고 봐요. 저같이 통상을 하고 경제논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건 정치인들이 풀어야죠. 자유와 평등이 병립하면서 충돌이 생기는데, 그 충돌을 풀어가는 게 정치의 묘미잖아요.”

    ▼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어려웠어요. 단시간에 협상도 해야 하고, 국내 사정도 빡빡하고, 협상 자체도 민감하고, 또 정치적인 측면도 많았죠. 이젠 다 지난 이야기죠.”

    “주미대사? 바람이 전하는 소리”

    ▼ 흔히 ‘외교관의 꽃’이 대사직인데요, 한 번도 못했는데요.

    “아쉽죠. 그런데 정리할 건 정리해야죠. 제 나이가 환갑인데.”

    ▼ 주미대사, WTO 차기 사무총장 얘기도 있어요.

    “그건 다 바람 속에 떠다니는 이야기죠.”

    ▼ 최근에 정동영 의원은 보셨나요?

    “참, 그분 요즘 안 보이십디다.”

    욕하면서 정든다더니,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기자를 쳐다봤다. 정말 궁금한 듯했다.

    정 의원은 지난해 10월 그를 향해 ‘미국의 파견관인지 옷만 입은 이완용인지 모르겠다’ ‘김 본부장을 통상관료로 쓴 것을 후회한다’ ‘영혼 없는 김 본부장에게 국익을 맡긴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하늘의 노 전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릴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김 전 본부장은 ‘(정 의원이) 미국 방문 시 한미 FTA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말씀해주셨다. 많은 도움을 주셨다. 늦었지만 고맙다’고 꼬집었다. 이른바 ‘FTA 설전’이다.

    ▼ 정 의원의 발언에 서운하지 않았나요?

    “그분도 다 생각이 있겠죠. 그분이 미국에 다니시면서 (FTA 협정 체결을 위해) 여러분을 만났고, 많은 말을 했고, 기록도 있습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정 의원 같은 분들이 저한테 얘기하는 건 다분히 그런 이념적인 색깔에서 얘기하는 거겠죠. 뭐랄까요. 참…. 이념도 무상, 정치도 무상입니다. 서운할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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