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한반도 핵 위협 분석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입력2012-01-20 11: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6·25전쟁 때 미국 핵 위협이 북 핵 개발 자극
    • 핵에 대한 트루먼의 방심과 스탈린의 오만으로 전쟁 발발
    • 美 개전 초부터 핵무기 사용 검토
    • 핵 위협으로 ‘코리아 아마겟돈’ 위험 상존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6·25전쟁 당시의 낙하산 부대.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친북좌파의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미국 AP통신이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그 여파는 무엇인가. 일본 외무성에서 핵군축 및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미네 요시키가 이 통신을 통해 한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 핵무기를 개발·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긴 어렵다.

    그래서 다시 6·25전쟁에 주목한다. 북핵의 ‘뿌리’가 바로 이 전쟁과 그 유산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전 초기부터 정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총성이 멈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에 핵 위협을 가해왔다. 이는 당시 미 육군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있었던 벤데트센(Karl R. Bendetsen)이 “개전 초기부터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이와 관련된 암호명(code name)도 있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6·25전쟁과 핵무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북한의 핵 무장과 미국의 핵 우산 정책이 맞서 있는 오늘날의 한반도 핵문제에도 중대한 함의를 준다. 북한의 대미 위협 인식의 뿌리는 미국의 핵 사용 위협을 비롯한 6·25전쟁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고, 미국이 6·25전쟁 이후 60년 넘게 대북 선제 핵 공격 전략을 고수하는 것 역시 6·25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6·25전쟁이 ‘세계 전쟁’이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의 발발, 전개과정, 정전협정 체결, 그리고 정전체제에서 핵무기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에 관련해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은 실제로 있었을까?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직면하고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애치슨 라인(1950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한 미국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배경에는 핵 독점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대로 스탈린이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준 데에는 자신의 핵 무장이 미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北進)을 감행한 데에는 자국의 핵 위협이 중국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거꾸로 마오쩌둥이 미국으로부터 핵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었음에도 참전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주장대로 자국의 핵 위협이 공산군의 전쟁 의지를 꺾어 휴전협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까? 미국의 핵 공격 움직임에 대해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핵전략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이것이 한반도를 비롯한 지구 지정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물론 이 글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들을 추적하고 외국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분석해본 결과,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는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5전쟁, ‘핵 시대’의 첫 전쟁

    6·25전쟁은 핵무기라는 ‘절대 무기’를 보유한 두 ‘슈퍼 파워’의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이전 전쟁들과는 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으로 미국 핵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에 터진 6·25전쟁은 핵에 의한 승전의 유혹과 상호간 절멸의 공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전쟁 개시 당시 미국은 약 300개의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수 있는 260여 기의 전폭기를 갖고 있었고, 유사시 소련에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개월 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도 20개 정도의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군 역사학자인 스펜서 터커가 “냉전시대의 첫 실전인 동시에 핵 시대의 첫 제한적 전쟁이었다”고 6·25전쟁의 성격을 규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미국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가디스의 가상 에세이는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6·25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0년 12월 2일, 맥아더는 트루먼의 위임에 따라 미 공군에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국군을 향해 5발의 핵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핵폭탄이 뿜어낸 섬광과 폭발은 중국군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약 15만 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미군과 한국군 포로 상당수도 목숨을 잃었다. 나토 회원국들은 사전 상의 없이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고, 6개월 전 한국 방어를 위해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핵 보복에 나서달라는 중국의 압력에 따라 소련은 미국에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든,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감수하든 48시간 안에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2월 4일, 48시간이 지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륙한 2기의 소련 전폭기는 부산과 인천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 두 곳은 유엔군 지원의 핵심 거점이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핵 공격이 자신이 행한 것보다 2배 이상의 사망자를 내자, 주일 미공군에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선양 및 하얼빈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소식은 소련 공군기의 작전 범위에 있는 일본과 유럽 국가들의 격렬한 반미 시위를 야기했고, 영국·프랑스·베네룩스 3국은 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소련의 핵폭탄이 떨어진 뒤였다.”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유엔 안보리 전문가 보고서에 수록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미국 주간지 ‘위클리스탠더드’ 홈페이지.



    전쟁 발발도 핵무기 관련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북핵 6자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북측 수석대표인 이용호 외무성 부상이 2011년 9월 21일 오전 중국 베이징 장안구락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6·25전쟁의 발발 배경과 원인에 핵무기 문제가 있다. 핵의 힘을 믿었던 트루먼의 방심과 스탈린의 오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여 경제와 복지로 전환하고자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저렴하게 군사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했던 것도 핵무기의 힘을 믿었던 탓이 컸다.

    비밀 해제된 중앙정보국(CIA)의 문서들을 보면 미국은 6·25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다.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 될 북한의 남침을 지시할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극동사령부는 “미국의 군사적 힘에 의해 전멸”될 각오를 무릅쓸 만큼 북한도, 중국도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전면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는 원자폭탄”에 있다고 봤는데,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에는 소련이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침을 지시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핵 억제에 대한 자신감은 스탈린의 또 다른 믿음과 대치된다. 1949년 내내 김일성의 남침 승인 및 지원 요청을 뿌리쳤던 스탈린은 1950년 5월 14일 마오쩌둥에게 서신을 보내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해, 통일을 향한 북한의 (남침) 제안에 우리는 동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가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이란 소련의 최초 핵실험(49년 8월 29일), 중국의 공산화 및 중화인민공화국 선포(49년 10월 1일),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의 선포(50년 1월 12일), 중소 동맹조약 체결(50년 2월) 등이었다.

    특히 핵실험 성공은 스탈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를 분석한 이브구에니 바자노프(Evgueni Bajanov)는 스탈린이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핵실험 성공에 있었다며, “그는 공산권의 힘에 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소련의 외교 전문은 “승리의 분위기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고 우리 입장이 평양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는 사실로 인해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기술했다.

    스탈린의 중국 앞세우기 작전

    결국 6·25전쟁은 트루먼과 스탈린 모두 ‘핵의 위력’에 대한 맹신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소련의 ‘꼭두각시’ 정도로 간주하면서 미국보다 핵전력이 크게 뒤졌던 소련이 북한과 중국에 남한 공격을 명령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상당 기간 핵 독점과 우위를 자신했던 트루먼은 재래식 군사력을 줄이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건 방심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 선포는 미국의 개입 의지에 심각한 의문을 야기했고, 핵의 위력을 믿고 단행한 재래식 군사력의 대대적인 감축은 미군이 6·25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한 물리적 요인이었다.

    반면 핵실험 성공으로 대담해진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역시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불사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개입 가능성도 낮고 개입하더라도 중국을 앞세우면 소련이 직접 피 흘릴 일은 없다고 봤다.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6·25전쟁에 신속히 개입하자 스탈린은 미국의 힘을 빠지게 해 냉전체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역시 오판이었다. 6·25전쟁을 소련이 일으키는 제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한 미국은 엄청난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대소(對蘇) 봉쇄를 위한 동맹체제 강화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요동치는 세계 지정학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과신이 6·25전쟁 발발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당시 미국의 압도적인 핵 우위는 신속한 개입을 가능케 한 물리적인 힘이었다. 6·25전쟁 개입을 선택한 미국의 가장 큰 우려는 소련의 유럽 침공 가능성이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트루먼은 6·25전쟁 개입 직후인 7월 11일 영국에 원자탄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 B-29를 배치했다. 이는 동북아에 쏠린 미국 군사력의 공백을 틈타 소련의 유럽 공격을 억지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 전문가인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와 버드(Kai Bi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원자폭탄은 미국의 6·25전쟁 참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유럽 방어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전 초기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패퇴를 거듭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원폭 사용을 둘러싼 논란이 격화됐다. 미 육군은 “지금 단계에서의 원폭 사용은 아시아인의 생명을 멸시한다는 미국 정책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고, 미 공군의 정보부대 역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아시아의 반미감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상이 있었다.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에는 터널과 다리가 많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차단공격을 하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할 둘도 없는 곳이다.”

    맥아더의 청원을 접한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7월 중순 일본 도쿄를 방문해 맥아더와 핵무기 사용에 관해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원폭 투하가 필요하다며, B-29 전폭기의 운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주면 그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맥아더는 북한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는 한편 “적의 주요 축선을 방사능 물질로 만들어 한반도를 만주와 분리하겠다”는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최대 10일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훗날 북중 국경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기 전에, 북한에 “30~50개의 원자폭탄 투하를 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

    핵 사용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트루먼은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며 맥아더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핵 공격 태세를 갖추기 위해 10기의 B-29 전폭기를 괌에 파견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핵폭탄의 핵심 물질(fissile core)이 ‘분리된’ 폭탄을 탑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원폭 투하의 최종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이처럼 미국이 원폭 투하를 검토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전세는 9월 중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맥아더가 주도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고 곧바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북진을 강행한 미국이 ‘승자의 저주’에 직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의 참전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핵 공격을 더욱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제3차 세계대전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문을 노크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급기야 트루먼은 “미국의 대응에 원자폭탄도 포함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된다”며, 핵무기 사용을 강력히 암시하고 나섰다.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 자리에서였다. 그러자 세계 지정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영국 총리인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lee)는 “주사위가 던져지기 전에 영국도 자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호주도 우려를 표명했고, 인도의 네루 총리는 “원자탄 사용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중동과 중남미의 대다수 비공산계열의 국가도 “미국의 핵 사용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우려와 비판에 직면한 트루먼은 결국 한발 물러났다.

    ‘핵 공격은 부도덕의 극치’

    이듬해에 접어들어 유엔군과 공산군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자, 트루먼은 4월 6일 완제품 핵무기가 탑재된 B-29 전폭기를 괌에 보냈다. 미국이 자국의 본토 밖으로 즉시 사용 가능한 핵폭탄을 탑재한 전폭기를 배치한 것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핵 공격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맥아더 해임에 따른 미국 내부의 불만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가 임명됐는데, 그는 “핵 공격은 부도덕의 극치”라고 말했을 정도로 핵 사용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미국이 핵 사용 검토에 들어가자, 이승만과 김일성의 반응도 크게 엇갈렸다. 김일성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는 기만전술로 인민들을 끌고 갔다고 비난하면서 미국의 핵 공격 위협을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삼았다. 반면 이승만은 “이 빅뉴스를 비장한 각오로 환영한다”고 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하의 어느 한구석에라도 공산당 한 놈이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며 원폭 투하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트루먼이 원폭 투하를 결심하지 않자, “왜 원자폭탄을 쓰지 않는가”라며 분개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이 대통령께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원폭도 불사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말씀 전해주시오.” 맥아더가 정일권에게 건넨 말이다.

    1951년 7월 8일 정전협상이 시작됐지만, 포로 송환 문제로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허드슨 항구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이라는 극비 모의 핵 공격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기존의 핵폭탄은 너무 커서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에는 사용하기 곤란하다며, 작은 핵무기, 즉 ‘전술 핵무기’ 개발·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한 6·25전쟁 종식을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는 “원자폭탄도 수많은 미국 무기 가운데 하나”라며 핵 공격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미 합참은 핵 공격 대상으로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가 집중되어 있던 개성을 지목했고, 아이젠하워 역시 전술 핵무기 사용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동의했다. 북한의 다른 지역과 중국의 군사 시설도 핵 공격 대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미국은 1954년 5월을 “원자폭탄의 광범위한 전략적·전술적 사용이 요구되는” 그날(D-day)로 잡았다. 이때로 잡은 이유는 소련군의 개입 등 확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분량의 핵무기를 확보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운명의 날’이 오기 전에 총성은 멈췄다. 스탈린 사후에 공산권이 휴전협상에 적극 임하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한반도의 핵 위협 60년

    총성은 멈췄지만, 핵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국은 공산권의 재래식 무기를 사용한 공격에도 핵으로 보복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을 공식 천명했고, 한국에도 핵무기를 대거 배치했다. 북한은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휴전선 인근에 배치해 ‘적 끌어안기’ 전략으로 맞섰다. 미국과 소련은 이념과 세력권 대결에 이어 핵 군비경쟁에도 불을 댕겼다. 핵무기를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중국의 마오쩌둥이 생각을 바꾼 계기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이 멈춘 지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한반도와 주변 정세도 많이 변했다. 전쟁이 멈춘 후 20년 만에 가장 치열한 교전 당사국들이었던 미국과 중국은 화해했고, 이 기회를 틈타 중국과 일본도 국교를 수립했다. 미국과 소련도 1989년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한국도 미-소 탈냉전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에 힘입어 1990년과 1992년에 각각 소련 및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의 남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한반도의 북쪽은 지구촌에서 가장 빈곤하고 폐쇄적이며 고립된 나라로 전락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6·25전쟁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은 60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일관되게 미국 핵 위협에 노출된 나라는 지구상에서 북한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총성이 멈춘 지 60년이 다 되가도록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않고 있다. 급기야 북한도 핵으로 맞서는 전략을 선택하고 말았다. ‘코리아 아마겟돈’의 위험을 품은 핵의 대결이 21세기 들어 본격화되는 셈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