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유적·유물 수난기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2-01-20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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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파괴할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까지 붕괴시킨다. 세계 문명의 보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어지는 전쟁은 더욱 그렇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간다라 미술, 박트리아 시대를 증언하는 인류사의 보물들이 오늘, 폭격과 약탈과 도굴 속에 사라지고 있다. 참혹한 현장을 고발한다.
    이라크 바그다드, 2003년 4월 10일. 날짜까지 잊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게 그날을 기억한다. 당시 바그다드는 이라크 전쟁 발발과 미군의 진격으로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지면서 천지가 개벽하고 있던 때였다. 그날 우연히 바그다드 박물관 앞을 지나가다 많은 사람과 손수레, 차가 뒤엉켜 있는 걸 봤다. 사람들이 담장을 넘어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이윽고 바그다드 박물관 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사람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고 나온 물건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국보급 유물이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하는 현장을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두상을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점토판을 차에 마구 실었다. 그중 한 유물은 필자도 책에서 본 수메르인의 이난나 여신상이었다. 기원전 4000년 무렵의 것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약탈자는 여신상을 조수석에 던져 넣고 차를 운전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향해 총까지 쏘면서 값진 유물을 선점하기 위한 무법천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날 바그다드 박물관에서 사라진 유물은 1만5000여 점에 달한다.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었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 서판과 아카디아의 우루크 청동상도 포함돼 있다.

    전쟁 통에 국립박물관이 털린, 세계사에 유례없는 그날을 이라크 고고학자들은 ‘이라크 문화 사망일’이라고 한다. 이브라힘 칼리드 바그다드 대학 고고학과 교수는 “우리 모두 그날을 기억한다. 수천 년 된 유산을 잃어버린 날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고고학자들은 그날 박물관 앞에서 망연자실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유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라도 알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내게 총을 겨누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쟁이 나기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은 미군에게 박물관 유물이 약탈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세계 학자 100여 명이 사이언스지를 통해 미국에 “폭격뿐 아니라 무법천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탈로 귀중한 유물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 일도 있다. 그럼에도 미군은 바그다드로 들어오자마자 후세인궁으로 진격했고 국립박물관은 혼란 속에 방치됐다. 박물관에서 약탈이 계속되고 국제사회의 맹비난이 쏟아지자 이틀이 지난 4월 12일에야 미군이 박물관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탱크와 총으로 민간인 출입을 막은 뒤에야 비로소 약탈의 참극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많은 유물이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을 전공한 맥과이어 깁슨 미국 시카고 대 교수는 “눈앞의 이익과 정치 상황 때문에 유물·유적이 훼손된다면 이는 이라크인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의 비극이라고 전쟁 전에 경고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문명의 종말



    이라크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꽃피웠다.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다. 고대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어 조사된 유적지만 전국에 10만 곳이 넘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출생지 우르, 전성기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국제 고고학계가 이라크 내에서 인류 역사 핵심 유적으로 꼽은 곳만 1만2000여 곳이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오늘의 이라크 남부 수메르 지역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문명의 발전으로 평가받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출현했다. 그래서 남부 이라크는 눈에 띄는 언덕 하나하나가 모두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할 정도로 유물의 보고다.

    필자는 이라크를 취재하다 곳곳에서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된 유물들을 만났다. 이라크 남부도시 나시리아의 시장에서 수메르인의 원통도장을 우리 돈 2만 원 정도에 파는 좌판 상인을 본 적도 있다. 이 물건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집 뒤 언덕으로 안내했다. 상인은 그곳 땅을 파헤쳐 각종 유물을 꺼냈다고 했다. 고고학 지식이 없는 필자가 보기에도 분명 진품 원통도장이었다. 일부러 가품을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방에 널린 것이 고대 유물인 셈이다. 훗날 영국의 고고학자에게 그때 본 원통도장에 대해 설명했더니 그것은 수메르인의 쐐기문자가 각인된 인장으로 유럽시장에서는 수천 달러의 가격에 팔린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좌판 물건 취급을 받는 게 오늘 이라크 현실이다. 그런데 전쟁까지 터졌으니 오죽 했겠는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문화유산이 마구 약탈당하자 세계는 비난 여론으로 들끓었다. 화들짝 놀란 미군은 박물관을 지키러 나섰고 유물의 유출 경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전문 인력과 미연방수사국(FBI) 요원, 미국 세관원까지 동원해 약탈 문서와 유물을 찾아다녔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도 특별 수사팀을 파견해 문화재 회수를 도왔다. 하지만 수십 점의 가장 귀한 유물은 끝내 찾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유물이 사라졌는지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유물은 이미 이라크 땅을 떠나 인접국 요르단이나 시리아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중개상을 거쳐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으리라. 요르단·시리아는 물론 미국 뉴욕, 이탈리아 제노바 등에서 이라크 유물 수백여 점이 압수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에서 귀환하는 영국·미국의 언론인과 군인이 유물과 예술품, 현금, 무기 등을 전리품으로 챙겨오다 세관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이라크 유물을 손상한 주범은 미군이다. 이라크 전쟁 개전 초기 미군은 이라크에 고성능 미사일을 쏘았다. 많은 유적지가 훼손된 건 불문가지다. 이라크 고고학자 아샴 알 주부리는 “가는 곳마다 유물이 널려있는 이라크에 미사일을 쏘았다는 것은 어디서든 유적지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고 말했다. 2009년에는 미군 관할 아래 있는 바빌론 유적이 훼손됐다는 유네스코 보고서가 나왔다. 유네스코는 ‘바빌론의 훼손 평가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바빌론을 군사 기지로 사용함으로써 세계적인 고대 유적지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또 문화유적 파괴가 재발하는 걸 막기 위해 바빌론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했다. 바빌론은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0㎞가량 떨어진 알-힐라에 위치한 유적지다. 고대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1750)과 네부카드네자르 왕(기원전 604~562) 당시 수도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이며 수많은 고대 바빌론 유적이 분포해 있다.

    생각 없는 점령군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이집트의 스핑크스. 17세기 이곳을 지배한 오스만튀르크 병사들이 스핑크스 코를 향해 사격 연습을 하는 바람에 크게 훼손됐다.

    미군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4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 자리에 군사기지 ‘알파’를 세우기도 했다. 기지 건설 과정에서 미군과 공사업자들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해 바빌론 유적지를 수백 m에 걸쳐 파헤쳤다. 이때 지반이 약한 바빌론 고대 도로가 훼손됐고, 특히 인류 최초의 포장도로로 평가받는 ‘프로세셔널 웨이’도 심각하게 망가졌다. 바빌론에서 탐사를 하던 독일고고학연구소 이라크 탐사반의 마르가레테 에스 반장은 “현지의 흙더미는 모두 유물 발굴지라는 걸 미군 병사들이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바빌론 시대의 귀중한 탑이 군 관측 포스트로 사용됐고 일부 병사는 조각품을 잘라내 기념으로 갖고 귀국하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체로 걸러가며 유물을 찾는 유적지 토양이 진지 모래주머니를 채우는 데 활용됐다.

    또한 미군은 바빌론이 약탈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대영국박물관의 고대 및 극동지역 담당 고고학자로 5년 동안 바빌론 지역을 조사해온 존 커티스는 “바빌론 유적지의 훼손은 심각한 문제다. 2600년 전 만들어진 이슈타르 성문에서 나온 9개 용 문양 벽돌에서 이를 잘라내려 한 사람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했다. 바빌론 도서관과 함무라비 박물관,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에서 유물이 약탈·파괴되기도 했다. 사라진 물건 중에는 기원전 2000년에 만들어진 원통형 돌도장과 수염을 기른 남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테라코타 부조 등이 포함돼 있다. 유네스코는 “바빌론에 군사기지를 만든 것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국의 스톤헨지 주변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주변에 군사기지를 세운 것과 같은 행위”라며 미군을 비난했다.

    사람의 생명도 지키기 힘든 전쟁 중에 유물을 지키는 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1954년 ‘전시문화재 보호에 관한 헤이그 협약’을 맺었다. 무력 충돌 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해 규정한 이 협약에는 세계 103개국이 가입했지만 미국, 영국, 일본과 남·북한은 가입하지 않았다. 1977년 체결된 ‘문화·종교 유적지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에 대한 의정서도 미국과 영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이 협약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가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 중에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반달리즘’이라고 한다. 5세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해 유적을 파괴하고 유린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이 터질 때마다 반달리즘이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예는 기원전 356년 그리스인 헤로스트라투스가 그리스 최초의 순대리석 신전인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 지른 사건이다. 그는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신전을 훼손했다. 그의 뜻대로 ‘헤로스트라투스’는 지금까지도 반달리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17세기 그리스를 침공한 오스만튀르크 군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화약고로 썼으며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는 스핑크스 코 부분을 목표물 삼아 사격 연습을 했다. 이때 스핑크스가 크게 훼손됐다.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193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오벨리스크를 약탈한 뒤 로마 콜로세움 인근에 옮겨 세우고 에티오피아 유물을 본국으로 마구 날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미술품과 조각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했다. 1991년 유고 내전 때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의 건축물이 폭격으로 훼손됐다. 크로아티아의 고대 도시인 두브로브니크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이때의 폭격이 대규모 인종 학살에 버금가는 중대 범죄로 간주된 건 이 때문이다. 이처럼 반달리즘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현대까지 끊이지 않고 되풀이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반달리즘의 재현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지역의 교차지점에 위치해 역사 유물이 풍부하다. 기원전 수세기 고대 인류 국가부터 아프간을 차지해온 수많은 민족,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인도인, 터키인, 그리고 몽골인이 2500년간 수많은 유물을 남김으로써, 이곳은 오늘날 고대 문명의 전시장이 됐다. 종교 유물도 많다. 힌두교와 불교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중국과 몽골 및 한반도까지 전파됐다. 고대의 조로아스터교부터 지금의 이슬람 문화까지 다양한 종교와 유물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퍼져 있다. 기원전 2000~1800년 이 지역에서 형성된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BMAC)은 중앙아시아 청동기 문명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나는 실크로드 덕분에 6세기 무렵부터 신라의 현각과 혜륜 등 우리나라의 고승이 이곳을 지나갔다. 8세기 초 혜초가 쓴 한국인 최초의 해외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는 지금 미군의 군사기지로 쓰이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그람이 계빈국이라고 적혀 있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아프가니스탄의 각종 문화유산이 오랜 내전과 소련의 침공, 그리고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카불 국립박물관 유물은 아프가니스탄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대거 약탈·파괴됐다. 기원전 6세기부터 사용된 금화와 은화는 이미 대부분 도둑맞았다. 1990년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고 나자 그동안 소련군을 상대로 싸우던 게릴라가 사분오열됐다. 갑자기 공공의 적이 사라지자 내분이 난 것이다. 이들은 수도 카불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 충돌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1993년 5월 12일부터 23일까지, 12일간 카불 한복판에서 벌어진 게릴라 간 전투는 아프가니스탄 유물에 대한 결정적인 사망선고였다. 국립박물관 건물에 총알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박격포탄이 수시로 날아들었다. 그 와중에 최장 10만 년이 된 소장품 수만 점이 파괴됐다. 그때 사라진 보물 중 최고의 걸작은 아프가니스탄 동부 하다시에서 발굴된 불상이다. 최단 1200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받던 이 불상은 섬세한 조각 덕분에 고고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박격포에 산산이 부서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렸다. 한낱 돌멩이가 된 것이다. 당시 박물관장이던 나즈볼라 씨는 “박격포탄이 수시로 박물관에 날아들던 시절, 나는 어떻게든 유물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게릴라가 빼앗아 모두 부숴버렸다”고 말했다. 그들이 박물관 입구에 있던 불상을 방패 삼아 총을 쏘는 바람에 불상 머리는 멀리 날아가버렸다. 전투가 끝났을 때 박물관은 이미 폐허였다. 힌두 여신 두르가가 인간의 머리를 가진 황소를 죽이는 모양의 대리석상이 산산조각난 채 뒹굴고 불에 탄 건물 위층에 있던 2000년 된 철제 항아리와 호리병 및 단지들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당시 박물관 직원이던 누르 칸 씨는 “게릴라들은 글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들에게 간다라 미술이니 박트리아 유적이니 하는 설명은 통하지도 않았다. 그들 눈에는 2000년 된 불상도 그저 바위 덩어리이고 그림은 낙서로 보일 뿐이었다. 박물관 유물 중에는 기원전 6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흙으로 빚은 물병이 있었는데, 게릴라 전사 한 명이 그 병에 물을 담아 마시더니 병을 부숴버렸다”고 회상했다. 당시 문화부 차관이던 메스바 장관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게릴라들은 이 박물관이 바로 나라의 심장이며 세계의 유산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문화유산은 그렇게 사라졌고, 이제 다시는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글을 좀 배웠다는 탈레반 정권이 게릴라를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유물 파괴는 끝나지 않았다. 게릴라들이야 무식해서 그랬다 치자. 탈레반은 더 나빴다. 그들에게는 종교만이 중요했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문화유산을 파괴한 이유다. 이런 탈레반과 맞서 싸운, 그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의 영웅 샤 마수드 장군은 또 어떤가. 그가 이끈 북부동맹 또한 유물 보호에는 문외한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는 25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이 건립한 ‘다시트-에-할라’라는 고대 성곽이 있다. 북부동맹 전사들은 탈레반에 맞서 싸우며 탱크와 대포를 이 고대 성곽에 설치하고 참호를 판 채 전투를 했다. 참호를 파기 위해 파묻힌 성벽의 돌을 파헤쳤다. 이후 전투 과정에서 탈레반과 북부동맹이 포탄을 주고받으며 이 고대 성벽은 조금씩 허물어졌고, 성 안에 있던 고대 유물은 먼지로 변했다. 당시 북부동맹 전사였던 굴 아하마드는 “우리는 그 성이 그렇게 중요한 유물인지 몰랐다. 알았더라도 전투가 진행 중인 현장에서 그 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게릴라든, 탈레반이든, 북부동맹이든, 어느 누구도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유산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그중에서 반달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건 탈레반이다. 탈레반은 이슬람 샤리아를 믿는 극단적인 이슬람 종교주의자들로 이슬람 외에는 어느 종교도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 유물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가능한 한 파괴하는 정책을 펼쳤다. 가장 유명한 건 바미안 석불 파괴다. 1500년 전 만들어진 바미안 석불은 높이 55m와 38m짜리 두 개로 절벽의 한 면을 파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스 조형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을 잘 보여줘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사랑받았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이 석불을 ‘이교도의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로켓포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파괴했다. 그 현장은 CNN을 통해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탈레반은 악명을 얻었다. 당시 화면을 보면 석불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너지는 순간, 탈레반 정부 인사의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알라여 당신은 유일신입니다.”

    탈레반 정권은 바미안 석불뿐 아니라 사람 모양으로 생긴 모든 유물과 그림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없애려 했다. 필자는 2002년 카불 박물관에 방문했다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 박물관 건물 여기저기 총탄 자국이 나 있고 지붕은 로켓포에 맞아 날아간 모습.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폐가 같았다. 박물관 입구에 있었다던 2점의 소조상(塑造像)은 이미 파괴돼 돌조각만 쌓여 있었다. 이 조각은 서기 1세기 쿠샨왕조의 조로아스터교 제단 중 하나인 수르흐 코타르에서 발견된 것으로, 카니슈카 왕의 동상과 쿠샨의 왕자상이었다. 탈레반 정권은 2000년 한 해 동안만 카불 국립박물관 소장 미술작품 2750여 점을 파괴했다. 이러한 유물 파괴정책은 2000년 당시 탈레반 정권의 문화공보장관과 재무장관이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역사학자 야하 모헤브자다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어느 날 정부 관리들이 박물관에 왔다. 박물관에 있는 미술품이 우상이라며 앞마당에 끌어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그들에게 이 유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총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한 마디만 더 했으면 나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이 유물들은 다음 날 바로 파괴됐다. 야하의 증언은 계속된다.

    “첫날엔 관리 두 명이 돌로 미술품을 파괴했다. 돌상이 무겁고 잘 깨지지 않자 다음 날 도끼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 다음 날은 탈레반 병사들이 아예 큰 해머를 들고 왔다.”

    그는 “그때 박물관 유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이제는 뭐가 있었는지 1974년 나온 관광 안내책자를 봐야 겨우 기억날 정도”라고 했다. 이런 일이 이 박물관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수천 년간 보존해온 수많은 유물이 단 1년 동안 탈레반 손에 사라졌다.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대석굴. 석굴 계곡의 동쪽과 서쪽에 있던 큰 석불을 2001년 탈레반 정권이 폭파했다(큰 사진).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는 순간.

    신앙이라는 이름의 폭력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서도 문화 유적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불교문화 유적지 파괴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탈레반이 불교 유산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북부와 서부는 실크로드가 지나는 곳으로 간다라 유적 등 고대 불교 유산이 많이 퍼져 있다. 필자는 2008년 파키스탄 북서부 탁타베이라는 곳에서 2000년 된 불교 수도원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간다라 미술 전성기에 만들어진 스투파(탑)와 불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수도원 입구부터 유물이 늘어서 있던 이곳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탁타베이 불상이었다. ‘간다라 미소’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자애로운 미소가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바로 다음 날 파괴될 예정이었다. 탈레반이 폭파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곳을 찾은 것도 실은 이제 곧 사라지는 유적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사원 관리자 이냐얏 칸은 내일이면 돌덩이가 될 불상을 어루만지며 “예전에는 우리 사원에 관광객이 참 많이 왔다. 한국, 일본, 네팔, 스리랑카에서 많은 사람이 왔는데, 이제는 올 수 없다.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그들이 사원 전체를 폭파할 것”이라고 슬퍼했다. 생각해보면 그날은 20년간 관리자로 사원을 지켜온 그의 임무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그는 “탈레반 손에 죽기 전에 오늘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불상은 너무 아깝다. 커서 어디 숨길 수도 없는데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석양이 질 때까지 취재를 하며 필자는 아까운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현장을 바라봤다.

    대체 탈레반은 왜 문화재를 파괴하는가. 필자는 파키스탄 북부 스와트 지역의 탈레반 사령관 오마르 칼리드를 인터뷰했다. 스와트와 페샤와르 주변의 간다라 미술 관련 유물 폭파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스와트는 탈레반이 장악해 파키스탄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다. 인터뷰는 작은 이슬람 모스크 앞에서 진행됐다. 오마르 칼리드 외에도 부사령관과 참모들이 함께 인터뷰에 응했다. 그들은 “알라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숭배하면 안 된다. 우리 탈레반 전사들은 알라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고고학자들은 간다라 미술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후대에게 물려줄 귀중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과거에는 알라를 모르던 무지한 사람들이 불상을 만들었고 이에 현혹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알라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런 우상을 계속 숭배하는 건 죄악이다. 우리 탈레반 전사들은 알라의 뜻을 받들어 우상 숭배를 할 수 없도록 보이는 모든 불교 유적을 파괴할 예정이다.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파키스탄에서도 이 성스러운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들의 목표는 ‘모든 간다라 미술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탈레반이 이미 장악한 스와트 지역의 박물관은 오마르 사령관의 명령으로 이미 파괴됐다. 그들은 박물관에 폭격을 가했고, 망가지지 않은 유물은 모두 마당으로 들고 나와 망치와 폭약을 동원해 부쉈다. 박물관 근처에 있던, 반은 땅에 묻혀 있고 반은 위로 솟아 있어 고고학적 연구 가치가 높았던 석불도 파괴했다.

    이제 탈레반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근처의 문화 유적까지 파괴 중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20㎞ 떨어진 소도시 택실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2세기까지 불교 중심지였던 곳으로 고고학 유산이 많다. 최근 파키스탄 탈레반이 이곳까지 유입되면서 택실라의 문화유산은 폭파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히 유적지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은 끊겼고, 20건가량 진행되던 외국의 연구·개발 활동도 중단됐다. 택실라의 박물관 큐레이터 압둘 나시르 칸은 “탈레반 반군은 문화의 적”이라며 “상황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우리 문화와 문화유산은 결국 파괴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탈레반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불교문화를 파괴하면 우리 후손은 이제 간다라 미술의 유적을 더 이상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박트리아 시대

    2001년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 지역의 유물을 더욱 위험에 빠뜨렸다. 미국의 첨단 전투 미사일과 무인 폭격기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무차별 폭격했다. 그로 인해 오래된 성곽이나 고대인의 집단 거주지 터 등이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다. 한 개만 떨어져도 마을 전체가 날아가는 토마호크 미사일은 그동안의 그 어느 문화 파괴 세력보다 더 엄청난 힘으로 유물을 파괴했다. 2008년 5월 나토 소속 뉴질랜드 군이 노후 군수품을 폭파 처리하다가 바미안 석불 가운데 높이 38m짜리의 잔해 일부를 파손한 사건이 있었다. 바미안 주 문화재 당국 책임자 나지불라 하라르는 “불상 잔해와 그 주변의 벽이 파괴됐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군이 졸지에 탈레반과 동급이 됐다. 알려지지 않은 유물 파괴 사건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온 점령자들은 대부분 유물 파괴 동조자들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난 후 유물 파괴의 주동자 탈레반이 물러나자 세계 각국 고고학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전국에 걸쳐 귀한 문화유산이 계속 발견된다. 학자들은 도굴꾼보다 먼저 이 유물을 확보하고 어떻게든 보존하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다. 지난 세월 숱한 내전과 탈레반 통치, 그리고 10년의 전쟁, 폭격에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노력이다. 특히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 팀은 단연 돋보이는 활동을 하고 있다. DAFA(프랑스 고고학 발굴단·Delegation Archeology France of Afghanistan)라는 이름으로 1922년부터 아프가니스탄 발굴 작업을 시작한 이들은 내전과 탈레반의 압력으로 한동안 활동을 중지해야 했다. 그러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인 2002년 프랑스 외교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거의 무너진 카불 국립박물관의 유물 복원작업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크 주의 박트리아 시대 유물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박트리아는 발크 주에 있는 옥수스 강을 따라 발달한 옥수스 문명으로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남부, 타지키스탄 서부에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특히 고대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중심지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조로아스터교 유물이 많이 발굴된다.

    1978년 11월 그리스 출신 러시아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는 아프가니스탄 북쪽 작은 언덕인 틸라 테페를 발굴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으로 총성이 그치지 않았지만 빅토르는 발굴에만 집중했다. 11월의 추운 날씨로 작업에 난항을 겪다가 발굴을 마무리지을 무렵 성터의 서쪽에서 황금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7개의 무덤 중 6개가 발굴됐는데 모든 무덤이 황금으로 가득했다. 그중 6호분에서는 신라의 왕관과 비슷하게 생긴 금관이 출토됐다. 박트리아 시대 유물의 첫 발견이었다. 2000년 전의 찬란한 황금문화가 이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되면서 전설로만 내려오던 박트리아 시대는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우리는 잃었던 역사를 다시 쓰게 됐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크 주는 힌두쿠시 산맥 사이로 비옥한 토양이 투란 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박트리아 시대의 집단 주거지였다. 고고학계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많은 유물이 쏟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DAFA는 발크 주에서 발굴 작업을 하다 2007년 마자르-이-샤리프에서 남서쪽으로 약 30㎞ 떨어진 체시마-이-샤파라는 계곡에서 고대 인류의 거주 흔적을 발견했다. 이 유적지는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멸망한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BC 6~4세기) 시대 유적지로 추정된다. 롤랑 브장발 DAFA 단장은 “13세기까지 이 유적지에 사람이 거주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정복자들도 이 지역을 거쳐갔다”고 말했다. 또 “몽골이 1220년 무렵 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이 지역 전체를 파괴하는 바람에 이 문명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 후 무려 10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 이 유적지에는 두께 9m, 높이 15m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로아스터교 유적 중 하나다.

    개발이냐 발굴이냐

    문제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유물이 새로운 적을 만났다는 점. 개발이라는 이름의 복병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최근 ‘개발’을 위해 아프가니스탄 땅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 2007년 중국 국영 광산업체 중국야금과공집단공사(中國冶金科工集團公司)는 아프간 정부와 30억 달러 계약을 맺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이나크 구리광산 개발권을 얻었다. 중국 정부는 이 업체가 공사를 딸 수 있도록 하는 데 온갖 공을 들였다. 카불에 종합병원을 기증하고 아프가니스탄 구호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중국 업체는 카불 정부와 비공식적으로 2011년 말까지 광산 건설을 끝낸다는 협정을 맺고 공사 기한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공사를 진행했다. 진행되던 공사에 제동이 걸린 것은 지난해 지하 갱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26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150개 이상을 발견하면서부터. 소식을 들은 고고학자들은 아이나크 구리 광산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돔 모양으로 된 불교 사원을 발견했다. 기원전 7세기경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했던 불교사원으로 유물의 양이 엄청났다. 아프가니스탄 박물관을 다시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사원의 복도와 객실은 벽화로 장식돼 있고, 3m 정도 깊이로 흙과 돌을 파내자 기울어져 있는 불상 여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 고고학자 필립 후작은 “이 사원은 아마도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일 것”이라며 유물의 가치를 극찬했다.

    그러자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중국 회사는 당황했다. 당장 공사를 중단해야 하지 않은가. 아프가니스탄 법에 따르면 3년간 고고학자에게 문화재 발굴권을 넘겨야 한다. 문제는 구리 광산 공사가 중단되면 중국 기업이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는 점이다. 공사를 계속하자니 유물이 훼손될 위험이 크고, 그에 따른 세계 비난 여론을 견디기 힘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결국 2011년 말이 지나갔고, 현재 공사는 중단된 상태다. 고고학자들은 또 그들대로 3년이라는 기간이 너무 짧다며 불평한다. 유물이 많은데다 대부분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상이라 이동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발굴에는 3년이 아니라 10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견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공사를 마무리 짓고 현찰을 만들려 하는 중국 업체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그래서 고고학자와 정부 간의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의 유물 도굴도 심각한 문제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가해진 서방국가의 경제제재 조치와 이어진 경제난으로 이라크 서민들은 궁핍해졌다. 이 틈을 타고 전문 도굴꾼들은 평범한 사람을 유혹해 도굴을 하게 했다. 도굴꾼들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살던 우르 등 사막지역에 있는 각종 유적과 무덤을 파헤쳐 조금이라도 돈이 될 것 같은 유물은 모조리 쓸어갔다. 전문 밀수꾼 조직이 이 유물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요르단 등으로 빼돌렸다. 이라크와 요르단 국경에서 세관에 압수된 유물만으로도 국립박물관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국립박물관이 돈이 없어 직원과 경비원을 무더기로 해고하자 이들이 도굴꾼으로 변신해 박물관의 유물을 훔쳐간 일도 있다. 이라크의 건축가이자 외교관인 니자르 함둔은 “전쟁 이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이라크 각지의 박물관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런던과 뉴욕, 도쿄 등지의 고미술상에 이라크의 문화재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전문 도굴꾼이 필요 없어졌다. 사람들은 당당하게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물을 꺼내 밀수꾼에게 팔아넘겼다. 전쟁이 나기를 기다리며 수집품 목록까지 만들어 배포한 외국 수집업자들은 도굴을 독려하려고 이라크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증언한 맥과이어 깁슨 시카고대 고고학과 교수는 “수집가들에게 이라크 전쟁은 미술품 수집의 황금시대나 다름없다”고 했다. 약탈과 당국의 무관심 속에 이라크 보물은 지금도 도굴 위험에 노출돼 있다.

    7인의 열쇠지기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이라크 바빌론 유적.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은 바빌론 유적지에 기지를 건설해 세계적인 비난을 샀다.

    여전히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는 도굴을 금지하고 단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전문 도굴꾼 굴람(가명)은 전직 북부동맹 군인이다. 그는 “유물 도굴이 불법이라는데 단속하는 사람은 없다. 혹시 걸려도 경찰에게 이익을 조금 떼어주면 되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유적지에 구멍을 뚫어 박트리아 시대의 황금동전을 찾아내거나, 불교 사원의 석탑까지 조각내 팔고 있다. 그는 “지난달엔 아주 진귀한 보석이 박힌 팔찌를 발견했다. 상인 말로는 20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이 팔찌를 팔아 100달러쯤 벌었다. 그 덕에 아이들이 굶지 않게 됐다”고 했다.

    굴람 같은 도굴꾼에 의해 불법으로 발굴된 유물은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도시 호자바우딘으로 흘러간다. 거대한 암거래 상권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금화와 은화 같은 고대 주화부터 박트리아 시대 목걸이나 장신구 등 값을 매기기조차 힘든 귀한 유물이 겨우 식사 몇 끼 가격으로 거래된다. 호자바우딘의 중개업자인 샤하르(가명)는 “외국에서 온 거래상들이 내게 웃돈을 주며 최대한 많은 물량을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우리는 이것이 외국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거래된 유물이 향하는 곳은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국가의 개인 수집가 수장고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유적이 땅속에 묻혀 있을 수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도굴꾼에게 ‘보물섬’으로 통한다. 고고학자라며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한 사람이 모두 고고학자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자로 위장한 전문 도굴꾼과 밀수꾼이 보물찾기를 하는 동안 귀중한 문화유산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다.

    세계 고고학계는 한동안 틸라 테페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1978년 빅토르 사리아니디가 발굴한 틸라 테페 분묘 유적의 금관 등 2만 점에 달하는 눈부신 황금 유물이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문만 무성할 뿐 지난 10년간 그 유물을 실제로 본 사람이 없었다. 탈레반이 황금을 녹여 팔아 군비에 충당했다는 설, 폭격으로 사라졌다는 설 등이 분분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2003년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카불 박물관의 보물 2만2000여 점이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카불 박물관 직원들이 박물관 소장품 중 가장 귀중한 문화재를 금고와 철제 상자 등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용기에 담아 카불의 여러 건물 천장에 나눠 숨겨놓았던 것이다. 가장 값진 황금 유물은 카불 중앙은행 지하 금고에 숨겼다. 그 후 금고 열쇠 7개를 각자 나눠 갖고 헤어졌는데 이 금고는 열쇠 7개를 모두 넣고 한꺼번에 돌려야만 열 수 있다.

    20년간 이들은 서로 왕래도 하지 않고 이 비밀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탈레반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모였다. 백발이 되어 만난 이들이 각자 하나씩 갖고 있던 열쇠를 넣고 한꺼번에 돌리자, 마침내 금고 문이 열리며 황금 유물이 눈부신 빛을 뿜었다. 기원전 23~19세기 박트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금 공예품과 상아조각, 청동상, 불상, 금화 등 값을 매기기 어려울 만큼 진귀한 것들이다. 그중에는 그 유명한 박트리아 시대의 틸라 테페 왕관도 포함돼 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사건에 세계 고고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국의 고고학자 짐 윌리엄스는 “그 왕관과 유물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며 흥분했다. 열쇠지기 중 한 사람인 나즈볼라(가명)는 “나는 이 보물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목숨보다 귀한 우리의 문화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유물들이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우리 자손들도 자랑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의 유산을 보길 바란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물관 직원들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물을 팔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빛나는 용기와 인내를 보여줌으로써 인류에게 큰 선물을 줬다. 필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유물을 취재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동전과 깨진 화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박트리아 시대의 유물이 전쟁으로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안타까웠다. 카불의 7인의 열쇠지기가 그랬듯, 인류 역사를 설명해줄 유물들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 세대 모든 사람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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