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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이슈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유적·유물 수난기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전쟁과 빈곤 속에 국보급 문화재 약탈·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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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파괴할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까지 붕괴시킨다. 세계 문명의 보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어지는 전쟁은 더욱 그렇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간다라 미술, 박트리아 시대를 증언하는 인류사의 보물들이 오늘, 폭격과 약탈과 도굴 속에 사라지고 있다. 참혹한 현장을 고발한다.
이라크 바그다드, 2003년 4월 10일. 날짜까지 잊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게 그날을 기억한다. 당시 바그다드는 이라크 전쟁 발발과 미군의 진격으로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지면서 천지가 개벽하고 있던 때였다. 그날 우연히 바그다드 박물관 앞을 지나가다 많은 사람과 손수레, 차가 뒤엉켜 있는 걸 봤다. 사람들이 담장을 넘어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이윽고 바그다드 박물관 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사람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고 나온 물건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국보급 유물이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하는 현장을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두상을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점토판을 차에 마구 실었다. 그중 한 유물은 필자도 책에서 본 수메르인의 이난나 여신상이었다. 기원전 4000년 무렵의 것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약탈자는 여신상을 조수석에 던져 넣고 차를 운전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향해 총까지 쏘면서 값진 유물을 선점하기 위한 무법천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날 바그다드 박물관에서 사라진 유물은 1만5000여 점에 달한다.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었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 서판과 아카디아의 우루크 청동상도 포함돼 있다.

전쟁 통에 국립박물관이 털린, 세계사에 유례없는 그날을 이라크 고고학자들은 ‘이라크 문화 사망일’이라고 한다. 이브라힘 칼리드 바그다드 대학 고고학과 교수는 “우리 모두 그날을 기억한다. 수천 년 된 유산을 잃어버린 날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고고학자들은 그날 박물관 앞에서 망연자실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유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라도 알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내게 총을 겨누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쟁이 나기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은 미군에게 박물관 유물이 약탈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세계 학자 100여 명이 사이언스지를 통해 미국에 “폭격뿐 아니라 무법천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탈로 귀중한 유물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 일도 있다. 그럼에도 미군은 바그다드로 들어오자마자 후세인궁으로 진격했고 국립박물관은 혼란 속에 방치됐다. 박물관에서 약탈이 계속되고 국제사회의 맹비난이 쏟아지자 이틀이 지난 4월 12일에야 미군이 박물관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탱크와 총으로 민간인 출입을 막은 뒤에야 비로소 약탈의 참극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많은 유물이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을 전공한 맥과이어 깁슨 미국 시카고 대 교수는 “눈앞의 이익과 정치 상황 때문에 유물·유적이 훼손된다면 이는 이라크인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의 비극이라고 전쟁 전에 경고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문명의 종말



이라크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꽃피웠다.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다. 고대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어 조사된 유적지만 전국에 10만 곳이 넘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출생지 우르, 전성기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국제 고고학계가 이라크 내에서 인류 역사 핵심 유적으로 꼽은 곳만 1만2000여 곳이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오늘의 이라크 남부 수메르 지역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문명의 발전으로 평가받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출현했다. 그래서 남부 이라크는 눈에 띄는 언덕 하나하나가 모두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할 정도로 유물의 보고다.

필자는 이라크를 취재하다 곳곳에서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된 유물들을 만났다. 이라크 남부도시 나시리아의 시장에서 수메르인의 원통도장을 우리 돈 2만 원 정도에 파는 좌판 상인을 본 적도 있다. 이 물건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집 뒤 언덕으로 안내했다. 상인은 그곳 땅을 파헤쳐 각종 유물을 꺼냈다고 했다. 고고학 지식이 없는 필자가 보기에도 분명 진품 원통도장이었다. 일부러 가품을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방에 널린 것이 고대 유물인 셈이다. 훗날 영국의 고고학자에게 그때 본 원통도장에 대해 설명했더니 그것은 수메르인의 쐐기문자가 각인된 인장으로 유럽시장에서는 수천 달러의 가격에 팔린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좌판 물건 취급을 받는 게 오늘 이라크 현실이다. 그런데 전쟁까지 터졌으니 오죽 했겠는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문화유산이 마구 약탈당하자 세계는 비난 여론으로 들끓었다. 화들짝 놀란 미군은 박물관을 지키러 나섰고 유물의 유출 경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전문 인력과 미연방수사국(FBI) 요원, 미국 세관원까지 동원해 약탈 문서와 유물을 찾아다녔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도 특별 수사팀을 파견해 문화재 회수를 도왔다. 하지만 수십 점의 가장 귀한 유물은 끝내 찾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유물이 사라졌는지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유물은 이미 이라크 땅을 떠나 인접국 요르단이나 시리아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중개상을 거쳐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으리라. 요르단·시리아는 물론 미국 뉴욕, 이탈리아 제노바 등에서 이라크 유물 수백여 점이 압수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에서 귀환하는 영국·미국의 언론인과 군인이 유물과 예술품, 현금, 무기 등을 전리품으로 챙겨오다 세관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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