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 촬영 현장.
나는 어릴 적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 많은 궁금증이 날 영화감독으로 만들었을까? “왜 영화를 만드시죠?”라는 인터뷰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성숙하는 과정 같아요.”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고 하는데 영화감독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가지각색의 고통을 경험한다. 촬영 규모에 상관없이 제작비에 시달리며, 항상 시간에 쫓긴다. 항상 참는다. 화를 참고, 추위를 참고, 더위를 참고, 잠을 참고, ‘자연의 부르심’을 참을 때도 많다. 긴 촬영 기간 탓에 실연의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프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소임 중 하나다. 일단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은 자꾸 빠지고, 흰머리가 급속도로 늘어난다. 작품 만들기 전과 그 후의 모습은 정말 다르다. 작품이 잘되면 모두 자화자찬이고, 망하면 모두 감독 탓이다. 영화 개봉 후 몇 달간 전화기는 조용하다. 고독과 싸워 이기는 것도 영화감독의 일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출이란 그럴싸하게 그림을 그려 카메라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다. 해는 저물고 있고, 다섯 커트나 찍을 게 남아 있는데, 두 커트밖에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순간, 진정 연출이 뭔지 알게 된다.” 과언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허탈한 상황에 맞닥뜨려 주저앉고 싶을 때도 최선을 다하자는 긍정적 의지를 온몸에서 끌어내야 하는 이가 영화감독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는 습관이 생긴 것은 내가 ‘영화감독’이어서일까?
왜 난 이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처음엔 이럴 줄 몰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난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을까? 표현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욕망이었던가? 지혜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었던가? 시간은 자꾸만 간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소년과 대화를 나눈다. 항상 영화로 사고하고, 영화로 숨 쉬고, 영화로 꿈을 꽃피우는 맑고 총명한 소년. 그 소년은 어느덧 미래에 영화감독이 되고, 나는 그 소년에게 지금 말한다.
영화감독 : 요즘도 영화감독을 꿈꾸나?
소년 : 매일 꾸지. 어제 학교에 단막극 과제를 써서 냈는데, 점수가 D-야. 내 일생 첫 대본이었는데 말이지.
영화감독 : 내용이 뭐지?
소년 : 어느 비행소년이 교장실에서 혼나다가 교장선생님을 죽이는 내용이지.
영화감독 : 거 좀 심했네. 완성도에 상관없이 소재가 점수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듯. 자화상인가?
소년 : 영화감독은 원래 자기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소설가처럼.
영화감독 : 넌 너무 진지해. 나가서 야구 좀 하지? 친구들과 뛰어놀고. 여자도 사귀어보고 말이야. 키스도 못해봤지? 일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영화 감상에 쏟아 붓는 것 아닌가? 시커먼 극장에서 혼자 고독하게…, 청춘이 아깝지 않나?
소년 : 그런 당신은 연애 잘하고 있나? 폼 잡고 다니지 말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면 어떨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봐야 사랑이야기를 걸작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영화감독 : 내가 만든 영화 때문에, 모두 내가 연애를 잘한다고 착각하지. 난 그렇지 않아. 사랑은 허상이야. 모두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야.
소년 : 중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의 생각과 비슷하군. 나도 공감하지만. 사랑에 대해 그렇게 규정 지으면 살아가기 힘들걸.
영화감독 : 나도 규정 지은 건 아니야. 모두가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할 뿐….
소년 : 과연 무엇이 좋은 영화감독을 만들까? 난 정말 좋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거든? 그냥 영화감독이 아니고 말이지. 과시욕에 불타며 노력하는, 가식 속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냥 그런 영화감독 말고….
영화감독 : 그건 나도 궁금해. 본질을 찾으려 노력할 때, 그게 일단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문턱에 서는 것 아닐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때, 본질을 파헤치며 말이지!
소년 : 당신은 꿈이 뭐지?
영화감독 :영화감독이 꿈이었지.
소년 :지금 영화감독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