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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겉만 화려해지는 속물들의 세상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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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일상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면 다른 시각이 열린다. 작가가 서울의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보려는 이유다.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파리 시내 뤽상부르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

파리 생활 10년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 지 6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낯설었던 서울의 풍경이 하나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생소하고 어지럽던 서울 곳곳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인간에게는 새로운 사물이나 삶의 방식을 나름대로 받아들여 적응하는 능력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고칠 수 없는 부분에는 적응해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 틀 안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넓혀나간다. 나도 이제 나름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할 만큼 적응했다.

누구에게나 매일 다니는 길이 있다. 집에서 나와 직장이나 학교로 가는 길, 직장이나 학교 주변의 음식점, 공원, 카페, 영화관, 공연장, 시장, 백화점, 학원, 헬스클럽 등으로 오가는 길이 있다. 그 일상의 공간들은 너무 익숙해서 새로움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서 낯선 환경에서는 불안감을 느끼며 적응하기 위해 애쓰다가도 거기에 익숙해지면 지루함을 느끼며 신선한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파리에 살 때 친하게 지낸 프랑스 친구의 이야기다. 은행원인 그 친구는 저녁에 직장 일이 끝나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동네의 카페로 가서 포도주나 맥주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일상의 공간을 떠나 새로운 느낌을 주는 장소에 있을 때 새로운 생각이 잘 떠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그는 말했다.

반 고흐가 머물며 그림을 그린 아를이라는 프로방스의 도시에 사는 프랑스 친구는 일상적으로 다니는 아를 시내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건물 벽의 돌조각, 광장 바닥에 비친 그림자, 어느 집 베란다의 화분, 상점 진열창에 새로 나온 물건, 빵집 주인 여자의 머리 모양 등등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번역가인 그녀는 그런 작은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당연하게 거기 있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작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감수성의 회복이 일상을 즐겁게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흘러가버리면 그만일 작은 풍경들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경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풍경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나날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권태가 없다.



보잘것없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위대함 속에서 보잘것없음을 찾아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허풍과 허세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작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눈도 가지고 있다.

미소(微小)한 것 속에 들어 있는 지대(至大)한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노력이 ‘일상생활의 사회학’과 미시역사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그냥 지나칠법한 미세한 연구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고 사회적 총체성의 구조를 가늠한다. 은행 총수의 자리를 마다하고 예술사 연구에 몰두했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말했다.

“신은 세밀한 부분에 거한다(God is in details).”

풍경 #28 여성다움을 뽐내는 서로 다른 방법

외국의 새로운 도시에 가면 건물과 더불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그럴 때도 여성은 남성의 여러 가지 면모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1980년대 내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 같은 기숙사에 살던 프랑스 여학생은 로마와 피렌체 여행을 다녀온 후 “이탈리아 남자들 정말 멋지더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여성들에게 자상한 점 등 매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남성은 아무래도 여성들의 외모를 더 주시한다. 2000년대 이후 파리에서는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들을 두고 ‘푸페(인형·la poupee)’라고 한다. 모든 한국 여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파리에 갓 도착한 여성일수록 의상과 화장에서 프랑스 여성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정성을 들여 꾸미고 다니기 때문이다. 요즘 외국의 연예인들 사이에 ‘코리안 뷰티(Korean beauty)’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 여성 연예인들의 뛰어난 화장법과 자기 연출법 때문에 생긴 말이다.

얼마 전 동대문 의류 상가 부근의 한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다. 앞자리에 앉은 50대의 한 중년 남자가 전화에다 대고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 이번에 서울 와서 느낀 게 많았을 거다.”

무슨 소리인지 귀가 쫑긋해서 다음 대화를 엿들었다.

“눈도 뒤집어 까고 화장도 하면 훨씬 달라 보일 거다!”

말투로 보아 중국 옌볜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이 중년 남자는 옌볜에서 온 처녀가 서울 여성들의 외모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 분발해서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말을 하던 참이었다.

바캉스 철이다. 태양의 계절이다. 노출의 계절이다. 여름이 되면서 서울 여성들의 옷차림이 달라지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옷차림은 ‘하의 실종’이다. 197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경찰들이 30cm 자를 들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재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그때는 무릎 위 5cm 이상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단속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가랑이 아래 5cm도 안 되는 미니팬츠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닌다. 집에서 부모가 반바지가 너무 짧지 않으냐고 딸에게 말하면 “다들 그렇게 입고 다녀요!”라는 말 한마디로 잔소리는 끝나버린다. 여성들의 외모에서 ‘섹시함’이라는 가치가 ‘우아함’이나 ‘고상함’이라는 가치를 누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한국 여성들의 옷차림은 세계 첨단의 노출도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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