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겉만 화려해지는 속물들의 세상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07-20 0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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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일상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면 다른 시각이 열린다. 작가가 서울의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보려는 이유다.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파리 시내 뤽상부르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

    파리 생활 10년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 지 6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낯설었던 서울의 풍경이 하나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생소하고 어지럽던 서울 곳곳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인간에게는 새로운 사물이나 삶의 방식을 나름대로 받아들여 적응하는 능력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고칠 수 없는 부분에는 적응해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 틀 안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넓혀나간다. 나도 이제 나름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할 만큼 적응했다.

    누구에게나 매일 다니는 길이 있다. 집에서 나와 직장이나 학교로 가는 길, 직장이나 학교 주변의 음식점, 공원, 카페, 영화관, 공연장, 시장, 백화점, 학원, 헬스클럽 등으로 오가는 길이 있다. 그 일상의 공간들은 너무 익숙해서 새로움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서 낯선 환경에서는 불안감을 느끼며 적응하기 위해 애쓰다가도 거기에 익숙해지면 지루함을 느끼며 신선한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파리에 살 때 친하게 지낸 프랑스 친구의 이야기다. 은행원인 그 친구는 저녁에 직장 일이 끝나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동네의 카페로 가서 포도주나 맥주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일상의 공간을 떠나 새로운 느낌을 주는 장소에 있을 때 새로운 생각이 잘 떠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그는 말했다.

    반 고흐가 머물며 그림을 그린 아를이라는 프로방스의 도시에 사는 프랑스 친구는 일상적으로 다니는 아를 시내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건물 벽의 돌조각, 광장 바닥에 비친 그림자, 어느 집 베란다의 화분, 상점 진열창에 새로 나온 물건, 빵집 주인 여자의 머리 모양 등등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번역가인 그녀는 그런 작은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당연하게 거기 있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작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감수성의 회복이 일상을 즐겁게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흘러가버리면 그만일 작은 풍경들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경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풍경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나날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권태가 없다.



    보잘것없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위대함 속에서 보잘것없음을 찾아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허풍과 허세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작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눈도 가지고 있다.

    미소(微小)한 것 속에 들어 있는 지대(至大)한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노력이 ‘일상생활의 사회학’과 미시역사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그냥 지나칠법한 미세한 연구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고 사회적 총체성의 구조를 가늠한다. 은행 총수의 자리를 마다하고 예술사 연구에 몰두했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말했다.

    “신은 세밀한 부분에 거한다(God is in details).”

    풍경 #28 여성다움을 뽐내는 서로 다른 방법

    외국의 새로운 도시에 가면 건물과 더불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그럴 때도 여성은 남성의 여러 가지 면모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1980년대 내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 같은 기숙사에 살던 프랑스 여학생은 로마와 피렌체 여행을 다녀온 후 “이탈리아 남자들 정말 멋지더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여성들에게 자상한 점 등 매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남성은 아무래도 여성들의 외모를 더 주시한다. 2000년대 이후 파리에서는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들을 두고 ‘푸페(인형·la poupee)’라고 한다. 모든 한국 여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파리에 갓 도착한 여성일수록 의상과 화장에서 프랑스 여성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정성을 들여 꾸미고 다니기 때문이다. 요즘 외국의 연예인들 사이에 ‘코리안 뷰티(Korean beauty)’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 여성 연예인들의 뛰어난 화장법과 자기 연출법 때문에 생긴 말이다.

    얼마 전 동대문 의류 상가 부근의 한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다. 앞자리에 앉은 50대의 한 중년 남자가 전화에다 대고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 이번에 서울 와서 느낀 게 많았을 거다.”

    무슨 소리인지 귀가 쫑긋해서 다음 대화를 엿들었다.

    “눈도 뒤집어 까고 화장도 하면 훨씬 달라 보일 거다!”

    말투로 보아 중국 옌볜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이 중년 남자는 옌볜에서 온 처녀가 서울 여성들의 외모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 분발해서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말을 하던 참이었다.

    바캉스 철이다. 태양의 계절이다. 노출의 계절이다. 여름이 되면서 서울 여성들의 옷차림이 달라지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옷차림은 ‘하의 실종’이다. 197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경찰들이 30cm 자를 들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재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그때는 무릎 위 5cm 이상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단속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가랑이 아래 5cm도 안 되는 미니팬츠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닌다. 집에서 부모가 반바지가 너무 짧지 않으냐고 딸에게 말하면 “다들 그렇게 입고 다녀요!”라는 말 한마디로 잔소리는 끝나버린다. 여성들의 외모에서 ‘섹시함’이라는 가치가 ‘우아함’이나 ‘고상함’이라는 가치를 누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한국 여성들의 옷차림은 세계 첨단의 노출도를 자랑하고 있다.

    한국인의 복장이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뀐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1882년 개화파 관료 박영효가 상투를 자르고 양복 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것을 한국인 양장의 효시라고 한다면 양장은 불과 130년 전에 시작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앞서가는 개화파 남성 엘리트층의 이야기고 일반인은 6·25전쟁 이후에도 대부분 한복을 입었다. 6·25전쟁 당시 피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거의 대부분 한복 차림이다. 그러고 보면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한국인의 의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국민소득의 향상과 식생활의 변화로 한국 젊은이들의 신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 사람들의 신체처럼 상체에 비해 하체가 점점 더 길어지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롱다리’라는 말이 생겼고 그 롱다리를 과시하기 위해 미니팬츠를 착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짱’보다 ‘몸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긴 다리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이 아름다운 여성미의 과시인 모양이다.

    그런데 파리에선 초미니 반바지 착용으로 여성성을 과시하는 이가 드물다. 파리 여성들은 양 가슴 사이에 갈라진 부분(고르주·gorge라고 하는 데 원뜻은 협곡이란 말이다)을 살짝 보이게 내놓는 것으로 여성다움을 과시한다. 여성의 상징은 다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여성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초미니 바지 패션이 미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1970년대 중반 이화여대에는 해외 교포 자녀들을 위해 영어로 수업하는 ‘여름학교(summer school)’가 운영됐는데 그곳에 온 수강생들 가운데 무릎을 훨씬 올라가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학교 당국에서는 그런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한국 여성들이 여성다움을 과시하는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이 된다.

    풍경 #29 성형 열풍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몰려있는 성형외과 의원들.

    근대(modern times)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지배가 끝나고 ‘보이는 존재’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한 힘이 사라진 자리에는 보이는 세상의 화려함이 자리 잡게 된다.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갈수록 눈에 보이는 미세한 부분까지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파고든다. 건물 외관이 점점 더 화려해지고 사람 얼굴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얼굴 성형도 그 하나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 내리면 주변에 성형외과 광고가 즐비하다. 지하철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동호대교가 끝나는 육교 양옆으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성형외과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성형외과의 광고 문구들은 얼굴과 외모를 고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를 자신 있게 해주는 곳, KKK성형외과’

    ‘아름다운 얼굴, 자신 있는 미소’

    ‘좋은 인상, 좋은 만남, 꿈의 실현’

    성형외과마다 전공 분야를 자랑스럽게 광고한다. 안면 윤곽 전공 성형외과의 광고에는 “이마 윤곽, 광대뼈, 돌출입, 주걱턱, 무턱, 비대칭턱, 사각턱” 등이 적혀 있고 코 전문 성형외과 광고에는 “긴 코, 낮은 코, 매부리코, 복 코, 넓은 코, 휜 코, 짧은 코, 코끝 성형”이라고 적혀 있다. 눈 전공 광고에는 쌍꺼풀은 기본이고 “눈매 교정, 앞트임, 뒤트임, 눈밑 애교” 등이 적혀 있다.

    얼굴만이 아니라 몸매가 중요해진 세상이다. 짧은 손가락, 발가락 교정도 가능하고, 휜 다리를 고치면서 키도 크게 만들어준다. “휜다리 +사지 연장수술로 7cm를 늘린 후 S라인을 형성시켜드립니다”라는 광고도 있다. “배꼽 통한 가슴 성형” “가슴확대, 가슴축소, 처진 가슴, 지방 흡입, 힙업, 종아리 알 관리, 종아리 알 축소”에서부터 뼈 안 깎고 안면 윤곽을 교정하는 양악수술에 이르기까지 운명적으로 정해진 얼굴을 버리고 원하는 얼굴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기술은 끝 모르게 발전하고 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완벽한 기술과 안전성으로 시술해 완벽한 만족감을 준다는 성형외과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이자 특이한 한국적 열풍이다.

    풍경 #30 괴물 마스크

    파리에는 가끔씩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가린 포대자루 같은 옷(부르카)을 입은 이슬람 여성들이 눈에 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오싹할 뿐만 아니라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서울 거리에도 가끔씩 눈만 내놓고 얼굴을 다 가린 괴물 같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여자들이 보인다. 아마도 껍질을 벗겨내는 피부시술이나 성형수술한 후에 집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일 것이다. 여름철이면 피부를 망가뜨리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그런 괴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여성들도 있다. 햇빛이 얼굴에 닿으면 잡티, 기미, 주근깨를 만들기 때문이란다. 그런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소름이 오싹 돋는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얼굴은 지위의 상징이다. 동창회 결혼식 등 사람들이 모여 지위를 과시하는 장소에 “나 이런 여자다”라고 고개를 쳐들고 나타나기 위해 보통 때는 괴물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일까.

    풍경 #31 버려진 보호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현대고를 지나 한남대교 남단을 지나다보면 오른쪽 길가에 먼지를 쓰고 서 있는 제법 큰 보호수(保護樹)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건물 바로 앞에 서 있는데 건물과 붙어 있어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나무는 한창 기운을 쓰며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려야 할 계절에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형국이다. 죽지 못해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옛날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는 그 나무가 서 있는 지점이 한남대교를 건너가기 전의 마지막 휴식처였을 것이다. 나무는 그곳에 서서 여름이면 지나가는 상인이나 나그네들에게 그늘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렇게 덕을 베풀었을 나무가 오늘에 와서는 건물에 치여 마음대로 가지를 뻗지 못하고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서 있다. 건물 면적을 조금 더 넓히려는 욕심에 나무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보호수라면 그 주변 5m정도는 확보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수백 년 된 오래된 나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누구나 환경보호를 부르짖는 시대이지만 아무도 그 나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턱없는 상상이지만 그 건물이 나무에게서 물러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풍경 #32 집단 이기주의

    요즈음 버스 안에서 자주 만나는 서울시정 홍보 광고물이 있다.

    -펼칠까 접을까?

    -희망 서울, 뉴타운 개발은 주민의 뜻대로.

    -정확한 실태조사와 갈등조정을 통해 주민 뜻대로 촉진과 해제가 진행됩니다.

    -시민이 시장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뉴코아 아울렛’ 앞을 지나가는데 한 아파트 외벽에 붙어있는 대형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박원순 시장님 아파트 창문 앞에 지하상가 대형연통이 왠(웬의 오기인 듯함) 말입니까? 정말 이래도 됩니까?”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소유의 고속터미널 지하상가가 리모델링을 하면서 지하 공기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기존의 냉각탑을 보수하는 중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아마도 시설관리공단이나 구청에 민원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어서 직접 시장을 향해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 집 뒷마당에 화장장, 쓰레기 소각장, 원자력발전소, 핵폐기물 처리장 등 혐오시설이나 기피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집단 이기주의 현상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다니다보면 이처럼 특정 집단의 항의나 요구가 적혀 있는 플래카드를 심심치 않게 만난다. 파리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풍경 #33 버스 안 풍경

    며칠 전 버스를 타고 갈 때의 일이다. 버스 운전사 오른쪽 위에 부착된 전광판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문장이 계속 깜빡였다.

    ‘깨끗한 자동차(초록색 글씨), 친절한 기사(주황색 글씨), 안전한 버스(붉은색 글씨)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사랑받는 버스가 되겠습니다.’

    파리에서는 버스 운행이 공공서비스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광고 문구는 볼 수가 없다. 어쨌든 과거에 비해 서울 시내버스 안은 깨끗해졌고 운전기사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를 하며, 버스 안은 냉방이 잘되어서 시원하다. 에어컨이 없는 파리시의 버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시원하고 쾌적하다.

    그런데 경고성 문구가 그 쾌적함을 앗아간다.

    ‘버스 운전사 폭행 엄벌’

    ‘개정된 특정 범죄 가중처벌법은 버스운전사 폭행 상해시 3년 이상 징역’

    ‘성숙된 교통문화의 정립으로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킵시다’

    풍경# 34 네온사인 십자가

    서울의 밤풍경은 네온사인으로 현란하다. 파리에서 온 프랑스 친구와 남산타워에 올라가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볼 때의 이야기다. 여기저기 교회 옥상에 솟아오른 붉은 네온 십자가들이 보였다. 그 친구는 서울 전체가 마치 거대한 묘지 같다고 말했다. 사실 파리에도 여러 개의 커다란 공동묘지가 버젓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 십자가가 즐비하다. 하지만 네온사인까지 달아서 밤에도 빛나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엔 붉은색 십자가만이 아니라 흰색, 초록색, 청색 십자가도 등장했다. 유심히 바라보면 속까지 색깔이 꽉 찬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자리만 네온으로 두른 십자가도 있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가 있듯이 부자교회도 있고 가난한 교회도 있다. 가난한 교회는 십자가 설치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장자리만 네온으로 두른 십자가를 설치하고 부자교회는 더 높은 곳에 더 속이 꽉 찬 큰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설치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푸른색에서 빨간색, 초록색, 보라색으로 색깔이 바뀌는 십자가를 설치한 교회 앞을 지나갔다. 한국의 교회가 신도 수를 늘리고 큰 교회당을 짓는 경쟁을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 수많은 십자가가 예수의 고난의 상징으로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광고판들과 큰 차이 없이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 더 좋은 물건이 있습니다!”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풍경 #35 이웃 사랑

    내가 지나다니는 아파트 단지 한구석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검은 대리석 판에 ‘가족사랑, 이웃사랑, 민족사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눈 뒤집어 까고 화장만 하면 달라 보일까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기독교나 가톨릭은 이웃사랑의 종교다. 가족과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는 종교다. ‘이웃사랑’의 이웃은 동네 사람이나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웃사랑이 가족사랑과 민족사랑 사이에 끼여 있다.‘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언제나 가족 사랑을 먼저하고 가까이에 있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엮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민족을 생각하라고 지시한다. 나와 가족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를 기대하는 것은 정녕 난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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