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

몰락하던 왕조 부활시킨 그라운드의 ‘잭 웰치’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7-24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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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수 시절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한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MLB)에서 9번이나 올스타에 뽑히고,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할 정도로 잘나갔다.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 팀인 뉴욕 양키스의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 변신한 첫 해에는 1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값진 선물을 팀에 안겼다. ‘감독 갈아치우기’가 취미인 고집불통 구단주와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슈퍼스타 선수들 사이에서 조용한 카리스마를 빛내며 12년간 양키스의 4회 우승을 일군 그는 바로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이다.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그에게 미국 경영주간지 ‘포천’은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에 버금가는 경영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

    조 토레(왼쪽) 전 뉴욕 양키스 감독이 지난 1월 양키스구장에서 열린 올드타이머데이 행사에 참석해 팬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부하 직원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동시에 상사를 만족시키는 전천후 일꾼. 게다가 경쟁에 나서면 십중팔구 승리로 이끈다.”

    스포츠 지도자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게다가 경영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잭 웰치 전(前)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어떨까. 이 칭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조 토레(72) 전(前) 뉴욕 양키스 감독이다.

    토레 감독과 웰치 회장이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던 2001년 미국 경영주간지 ‘포천’은 두 사람의 경영 능력을 비교·분석하는 색다른 기사를 내놨다. ‘포천’은 그 결과 ‘명감독’이 좀 더 우수하다며 토레의 손을 들어줬다. 토레 감독이 야구팀이 아니라 기업체를 운영하는 인물이었다면 웰치 회장에 맞먹거나 그를 능가하는 걸출한 경영자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

    토레 감독이 이런 칭송을 받은 이유가 뭘까. 쓰러져가던 양키스 왕조의 부활을 가능케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최다 우승 횟수, 가장 비싼 구단 가치, 최고로 많은 선수단 전체 연봉(payroll), 홈런왕 베이비 루스가 속했던 전설의 야구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에는 단 한 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도 거두지 못해 ‘모래알 군단’으로 불리는 치욕을 겪었다. 이 모래알 군단은 1996년 사령탑으로 등장한 조 토레의 부임 후 환골탈태했다. 월드시리즈에서 4차례 우승하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월드시리즈 3년 연속 제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며 최강팀으로 다시 발돋움했다.



    이 기간에 그가 전립선암과 싸웠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토레 감독에 대한 미국 야구계의 칭송은 더 높아졌다. 토레 감독은 감독으로 활동한 29년간 통산 4329경기에서 2326승 1997패(승률 5할3푼8리)의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대 감독 다승 5위를 달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토레 감독의 성공이 소위 선수 ‘빨’에 기인한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영원한 리더 데릭 지터, 홈런왕 알렉스 로드리게스, 특급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 호타준족의 대명사 게리 셰필드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스타들이 즐비한 양키스에서 우승을 일궈내는 건 어렵지 않다는 것.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특급 선수가 많은 만큼 개개인의 독불장군식 행동이 잦았고, 선수단 전체의 기(氣)도 셌다. 토레 감독은 이런 톱스타를 한 팀으로 아우르고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토레 감독의 성공은 스타 선수를 대상으로 한 철저한 1대 1 ‘감성 마케팅’에 기인했다. 본인 역시 스타 선수 출신인 만큼 선수들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잘 헤아린 토레 감독은 ‘채찍’보다 ‘당근’을 중시하는 전략을 썼다. 그는 선수들에게 어지간하면 성을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들을 믿는다는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형의 영향으로 시작한 야구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
    ‘메이저리그의 독재자’로 유명했던 조지 스타인브레너 고(故) 양키스 구단주와도 원만하게 지냈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취미가 감독 갈아치우기일 정도로 구단 운영에 시시콜콜 간섭했지만 토레 감독은 특유의 온화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좋은 성적으로 구단주의 간섭을 잠재웠다.

    최근 미국 야구협회는 토레 감독을 ‘20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나설 미국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으로 추대했다. 그가 메이저리그 내 최고 선수들로만 구성되는 WBC 감독으로 뽑힌 것 역시 “쟁쟁한 스타급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조 토레만한 역량을 지닌 감독이 없다”는 평판 덕분이다.

    토레 감독은 1940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탈리아 이민자 가계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안은 엄격한 가톨릭 교풍이 지배하는 대가족이었고, 가족 간 우애(友愛)가 유달리 두터웠다. 그의 누나인 마거릿 토레는 수녀였다.

    3남1녀 중 둘째 아들인 토레 감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족은 아홉 살 위의 형 프랭크 토레다. 프랭크 토레는 1950~60년대 밀워키 브루어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에서 1루수로 뛰었다. 형의 영향을 받아 토레 감독도 어릴 때부터 야구공을 잡았다.

    프랭크 토레는 메이저리그에서 8시즌 동안 선수로 활약하며 2할5푼8리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다. 후하게 평가해도 B급 선수 이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형과 달리 토레 감독은 1960년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다.

    야구 선수 토레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때는 1964년이다. 당시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64년 타율 3할1푼2리, 홈런 12개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처음 뽑혔다. 이듬해인 1965년에는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196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한 뒤에는 야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3루수로 보직을 바꿨음에도 토레 감독은 1971년 타율 3할6푼3리, 홈런 24개, 137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그야말로 선수 생활의 절정기를 만끽했다.

    토레 감독은 선수 생활 말년에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왔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 메츠에서 활동한 그는 통산 18시즌을 뛴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동안 타율 2할9푼7리, 통산 25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포수, 1루수, 3루수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었음에도 어느 포지션에서건 수준급의 성적을 냈다. 현역시절 9차례나 올스타에 선발될 정도로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에서 무능한 지도자로

    토레 감독은 1977년 시즌 중 뉴욕 메츠의 선수에서 코치로 변신했다. 이후 1981년까지 메츠 감독으로 활동했지만 그 기간에 낸 성적은 형편없었다. 감독으로 재직한 5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은 고사하고, 5할 승률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결국 1981년 시즌 중반 감독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1982년 토레 감독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명장인 바비 콕스 전(前)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의 뒤를 이어 애틀랜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도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82년 한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지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연패해 탈락했다. 이후 성적은 더 나빠졌고 그는 감독 부임 2년 만인 1984년 해고당했다.

    결국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토레 감독은 무려 5년간 미국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인 ESPN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해야만 했다. 오랫동안 야인(野人) 생활을 하던 토레 감독은 1990년 드디어 메이저리그 복귀 기회를 잡았다. 자신의 선수 생활 동안 황금기를 보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수장(首長)이 된 것. 하지만 1995년까지 6시즌 동안 그는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미국 야구계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은 역시 명감독이 될 수 없다”며 토레의 지도력을 폄하했다. 무려 세 개 구단에서 잇따라 실패를 맛본 그를 데려갈 팀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최고 인기팀 사령탑이 되다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

    뉴욕 양키스 선수들이 7월 1일 양키스구장을 찾은 조 토레(맨 오른쪽) 전 감독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토레 감독은 1996년 메이저리그의 최고 인기 팀인 뉴욕 양키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의 영입을 주도한 사람은 ‘보스(The boss)’라는 칭호로 유명한 고(故)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구단주였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1973년부터 2007년까지 34년간 양키스를 소유하며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둘렀다. 감독, 단장, 선수, 스태프 등 구단 내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쳤다. 평소 옷차림이나 사생활 등 야구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간섭이 심했다. 빌리 마틴 전 양키스 감독은 그로부터 무려 5번이나 기용됐다 해임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토레 감독이 양키스에 발을 담그기 전 10여 년 동안 여러 팀을 전전하며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기에 많은 사람이 토레의 영입에 의문을 표시했다. 심지어 뉴욕 주요 언론들은 고집불통 구단주가 무능력한 감독을 선택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일부 언론은 ‘멍청한 조 토레(Clueless Joe)’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토레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단에게 “나를 믿으라”는 판에 박힌 말 대신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 보이겠다”는 다짐으로 무명 지도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선수단의 불안을 잠재웠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에게는 “너는 곧 살아날 것”이라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를 통해 선수들과 신뢰를 쌓아간 그는 1996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꺾으며 뉴욕 양키스에 우승컵을 안겼다. 1978년 우승 이후 18년 만의 쾌거였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뛸 듯이 기뻐했고 뉴욕 언론도 앞 다퉈 그를 칭송했다.

    1996년의 우승은 토레 감독 개인에게도 재기의 발판이 됐지만 지금도 양키스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주장 데릭 지터(38)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해 처음으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지터는 타율 3할1푼4리, 홈런 10개, 78타점을 기록하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메이저리그 신인상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그는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해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는 4할1푼2리의 타율을 올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선 4할1푼7리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넘쳐나는 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지터는 이를 통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고 지금도 미국 야구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군림하고 있다.

    월드시리즈 3연패

    1997년 뉴욕 양키스는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패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시즌 동안 뉴욕 양키스는 압도적인 승률을 올리며 전무후무한 월드시리즈 3연패에 성공했다.

    특히 1998년 양키스는 시즌 전체로 114승 48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무려 7할이 넘는 어마어마한 승률을 기록했다. 10경기 중 6경기만 이겨도, 즉 6할대의 승률만 기록해도 페넌트레이스 1위를 기록하는 프로야구에서 7할대 승률의 우승팀이 나왔다는 것은 1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메이저리그에서도 매우 드문 사건이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승 팀은 116승을 올린 1906년의 시카고 컵스(116승36패)와 2001년의 시애틀 매리너스(116승46패)다. 하지만 두 팀은 모두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1906년의 시카고 컵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패했다. 2001년의 시애틀 매리너스는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넘지 못해 월드시리즈에 아예 나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1998년의 양키스는 달랐다. 양키스는 첫 85경기에서 무려 65승을 따내면서 다른 팀들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하반기에는 경기를 상당히 느슨하게 운용했음에도 다른 팀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멀리 달아났다.

    1998년 양키스에 이어 아메리칸리그 2위를 차지한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양키스는 레드삭스와 무려 22경기 차로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2위였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올린 92승은 어지간한 해라면 우승을 하고도 남을 성적이었다. 덕분에 토레 감독은 첫 우승을 차지한 1996년에 이어 1998년에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1년 뉴욕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맞붙었다. 1901년 창단된 100년 역사의 양키스와 1998년 창단된 3년차 구단 애리조나는 선수단의 두께 자체가 다른 팀이었다. 게다가 양키스는 지난 3년의 월드시리즈를 모두 이겼고, 애리조나는 월드시리즈에 처음 진출한 팀이었다. 누가 봐도 양키스의 낙승이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실제 상황도 양키스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5차전까지 양키스는 3승2패로 다이아몬드백스에 앞섰다. 특히 월드시리즈 4차전과 5차전에서 잇달아 역전 홈런을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다. 당시 홈런을 맞은 애리조나의 투수가 바로 지금 넥센 히어로즈에서 뛰고 있는 김병현이라는 사실은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6차전을 패한 양키스는 2001년 11월 4일,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뱅크원 볼파크에서 운명을 가를 월드시리즈 마지막 승부, 즉 7차전을 치렀다. 9회 초까지는 양키스가 2대 1로 앞서면서 우승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마지막 공격을 막기 위해 등판한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아웃카운트 3개를 잡아내지 못하면서 역사가 뒤바뀌었다. 메이저리그의 초특급 소방수로 이름을 날리던 리베라는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동점을 허용했고, 이후 역전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

    불과 3년의 역사를 가진 초짜 팀에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양키스는 이후 8년이 지나서야 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쥔다. 그 사이 양키스의 부활을 이끌던 토레 감독의 화려한 나날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한다.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 안타깝게 패한 후 양키스는 한동안 명문 팀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우승팀이 겨루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2003년 이후에는 아메리칸리그에서조차 우승을 놓쳤다.

    양키스와의 이별

    성질 급한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홈런왕 알렉스 로드리게스까지 영입한 뒤에도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은커녕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자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토레 감독에게 자주 언성을 높였다.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연봉이 어지간한 스타 선수 못지않게 비싸진 토레 감독이 몸값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결국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토레 감독의 몸값을 후려치는 전략으로 자연스레 그를 해고했다. 2007년 가을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언론을 통해 “토레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감독인 만큼 그에 걸맞은 성적을 내야 한다”며 “올해도 만약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한다면 재계약은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말이 악재로 작용했는지 양키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패하며 또다시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했다. 월드시리즈의 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했다. 양키스와 토레 감독의 이별은 기정사실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로 양키스 선수단과 팬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1996년 토레 감독이 처음 양키스에 부임했을 때 “멍청한 토레”라고 비난했던 뉴욕 언론들은 연일 “토레는 여전히 최고의 감독”이라는 양키스 팬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를 압박했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토레 감독에게 재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계약 기간 1년에 연봉 500만 달러였다. 500만 달러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가 이전에 받던 연봉보다는 적었고 굴욕적인 조건까지 붙었다. 바로 디비전시리즈, 챔피언 결정전,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때마다 각기 100만 달러씩을 얹어 최대 800만 달러(약 74억 원)를 준다는 것.

    양키스 감독이 되고난 후 연봉이 깎인 적이 없던 그에게 연봉 삭감과 굴욕적인 옵션계약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계약 내용으로만 보면 구단이 토레 감독에게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더는 믿지 못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었다.

    조 토레  전 뉴욕 양키스 감독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최고의 자리를 경험한 토레 감독은 돈보다 자존심을 택했다. 그는 이미 양키스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운 데다 ‘명예의 전당’ 입성까지 노리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계약 내용이라고 판단해 구단주의 제의를 거절했다. 양키스 감독이라는 자리와 수십억 원의 연봉보다는 자존심과 명예를 택한 토레 감독은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뛰어난 지도력과 품위 있는 언행으로 존경받아온 그다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토레 감독이 양키스를 떠나겠다고 밝힌 직후 “그의 퇴장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다저스 감독에서 WBC 사령탑으로

    2007년 10월 정들었던 양키스와 이별을 고한 그는 한 달 뒤인 11월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한국 야구팬에게는 박찬호 선수가 전성기 시절 뛰었던 팀으로 유명한 다저스는 3년간 총액 1300만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토레 감독을 영입했다. 1년 연봉으로 치면 양키스 시절보다 오히려 낮은 액수였지만 새로운 팀에서 뛰겠다는 그의 뜻을 말릴 수는 없었다.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벗고 다저스의 푸른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었지만 월드시리즈 그라운드를 밟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결국 토레 감독은 2010년 말 다저스와의 계약이 끝난 후 사실상 감독 직에서 물러났다. 통산 2326승을 기록한 메이저리그의 5번째 최다승 감독이라는 기록과 함께.

    하지만 그는 야구와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없었다. 2011년 2월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를 운영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선수, 지도자에 이어 행정가로 활동하던 그는 최근 야구장에 복귀할 기회를 잡았다. 메이저리그가 2013 WBC에 나설 미국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토레 감독을 지명했기 때문.

    토레 감독이 다시 선수단을 맡는 건 약 2년 만이다. 2010년 LA 다저스 사령탑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지난 3월부터 메이저리그 운영 담당 부사장으로 일했다.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된 그는 “미국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건 처음”이라며 “너무도 영광스럽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가 짊어진 임무는 막중하다. 세계 최고 선수들로 WBC 팀을 꾸린 미국은 지난 두 차례 대회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겼다. 최고 성적이 2009년에 기록한 4위일 정도로 보잘것없다. 메이저리그 대표 지도자 반열에 올랐지만 마지막에 지도자 인생의 빛이 살짝 바랜 토레 감독이 이번 WBC에서 미국과 그의 자존심을 동시에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 토레 감독이 주는 경영 교훈

    1)감성지능의 중요성을 깨달아라

    흔히 마음을 움직이는 힘 혹은 능력을 ‘감성지능’이라 한다. 일반적인 지능지수(IQ)에 대비되는 의미의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은 199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샐로베이와 존 메이어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감성지능이 리더십과 조직 경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발견한 이는 미국의 유명 심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대니얼 골먼이다. 골먼은 감성지능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해 능력,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 감정 조절 능력, 타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관계관리 능력 등 4가지로 구성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특히 골먼은 성공한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 간의 차이는 기술적 능력이나 지능지수의 차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감성지능의 차이에 있다고 지적했다. 즉 감성지능이 뛰어난 리더가 조직을 운영할 때 해당 조직의 업무 능력이 극대화한다는 것.

    토레 감독은 스포츠계 지도자에게 감성지능의 중요성을 알려준 최초의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 조직에서 감성지능이 왜 중요할까.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수직적인 조직문화에서 탈피해 구성원 간의 협력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보다 구성원 개개인의 자발적인 협조와 동기부여가 넘쳐나는 조직이 더 큰 성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즉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협력과 팀워크를 중시하는 기업문화가 절실하다. 감성지능이 높은 토레 감독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다. 잘 알려진 대로 토레 감독은 콧대 높은 스타 선수들의 총 집합소인 양키스 구단의 감독으로 12년간 재직하면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특히 그의 온화한 카리스마는 한때 잘나갔지만 현재는 성적이 부진한 노장 선수들 앞에서 빛을 발했다. 상당수 노장 선수는 몸값이 비싸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 언제 은퇴나 트레이드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틴다.

    토레 감독은 일부러 고참선수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이렇게 격려했다. “너 절대 트레이드 안 시켜. 그러니 열심히 해 봐.” 해당 선수를 불러내 속삭이듯 전하는 이 한마디가 고참 선수는 물론 선수단 전체에 활력소가 됐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토레 감독이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양키스 구단의 팀워크를 위해서는 채찍보다 따뜻한 격려를, 경쟁보다 화합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한 덕분이다.

    2)상사를 내 편으로 만들어라

    “관리자로서 상사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는커녕 상사를 다룰 수 있다는 자체를 믿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관리자는 상사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을 뿐 그를 다루려고 애쓰지 않는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한 말이다. 많은 직장인이 상사 때문에 울고, 사표를 쓰기도 한다. 직장을 떠나는 주된 이유가 업무가 아니라 상사 때문이라는 것이 여론조사에서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지금 CEO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은 상사만 거쳤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아니다.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내게 좋은 상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토레 감독은 이런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지닌 리더였다.

    많은 인기를 누리며 천문학적인 액수의 연봉을 받는 메이저리그 감독들 역시 구단주 앞에서는 파리 목숨일 뿐이다. 스타인브레너처럼 독불장군형 구단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토레 감독 이전에 양키스를 맡았던 빌리 마틴, 벅 쇼월터 등 쟁쟁한 감독들도 모두 스타인브레너와의 불화 때문에 팀을 떠났다.

    토레 감독은 모시기 부담스러운 이 상사를 잘도 요리했다. 비결은 바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때는 절대 굽히지 않는 대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상사의 체면을 세워준 데 있다. 토레 감독이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1996년, 뉴욕 양키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대패했다. 애틀랜타는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등 특급 투수로 무장한 강팀이었다.

    화가 난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1차전이 끝난 후 선수단을 찾아가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토레 감독은 대뜸 “내일 또 질지 모른다.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 말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실제 토레 감독의 말대로 양키스는 이튿날 2차전에서 또 패했다. 하지만 이후 내리 4게임을 승리해 1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만약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1차전 패배의 책임을 물어 토레 감독에게 성질을 부렸을 때 그가 똑같이 맞받아쳤으면 어땠을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상사의 공격에 즉각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방어 태세를 취하거나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문제는 더 커지게 된다.

    반면 욱하는 심정을 누르고 자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상사는 오히려 자신의 과잉행동과 흥분을 민망해하며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즉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불을 끄려면 맞서기보다는 한발 물러서기가 낫다. 즉각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상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방법을 모색하는 게 유리하다.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 방법을 토레 감독은 잘 지켜냈다. 그는 늘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일부만을 취하려 하지 말고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성적이 나쁠 때마다 넌지시 해고 의사를 비치는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에게 “만약 당신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렇게 하라”는 말도 먼저 건넸다. 토레 감독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구단주 밑에서 최장시간인 12년을 버틴 원동력이다.

    3)야구장 밖에서도 모범을 보여라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토레 감독은 스타가 된 후 사회공헌 활동에도 열심이다. 특히 2002년에는 가정폭력을 추방하고 피해 어린이를 보호할 목적으로 ‘조 토레의 가정안전재단(The JoeTorre Safe at Home Foundation)’을 설립했다. 토레 감독은 이 재단을 통해 미국에 진출한 삼성전자와도 손을 잡았다. 삼성은 2002년부터 양키스 팀이 정기 시즌 중 뉴욕 양키스 구장에서 1개의 홈런을 칠 때마다 기부금 1000달러를 조 토레 재단에 내고 있다. 스포츠 스타를 이용한 자선 마케팅이 어느 나라보다 활발한 미국에서 미국식 방법으로 미국 소비자를 공략하겠다는 삼성의 전략적 판단과 다양한 기부금 납부자가 필요한 토레 재단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야구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범을 보인 토레 감독이 팬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200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실시한 팬 투표에서 토레 감독은 무려 25%의 지지율을 얻어 ‘메이저리그 최고 감독’ 1위를 차지했다.

    양키스 감독 시절 말년에 부진한 성적을 냈음에도 양키스 팬과 주요 언론이 한 목소리로‘조 토레 연임’을 외친 것은 실력과 인품을 두루 갖춘 덕장(德將) 토레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일 것이다.



    ●‘양키스는 왜 강한가’(이종률, 2003, 한국능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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