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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 강은교│시인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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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잘 잊기’를 못하는 너, 기억의 담요에 포근히 싸인 채 이 지상의 공간을 그림자이듯 유영하는 너! 제발 이제 거기 포근한 기억의 담요에서 나와라. 망각이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너는 점점 더 고독해지기만 하리라. 고독은 너의 뼈를 점점 더 약하게만 하리라.

너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무엇인가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혼자 노래하며 빙긋이 웃음 짓고 있었다.

하긴 너의 남편이 요즘은 열심히 너를 찾아온다고 한다. 그는 이제야 ‘너’를 찾은 모양이구나. 네가 아프지 않을 때는 그렇게 너와 싸우더니…그래서 우리는 모두 네가 그렇게 아프게 된 것은 너의 남편이 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언성을 높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는 너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너의 뒤에 어른거리는 너’를 인식하고 새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현실의 너는 너의 형식일 뿐이었음을 이제야 이해한 것이리라. 그는 지금 너의 형식이 아닌 ‘너의 핵’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거기 실연당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너를 자주 찾아온다는 것은 너에게 손을 내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네 속에 들어 있는 ‘너’를 향해. 그래, 다시 말하자. 그는 지금 자기가 실연당했었음을 안 것이다. 그리고 실연당하고 나서야 얼마나 자기가 사랑했었는지를 안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실연일 거야. 일생 동안 우리는 실연하고 있는 것일 게야.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가슴에 어떤 혹이 자라고 있는지 몰랐다니…, 그렇게 우리는 멀다니….





나는 일생동안 실연했지요

고단한 나는 알지요

모든 도착은 모든 출발이 되어

그대 손목에 팔찌로 꿰어질 것을

떠나는 눈송이들이 간이역엔 가득 앉아 있어요

일생동안 실연하는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고단한 내가 눈물 던지는 것을 흘깃흘깃 바라보며

-강은교, ‘실연’

너의 신발을 다시 벗기고 침대만이 기다리고 있는 방에 너를 다시 보내면서 우리는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긴다.

깊은 생각 속에서 너를 다시 생각한다. 네가 떠돌고 있을 한 공간을.

너는 아마 지금 유년 시절의 그 마루를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너는 아마 지금 거기 있는 우물 앞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우물 속에 들어있는 수박을 찾아 또는 복숭아 캔과 초콜릿 통이 있는 벽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몰라.

네가 정말 기억하고 싶은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모두 그 누구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할까. 나는 누구에겐가 그런 사람이 되고 있을까.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그런 얼굴.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런 얼굴….

정말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잊어야 한다. 잊어버린 뒤에도 찾아오는 것, 그것을 기다릴 일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실연할 일이다. 그 뒤에도 찾아오는 얼굴, 그것을 기다릴 일이다. 이루어지지 않을수록 참사랑이 될 것이라는 역설을 믿을 일이다.

너를 두고 나오면서 나는 몽골의 시 하나를 중얼거린다.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강은교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연세대 영문학과,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저서 :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 ‘봄무사’ 등, 시산문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에세이 ‘추억제’ ‘잠들면서 잠들지 않으면서’ 등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

現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나 잊은들 어떠하고 남은들 어떠하리

노래하는 새들이 내 목소리 이어받을 테고

저 하늘은 언제나처럼 당당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 여기 머물진대.

-몽골의 시 중에서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바꿔 부르면서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신동아 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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