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이 있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 이문구 동시 ‘산 너머 저쪽’ 전문
어릴 적, 사람마다 꿈꾸었던 ‘산 너머’의 세상은 각박한 생애를 마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 다시 새롭게 다가드는 모양이다. 별똥과 은하수로 채워진 바다, 지금쯤 그도 그 바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령 땅은 이문구 외에도 또 한 명의 작가를 낳고 키웠다.
나는 1947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동구 앞 멀리 대천과 청양을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보이고, 해발 6백 미터쯤 되는 오서산의 산자락이 마을을 휘감고 있는 구렛굴이라는 산촌이었습니다….
이 글은 1980년대 중반에 출간된, 당시의 인기작가 10명의 글을 모은 산문집에 실려 있는 소설가 김성동의 글 한 구절이다. 소위 잘나간다는 젊은 작가들이 ‘상처 받은 젊은 영혼들에게 들려준다’는 이 글들은 지금 보면 꽤나 치기 어린 것일 수도 있다. 이문열, 이외수, 김홍신, 박범신 같은, 요즘에도 쟁쟁한 이름의 작가들 사이에 분에 넘치게 내 이름자도 끼어 있었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구도(求道)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 ‘만다라’를 펴내 일약 유명해진 김성동과는 한때 지방도시의 한 아파트 단지 앞뒤 동에 살 정도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어느덧 그와도 소식 끊고 산 지 스무 해가 넘었다.
하여 젊은 제자들과 함께 눈길을 뚫고 오서산을 찾아가던 때에도 이 어디쯤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질 못했다.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 오서산 자연휴양림 초입, 저수지가 있는 그 산간 마을이 바로 그의 출생지 장현리였다. 그런 줄 알았으면 차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이라도 해볼걸….
그러고 보면 김성동은 오서산의 기운을 타고난 셈이다. 이 산은 보령시와 홍성군 경계에 있다.장항선 광천역에서 4㎞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열차를 이용한 산행을 하기에도 편리하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가 지척으로 다가와 보이는 까닭에 인근 항포구 사람들은 이 산을 ‘서해의 등대산’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2㎞ 정도의 주능선은 온통 억새밭이라 특히 가을날 이 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
어느 때는 향내 넘치는 절간에서보다 잡초 속에 주춧돌이 뒹구는 폐사의 절터에서 더 많은 생애적 상념을 가질 수 있다. 불교가 말하는 공(空)과 무(無)의 실상을 텅 빈 절터만큼 여실히 보여주는 데가 달리 있을까.
성주사 절터의 상념
보령시청에서 부여 방면으로 가다보면 머잖아 성주터널을 통과한다. 성주산의 아랫도리를 파고든 이 터널을 지나면 이내 성주면 소재지에 닿는데, 여기서 북쪽 방향의 큰길을 따라가면 쉽게 성주사 터를 만나게 된다. 성주계곡과 심연동계곡으로 가는 길이기도 한 이 길은 곱고도 평화롭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길가를 지키고 있는가 하면 성주천 맑은 냇물이 소리 없이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성주산 봉우리도 운치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9산 선문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을 통일신라 때 당에서 귀국한 무염(無染) 화상이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백제 멸망 때는 붉은 말이 나타나 몇날 며칠 슬프게 울었다는 전설도 있다. 절은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됐지만 그동안 몇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의 구조와 형태는 대부분 밝혀졌다. 지금은 드넓은 대지에 몇 기의 석탑과 석등, 석불이 남아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탑비가 있다.
국보라 해서 사람들은 한 승려의 생애를 적은 이 탑비에 유독 큰 관심을 보이지만, 나 같은 이한테는 그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못생긴 석불 입상 하나가 더 인상적이다. 깨지고 부서진 데마다 덕지덕지 시멘트를 붙이고 있는 이 불상은 얼굴 생김새도 기이하여 우는지 웃는지 구분이 안 된다. 남루하면서도 천의무봉한 그 모습을 보노라면 이곳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미륵불로 여겨온 이치도 알 만하다.
성주사터가 과거 시간이 포개져 있는 곳이라면 다음에 찾는 오천항은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우러진 역동적인 포구다. 주교면 소재지에서 610번 도로를 타고 서해안 방향으로 달리면 이곳에 이른다. 가는 도중에는 토함 이지함의 묘소도 들러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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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는 바다가 육지로 파고든 만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입구 쪽 바다가 곧 천수만이며 그 바다 너머의 육지가 안면도다. 천연적으로 바깥 바다의 파랑(波浪)을 막아주는 지형인지라 따로 방파제가 필요 없다. 낚시꾼들에겐 일찌감치 주꾸미며 갑오징어 낚시 기지로 잘 알려진 이곳은 조선시대만 해도 서해를 지키는 주요 군항지였다. 조선조 중종 때 이곳에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것도 봐도 그렇다. 서울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지키고 왜구들의 침탈을 방어하는 것이 이 수영(水營)의 임무였다.
당시에 쌓은 수영성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지금도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포구에서 키조개를 다듬는 아낙들의 부지런한 손길을 바라보다가 성에 오르면 한순간에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느낌이 든다. 특히 낙조 무렵, 성벽 위의 산책로를 걸으며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넋을 놓을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