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사도세자 트라우마’ 시달린 정조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8-21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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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정조 초상.

    “세손(정조)은 문에 들어오자마자 곧 관을 벗고 손을 모아 애걸하였다. 영조가 멀리서 세손을 보고는 진노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세손을 모시고 나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 세손은 문으로 들어와 땅에 엎드린 후 세자(사도세자)에게로 점점 가까이 기어왔다. (…) 별군직이 세손을 안고 나가려 하자 세손이 저항했다.”

    사도세자의 광증

    승정원 사서 이광현의 일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죽는 장면을 여과 없이 기록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이후,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의 삶은 화증(火症)으로 점철됐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알려진 경종이 간질, 화증을 앓다 일찍 죽은 것과 비교하면 초인적인 자기절제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광증은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M 볼비의 애착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볼비는 1950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부모를 잃고 모성 결핍을 겪은 아이들을 연구해보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초기 아동기에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평생 지적, 사회적, 정신적 지체를 겪었다고 보고했다. 2차 연구에선 결핵을 앓아 요양소에 격리된 어린이들을 분석했는데, 이 아이들이 감동결여성 인격장애로 반사회적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밝혀냈다.

    유아에게 부모는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주고 음식물을 제공하는, 신과 같은 전능한 존재다. 따라서 이렇게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될 인간관계에 실패했다는 것은 회한과 공포, 불안 등과 뒤섞여 아기의 마음에 새겨진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혼자 꿈의 세계를 만들어 현실과 뒤섞이게 된다. 신경증 또는 정신병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사도세자 영정(백범영 용인대 교수 제작).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양육 과정에 대한 묘사는 초기 애착 과정에 실패한 이유를 잘 설명한다. 세자의 위엄을 세우려고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승전(儲承殿·왕세자 동궁의 처소)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것도 그의 모친이 아니라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을 보모로 썼다. 세자를 보려고 들른 영조는 나인들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 저승전을 찾지 않게 되면서 사이는 더 멀어진다.

    이 점을 혜경궁은 정확히 집어냈다. “부모 측에서 양육하며 성취하지 않으시게 하고 처소가 멀리 떨어져서 인사를 아실 때부터 떠나심이 많고 모이심이 적으니 조석에 대하는 사람은 환신, 궁첨이요, 들으시는 것이 항간의 잡담뿐이니 이것이 벌써 잘되지 못한 장본이며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리오.”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교육방식은 한중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는 화증이 더해 당번 내인 김한채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다니다 영조의 질책을 받는다. 사도세자는 이렇게 답변한다. “사랑치 않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럽니다.” 무수리 엄마와 경종 독살 사건으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영조는 아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키웠던 것이다. 심리학자 기 코르노는 저서 ‘부재하는 아버지, 잃어버린 아들’에서 자식이 갈망하는 칭찬, 애정 표현, 인정을 아버지가 보류하는 것은 심리학적 연구 대상이며 보편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젊었을 적 열이 많아…”

    영조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주 질책했다. 그 정점에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병하고 뒤주 사건이 생기면서 정조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정조의 질병은 여기서 시작됐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가 화증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정조의 죽음은 종기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저(癰疽)’로 표현하는데 그 원인을 화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 “옹(癰)은 막힌다, 저(疽)는 걸린다는 뜻이다. 혈기가 막히고 찬 기운과 열이 흩어지지 못할 때 생긴다”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아픈 것, 가려운 것, 창양, 옹종이 생길 때 속이 답답한 것은 다 화열에 속한다. 불에 가까이 하면 처음에 가렵고, 몹시 뜨겁게 하면 아프다. 불에 닿으면 헌 데와 딱지가 생긴다. 이것은 다 화(火)의 작용이다.”

    정조를 평생 진료한 주치의는 강명길(1737~1801)이다. 32세 때 의과에 급제해 이듬해 내의원으로 들어갔다.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친분이 있어 임금이 되자 바로 수의(首醫·내의원에 속한 내의(內醫)의 우두머리 의원)가 됐다. 정조는 ‘홍제전서(弘濟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자신의 체질과 치료 처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젊었을 적에 몸에 열이 많아서 음식을 겨우 먹었으므로 날마다 우황과 금은화 따위를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수의 강명길이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고암심신환을 처방해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10여 년 동안 환약으로 복용했다는 것이다. 가미소요산이라는 처방과 청심연자음이라는 처방을 꾸준히 복용해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한의학에선 치료를 균형, 밸런스로 정의한다. 열이 나면 보통 열을 내리는 데 치중하는데, 강명길은 열을 내리는 목적에만 중심을 둔 게 아니라 열을 내리면서도 식욕을 돋우거나 신체의 허약을 회복하는, 보(補)와 사(瀉)를 겸한 치료법으로 정조의 신뢰를 얻었다.

    고암심신환은 화증을 치료하는 보약이다. 진짜 열이 아니라 허화(虛火)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잘 놀라면서 뼈와 살이 말라들어가는 증상 치료에 적합하다. 허증을 기반으로 처방했다는 건 정조가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여름이 되면 소화기능이 떨어지듯 정조는 열이 나서 음식을 챙기지 않았다. 대다수 임금이 하루 5번 음식을 먹었지만 그의 행장에 따르면 하루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고 한다.

    청심연자음도 마찬가지다. 연꽃의 씨앗인 연밥이 주재료인 처방이다. 연꽃이 마음의 평정을 이루듯 번뇌를 씻어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보양하면서 허한 증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이다.

    首醫 강명길의 인생유전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애용한 처방이다. 이는 ‘장자(莊子)’의 ‘소요유편(逍遙遊篇)’ 내용과 관련이 있다. 큰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어 우주에서 날개 치는 이야기인데, 소요산을 복용하면 마음이 상쾌해져 넓은 천지에 대붕이 자유롭게 날개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가미소요산은 본래 부인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생리 전에 화를 내거나 어깨결림, 두통, 불면, 변비 증상이 있을 때 효험이 있다. 주로 갱년기 여성의 열이 오르는 증상에 쓰는 약을 강명길이 추천해 복용함으로써 정조는 신기한 효과를 봤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에 갱년기 증세가 포함된 것을 파악한 강명길은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 저작을 기획한다. 정조 23년 완성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그 결과물이다. 동의보감의 최종 업그레이드판인 이 책은 흔히 강명길의 저작인 줄 알지만 정조가 만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란 책의 증보판이다.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영조의 수발을 위해 1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진맥에 대한 비결과 탕약에 대한 이론이다. (…) 몇 차례에 걸친 수정을 거듭한 끝에 제중신편을 완성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만큼 강명길을 감쌌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과 채홍원이 발의해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힌 일이 있다. 정조는 가장 사랑하던 정약용이 “재결(災結·자연재해를 입은 전답)은 훔쳐 먹고 군보(軍保·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정군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장정)에게는 첨징해 허다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그를 탄핵했음에도 강명길을 귀양 보내는 척하다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켰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았다. 초기의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인삼을 기피했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을 합한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조는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 사후 강명길은 노륙(·#54906;戮)형에 처해졌다. 본인은 극형에 처하고 아들은 외딴섬으로 보내는 것인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게 된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벌이었다. 정조의 신임 아래 최고의 권세를 누린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떨어졌다.

    종기 치료하는 우황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정조가 몸의 열을 내리기 위해 애용한 금은화(왼쪽)와 평소 즐겨 먹던 깍두기의 재료인 무.

    정조가 늘 먹었다는 우황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효험을 지녔을까. 우황은 소의 담낭, 담관에 생긴 결석이다. ‘본경소증’은 이렇게 설명한다. “봄철에 전염병(바이러스성)이 돌면 소도 독을 마신다. 독은 육체와 정신의 빈 곳을 공격한다. 소는 튼튼한 육체와 고삐를 맨 순종하는 마음에 틈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정기를 모아 독을 진압한다. 독은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내부에서 응결한다. 이런 힘의 정수가 우황이다. 이 튼튼한 힘의 정수는 정서장애나 열성 경련을 치료한다. 소의 몸에 우황이 있으면 밤에 몸에서 빛이 나고 눈에 핏발이 있으며 수시로 반복해서 운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물에 자기 모습을 잘 비춘다. 동이에 물을 받아 소한테 대주면 웩웩거리다 물에 우황을 떨어뜨린다.”

    쓸개즙은 본디 검은색이지만, 약간 희석하면 푸른색이 되고 많이 희석하면 노란색이 된다. 황달은 소장으로 빠져나와야 할 담즙이 나오지 못하고 역류해 전신의 혈액으로 퍼지면서 희석된 담즙의 색깔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한의학에선 아이들이 놀랐을 때 푸른똥을 싸는 것을 담이 놀라 차가워지면서 반쯤 희석된 상태로 파악한다. 음식을 입에서 씹고 위에서 반죽하고 나면 자연 그대로의 색을 띤다. 밥은 흰색, 홍당무는 붉은색, 김은 검은색이다. 그러나 대변은 황금색이다. 반죽된 음식이 소장을 통과할 때 쓸개즙이 골고루 침투해 완전히 삭혀지면서 누렇게 변하는 것이다.

    쓸개즙의 삭히는 힘은 타박상이나 상처를 입었을 때 생기는 어혈 제거에도 사용된다. 교통사고로 다쳤을 때 웅담을 쓰는 것도 이런 기전이다. 옛날에 대변으로 어혈을 치료하던 것도 담즙 색소가 스테르코빌린으로 변한 힘을 빌린 것이고, 요료법(尿療法)도 소변에 포함된 담즙 색소가 유로빌린 성분으로 변한 힘을 빌려 혈전을 녹이기 위한 것이다. 우황을 고를 때도 삭히는 힘을 시험한다. 우황은 소의 쓸개가 농축돼 담석에 이른 것이므로 삭히는 힘이 아주 강하다. 수박에 그어서 수박 무늬 위에 줄이 생겨야 진짜 우황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담(膽)은 마음의 상태와 연결되기도 한다. ‘담이 크다’는 말은 겁이 없고 용감하다는 뜻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말에겐 쓸개가 없다. 그래서일까. 말은 바람소리에도 놀라고 자신이 뀐 방귀에도 놀란다. 말먹이를 주러 갔다 뒷발에 차이는 경우도 흔하다. 말은 겁이 많아 작은 소리에도 갑작스레 날뛰며 그러다 기수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반면 곰은 침착함과 용감함의 대명사인 것을 보면 쓸개의 효능을 짐작할 만하다. 우황은 삭히는 힘으로 종기가 잘 나는 사람을 치료하고 와신상담해 화를 없애는 힘을 발휘하기에 우황청심환에 사용한다.

    피재길과 이동의 활약

    금은화 역시 종기의 성약이다. 인동초의 꽃인데 금빛과 은빛이 나는 꽃이 소박하게 핀다. 꽃이 필 때 은은하게 나는 향기가 일품이다. 꽃은 시들지만 줄기와 일부 잎사귀는 겨울을 견디며 생기를 유지해 살아남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을 넘기는 생기가 약효의 핵심이다.

    본경소증은 약효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동은 보라색 줄기에서 하얀 꽃이 피고 하얀 꽃이 다시 노랗게 변한다. 이러한 특징은 혈맥에서 종기가 발생하고 썩은 종기가 허물어져 노란 고름이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렇게 인체 기혈이 병소에서 죽어갈 때 금은화는 병든 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린다.” 동의보감은 귀한 금은화보다는 흔한 인동초 줄기를 모아 끓여 먹는 것이 가난한 자가 종기를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약이라고 소개했다.

    정조가 종기에 자주 걸린 만큼 종기 치료를 둘러싸고 여러 명의 의사가 등장한다. 길거리 약장수 수준의 의사가 벼락출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의료는 ‘열린 의료’였다. 왕을 치료할 때도 숙련된 궁중의사뿐 아니라 뛰어난 의술을 지닌 세간의 명의를 초빙하는 유연한 시스템이었다. 특기할 점은 치료의 기술적인 부분은 의사들이 담당했지만,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은 유학자 출신의 대신들이 검증했다는 것이다.

    정조 17년, 머리에 난 부스럼이 자라 종기가 됐는데 내의원들이 약을 써도 낫지 않자 피재길이란 의원을 불러 치료를 맡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이었다. 일순간 종기가 사라진 것이다. 피재길은 아버지가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이었지만 일찍 세상을 뜬 바람에 기술을 따로 배우진 못했다. 다만 남편을 거들었던 어머니가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 제조법을 알았기에 피재길은 웅담고라는 고약을 만들어 일약 스타가 됐고 마침내 내의원 침의에 올랐다.

    이동은 정조의 치질을 치료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다. ‘이향견문록’과 ‘호산외사’에 따르면 이동은 정식 의사가 아니라 임국서라는 의원의 마부로 들어가 어깨 너머로 의술을 배웠다고 전한다. 손톱, 머리카락, 소변, 대변, 침 등을 약재로 사용해 특이한 방식으로 치료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엔 이동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깍두기가 담배 독 제거?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2002년 6월 축조 당시 형태대로 복원된 화성행궁.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 때 거처로 사용했던 곳이다.

    정조는 깍두기와 담배 애호가였다. 홍선표는 저서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 “200년 전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永明慰)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숙선공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후 여염집에도 퍼졌다.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

    무가 독을 없앤다는 각독기설은 ‘본초강목’에도 언급돼 있다. 두부를 즐겨 먹어 중독에 이른 한 두부 상인이 무즙을 먹고 두부 독을 없앴다는 얘기다. 아내가 두부 만드는 냄비에 실수로 무를 넣었는데 끝내 두부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곤 실제로 무를 먹었더니 두부 독이 사라졌다는 것. 난을 피해 석굴에 들어간 사람이 적이 피워 넣은 연기에 질식해서 죽게 됐는데 무를 씹어 즙을 삼키자 소생했다는 얘기도 덤으로 들어 있다.

    정조가 지독한 골초였음을 감안하면 숙선공주가 담배 독을 제거하려고 깍두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조의 문집 ‘홍제전서(弘齋全書)’엔 담배의 별칭 ‘남령초’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퇴고할 때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격무 속에서도 담배 한 대를 물고서 느긋하게 휴식하는 왕이었지만, 담배의 화기가 결국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하다.

    정조에게 종기가 발생한 시점부터 사망 시점까지는 1800년 6월 14일부터 14일간에 불과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많은 처방과 고약이 투여됐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두 가지였다. 열을 내리는 청열약과 온보를 위해 인삼을 넣은 경옥고와 팔물탕이다. 청열약으로는 가미소요산과 백호탕이 대부분 처방됐고, 온보약으로는 경옥고와 팔물탕이 주로 처방됐다. 가미소요산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을 내리는 서늘한 약재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을 겸해 정조가 애용했다. 최후의 14일 동안에도 가장 주도적인 처방으로 기록돼 있다.

    백호탕은 석고를 주재료로 만든 처방이다. 석고가 흰색이어서 호랑이처럼 내부의 열을 물어뜯어 없앤다고 처방된 청열약이다. 종기의 열을 내리려고 유분 탁리산을 처방하는데, 이는 피부의 열을 내리는 녹두가 대부분인 처방이다. 메밀밥을 개어 종기에 붙이는데, 메밀 또한 찬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6월 23일부터 증상이 개선되자 강명길이 경옥고를 복용할 것을 은근히 권유한다. 이런 권유엔 종기가 생긴 이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배경이 있다. 소의 양이라 불리는 위즙이나 녹두죽 등을 권유했지만 정조는 쌀미음을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조선 후기 의학의 흐름도 한몫했다는 추측이 많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장수를 누린 것은 꾸준한 건공탕 복용 덕이 컸는데, 이 처방엔 엄청난 양의 인삼이 들어가 원기 보강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종기 치료엔 소(消)법과 탁(托)법이 있다. 열을 소멸시키는 법과 밀어내는 법이다. 청열약이 소멸시키는 방법을 주도한다면 밀어내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므로 황기라든지 인삼을 사용하는 게 필수다.

    그러나 인삼에 관한 한 정조는 ‘결사반대’였다. 6월 23일 정조는 처음 열 증세가 일어난 것이 더위를 없애는 육화탕 탓이라 여기고 경옥고 처방을 단호히 거부한다. 6월 24일엔 갈증을 없애고 맥을 살리는 생맥산이란 처방을 권해도 먹지 않았다. 6월 25일 번열증이 있는데 온보하는 약을 먹을 수 없다며 다시 거부한다. 그러다 생맥산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으나 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경옥고를 귤강차에 타서 복용한다. 이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정조 24년 6월 23일 정조 독살설의 뿌리가 된, 수은이 함유된 연훈(煙燻)방이 처음 등장한다. 6월 14일 제조(提調) 서용보에게 종기의 고통을 호소한 이래 병의 진척이 없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전에도 종기를 앓았던 정조는 저잣거리의 천민 의사 피재길의 도움으로 병을 고친 적이 있었기에 새로운 도움을 받고자 변 씨 의원과 장영장관(將營將官) 심인(沈·#54808;)을 부른다. 심인은 독살설의 장본인이자 정조어찰의 상대방인 심환지(沈煥之·1730∼1802)의 친척뻘이다. 심인이 정식 내의원이 아닌 장영장관인 것은 궁궐에 들어오기 위해 임시 직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연훈방과 팔물탕

    왕에게 약을 사용하려면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임상실험 결과 변 씨 의원의 토끼 가죽은 신봉조가 효과를 보았고 연훈방은 서정수가 효험을 보아 안전성과 효능을 담보했다. 6월 26일 연훈방을 사용한 뒤 진료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도제조 이시수가 말했다. “조금 전 연훈방을 사용한 뒤 심인과 여러 의관이 하는 말은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관뿐만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이때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 빠져나와 이불과 옷을 모두 적셨다. 이 점이 호전이냐 악화냐 하는 점은 다른 경우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정조 24년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다. 며칠을 끌다 피고름이 많이 나와 종기가 나았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한 호전 증상이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유해한 약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태우고 흡입했을까.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경면주사(유화수은의 일종)를 잘게 부수고 옛 한지에 말아 모래 위에 꽂아서 태운다. 그런 뒤 연기를 모으기 위해 고깔을 써서 코로 흡입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3번 사용했다고 전하지만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임금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물이 논의된다. 정조는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을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가미소요산에 사물탕을 합방해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왕과 신하의 나라인 조선에서 왕의 뜻만 관철될 수는 없다. 도제조 이시수는 경옥고를 비롯한 육군자탕, 생맥산, 팔물탕 등을 추천했다. 경옥고는 특히 어의 강명길의 추천이 곁들여졌다.

    그런데 이시수가 보기에도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됐다. “어제 저녁에도 주무시는 듯 몽롱해 보이셨는데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 정조는 “어젯밤의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후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고 정조는 숨을 거뒀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환은 종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진료 기록을 보면 더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인삼 아니었을까. 이건 필자의 억측일까.

    화증으로 인한 종기 후유증 인삼 든 경옥고 먹고 절명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미완의 개혁가였던 정조는 그의 정치 행로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규장각, 장용영, 화성행궁을 설치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려 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됐다. 강명길과 이시수 등의 건의를 묵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인삼을 끝까지 복용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혼수상태에서 인삼이 듬뿍 든 팔물탕을 받아 마시는 기분은 어땠을까. 자신의 길과 보편적 지식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정조의 고뇌는 건강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답하게 해준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을 낳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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