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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해부학·생리학 포괄 의술 조선 실학자에게도 영향

‘세계의 의사’ 갈레노스

  • 김성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조교수 imsskim@snu.ac.kr

해부학·생리학 포괄 의술 조선 실학자에게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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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와 4체액설

히포크라테스는 이 체액들 사이의 불균형을 질병 원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치료는 체액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의사는 어떤 체액에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진찰 과정과 진단, 예후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다뤘다. 환자의 얼굴과 눈, 호흡, 대변, 소변, 가래 등을 면밀히 검사하게 했다. 진단이 끝나면 치료법을 제시했는데, 음식 조절과 운동이 가장 기본적인 요법이었다.

체액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으로는 체액을 뽑는 사혈(瀉血)과 대소변으로 빼내는 설사와 이뇨, 그리고 구토 등을 이용하라고 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자연철학을 근거로 해서 제시한 의학 이론은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때문에 그가 타계한 후에도 소아시아 반도의 연해(沿海)는 그리스 의학의 중심이 됐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를 서양 의학의 근원으로 칭송하고 추종했다. 그러나 해부학적 전통을 포함한 다른 학파들의 업적도 계승했다. 헤로필로스(기원전 335~기원전 280)와 에라시스트라토스(기원전 310~기원전 250?)가 다른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스탄불 맞은편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의 해상도시인 칼케돈 출신인 헤로필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 그는 해부학적 관찰에 근거해 뇌가 ‘인간의 지성이 위치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동맥과 혈관을 뚜렷이 구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아나톨리아 남서해안 카리아 반도에 있는 크니도스 출신이었다. 그는 대뇌와 소뇌가 다르고 인간 뇌의 표면 주름이 동물 뇌의 표면 주름보다 복잡하므로 주름은 지능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맥과 정맥의 근원은 심장이라고 했다. 혈관에 있는 반월판과 이첨판을 발견할 정도로 그는 해부학에 정통했다.

이들의 의학 체계는 히포크라테스와는 크게 달랐다. 히포크라테스는 자연철학 기반 위에서 인체를 이해했으나 두 사람은 해부에 중점을 줬다. 에라시스트라토스가 태어난 크니도스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 코스 섬과 좁은 만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그런데도 크니도스학파는 히포크라테스와 달리 환자보다는 질병에 초점을 맞췄다. 해부학과 장기의 기능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130년, 페르가몬에서 갈레노스가 태어났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이후의 학파 간 학설 논쟁을 논리적 사고와 정확한 관찰을 통해 하나로 묶어냈다. 또한 체액론과 프네우마에 근거한 생기론(生氣論)을 결합해 고대 의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의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됐다.

‘계승자’ 갈레노스의 탄생

해부학·생리학 포괄 의술 조선 실학자에게도 영향

갈레노스의 초상.

그는 그리스 문화가 빛을 발하는 페르가몬에서 기본 교양을 닦았다. 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스미나르(지금의 터키 이즈미르)에 머물다 당시 학문의 본거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가 5년 정도 수학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타라트스가 쌓아올린 해부학적 전통과 학문적 업적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갈레노스의 의학적 성취에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갈레노스는 정확한 관찰인 해부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그는 ‘신체기관의 사용에 관하여’란 저서에서 이전 학자들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론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체액론을 바탕으로 인체론과 병인론을 견지했다. 이를 생기론의 관점인 프네우마와 결합해 육체와 생명을 이해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라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페르가몬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3년간 검투사 주치의를 맡았는데 이것이 소중한 경험이 됐다. 거친 싸움으로 늘 부상에 노출돼 있는 검투사들을 통해 다양한 임상경험을 축적한 것이다. 페르가몬의 정정(政情)이 불안해지자 그는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 입성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로 인해 시기를 받아 로마를 떠나기도 했지만, 곧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초청으로 황실 의사가 되어 자신의 진가를 후대에 전할 기회를 얻게 됐다.

갈레노스는 의학 연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정력가였다. 19세기 초반 독일 의사 카를 퀸이 정리한 갈레노스 전집에는 122편의 저술이 실려 있다. 이 저술을 모두 갈레노스 저작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의학 이론은 16~17세기에 이를 때까지도 비판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내용이 탁월해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갈레노스의 위대함은 근대 해부학을 개척했다는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서적인 ‘파브리카’의 출판과 근대 생리학의 문을 연 하비의 혈액순환설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베살리우스와 하비가 주목받게 된 것도 갈레노스처럼 해부학과 혈액 생리학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갈레노스는 정밀한 관찰과 이론화로 빼어난 설명을 제시했으니 베살리우스와 하비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부와 관찰을 중시한 갈레노스는 인체 기관에 대한 정밀한 기록을 남겼기에 해부가 금기시된 고대와 중세에는 가장 신뢰할 만한 해부 지식으로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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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조교수 imssk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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