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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 2014

독 아닌 약 되려면 권력 견제하고, 사생활 보호해야

국정원 휴대전화 감청

  • 엄상익 │변호사 eomsangik@hanmail.net

독 아닌 약 되려면 권력 견제하고, 사생활 보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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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였다. 필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초안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불법도청을 수면으로 드러내 통제할 건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 감청이란 이름으로 허용하려는 것이 입법취지였다. 법은 정말 신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독소가 있는 걸 모르고 만들었다간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청을 감청으로 바꾸어 법적 허가증을 주려면 도청 실태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도 도청에 대한 공포가 사회에 만연했다. 한 검사는 전화로 친구와 한 얘기를 정보기관 담당관이 다 알고 있더라고 하면서 꺼림칙해했다. 국가보안법 사범을 무죄석방하고 지방으로 좌천된 판사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전화를 했는데 지역 정보관이 그 사실을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공직자의 통화 내용을 엿듣는가 하면 해외 주재 공관에서 외무부 본부로 오는 전문을 중간에서 가로채 외무부를 장악하는 것 같았다. 기자들이 데스크로 송고하는 내용도 사전에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정보기관의 도청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떤 사람의 여자관계나 돈 관련 내용을 도청해 그 내용을 수사기관과 언론에 흘리면 그 사람의 정치·사회적 생명은 끝이 났다. 대통령선거전에서 국가권력이 한쪽 후보를 위해 도청하면 선거의 공정성은 파괴됐다. 대통령의 통화라고 안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통화를 엿듣고 그 의중을 제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틀어쥐는 셈이다.

유선전화를 쓰던 그 시절 시내 각 전화국이 서로 연결돼 있고 그들과 연결된 하나의 유령 전화국이 정보기관 내부에 있는 듯했다. 그뿐 아니었다. 각 전화국에서 전화 배선에 접근할 수 있는 직원들에게 매달 일정액을 지급하면서 불법 감청에 동원하는 것 같았다. 아령같이 무겁고 둔탁한 휴대전화가 시중에 나올 무렵이었다. 필자는 남산의 높은 탑과 63빌딩의 옥상을 올려다보면서 앞으로 그곳에 서울 전체의 휴대전화를 도청하는 장비가 설치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공연했던 정보기관 도청



필자는 세계 정보기관의 도청을 통한 첩보 수집 실태를 살폈다. 미국의 중앙정보부(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도 방문했다. 각국 정보기관의 도청 경쟁은 치열했다. CIA의 9국은 ‘퍼즐 팰리스’라는 별칭으로 첨단 과학설비를 동원해 세계적인 도청을 감행했다. 미국의 정보위성이 전 세계의 곳곳을 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국의 정보망 안에 있는 나라가 과연 완전한 주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느냐’고 책에서 반문하기도 했다. 국가들 사이에 도청은 합법과 불법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국민 대부분이 휴대전화를 쓰는 시대가 됐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IT 강국이다. 이미 민간의 상업용 도청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남의 휴대전화에 스파이 앱 하나만 위장해서 몰래 깔아두면 상대방의 사생활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통화, 문자, 영상, e메일은 물론 스파이 앱이 깔린 휴대전화 소지자의 움직임과 만난 사람과의 대화, 심지어 그 주변의 소리나 대화 내용까지 모두 녹음돼 도청자의 손아귀로 들어간다. 은행예금도 모두 알아보고 인출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꺼도 GPS를 꺼도 소용없다. 도청자가 원격으로 켤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게임이나 생활정보를 받다보면 그 뒤에 스파이 앱이 숨어 들어오는 시대다. 서버가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다.

새누리당이 휴대전화 감청 설비를 통신회사가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하고 정부가 비용을 대겠다는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휴대전화 사용이 일상화한 시대에 간첩이나 테러 첩보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맞는 소리다. 북한군의 동향이나 핵탄두의 움직임, 우리가 제공한 물자가 북한 주민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쓰이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북한 상공을 날아다니는 통화 내용을 들을 필요가 있다.

독 아닌 약 되려면 권력 견제하고, 사생활 보호해야

국가정보원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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