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교육 규제법이 ‘공교육 정상화’ 취지를 제대로 살리려면 합리적인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
이런 와중에 2월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법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공교육 정상화 특별법’과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2년여 전부터 제기해온 ‘선행교육 금지법’을 병합한 것이다.
선행교육 ‘금지’가 아닌 ‘규제’
이 법은 통과되자마자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논란의 상당 부분은 이 법이 ‘선행학습 금지법’으로 불린 데서 일었다. 그런데 이 법은 학생 자력으로 하는 선행‘학습’을 규제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또한 선행교습 행위에 대한 ‘금지’ 조항이 국회 논의과정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선행학습 금지법’이라고 부르는 건 부적절하며, ‘선행교육 규제법’으로 약칭하는 게 타당하다.
선행교육 규제법의 핵심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선행학습 수요를 일으키는 공교육 요인에 대한 규제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각종 평가와 대회, 방과후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식 학교 교육과정을 앞질러가는 내용을 출제하거나 가르치는 게 금지된다. 즉 입학 시 치르는 배치고사에서 선행학습을 했음을 전제로 문항을 출제하거나, 자사고·특목고에서 입학 예정자에게 미리 고교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일, 보충수업(방과후학교 수업)을 통해 편법으로 정규 진도를 나가는 행위 등이 모두 금지된다.
둘째, 고입·대입 선발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는 문항을 출제하거나 평가하는 게 금지된다. 외고나 국제고의 경우 이명박 정부 시절 선발제도 개편을 통해 이런 일이 거의 사라졌지만, 과학고·영재학교 선발에선 아직도 근절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학이 논술고사나 구술면접고사에서 고등학교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는 내용을 출제하는 관행이 근절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셋째, 학원이나 과외교습자가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광고 또는 선전을 하는 게 금지된다. 선행교습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이 빠지고 광고를 규제하는 선으로 후퇴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위헌 논란이 있다. 과거 과외교습 규제 법령이 헌법재판소에서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다. 사교육 일반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선행교습만 금지하는 건 합헌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결국 위헌 논란이 입법과정에서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선행교습 금지의 실효가 있겠느냐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학원에서 이뤄지는 선행교습을 단속한다 해도 이를 빠져나갈 편법을 만들어낼 수 있고, 특히 개인과외의 경우 선행교습 단속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행교육 규제법이 사교육계에 미칠 영향은 단기적으론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론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정부가 대학의 선발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난 10여 년간 ‘대입 자율화’의 물결 속에서 대입 전형은 점차 복잡해졌을 뿐 아니라, 논술 전형, 특기자 전형, 입학사정관 전형을 중심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뛰어넘는 수준을 요구하는 사례가 점차 늘었다. 논술고사나 구술면접고사에서 대학 수준의 내용을 출제한다든지(특히 수학, 과학 위주로 출제되는 이과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다), 학생부에 기재하지 못하게 돼 있는 토플 성적표나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상장 등을 ‘별첨자료’로 받아 반영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스펙 경쟁과 고강도 선행교육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학의 학생 선발 규제할 법률적 근거 마련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대입 자율화’의 흐름 곳곳에 브레이크를 건다. 최근 수개월 동안 교육부는 새 대입제도의 골격과 보완정책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직접 제약하는 요인이 적지 않다. 우선 지나치게 복잡한 대입 전형이 수능 위주 전형, 논술 위주 전형, 학생부 교과 전형(내신성적 위주 선발), 학생부 종합 전형(입학사정관제), 실기 위주 전형(특기자 전형 포함)의 5가지로 단순해진다. 또한 학교 밖에서 얻은 스펙(상장이나 성적표)을 제출하는 게 금지되며, 심지어 자기소개서에 이러한 내용을 기재하면 0점 처리된다. 여기에 더해 선행교육 규제법을 통해 대학별 고사(논술, 구술면접 등)에도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물론 대입 선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그동안에도 계속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3불 정책’(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금지)을 유지했고, 이명박 정부는 ‘대입 자율화’의 이면에서 본고사를 막고 입학사정관제를 확대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대학에 관여했다. 이러한 간섭은 모두 법률적 근거 없이 행정력과 정치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반면 선행교육 규제법은 정부가 대학의 학생 선발을 직접 규제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입정책이 이전 정부와 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선행교육 규제법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이 법이 ‘현행 교육과정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과 이에 근거한 학교 교육과정은 과연 합리적인가? 예를 들어 ‘한글 읽기’는 초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에 편성돼 있긴 하지만, 불과 4주 만에 끝내게 돼 있다. 만일 한글 읽기를 전혀 선행학습하지 않은 학생이라면, 과연 4주 동안 한글 읽기를 제대로 익히는 게 가능할까?
한편 영어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 그 수준이 급속히 올라간다는 지적이 많다. 이 역시 ‘선행학습을 해야겠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현행 교육과정에 이런 문제점이 적지 않게 엿보인다.
선행교육 규제법이 시행되면 고등학교가 혼란에 빠질 우려도 있다. 현재 공식 고교 교육과정은 수능을 고려하지 않고 3학년 말까지 진도를 나가는 걸 가정해 마련돼 있다. 많은 사람이 ‘입시 교육’ 때문에 한국 교육이 황폐해진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공식 교육과정을 만들 때 ‘입시(수능)’를 고려하지 않고 그 분량과 속도를 정하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입시(SAT나 ACT) 준비를 해주지 않는 미국의 고교 교육과정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수능 대비 문제풀이를 학교에서 해주지 않으면 큰 혼란이 벌어지고 사교육비가 급증할 것이다.
특목고·자사고, 수능 준비 합법적 ‘과속’ 우려
따라서 고교에서 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실질적인 교육과정에 괴리가 나타나는 건 불가피하다. 수학을 기준으로 보면, 3년 과정의 수학 진도를 후딱후딱 나가서 3학년 1학기 중엔 마쳐야 한다. 그래야 11월에 치르는 수능에 대비해 문제풀이 훈련을 할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행교육 규제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라고 지시하면, 고교에선 학생들의 수능 준비에 제대로 도움을 주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일부 고교는 이런 난관을 합법적으로 피해갈 수 있다. 특목고·자사고 등은 초중등교육법상 ‘자율학교’로 지정돼 있어 교육과정 편성에 상당한 자율성을 지닌다. 이런 자율성을 활용해 국·영·수의 수업시수(時數)를 크게 늘려놓은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반고에서 1학년 1년 동안 배우는 수학 진도를 1학년 1학기에 끝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분명한 과속이요 선행교육이지만, 빠른 진도에 상응하는 충분한 시수를 확보해 만들어놓은 ‘공식 학교교육과정’을 따른 것이므로 전혀 불법이 아니다. 선행교육 규제법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뜻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선행교육 규제법을 엄격히 적용할 경우, 일반고는 수능 준비에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고, 특목고·자사고는 합법적인 ‘과속’ 진도를 통해 수능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참으로 황당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선행교육 규제법은 현재 우리나라 공교육이 가진 고질적인 난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준비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돼야 하는가. 고교에서 ‘정상적인 공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중요한 물음에 대해 교육당국은 제대로 된 답변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고교의 경우 선행교육 규제법 적용을 일단 유예하고,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초등학교·중학교 교육과정도 이번 기회에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합리적으로 재조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