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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시인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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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밥벌이의 신산함과 힘겨움에 비하면 시나 그림,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태평한 일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추구를 멈추는 순간 삶의 빛은, 윤기는 금세 빠져나간다. 나는 푸석거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시의 자리, 그림의 자리, 삶의 진흙탕 속에서도 꽃피우는 것들을 붙잡고 싶었다.

이태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올 때 갖고 있던 1만여 권의 책을 정리했다. 한 번도 들춰보지 않으면서도 정리도 못하는 옛날 책들이 서서히 그 부피의 위용을 자랑하던 때였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기쁨 반 한숨 반이었다. 기쁨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책 마니아니까 그렇다 쳐도 한숨은 언제 읽나, 언제 찾기 쉽게 정리할까 하는 마음이 숙제처럼 짓누르던 기운 때문이었다. 이사를 결정하면서 책 정리도 과감히 시작했다. 자료용으로 볼 만한 책들은 도서관에서 검색해서 찾아보기로 힘들게 마음먹고 정리를 시작했다. 새집에서는 책이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책장마다 여유 있게, 잘 보이게 꽂혔다. 언제나 읽어도 좋은 책들이었다.

책장을 방과 거실에 흩어 세워놓고, 동선 따라 보고 싶을 때 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한 권 한 권이 자기 색깔을 보이며 선명하게 제목을 드러냈다. 책을 꺼내 읽지 않고 제목만 연결해서 읽어보는 제목놀이를 하는 날이 많았다. 침실에는 시집만 꽂힌 책장을 놓았다. 600여 권의 시집이 꽂힌 책장이 놓인 침실에서 잠들고 잠 깨고 싶었다.

이사 온 이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하는 일은, 아직 잠이 덜 깬 몸으로 비몽사몽결에 무작정 손을 뻗어 잡히는 한 권의 시집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시를 읽는 것이었다.



사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

어떤 날은 다소 쓸쓸한 정조의 최승자 시집이 잡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상상력으로 힘 솟게 하는 남진우 시집이… 매일 다른 느낌의 시를 만났다.

“어느 때인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만져보면/ 모두가 造花였다/ 또 어느 때인가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이뻐서/ 만져보면 모두가 生花였다 造花보다 이뻤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최승자,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중에서)

이 시를 읽은 날은 시구대로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든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뭔가 써보기도 했다.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남진우, ‘타오르는 책’ 중에서)을 읽은 날엔 출근해서 만든 책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상상을 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 ‘나만의 것’ 등

저서 ‘편집자 분투기’ ‘책 사용법’ 등

한국출판인회의 대외협력위원장,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원장 등 역임


밥벌이 공간에서 아침에 읽은 시어를 되새기는 건 내가 생계에 목맨 비루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에 경도된 사랑스러운 인간일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오래 남겠지만, 나는 사는 동안만 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사는 동안 시를, 그림을, 자연을, 꿈을 부르겠다, 불러대야겠다.

신동아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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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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