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삼성 손들어준 국민연금 ‘자체 결정’ 후폭풍 덮치나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5-08-19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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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물산 임시주총, 커트라인 2.86%p 넘어
    • ‘관례’ 깨고 의결권위에 상정 안 해
    •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찬성 이유? 공개 안 한다”
    • ‘곤란한 안건’ 애매모호…규정 개선 논의할 듯
    삼성 손들어준 국민연금 ‘자체 결정’ 후폭풍 덮치나
    역시 캐스팅보트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었다. 7월 17일 삼성물산 임시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안은 국민연금의 ‘찬성’에 힘입어 가결됐다. 합병과 같은 특별결의 사안은 주총에 출석한 의결권 있는 주식의 3분의 2, 즉 66.67%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날 찬성률은 69.53%로 삼성물산은 ‘커트라인’을 2.86%p 넘어섰다. 의결권 있는 주식을 11.2% 보유한 국민연금이 찬성하지 않았다면 합병안은 가결될 수 없었던 셈.

    삼성 처지에선 다행스러운 결말로 끝났지만, 국민연금 안팎에선 이제 막 논란의 불씨가 점화한 모양새다. 발단은 이번 합병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내부 투자위원회(이하 투자위)를 통해 ‘자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 당초에 시장은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위원장·보건복지부 장관, 이하 기금운용위) 산하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이하 의결권위)가 이 사안을 다룰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기금운용본부는 삼성물산 주총을 일주일 앞둔 7월 10일 투자위원회를 열어 전격적으로 찬성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의 끈질긴 로비와 압력에 굴복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논평을 냈고, 참여연대는 7월 13일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기금운용본부에 찬성의 근거를 명확히 밝힐 것을 주문했다. 기자회견에 나선 최정표 참여연대 공동대표(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의결권위에 맡기지 않은 합리적 이유를 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결권위 최초의 긴급회의

    이튿날인 14일 오전에는 의결권위 사상 최초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6시간에 걸친 마라톤회의 끝에 의결권위는 “기금운용본부가 의결권위에 판단을 요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한다”는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의결권 행사 관련) 규정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요청한다”고 밝힌 것에서 읽히듯, 앞으로 의결권위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절차에 관한 논의를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관련 의사결정 시스템은 이렇다. △의결권은 투자위의 심의·의결을 거쳐 행사한다. △투자위가 찬성 또는 반대의 판단을 하기 곤란한 안건에 대하여 기금운용위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의결권행사 일반지침 제8조). 기금운용위는 산하 전문위원회인 의결권위에 의결권 심의·의결을 위임한다.

    의결권위 상정 여부는 전적으로 투자위가 결정할 수 있는 셈이다. 무엇이 ‘곤란한 안건’에 해당하는지 기준 역시 정해진 바 없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대목인데도 이 같은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은 그간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위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05년 말 의결권위가 구성되고 2006년 3월 첫 회의를 개최한 이래 지배주주가 관련되거나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안은 의결권위로 넘어오는 경향을 보였다(표 참조). 따라서 전에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된 이번 합병 건은 당연히 의결권위에 상정될 것으로 예상됐다. 국민연금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애매한 규정으로 투자위가 재량권을 남용할 가능성이 있음이 이번 일로 드러났다”며 “의결권위의 여러 위원 사이에서 이번 안건처럼 중요한 안건을 의결권위가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의결권위의 존재 이유가 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더욱이 이 같은 규정은 의결권위 자체 지침과 상충되는 부분도 있어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의결권위 지침에 따르면 의결권위는 투자위원회가 요청하는 사안 이외에도 ‘기금운용위 위원장이 요청하는 사안’이나 ‘그 밖에 의결권위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을 검토·결정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위 사이에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지침을 꺼내볼 일이 없었다”며 “앞으로는 지침의 구절들을 구체적으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 연기금들은 의결권 행사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까. 이들은 기금 운용을 맡긴 자산운용사에 의결권 행사 권한까지 위임한다. 국민연금처럼 의결권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별도 위원회를 두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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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연금 지배구조의 한계

    국민연금이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다른 구조를 갖게 된 배경이 있다. 초대 의결권위 위원장을 지낸 박상수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의결권 의사결정 기관이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의결권위”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다보니 정치권력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독립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그림 참조). 박 교수는 “기금운용본부가 의결권 관련 의사결정을 독점하면 제아무리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의결권위 설립 과정에 참여한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의결권위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국민연금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이 국민연금 기금의 70%를 정부 재정으로 갖다 썼을 정도로 국민연금은 정부에 종속돼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가 이를 시정하라고 했고, 이에 국민연금이 보건복지부 산하로 옮겨지고 정부·사용자·근로자·지역가입자·연구기관 등 여러 이해집단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위가 설치돼 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의결권위 역시 이러한 기금운용위 구성을 그대로 차용했다. 기업들도 국민연금 의결권이 정부 뜻대로 행사될 것을 염려해 여러 이해집단 대표로 의결권위를 구성하는 것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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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결권위는 정부·사용자·근로자·지역가입자가 각각 2명씩 추천하고 연구기관이 1명을 추천해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삼성물산 주총을 앞두고 세간의 관심이 ‘국민연금의 선택’에 집중됐을 때 “의결권위는 자문기구일 뿐인데 국민연금 의결권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의결권위는 자문기구가 아니라 기금운용위로부터 의결권 관련 권한을 위임받은 심의·의결기구”라고 강조했다.

    지난 10년 동안 국민연금은 의결권위를 통해 주주가치 훼손 등을 이유로 여러 안건에 반대를 표명해왔다. 지난해 4월에는 자회사를 통해 부실 모기업을 지원한 (주)만도의 행위가 회사의 장기 기업가치와 주주권익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같은 행위를 한 당시의 대표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했다. 지난 3월에는 현대모비스 및 기아차 사외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는데, 해당 사외이사들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매입과 관련해 대표이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 6월 말 SK C·C와 SK(주)의 합병을 반대한 이유도 합병비율이나 자사주 소각 시점 등을 고려할 때 SK(주)의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가 실제 주총에서 부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부결을 꾀할 만큼 지분율이 높지 않았을뿐더러 다른 주주들에게 뜻을 같이하자는 주주운동을 벌이지도 않은 까닭이다. 이 때문에 ‘실패가 예상되는 반대’를 해온 국민연금에 대해 ‘부담 없는 반대만 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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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감 때나 오픈될까…”

    이에 대해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비록 주총에서 부결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다른 기업과 시장에 ‘국민연금은 이러한 사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일관성을 꾸준하게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시장 전체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슈퍼 롱텀(super long-term) 투자자로서 국민연금은 주주가치 제고 차원에서 적정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 일관되고 꾸준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 주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난 8월 중순 현재까지 기금운용본부는 합병안 찬성 판단의 근거를 외부에 밝히지 않았다. 참여연대 최정표 공동대표는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관련 자문을 하는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반대를 권고했는데도 찬성했다면, 그 근거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판단의 근거는 있지만 공표는 안 하고 있다”며 “9월 국감 때 질의응답을 통해 오픈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선택에 많은 관심이 쏠린 탓인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위는 이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매우 꺼리는 분위기다. 시장에선 ‘의결권위가 SK 합병 건에 반대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삼성 건도 의결권위에 상정되면 승산이 없다고 본 것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신동아’ 취재 결과, 의결권위 위원 대다수가 막판까지 이 안건이 의결권위에 상정될 것으로 기대했고, 7월 10일 투자위가 자체 찬성으로 결론 내린 것도 언론 보도를 통해 안 것으로 파악됐다. 의결권위 안팎에서는 이번 일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방향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것을 염려하는 분위기다.

    7월 14일 의결권위가 요청한 ‘제도 개선’은 9월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또 다른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삼성물산 주총과 관련해 의결권 행사 내용의 근거가 합당한지, 절차적 개선 사항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등이 집중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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