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시(廣西)성은 베트남과 800km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인종·문화적 측면에서 중국보다 동남아에 가까웠고, 오랜 세월 이방인으로 핍박받았다. 하지만 최근엔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로 부상했다. 광시성에서 발원해 실패로 끝난 ‘태평천국’이 21세기에 실현될 수 있을까.
여자는 계수나무향을 좋아했고, 남자는 그걸 잊지 않았다. 계수나무향은 서로를 잊지 않았음을 확인해준 사랑의 향이다. 중국에서 계수나무향을 맡기에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약칭으로 ‘계수나무 계(桂)’를 쓰는 광시 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가 아닐까.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서도 야망이 식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영역이 아니던 남방을 정복해 진나라에 편입시켰다. 광시 일대는 계림군(桂林郡)이 됐다. 2000년 전에도 이 땅은 계수나무 숲이었다는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들짐승’
진시황이 죽고 중원이 전란에 휩싸이자 장군 조타는 남월(南越)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남월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광둥 · 광시 · 북베트남을 석권한 남방의 강자. 한(漢)이 천하를 재통일하고 국력을 축적한 뒤 한 무제는 남월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때의 정복이란, 한의 지배를 인정하고 세금을 바치는 수준이었다. 문화적 통합은 요원했다. 당시 양광(兩廣 · 광둥과 광시) 지역은 인종 · 문화적으로 중국보다는 베트남 홍강삼각주 주민과 더 비슷했다. 원주민은 원주민대로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국인들도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후한말의 대학자 설종은 중원의 전란을 피해 어린 나이에 교주(交州)로 왔다. 당시 교주는 광시 · 광둥 · 하이난 · 북베트남을 포괄했다. 교주에서 자란 설종은 이곳 지역 문화를 잘 알았지만 존중하지는 않았다. 교주 백성은 남녀가 거리낌 없이 몸을 허락해 부부가 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으며, 알몸으로 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들짐승으로 오직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경멸하는 사람을 착취하기란 쉬운 일이다. 후한 조정에서 임명한 교주 관리가 이민족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자주 벌어졌는데, 정황상 소수민족이 가혹한 수탈에 항거하다가 관리를 죽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교주 지역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 중국 사정에 정통한 동시에 현지 문화를 잘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사섭(士燮)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사섭의 선조는 노나라 사람으로 산둥인이지만, 전란을 피해 광시성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사씨 일가는 착실하게 기반을 닦아 6대손인 사섭의 아버지는 일남 태수를 지냈다.
광시성 정착 7세대인 사섭은 현지의 공기를 마시고 자랐다. 동시에 수도 낙양에서 유학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칠 만큼 중국 문물과 사정에도 밝았다. 숱한 군웅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스러지는 난세에 사섭은 중원의 조조, 형주의 유표, 동오의 손권 등과 시기적절하게 동맹을 맺기도, 대립하기도 했다. 덕분에 중원이 전란에 휩싸인 시기에 교주는 오히려 평안했다. 원휘는 순욱에게 사섭을 극찬했다. “사섭은 학문과 정치에 모두 뛰어나 혼란 속에서도 한 군을 보전했으며, 20여 년 동안 그의 영내에는 일이 없고 백성은 가업을 잃지 않았으니 타향을 떠도는 사람은 모두 그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섭은 중국 유교문화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인도-동남아-중국을 잇는 해외무역을 통해 풍요를 누렸고, 동남아 · 인도 문화를 융통성 있게 수용했다. 사섭이 외출할 때마다 “오랑캐 수십 명이 길 양쪽에서 향을 태웠다”는 기록에서 보듯 인도 불교문화도 일찍이 받아들인 듯하다.
거위 배를 가르다
사섭이 다스리는 동안 교주 지역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베트남인들은 사섭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고 ‘씨 브엉(士王)’이라며 존경을 표했다. 베트남 역사서 ‘대월사기전서’는 “우리나라가 시서(詩書)가 통하고 예악(禮樂)을 익히며 문헌(文獻)의 나라가 된 것은 사왕(士王)으로부터 시작됐다”고 기록한다.
사섭은 손권의 신하임을 자처하고 조공을 바쳐 교주의 평화를 유지했지만, 손권은 늘 교주의 풍부한 물산을 탐냈다. 사섭이 죽고 손권이 교주를 정벌토록 하자, 명장 여대는 전격전을 감행한다. 주위에서 준비가 불충분하다고 우려하자 여대는 말했다. “신속히 움직이지 않아 사씨 일가가 성을 굳게 지키고 일곱 군의 원주민이 구름처럼 모여 호응하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소?” 삼국시대 한족의 전투력은 모든 이민족을 압도했지만, 구름처럼 많은 소수민족과 험준한 지형은 여대도 두려워했음을 엿볼 수 있다.
여대의 정벌은 성공했다. 그러나 수탈과 반란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아 조세 수입이 사섭의 조공만도 못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격이었다. 오랜 시일이 흘러서야 광둥 · 광시 · 하이난은 중국에 통합되고 북베트남은 독립한다.
광시가 중국에 통합됐지만, “이곳 땅은 광활하고 인구가 많으며 지세가 험준하고 산림이 좋지 못하므로 이 조건을 이용해 소란을 일으키기는 쉽지만, 이곳 사람들을 다스림에 복종시키기는 어렵습니다”라던 설종의 우려는 청나라 말기에 재현된다.
아편전쟁은 서양의 탐욕과 청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난징조약에 따라 5개 항구가 개항하자 중국 무역을 독점하던 광저우는 상하이에 무역 중심의 자리를 내주며 침체의 몸살을 앓았다. 인근 광시에서 광저우로 온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로 전락했다. 고향에 돌아가도 별수 없었다. 원래 가난하던 광시는 때마침 가뭄까지 겹쳐 기근에 허덕였다. 일부 광부들은 허기를 달래려 석탄을 먹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홍콩에 자리 잡은 영국이 광둥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자, 궁지에 몰린 해적은 강을 거슬러 광시로 도망쳤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비밀결사 천지회도 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광시성에서 암약했다. 먹고살기 힘든 데다 불량배들까지 설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지역 토호들은 빈민을 구휼하기보다 자기 이익만 챙겼다.
‘예수의 아우’ 훙시우취안
외세의 침탈, 기근과 실업, 불안한 치안과 민심,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 선지자 이사야의 말은 마치 청나라 말기를 보며 한탄하는 듯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 너희 땅은 황폐해졌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눈앞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해졌다.”
이때,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의 아우인 훙시우취안(洪秀全)이 나타났다. 예수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가난하고 수고로운 이들에게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설파했듯, 훙시우취안은 고향 광둥을 떠나 광시의 척박한 산골마을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것조차 어렵고, 한 달을 살아가기는 더욱 어려운”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했다. 광시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들불처럼 대륙을 휩쓸었다. 광시인들은 용맹한 군인으로서, 충실한 신자로서 태평천국 초기에는 열정과 활기를, 후기엔 신념과 노련함을 불어넣었다.
“누구든 하느님의 자녀이고,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표방한 태평천국은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훙시우취안 일가부터 사치향락에 빠져들어 부패했고, 핵심 인물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을 벌였다. 청의 관군은 무능했지만, 안정을 지키려는 쩡궈판(曾國藩) · 리훙장(李鴻章) 등 신진 군벌이 등장했다. 결정적으로 서양 열강도 이해득실을 따져본 끝에 이단적인 태평천국보다는 고분고분한 청나라가 낫다고 판단해 청나라를 지원했다.
14년에 걸친 태평천국은 200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지옥으로 끝났지만, 꿋꿋이 청 · 지주 · 외세에 맞선 태평천국의 신화는 오랫동안 회자됐다. 태평천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린이들은 훗날 신중국을 여는 주역이 됐다. 신중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은 “제2의 훙시우취안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고, 공산당의 전쟁 영웅 주더(朱德)는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오”라던 태평천국의 명장 스다카이(石達開)의 무용담을 들으며 불굴의 의지를 키웠다. 실패로 끝난 실험은 중국의 근대를 여는 시작이기도 했다.
뜨거운 역사를 뒤로한 채, 오늘의 광시는 평온하다. 광시의 풍광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각지에서 몰려든다.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고, 양숴의 산수는 구이린 제일(桂林山水甲天下,陽朔山水甲桂林)’이므로 “구이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신선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願作桂林人,不願作神仙).”
‘서양 사위’ 많은 동네
구이린의 산수를 보면 지형의 변천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태곳적 이곳은 바다였다. 조개와 산호의 사체가 쌓여 석회암이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해저 석회암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석회암은 탄산이 섞인 물에 약하다. 남부는 아열대 · 열대성 기후로 비가 많이 오고 식물이 잘 자란다. 빗물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지하수는 식물의 뿌리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를 포함한다. 탄산수가 끊임없이 석회암을 녹여내면서 계곡과 동굴이 만들어지고, 비교적 산성에 강한 석회암 부위는 독특한 모양의 산으로 남았다.
그 결과 오늘날 광시는 430km의 리장강과 3만6000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절경을 자랑한다. 또한 여건이 비슷한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대에 유사한 카르스트 지형이 조성됐다. 윈난성, 구이저우성, 베트남의 하롱베이, 라오스의 방비엥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명소는 언제나 많은 인파로 붐빈다. 천하명승지인 구이린도 예외가 아니라, ‘론리 플래닛’은 특유의 독설을 날린다. “구이린은 관광 의존도가 매우 높은데, 이는 잘 관리되고 있고 깨끗하지만, 떼거지 군중과 부대껴야 하며 대부분의 명소에서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 헨리 키신저는 노적암(芦笛岩)을 시적인 곳이라 평했는데, 아마 이때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크고 아름다운 아우성이 없었나보다.”
양숴는 작은 마을이라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쿵짝쿵짝 클럽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2시가 돼서야 그쳤다. 양숴가 왜 ‘중국에서 가장 서양 사위가 많은 마을’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짐작이 갔다. 젊은 서양 배낭여행자들이 낮에는 풍경에 취하고, 밤에는 술과 음악에 취해 놀다가 혈기를 못 이기고….
숙소를 양숴 외곽으로 옮긴 후에야 비로소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숙소 매니저 잭은 무척 유머러스한 쓰촨인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일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KFC도 없는 곳에선 일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는데, 양숴에도 KFC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일하게 됐단다.
“광시는 좡족자치구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네?” 잭은 나의 질문에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중국엔 56개 민족이 있고, 좡족은 그중 하나일 뿐이야.” 소수민족을 대단찮게 여기는 한족의 시각이 엿보였다.
좡족은 중국 내 최대 인구(1618만 명)의 소수민족으로, 그중 87%(1420만 명)가 광시에 산다. ‘소수’라고는 하지만 네덜란드, 과테말라, 에콰도르 등 웬만한 나라의 인구와 맞먹는다. 그러나 큰 것을 숭상하는 중국인에게 소수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다. 4000만 광시인 중 62%는 한족이고, 좡족은 32%에 그치며 3위인 야오족은 3%에 불과하다.
야오족의 서사시는 모세의 출애굽기를 방불케 한다. 야오족의 경사스러운 혼인잔칫날 “글자로 춤을 추고 먹을 가지고 놀 줄 아는” 한족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족과 야오족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한족에 맞서는 것은 고사하고 안전하게 달아날 길조차 막막했다. 현명한 야오족 노인은 북 위에 기장을 뿌려서 새들이 모이를 쪼느라고 북을 둥둥 울리게 했다. 한족들이 북소리를 경계하는 동안 야오족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머리카락 전설
그러나 이들이 밀려난 땅은 척박했다. 산 전체를 통째로 논으로 만든 룽성(龍勝)은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다. 흰 바지야오족(白袴瑤族)이 사는 난단(南丹)현은 고산 협곡 사이에 위치한 땅으로 ‘7층의 돌에 1촌(寸)의 흙’이라 지력이 약하다. 2~3년 농사짓고 7~8년 휴경하기 일쑤다. 큰 강은 아예 없고 작은 강도 드물지만,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다. 큰비가 얕은 흙을 쓸어가버려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오족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풍습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랐더니 영혼을 잃어 죽었다거나, 힘을 잃어 전쟁에서 졌다는 등 여러 전설이 있다. 그런데 다양한 전설 속에서 공통된 점은, 지나가던 상인에게 머리카락을 팔았더니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한족 상인이 화려한 도자기, 예쁜 빗과 노리개, 맛있는 향신료 등을 잔뜩 가져왔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라 급기야는 머리카락까지 내놓는다. 가난한 상태에서 과소비를 하게 되니 더욱 가난해지고, 한족에게 경제적으로 얽매인다. 경제적 예속은 정치 · 사회적 지배로 확대되고, 문화적으로도 한족에 동화해 종족의 정체성까지 잃을 위험에 처한다. 전설 속의 패배는 문화의 패배를, 전설 속의 죽음은 종족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한족의 지배를 받는 탐욕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독립선언이다. 자신의 긍지와 문화, 종족을 지켜가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전통이란 결국 내용은 잊히고 형식만 남기 마련이다. 이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을 뿐,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잊어버렸다. 룽성 장발촌의 야오족은 머리를 푸는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 한다. 돈 대신 자존심을 택하며 생긴 장발의 풍습이 오늘날 돈 버는 수단이 됐다.
베트남과 얽히고설켜
나는 구이린에 처음 갔을 때 꽤나 당혹스러웠다. 산수로 유명한 곳이라 전원적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도시스러웠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내 당혹감을 눈치챈 듯 말했다. “구이린은 중국에선 작은 곳입니다. 하지만 시 중심부만 80만, 외곽까지 합해 총 500만이 사는 곳이라 외국인들에게는 작게 느껴지지 않죠.”
광시의 성도 난닝(南寧)에 가보니 구이린이 작긴 작았다. 난닝은 성도답게 큰 건물이 널찍널찍하게 들어섰고, 사람도 더 많아 활기가 넘쳤다. 난닝에서 아침에 버스를 탄 지 7시간 반 만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착했다. 마치 이웃동네 가듯 버스로 국경을 넘었다. 한국에서는 느끼기 힘든 대륙의 매력이다.
광시의 약칭 ‘桂’가 말해주듯 진나라가 계림군을 설치한 이래 광시의 중심은 구이린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광시의 중심을 베트남과 가까운 난닝에 뒀다. 난닝에서 하노이로 가는 중국 도로 위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 시설물이 설치돼 있어 동남아로 가는 기분을 한껏 낼 수 있다. 동남아로 뻗어가려는 중국의 야망이 느껴진다.
광시는 베트남과 800km의 국경선을 접한다. 그래서 광시와 베트남은 전쟁, 국경분쟁, 이민, 이권다툼 등 크고 작은 일들로 항상 복잡하게 얽힌다. 광시는 베트남을 관리하는 전진기지다. 사이가 나쁠 때는 전쟁터가 되고, 좋을 때는 협력의 장이 된다.
중국은 진나라 이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공식 이벤트처럼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다. 그때마다 광시는 베트남 공략을 위한 진군로 겸 병참기지였다. 중국은 동남아 일대에서 중화 중심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고, 그 열쇠인 베트남에 직 · 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 근대에는 중국과 프랑스가 동남아 패권을 두고 다퉜다. 일본이 조선을 대륙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손을 뻗치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프랑스 역시 중국 공략을 위해 베트남을 점령하는 와중에 베트남에서 청불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와 맞붙은 반도국의 지정학적 운명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일시적 지배는 중국의 장기적 지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을 뺏었다가 패전 후 중국에 지배권을 넘겨줬다. 동남아 패권을 탐낸 프랑스는 중국과 조약을 맺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한다. 중국군이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재진주하는 것을 우려하는 베트남인에게 호찌민은 쏘아붙인다.
“중국군이 머무르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아십니까? 중국군은 올 때마다 100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잠깐만 머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떠나게 될 겁니다.”
이후 역사는 호찌민의 예상대로 흘렀다. 베트남은 프랑스군과 미군을 차례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다. 베트남 독립에는 중국, 특히 광시의 공이 컸다.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 혁명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광시의 소도시 징시(靖西)에 모였다. 프랑스 · 미국과 전쟁을 치를 때에도 중국은 대량의 물자 · 무기를 지원했다. 원활한 보급을 위해 광시에 도로 · 철도를 새로 깔기도 했다.
베이부만(北部灣) 경제권
그러나 동남아의 패자가 되고 싶던 베트남은 끝내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1978년 중월전쟁을 치른다. 오랜 다툼 끝에 육지 국경분쟁이 해결되는가 싶더니, 오늘날에는 남중국해를 두고 분쟁을 벌인다. 멀리 있는 미국 · 프랑스보다는 역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베트남의 심복지환(心腹之患)이다.
물론 자국의 안위에 급급한 소국 베트남보다 대제국 중국의 시야는 더 넓다. 중국은 2007년 난닝 · 베이하이가 중심인 베이부만(北部灣) 경제권 건설에 착수했다. 광둥 중심의 주강 삼각주, 상하이 중심의 장강 삼각주, 톈진 중심의 보하이만(渤海灣) 경제권의 뒤를 잇는 중국의 제4 경제권이다. 동남아의 관문인 광시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동남아 교역과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긴 역사 동안 소외됐던 광시가 빛을 볼 날이 드디어 오는 것일까.
김용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