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생 이민성 씨와 1980년생 강석진 씨. 두 사람에겐 ‘빚 트라우마’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학 시절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메웠고, 졸업 후 생활비는 신용카드로 충당했다. 가정을 꾸린 지금껏 대출금을 갚느라 허덕인다. ‘빚에 살고 빚에 죽는’ 우리 청년들의 애환.
“결혼한 선배가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빚부터 갚아야 한다’고 조언하더라. 대학 학자금 대출 3100만 원, 졸업 후 2년간 생활비로 사용한 신용카드 대금 100만 원을 갚으려면 내년까지 월급(220만 원)의 70%를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소득의 3분의 2를 저축이 아니라 대출 상환에 써야 한다는 얘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좋은 빚’은 없다
이씨가 빚을 지게 된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 학자금 대출이다. 2007년 봄, 이씨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경기 이천이 고향인 그는 기숙사 입주를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가계 소득분위가 낮긴 하지만 차상위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씨는 자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았지만 이씨의 어머니는 은행 대출을 받아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35만 원짜리 방을 얻어줬다. 이 때문에 가계부채가 늘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씨의 부모에게 “대학졸업장은 취직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니 빚을 내서라도 학업을 마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씨는 대학 4년, 8학기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로 치렀다.
7년이 흐른 2013년 2월, 이씨는 빚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다. 갚아야 할 대출금이 공기업 신입사원 평균 연봉(3005만 원)보다 많다는 사실에 막막했지만, ‘취업만 하면 해결될 문제’로 여겼다. 그에게 대학 졸업은 미래를 위한 투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는 취업 문턱 앞에서 턱하니 막혔다. 졸업 후 2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 그는 대학졸업장을 갖고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대학진학률’을 꼽는다.
대졸자가 넘쳐나는 탓에 취업시장에서 대학졸업장이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1990년 33.2%이던 대학진학률은 18년 뒤인 2008년 83.8%로 껑충 뛰어올랐다.
“대학 다닐 때도 학자금 대출 상환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돈이 많이 드는 어학연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미래를 꿈꿀 선택지까지 제한하며 대학을 졸업했는데, 남은 건 빚뿐이다.”
돌려막기 악순환
이씨의 말마따나 우리 사회엔 미래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선 빚을 내서라도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인식이 굳건하다. 심지어 학업을 위한 빚은 ‘좋은 빚’이라며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세상에 좋은 빚이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조금득 청년연대은행 ‘토닥’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채권자가 돈을 빌려주면 채무자는 그 대가로 원금에 이자를 더해 갚아야 한다. 당연히 채권자가 이득을 보는 구조다. 학자금 대출은 신용 능력과 사회적 기반이 약한 청년들에게 이런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다.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청년을 대상으로 수익을 올리는 것 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씨가 빚을 지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신용카드다. 그가 갚아야 할 신용카드 할부금과 현금서비스 대금은 100만 원이 넘는다. 정규직 사원으로 취업하기 전 아르바이트와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혹자는 “비정규직 처지에 경제관념 없이 과소비한 것 아니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겠다. 이씨가 들으면 “속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맞받을 것이다.
이씨의 가계부를 살펴보자. 당시 이씨의 한 달 수입은 100만 원. 월세(35만 원), 학자금 대출 상환(27만 원), 공과금(3만 원), 교통비(7만 원), 통신비 및 휴대전화 할부금(8만 원)을 지출하고 20만 원으로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한다. 현금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에게 카드회사가 신용카드를 발급해줬다. 비록 6개월 계약직이긴 하지만 고정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도는 100만 원으로 이씨의 한 달 급여와 같다.
신용카드는 여러모로 편리했다. 후불제이지만 결제일별로 사용기간을 조정하면 최장 2개월까지 대금 상환을 미룰 수 있었다. 이씨는 현금이 모자랄 때마다 식비와 학원 수강료를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할부서비스도 요긴하게 사용했다. 면접에 필요한 의류나 신발은 신용카드 할부서비스를 이용해 구입했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쓰면 쓸수록 이씨의 자금 상황은 궁핍해졌다. 나중엔 카드 대금을 막기 위해 현금서비스까지 이용했다. ‘현금 부족→신용카드 사용→현금 부족→신용카드 현금서비스 사용’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그때마다 카드사는 카드 대금을 일부만 결제해도 된다며 ‘리볼빙 결제서비스’를 안내했다. 미결제금액을 약간의 이자와 함께 12개월 약정으로 갚으라는 것이다.
이씨는 “답답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과소비를 한 것도 아니고 학자금 대출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졌을 뿐인데, 어느새 여러 장의 신용카드와 대출서비스로 돌려 막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S저축은행에 대출을 문의했다가 살인적인 연체이자율에 수화기를 내려놨다. 다수의 대부업체가 저축은행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씨는 “토익 인터넷 강의를 3개월 간 90% 이상 수강하면 수강료 일부를 돌려주는 페이백(결제금 일부분을 돌려주는 것) 서비스를 이용해 악화된 자금사정을 겨우 회복했다”며 “빚은 테러이고 폭력이다. 요즘 젊은 층에서 왜 ‘헬조선’(한국혐오) 바람이 부는지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두 가지다. 금융권이 신용 기반이 약한 청년층에게 대출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소득이 불안한 청년층이 금융 소비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다. 이유가 뭘까. ‘약탈적 금융사회’의 저자 이현욱 변호사는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위축된 소비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금융산업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제위기 대응책으로 마련된 금융 자율화 정책과 교육복지에 대한 요구가 학자금 대출 시장을 키우고, 청년층에게 신용카드를 남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받을 만큼만 빌려주라”
채무를 개인의 잘못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도 문제다. 이씨처럼 빚을 진 청년들을 괴롭히는 건 빚을 졌다는 ‘자책감’이다. 이씨도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못한 정부에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잘못한 측면이 있다”면서 “청년들이 내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빚을 지고 연체에 허덕이는 청년을 향한 비난을 거둬야 한다”고 말한다. 한영섭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대표는 “못 갚는 것을 안 갚는 것으로 간주하고, 못 갚을 만큼 빌려준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갚을 만큼만 빌려야 한다면, 받을 만큼만 빌려줘야 한다”고 꼬집었다. 과도하게 빚을 권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외벌이 가정의 가장 강석진(가명·36)씨는 최근 5년간 ‘빚에 웃고 빚에 우는’ 삶을 살았다고 털어놨다. 불행은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 빌린 전세주택대출금에서 비롯됐다.
2010년 월 소득이 300만 원이 채 안 되던 강씨는 은행에서 1억 원을 빌렸다. A뉴타운 26평(85.95㎡) 장기전세주택(시프트)에 입주하기 위해서였다. 소득의 20%를 15년간에 걸쳐 상환하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모험을 감행했다. 입주할 아파트가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데다 은행이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었다며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돈을 빌려줬기 때문이다. 이씨는 “대출 한 번으로 집 문제가 해결되니 살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은행은 채권 회수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돌연 신규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강씨는 자동차 구입과 자녀 출산 계획을 뒤로 미뤄야 했다.
“은행은 애초에 채무자의 소득 수준이나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고, 채무자들이 돈을 무리하게 빌릴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 날 때 우산 빌려주고 비가 온다 싶으면 곧바로 빼앗는 은행의 태도를 보면서 채무자의 윤리는 있고 채권자의 윤리는 없는 것인지 씁쓸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대출 권유도 문제다. ‘우량고객’ ‘우대금리’ 같은 단어로 포장된 대출광고가 그렇다. 평범해 보이는 이 마케팅에는 치명적인 유혹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고객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달콤한 말로 아직 사회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들의 마음을 흔든다. 당장 급하게 돈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일반금리를 적용받게 되면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여겨 대출을 받게 유도한다.
강씨는 “결혼한 청년들은 사교육비와 노후자금 등 개인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언젠가 사용할지 모를 빚을 염두에 두게 된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일상 곳곳에 도사린 대출 권유는 혜택만 강조할 뿐 위험성은 좀체 알리지 않는다. 서동성 희망체크론 팀장은 “은행은 고객에게 우대금리를 적용받을 수 있다며 특별히 마이너스 통장까지 발급해주겠다고 하니 고객 처지에선 대단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지만 실제론 빚만 늘어날 뿐”이라고 설명한다.
빚의 일상화는 청년들을 빚의 수렁으로 내몬다. 강씨는 “내가 빚에 노출된 것은 최근이 아니다”며 “어릴 때부터 접한 빚이 대출과 할부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저축이 아닌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을 찾고, 당장 돈이 없어도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빚을 내 소비하고, 빚을 내기 위해 일하는 왜곡된 소비심리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강씨는 할부와 대출이 없는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를 ‘렌털’하고, 매주 대형마트에서 10만~20여만 원을 3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하며, 100만 원을 호가하는 휴대전화를 2년 약정으로 구입한다. 언제부턴가 빚이 일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빚의 위험성을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일러줄 생각이다. 자식만큼은 자신과 달리 빚으로부터 자유롭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빚의 일상화, 무감각화
이는 강씨만의 바람이 아니다. 노동정책과 금융정책에서 소외된 청년을 위해 활동하는 소모임이 생겨나고 있다. ‘도꼬마리 청년 빚 이슈’는 빚의 위험성을 환기시키고 청년 부채의 대안을 연구한다. 청년연대은행 토닥은 청년(만 15~39세)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언제든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담보는 없고, 이자는 채무자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모임이 정부 차원이 아니라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이들은 “우리마저 움직임이지 않으면 부채를 가진 청년이 구제를 요청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강씨는 “빚을 졌다는 이유로 미래를 꿈꿀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 답답하고 무섭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현실을 인정하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