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 먹을거리 발굴할 ‘2020미래창조추진단’
-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금 운용관리 시스템 정착”
- 총선 불출마, 아내 암투병…“아내 따라 죽고 싶었다”
- “여야 싸우면 국민만 피해…적 아닌 동지로 대해야”
공제회는 회원들이 매달 납부한 공제회비(장기저축급여)를 운용해 일시금, 또는 연금 형태로 돌려준다. 회원들을 대상으로 대여사업(생활자금 등), 복리후생사업, 교육문화사업도 한다. 자회사로 The-K손해보험, The-K예다함상조, The-K저축은행, The-K호텔,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 The-K소피아그린(골프장), The-K서드에이지(실버타운), The-K교직원나라 등이 있다.
공제회를 이끄는 이규택(73) 이사장은 9월로 취임 2년을 맞는다. 4선 의원 출신인 그는 대표적 친박(親박근혜)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러니 이른바 ‘정치권 낙하산’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웬만한 전문경영인 못지않은 실적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경제 ‘한국 기금·자산운용대상’을 2년 연속 수상했고, 매일경제 ‘공공기관 자산운용 평가’에서도 2년 연속 최고등급을 수상했다.
이사장 집무실에 들어서자 ‘교직 안정’이라고 쓴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1971년 공제회가 창립할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친필로 써준 것이다. 양 옆으로 ‘이 사회의 촛불과 소금이 되자’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문구가 나란히 걸렸다. 이규택 이사장은 고희(古稀)를 훌쩍 넘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동네 뒷산에 오릅니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약간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게 폐활량 늘리는 데 좋아요. 내려오는 길에 체육시설이 있는데, 역기를 매일 20번 이상 들어요. 이걸 안 하면 운동한 것 같지가 않아요.”
“몇 kg쯤 드냐”고 묻자 “70kg까지 든다”고 했다. 젊은이 못지않은 근력이다.
“적자를 낼 순 없다”
▼ 이사장에 취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2013년 여름에 공모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육계에 몸담고 계신 분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고, 교육 분야라면 어느 정도 전문성이 있다고 자부해 적어도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 교육계와는 어떤 인연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경기도 여주의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기도 했어요. 국회의원 시절 교육위원회 위원장도 지냈고요. 그때부터 한국교직원공제회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 공모였으니 경쟁이 치열했겠군요.
“10대 1이었으니, 총선 경쟁률보다 더 높았죠. 응모 후 두 달 동안 국회도서관에서 살았어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그렇게 준비했는데도 면접 볼 때 떨리더군요. 다른 지원자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그가 취임할 당시 공제회 총 자산은 22조3795억 원. 올해 6월 말 현재 약 26조 원이니 3조5000억 원 증가했다. 물론 저절로 늘어난 건 아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 국내 기업의 성장 잠재력 저하 등으로 당시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경제성장률은 3%대를 밑돌았고, 예금·채권금리는 ‘제로 금리’에 가까웠다.
“2013년 자산운용 수익률이 4.6%였어요. 그런데 회원들이 납입하는 장기저축급여에 대한 급여율(이자율)은 5.75%였으니 사실상 적자였죠. 노조 임원들을 만나 ‘우리가 아무리 공공기관이지만 적자를 내서야 되겠나, 임직원이 합심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자’고 독려했어요.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내부 혁신을 이루고, 조직체계도 개편했죠.”
▼ 노조의 반발은 없었나요.
“혁신 방안도, 조직체계 개편도 직원들과 상의하면서 진행해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 결과, 2014년에는 연말 코스피지수가 1915.59까지 하락하는 등 어려운 경제여건에서도 자산운용수익률 5%, 당기순이익 220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올해 6월 말 기준으로는 자산운용수익률 약 6%, 당기순이익 1310억 원을 달성했습니다. 2년 동안 전 임직원이 변화와 혁신에 동참한 결과입니다.”
공격적 투자, 안전성 확보
▼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줬습니까.
“임직원 중에서 직급, 연령대별로 20여 명을 뽑아 2020미래창조추진단을 만들었어요. 1년 동안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개선해야 할 것을 찾고 미래 먹을거리 발굴에 힘쓰도록 했죠.”
▼ 결과물이 있다면.
“지난해 3월 해외투자부를 신설했어요. 신설 당시 3조2000억 원이던 해외투자자산을 올 6월 말 현재 2배 가까운 5조7000억 원으로 늘렸죠. 그게 효자 노릇을 했어요. 해외투자는 국내보다 복잡하고 리스크도 크지만, 국내 투자가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이젠 ‘필요’를 넘어 ‘필수’가 됐다고 봅니다. 또한 미국 교직원퇴직연금기금(TIAA-CREF)과 1조 원 규모의 합작 펀드를 설립하고, 웰스파고 은행과도 업무협약을 맺어 다양한 투자선 확보를 꾀하는 등 해외 우량투자 비중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 새롭게 추진한 투자 분야로는 어떤 게 있습니까.
“미래 먹을거리인 신성장동력에 대한 투자를 다변화하고 있어요. 2013년엔 국내 기관투자자 최초로 항공기금융에 투자했고, 창조경제의 핵심 부가가치사업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오시밀러(바이오 의약품 복제약) 분야와 영화펀드에도 300억 원씩 투자했습니다. 또한 5000억 원 규모의 블라인드펀드를 조성해 인프라, M·A, 헬스 케어, 신약 등 다양한 분야의 투자처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공격적 자산운용도 필요하지만 안전성도 중요하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금 운용관리 시스템이 요구되는 이유다. 교원공제회의 기금운용 시스템은 여러 공제회 중에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선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산운용위원회에서 5년 단위의 중장기 자산운용계획안을 수립해 자산을 운용합니다. 자산운용위원회와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외부 인사가 맡아 공정성을 기하고, 이사장은 아예 운용에 개입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투자의 공정성과 리스크 관리 강화를 위해 투자부서와 독립된 조직인 미래전략실에 리스크관리팀과 투자심사팀을 둬 위험요소를 철저히 분석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시각에서 위험을 분석하고 합리적인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투자 관련 실무자 전원이 직급에 상관없이 개별 투자 안건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고, 투자한 후에는 제3의 기관에서 공정한 가치 평가를 통해 위험을 관리합니다.”
자산 100조 시대 준비
한국교원공제회는 회원들이 납입하는 장기저축급여에 대해 높은 급여율을 보장해왔다. 2013년 5.75%에서 2014년 5.15%로 낮췄지만 여전히 시중 금융상품보다 높은 이율이다. 회원들에게야 좋은 일이지만 공제회 경영엔 큰 부담이 됐다.
“감독기관인 교육부를 비롯해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재정 건전성 강화를 위해 급여율 인하를 지속적으로 권고받았습니다. 이에 대의원회, 운영위원회 등 회원 대표들로 구성된 다양한 의사결정기구를 통해 충분히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해 지난 3월 급여율을 4.32%로 인하했습니다.”
▼ 회원들의 반발이 심했을 것 같은데요.
“회원들도 높은 급여율보다는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아울러 지난 연말, 장기저축급여를 연금식으로 수령할 경우 이자소득세를 15.3%에서 2%로 낮추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회원들의 손실을 최소화했습니다. 공제회에서는 앞으로도 한층 강화된 재정 안정성을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수익 창출에 힘쓸 겁니다.”
▼ 임기가 1년 정도 남았는데, 앞으로 가장 주력하려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100세 시대입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40년쯤 더 살아야 합니다. 이런 흐름에 맞춰, 회원들의 복리 증진과 생활 안정을 위한 다양한 제도와 서비스, 상품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30년 후인 2044년엔 공제회 자산이 100조 원에 달하게 됩니다. 장기적 안목에서 경영 쇄신, 조직 개편, 인적자원 충원 등 모든 부분을 새롭게 정비하고 준비해나갈 생각입니다.”
▼ 재임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공제회에서는 회원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다양한 생활 · 문화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The-K행복나눔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선생님들로 구성된 합창단, 밴드 등이 출연해 공연을 펼쳤는데, 하는 분도 보는 분도 다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올 1월에 벌인 해외봉사활동도 보람차고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우리 공제회 지원으로 건립된 베트남 띵자 희망직업교육센터에서 10명의 교사 회원이 2주 동안 150여 명의 학생에게 음악, 미술, 과학, 체육, 컴퓨터, 한국어 등을 가르치고 돌아왔습니다. 함께 간 직원이 이질에 걸려 고생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돌아올 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부둥켜안고 울 정도로 정을 듬뿍 나눴습니다.”
정도와 원칙, 그리고 친박연대
이규택 이사장의 이력은 파란만장하다.
“돌이켜 보니 그동안 몸담은 직장이 12곳이나 되네요. 중학교, 중앙일보, 동양방송, 제일제당, 삼성전자, KBS….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스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는 제가 직접 창단하기도 했죠. 그 인연으로 지난 5월 삼성과 한화 경기에서 기념 시구를 했는데 기분이 묘하더군요.”
▼ 1980년대 중반,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다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이부영, 이경재 등 해직기자들과 친했어요. 이원홍 당시 KBS 사장이 불러서는 ‘한 번만 더 빨갱이들과 어울리면 자르겠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죠. 그렇다고 오랜 동료들과 절교할 수는 없잖아요. 계속 인연을 이어가다 결국 회사에서 잘렸죠. 이를 계기로 백기완 선생을 돕다가 김덕룡(민화협 상임의장)의 소개로 민주산악회에 참여하고, 민추협 활동을 하다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도 당하고, 감옥에도 갔죠.”
그는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활동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1990년 3당 합당 때 YS를 따르지 않고 노무현, 김정길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1992년, 1996년 총선 때는 여당 강세 지역인 경기도 여주에서 연거푸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1996년 민주당을 박차고 나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3당 합당 때 안 따라간 건 단순해요. 엊그제까지 전두환, 노태우 욕을 했는데 어떻게 그 품에 들어가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죠. YS가 직접 설득했지만 거절했어요. 1996년에도 마찬가지예요.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명분 없이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민주당 의원 대부분을 데려갔어요. 정도가 아니다 싶어 한나라당으로 온 거죠.”
2008년엔 ‘친박’이란 이유로 총선 공천을 못 받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공천 심사에서 탈락한 날 밤,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해요…’ 하며 걱정을 하는데, 나도 난감해서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다음날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나를 비롯한 공천 탈락자들이 모였는데, 당신도 답답하지만 위로하는 것밖에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때 박 대통령이 한 말이 ‘살아서 돌아오라’였죠.”
그는 이를 계기로 친박연대를 주도했다. 비록 자신은 낙선했지만 친박연대는 24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며 박근혜 파워의 실체를 확인시켰다. 만약 친박연대가 총선에서 실패했다면 박근혜의 대선 가도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친박연대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아내와 색소폰
하지만 그는 낙선했고, 그로 인한 좌절도 컸다. 그때 힘이 되어준 게 색소폰이라고 한다.
“지역구에 내려가면 당원들과 소주 한잔하고 2차로 노래방을 가는 게 코스였어요. 그런데 2007년에 아내가 느닷없이 색소폰을 배우라는 거예요. 여성 유권자를 홀리는 데는 색소폰 연주가 최고라나…직접 등록까지 해주더군요. 선거 때문에 열심히 배웠는데, 공천 탈락으로 써먹지도 못했죠(웃음).”
아내 이재옥 씨는 그 직후 뇌종양이 발병해 4년 동안 투병하다 2012년 11월 작고했다. 17년 동안 식당을 하며 그의 정치인 생활을 온몸으로 뒷바라지해준 아내였다.
“마지막엔 너무 힘들었어요.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데다, 아내는 생사를 헤매지…. 긴 병간호에 장사 없다고, 아픈 아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기도 하고…. 아내 죽을 땐 나도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그때 큰 힘이 되어준 게 색소폰이죠.”
배려하고 존중하자
▼ 지금도 자주 부나요.
“재능기부를 통해 많은 분과 즐거움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지난해에는 영월교도소를 방문해 위문공연을 했고, 독일 작센 유스윈드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했어요. 지난 3월 열린 공제회 대의원회에서도 색소폰을 연주해 박수갈채를 받았죠. 이제 색소폰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어요. 직원들에게도 무슨 악기든 좋으니 하나씩 배우라고 자주 얘기합니다.”
▼ 색소폰의 매력이 뭔가요.
“색소폰 음색은 듣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어요. 꾸준히 연주하다보니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폐활량도 좋아지고, 악보를 외우다보면 기억력 향상에도 좋습니다. 제 연주에 즐거워하는 청중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쁜 일이고요.”
이규택 이사장은 대변인, 원내총무, 최고위원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런 만큼 요즘 정치판을 보는 심경이 남다를 것 같다.
“우리 때는 여야가 싸우더라도 뒤로는 대화를 많이 했어요. 원내총무 때 파트너였던 정균환 의원과는 지금도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이죠. 그런데 요즘은 너무 각박해졌어요. 상대방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고.”
그는 노무현 정권 초기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전에 한나라당 당사를 방문하기도 했어요. 며칠 후엔 여야 원내총무를 불러 같이 밥도 먹었죠. 밥 먹으면서 다투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했죠. 예를 들어 참여정부 첫 총리로 고건 씨를 임명했는데, 요즘 잣대로 보면 청문회 통과가 힘들었어요. 우선 군대를 안 갔으니까. 하지만 당 지도부에서 ‘신접생활 6개월은 봐줘야 한다’며 통과시켜줬죠. 그땐 그런 배려가 있었어요.”
▼ 후배 의원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상대를 인정하고 대접해줘야 해요. 상대가 있으니까 자기도 존재하는 거예요. 정치란 게 결국 국민을 위한 일인데, 서로 원수처럼 대하면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가요. 상대를 적으로 보지 말고 동지로 봤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