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 까닭은 옷과 집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는 반면, 음식은 적당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먹방’ ‘쿡방’과 같은 요리 프로그램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옛날에도 저녁 식사시간에 요리 프로그램이 방영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큰 인기를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왜 먹방과 쿡방이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된 것일까요. 이런 자문을 하다보니 먹는 것과 음식을 다룬 미술 작품은 어떤 게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을 게 지천으로 널린 곳
음식을 화폭에 담은 작품 중 제게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1525년경~1569)의 ‘게으름뱅이의 천국’입니다. 브뢰헬은 16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브뢰헬은 흔히 ‘농민의 브뢰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농민의 생활상을 많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또 브뢰헬 가족은 모두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첫째 아들 피테르 브뢰헬과 둘째 아들 얀 브뢰헬 모두 유명한 화가가 됐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이름이 같아서 아버지는 대(大) 피테르 브뢰헬, 첫째 아들은 소(小) 피테르 브뢰헬로 불립니다. 여기서 다루는 이는 물론 아버지 피테르 브뢰헬입니다.
주목할 것은 브뢰헬이 활동한 시기가 16세기라는 점입니다. 브뢰헬은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와 같은 시대의 화가입니다. 신화와 종교가 이들의 주요 주제였던 것과 비교할 때, 농민 생활을 다룬 브뢰헬의 화풍은 매우 이채롭습니다. 물론 브뢰헬 역시 종교적 교훈을 담은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속담’ ‘농부의 결혼식’ ‘눈 속의 사냥꾼’ 등 그가 남긴 주요 작품들을 보면 브뢰헬은 매우 현실적인 화가였습니다.
이러한 화풍의 차이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라는 지역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는 기독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반면,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지만 16세기 유럽의 산업을 주도했습니다. 브뢰헬이 활동한 도시는 앤트베르펜과 브뤼셀인데, 앤트베르펜은 당시 유럽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테크에 있는 ‘게으름뱅이의 천국’(The Land of Cockaigne, 1567)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플랑드르 지역에 전승된 이야기와 관련됩니다. 전해 내려온 당시의 어느 시(詩)는 먹을 게 풍성한 땅을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으로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돼지가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며, 구워진 거위가 접시 위에 놓였습니다. 집 울타리는 소시지로 이뤄지고, 지붕에는 빵이 널렸으며, 뒤편에는 우유가 강처럼 흐릅니다. 한마디로 먹을 게 지천으로 널린 곳, 그곳이 바로 게으름뱅이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작품 한가운데는 농민, 군인, 학자를 상징하는 세 사람이 작품 제목처럼 게으르게 누워 있습니다. 당시 사회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입니다. 이들 모두 먹을 게 이렇게 널려 있으니 굳이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가 더없이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게으름뱅이의 천국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식욕은 욕망의 중심
브뢰헬은 왜 이 작품을 그린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견해가 제시됐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 빈곤한 현실에 대해 먹을 게 풍족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봤고, 어떤 이는 플랑드르가 번영하던 시절이라 풍족한 현실을 반영했다는 반대의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브뢰헬이 게으르고 탐식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교훈을 안겨주려 이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이런 천국이 존재하지 않으니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도덕적 교훈이 담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게으름뱅이의 천국’은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고상한 주제가 아니라 먹는 음식에 관한 일상적인 주제를 해학적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먹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먹는 것은 생명과 직결됐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의 먹방과 쿡방 열풍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먹방 열풍의 배경은 현대사회의 특성인 ‘욕망’이라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양 역사는 중세를 지배한 ‘신의 시대’에서 근대를 지배한 ‘이성의 시대’로 변화했고, 그것은 다시 탈현대를 지배하는 ‘욕망의 시대’로 변화해왔습니다.
이런 욕망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식욕이 아닐까요. 내가 지금 먹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새로운 식욕을 자극 받기도 합니다. 일종의 ‘욕망의 대리만족’이 먹방 열풍에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먹방 열풍은 현대인이 받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드러내주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할 만큼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때 빠른 만족을 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쁨이나 쾌락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과도하게 확장될 때 병리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주로 성(性)과 관련된 질환이지만, 먹는 것과 관련된 질환도 꽤 많습니다. 상담사인 저는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심각한 식이장애를 앓는 수많은 사람을 봤습니다.
화가는 과연 무엇을 그려야 할까요. 고상한 미의 재현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당대의 다른 화가들과 비교할 때 브뢰헬이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이유가 이러한 통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먹방·쿡방 열풍의 심리
먹방 열풍을 이은 쿡방 열풍도 바로 이런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쿡방 열풍이 일어난 까닭은 먹방 열풍과는 다소 다릅니다. 먹방이 개인의 욕망과 정신적 고통과 관련이 있다면, 쿡방은 사회적 상황과 더 관련돼 보입니다. 여러 사람은 최근의 경기 불황과 1인 가구의 증가가 쿡방 열풍을 가져왔다고 지적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집밥’이 외식보다는 저렴합니다. 빠듯한 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습니다. 그러니 싼 재료를 가지고도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코치해주는 쿡방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이들의 경우 반복되는 매식에 지치게 됩니다. 홀로 식당에 가서 외롭게 식사하느니 TV 속의 셰프와 함께, 혹은 아프리카 TV와 같이 화면 속에서 많은 사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요리를 만들어 먹는 방식을 택합니다.
또한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것은 다소 번거롭지만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만들 때 창조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게 엄청난 예술 작품의 창조일 필요는 없습니다. 평범한 집밥이라도 정성 들여 만드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줍니다. 쿡방 열풍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합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뢰헬의 ‘농부의 결혼식’(Peasant Wedding, 1568) 역시 먹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잔칫상에는 죽과 맥주가 놓였고, 결혼식에 참여한 축하객들이 먹고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작품 한가운데 오른쪽에는 신부가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혼식 풍경과 아주 유사합니다. 브뢰헬은 농부로 가장하고 시골에 가서 결혼잔치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체험이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농부의 결혼식’을 두고도 ‘게으름뱅이의 천국’에서처럼 견해가 엇갈립니다. 한편에선 브뢰헬이 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당시 농민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꾸짖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대식(大食)을 비판하는 작품이라고 해석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러한 견해가 지나치게 도덕주의적 시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죽과 맥주가 피로연의 주 메뉴입니다. 이런 소박한 피로연의 모습은 오히려 농민 생활에 대한 브뢰헬의 따뜻한 시선과 공감, 그리고 유머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농민에게서 성자를 보다
제가 보기에 아마도 진실은 이러한 두 해석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농민의 삶이 갖는 소박함과 소란스러움, 그런 공동체적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지나치게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경고를 하려 했던 게 브뢰헬의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브뢰헬의 작품을 볼 때마다 회화의 의미에 대해 그가 품은 생각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브뢰헬은 이 기획에서 다룬 적이 있는 엘 그레코와 동시대인입니다. 브뢰헬이 16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화가였다면, 엘 그레코는 16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엘 그레코는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한 화가입니다. 그는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종교화를 우리에게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브뢰헬은, 비록 기독교의 도덕적 교훈을 중시했더라도, 농민을 포함한 당시 사람들의 일상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브뢰헬에겐 매일의 일상이 종교생활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브뢰헬은 제게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늘 비슷하고 지루한 일상을 소중히 생각하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종교적인 감동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브뢰헬이 그린 거칠고 소박한 농민들의 얼굴과 손에서 엘 그레코가 그린 성스러운 성자의 얼굴과 손을 보았다고 한다면 제가 과장하는 것일까요.
박상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