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정 모자라자 죄수 차출해 남방보국대 보내
- 강제노역자 2000여 명 모두 불귀의 객
“해뱅이다!” “만세!” 라고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나는 해뱅(해방의 경상도 사투리)이 무엇인지 몰랐다. 왜 만세를 외치는지도 몰랐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더니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몇몇 동네 사람이 “야야~, 일본이 전쟁에 져서 망하고 이제 우리 조선은 해방이 되었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방학하기 며칠 전까지도 나는 학교에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서 우리 일본은 베이고쿠(米國)를 무찌르고 승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일본이 졌다니…. 나는 ‘이제 큰일이 나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이것이 8·15에 대한 내 기억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일제가 어린 우리에게 황국신민(皇國臣民)임을 세뇌한 결과였다.
그 후 며칠 동안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에서 일장기를 내려 불태우는 것을 보았다. 일본인들이 집이나 사무실에서 신을 모셔놓은 ‘가미다나’를 꺼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사람들이 발로 뭉개는 것도 보았다. 주재소(지금의 경찰 파출소)의 일본 순사들이 성난 군중에게 쫓기어 이리저리 도망하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렇게 해방을 축하하는 농악대의 풍악소리가 울릴 때 중국 땅 하이난도(海南島)에서는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조선인 남방보국대(南方報國隊)’ 생존자 1000여 명이 해방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일각에서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이가 쓰러지자, 패전으로 하이난도에서 퇴각해야 하는 일본인들이 살아 있는 조선인까지 칼과 곡괭이, 몽둥이로 살육해 매장했다고 한다.
‘해방의 날’에 시작된 살육
해방을 기뻐하며 조국에서 울려 퍼진 징소리와 북소리가 그들에게는 살육의 신호소리가 됐단 말인가? 왜 일본군인들은 칼과 곡괭이 몽둥이를 쓴 것일까. 총으로 조선인을 쏘면, 총소리 때문에 학살 사실이 하이난도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알려질 것을 염려했음이 분명하다. 항복과 동시에 일본군의 무기 사용이 금지됐으니 총을 사용하면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간교한 계산도 했을 것으로 본다. 전염병이 돌았으면 사람을 살려내려 노력해야지 살아 있는 사람까지 죽여서 매장한 것은 잔혹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조국 광복의 순간 하이난도에서 피살된 조선인 남방보국대는 무엇인가.
태평양전쟁이 중후반으로 접어들며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 해전을 계기로 미국은 강력히 반격했다. 전세가 밀리는 일본은 1943년경부터 최악의 사태에 대비했다. 일본의 오키나와, 한반도의 제주도와 부산, 중국의 관문인 하이난도에 동굴 요새진지를 대대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것.
이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장정들은 징병으로, 징용으로 모두 끌려갔기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일제는 한반도 전역에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노역을 감당할 만한 이들을 감언이설로 속여 억지로 남방보국대에 지원하게 했다.
일제가 제시한 조건은 6개월만 노역에 참여해도 잔여 형기를 모두 면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노역에 대한 보수도 일본인 순사(순경)만큼 주겠다고 했다. 차출된 죄수들은 대부분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한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다. 반(反)일제 성향의 인사들이었던 것. 그러하니 일제는 이들을 일제 청소(?)하려고 작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추모제를 위해 8월 9일 하이난도에 갔을 때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이러한 추측을 확신케 하는 증언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일본 군인들은 조선인 죄수들을 죽일 구실을 찾는 데 몰두했다는 것이었다.
광복 전에도 1000여 명 사망
그렇게 차출해서 끌고 간 인원은 2000여 명이었다. 그중 절반 남짓한 1000여 명은 힘든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고 1000여 명이 해방된 8월 15일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패전한 사실을 숨기고 잔혹한 방법으로 이들을 학살했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1000여 명이 죽은 것은 이들이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노역했음을 보여준다.
하이난도로 끌려간 2000여 명의 조선인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된 것은 일제가 반(反)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뜻이 된다. 전염병이 돌았으면 구제해야지 왜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국제법상으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범죄이니 반드시 사건 진상을 규명해 응징해야 한다.
하이난도의 중국인들은 해방의 순간에 희생된 조선인 1000여 명이 묻혀 있는 곳을 ‘천인갱(千人坑)’으로 부른다.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그곳에서 집단으로 사망한 것을 사실로 보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우리 국민 대부분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러 시민 단체가 탄원했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나도 이 사실을 모르다가 2013년, 이승복 소년 사건을 왜곡하고 유가족들을 폄훼한 무리들과 싸워 바로잡은 영관장교연합회의 권오강 회장을 만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 접하면서 놀라움과 울분을 누를 수 없어 지금까지 2회에 걸쳐 현장을 탐방했다. 지금 하이난도 당국은 천인갱 부근을 개발하려고 한다. 한 맺힌 천인갱이 사라질 지경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우리 정부는 독립운동을 하다 해외에서 순국한 열사의 유해는 단 한 구일지라도 대대적인 송환 작업을 통해 모셔오고 있다. 강제 징용된 사할린 동포들도 유가족들이 유해 송환을 원하면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수습한다.
그러나 하이난도에서 절명한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에 나는 사단법인 대한민국건국회 회원들과 함께 천인갱 원혼들의 영전 에 ‘조국이 독립’했고 ‘대한민국이 건국’했음을 고하고, 하이난도 당국에는 천인갱 부근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에 현장에서 수습된 유골을 보존해주고 찾지 못한 유골도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미약하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라 정부와 여러 단체가 갖가지 경축행사를 계획해 추진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자랑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크고 화려한 축제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불과 70여 년 전에 나라가 지켜주지 못했기에 이역만리 타국으로 끌려가 힘든 노역을 하다 학살당하고 암매장된 동포 1000여 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노역을 하다 광복 전에 숨진 이도 1000여 명에 달한다.
경제대국이 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조국이 빛나게 발전했음을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선조의 고통 되새겨야
식민지에서 놓여난 것을 ‘해방’이라고 하지 않고, 주권을 되찾았다고 하여 ‘광복’으로 부르면 우리의 자존심이 좀 더 지켜지는 걸까. 진정한 광복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새로운 건국과 함께 굳건히 선 것을 의미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해방의 기쁨을 축제로만 즐길 것이 아니라 압제의 시절 희생된 선조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선조의 희생과 주권의 귀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