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다른 구조를 갖게 된 배경이 있다. 초대 의결권위 위원장을 지낸 박상수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의결권 의사결정 기관이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의결권위”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다보니 정치권력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독립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그림 참조). 박 교수는 “기금운용본부가 의결권 관련 의사결정을 독점하면 제아무리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의결권위 설립 과정에 참여한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의결권위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국민연금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이 국민연금 기금의 70%를 정부 재정으로 갖다 썼을 정도로 국민연금은 정부에 종속돼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가 이를 시정하라고 했고, 이에 국민연금이 보건복지부 산하로 옮겨지고 정부·사용자·근로자·지역가입자·연구기관 등 여러 이해집단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위가 설치돼 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의결권위 역시 이러한 기금운용위 구성을 그대로 차용했다. 기업들도 국민연금 의결권이 정부 뜻대로 행사될 것을 염려해 여러 이해집단 대표로 의결권위를 구성하는 것에 찬성했다.”

삼성물산 주총을 앞두고 세간의 관심이 ‘국민연금의 선택’에 집중됐을 때 “의결권위는 자문기구일 뿐인데 국민연금 의결권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의결권위는 자문기구가 아니라 기금운용위로부터 의결권 관련 권한을 위임받은 심의·의결기구”라고 강조했다.
지난 10년 동안 국민연금은 의결권위를 통해 주주가치 훼손 등을 이유로 여러 안건에 반대를 표명해왔다. 지난해 4월에는 자회사를 통해 부실 모기업을 지원한 (주)만도의 행위가 회사의 장기 기업가치와 주주권익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같은 행위를 한 당시의 대표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했다. 지난 3월에는 현대모비스 및 기아차 사외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는데, 해당 사외이사들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매입과 관련해 대표이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 6월 말 SK C·C와 SK(주)의 합병을 반대한 이유도 합병비율이나 자사주 소각 시점 등을 고려할 때 SK(주)의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가 실제 주총에서 부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부결을 꾀할 만큼 지분율이 높지 않았을뿐더러 다른 주주들에게 뜻을 같이하자는 주주운동을 벌이지도 않은 까닭이다. 이 때문에 ‘실패가 예상되는 반대’를 해온 국민연금에 대해 ‘부담 없는 반대만 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