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현지취재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몽골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2/5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베이징발 철도에 어느 나라 물품이 많이 실릴지는 ‘가격’이 결정한다. 몽골은 경제력이 약하기에 싼 제품을 선호한다. 따라서 중국산 저가품이 가장 많이 실리고, 이어 고급품으로 인식된 ‘메이드 인 코리아’ 물품이 실린다. 중국은 몽골산 지하자원이 필요하다. 그러하니 생필품을 싣고 온 베이징발 화차는 몽골에서 지하자원을 가득 싣고 돌아간다. 그래서 몽-중 노선은 항상 북적인다.

현실이 이러하니 몽골은 중국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베이징발 열차가 하루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울란바토르 시장에서 품귀 현상과 사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몽골인의 대중 자주의식은 도도하기 그지없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도 하다. 그렇게 싫어하는 중국을 대국으로 만들어준 것이 몽골인과 몽골인의 친구이자 원수이기도 한 만주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인과 만주인은 베이징을 중국의 수도로 만들어줬다.

12세기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중국 대륙에 있던 송(宋)나라를 공격해 남쪽으로 밀어냈다. 남쪽으로 밀려간 송나라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그러한 금나라를 칭기즈 칸의 몽골이 무너뜨렸다. 몽골은 남송도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때 유교에 젖었던 남송인이 결사항전했다.

그런 까닭에 중국을 통치하게 된 몽골은 남송인을 강하게 차별했다. 몽골인이 최고이고, 서양인처럼 눈동자에 색깔이 있어 색목인(色目人)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인이 두 번째, 세 번째는 양쯔강 이북에 있던 한인(漢人), 마지막이 남송인을 가리키는 남인(南人)이었다.



베이징은 고대에도 중요 도시로 여겨졌지만, 심장부는 아니었다. 그때의 중국 중심부는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이 있는 중원(中原) 지역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베이징은 ‘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계는 전국7웅이던 연(燕)나라가 수도로 삼았기에 ‘연경(燕京)’으로 불리기도 했다.

베이징을 수도로 만들어주다

그리고 1000여 년이 지나 베이징이 주목받게 됐다. 933년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족이 베이징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명명한 것. 5경 제도를 유지한 요나라는 지금 내몽골자치구의 파림좌기를 ‘상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 상경에서 보면 남쪽에 있기에, 베이징을 남경(南京)으로 부른 것이다.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며 베이징 지역을 차지한 뒤엔 ‘중도(中都)’로 바꿔 불렀다. 금나라 역시 5경 제도를 운용했다. 금나라는 그들이 일어난 흑룡강성 아성(阿城)시를 ‘상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후대에 중도로 천도했다. 베이징은 금나라 시절 부(副)수도였다가 수도가 된 것. 그러한 베이징을 완벽한 수도로 올려준 것이 원나라다.

원나라를 세우기 전 몽골족은 울란바토르 남서쪽 350여 ㎞ 떨어진 곳에 있는 카라코룸을 수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온 마르코 폴로도 카라코룸에 장기간 머물렀다. 몽골제국 즉, ‘대몽골’은 칭기즈 칸(1대)-오코타이(2대)-구육(3대)-몽케(4대)를 ‘대칸(大汗)’으로 부르며 이어지다, 5대가 들어설 시점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동생인 아릭부케(‘아리크 부카’로도 부른다) 세력으로 나뉘었다.

몽골은 ‘말자(末子, 막내아들)상속’ 제도를 유지했기에, 아릭부케가 정통을 있게 됐다. 형인 쿠빌라이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력이 약해진 아릭부케는 1264년 항복했다. 승리한 쿠빌라이는 1267년 중도성(城)을 불태우고, 그 북쪽에 새 성을 만들어 ‘대도(大都)’로 명명하고 수도로 삼았다.

1271년 그는 국호를 대몽골에서 ‘대원(大元)’으로 바꿨다. 그에 따라 중심도 카라코룸에서 베이징(대도)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원을 명(明)이 무너뜨렸다. 명은 남쪽에서 일어났기에 지금의 난징(南京)을 ‘남경’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대도를 ‘북경(北京)’으로 고쳐 부르며 천도했다.

그러한 명을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붕괴시켰다. 선양(瀋陽) 인근에서 일어난 청은 랴오양(遼陽)을 ‘동경(東京)’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가 북경으로 천도했다. 이러하니 베이징은 만주족(금, 청)과 몽골족(원)이 수도로 만들어줬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경영한 원나라는 11대 황제(대칸)인 순제(順帝)가 나라를 이끌던 1367년 반란을 일으킨 한족(漢族) 주원장 세력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견디지 못한 순제 세력은 대도를 버리고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커스커텅기(克什克騰旗)인 응창부(應昌府)로 수도를 옮겼다. 사가(史家)들은 그때부터 중국 역사는 주원장이 만든 명(明)나라가 주도한 것으로 본다. 응창부로 천도한 원을 아웃사이더로 보고 ‘북원(北元)’으로 부른다.

2/5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목록 닫기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댓글 창 닫기

2021/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