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합동신문센터 수사관이 던진 첫 질문은 싸늘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후 귀순 사실을 알리고자 허공에 총 서너 발을 쏜 탓에 방한복에 스민 매캐한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수사관의 거친 물음은 미몽을 헤매던 나를 깨웠다.
하나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얼떨결에 되받아친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 태도면 이곳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어.”
수사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대북 전단과 심리전 방송을 통해 밝힌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환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휴전선이라는 사선을 넘어왔으되 또 다른 사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직관했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었다. 중앙합동신문센터와 탈북자 정착기관 하나원을 거쳐 한국 생활을 시작한 뒤, 태어나 처음 접해본 인터넷을 통해 무시무시하다는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실상을 알았다. 구타와 고문을 당한 탈북자들이 법정 소송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것이다. 지하조사실에서 고문한 뒤 중앙합동신문센터 내 예배당에 데리고 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죄를 회개하라는 강요된 의식까지 치르게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는 탈북자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한국 정착 초기 금압(禁壓)을 무릅쓰고 탈북자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인간쓰레기’ 같은 욕설은 기본이고 곤봉과 주먹질로 때리다 못해 성적 모욕과 겁박으로 귀순자를 괴롭혔다는 주장과 관련, 한국 정부의 비인간성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 제기에 나선 것이다.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한 여러 탈북자가 소송을 진행했지만 패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합동신문센터는 지난해 ‘탈북자 간첩’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유우성 사건의 출발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유우성의 동생 유가려는 법원에서 “달력 없는 독방에서 변호인 접견도 차단된 채 회유와 협박, 폭행을 당해 오빠가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했다”고 폭로했고 사법부는 ‘유우성의 여동생에 대한 변호인 접견 및 서신 전달 신청을 불허한 국가정보원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국정원은 이후 중앙합동신문센터의 명칭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바꿨으며 언론에 관련 시설을 공개했다. 인권침해 오해를 없애겠다면서 조사실을 개방형으로 바꾸기로 했으며, 법률전문가를 ‘인권보호관’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유우성은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둘 이룰 수 없는 꿈
나는 비무장지대에 주둔한 북한군에서 심리전을 담당했다. 휴전선 남쪽에서 넘어오는 대북 방송을 제압하고, 전단을 수거해 소각하는 업무도 맡았다. 그때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을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있는데 ‘세계일주’를 꿈꾸며 휴전선을 넘어간 북한 군인이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문구와 웃는 얼굴이 박힌 전단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한국에 온 후 멋도 모르고 여권을 신청했다. 굳이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발급된 여권을 통해 자유로운 몸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권 발급이 허가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자가 일반 국민과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이다. 당시에는 외교부와 경찰뿐 아니라 국정원의 허락을 받아야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그것도 복수여권이 아닌 단수여권만 허용됐다. 여러 탈북자와 단체들이 여권 발급 제한이 ‘차별행위’라며 항의 시위에 나서고 소송을 제기한 덕분에 여권 발급 기준은 완화됐다.
마침내 나도 복수여권을 발급받았다. 첫 여행 국가를 고심하다가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휴전선을 넘어온 나로서는 주변 탈북자들이 귀 아프게 얘기한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마침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친구가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가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모든 탈북자는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는데, 주민등록상 한국의 첫 거주지가 하나원이 위치한 경기 안성시가 돼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25, 여자는 225로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보고 탈북자를 식별해 비자 발급 등을 거부하곤 했으며, 중국 공안이 탈북자를 붙잡아 북한에 넘긴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탈북자들과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세 자리가 같은 안성시민들도 한동안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2009년에 와서야 ‘북한 이탈주민 보호·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돼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은 이는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됐고 이후 입국한 탈북자들도 북한이나 중국이 탈북 사실을 추정할 수 없게끔 125, 225로 뒷자리가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게 됐다.
그후 많이도 돌아다녔다. 여행, 세미나, 초청방문, 어학연수 등으로 여권에 방문 도장이 빼곡히 찍혔다. 전자여권이 새로 나왔다고 해 재발급을 신청했는데, 단 3일 만에 새 여권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 휴전선을 넘어온 선배 귀순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남쪽 땅을 밟았지만 삶은 힘겨웠고 세계일주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는 오래전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한 언론매체가 ‘진정한 자유를 찾아 외딴 산골로 들어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만사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