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의 레토릭에는 상대를 설득하려는 궁극적 목표, 즉 주제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주제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들이 있을 것이다. 설득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을 터인데, 대체로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로고스), 감성에 호소하는 설득(파토스), 말하는 사람의 공신력에서 나오는 설득(에토스)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말의 주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레토릭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인지 모른다. 그는 이것으로 어떤 상황을 규정하고, 이렇게 규정된 상황으로 국민이 생각하게끔 이끈다. 또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이다. 대통령의 말이 세인의 예측 가능범위 안에서만 맴돌면 그는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일종의 비약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약은 납득할 만한 개연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당무계’ ‘4차원’이라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개연성 있는 비약’이 리더십의 요체인 셈이다.
봉숭아학당 학생들처럼…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령을 제약하는 국회법에 합의해줬을 때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됐다. 여기까지가 정치권과 언론의 예측 범위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유 원내대표를 겨냥해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꼭 심판해주셔야”라며 한 발 더 나아갔다.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 여부가 나라의 쟁점이 됐고 여당이 깨질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결국 유 원내대표는 사퇴했고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올랐다.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를 기업도시로 만드는 수정안을 밀어붙일 때 박 대통령은 여당 내 소수파의 수장이었다. 친이계 내에선 ‘지가 뭘 어쩌겠어?’ 하는 말이 나왔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충청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걸 깨뜨리면 앞으로 아무것도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이 대통령의 수정안 시도는 좌절됐다. 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고, 친박계 공천학살이 가시화할 땐 “저도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후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렀다.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지는 순간, 정치인 박근혜는 늘 유효타를 쳤다. ‘주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중대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틀림없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럴 때 박근혜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라고 ‘관점’을 제시한다. 몇 마디 안 되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그러면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봉숭아학당 학생들’처럼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따랐다.
박 대통령의 연설 주제에선 상황을 그럴듯하게 규정하는 어떤 ‘통찰’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맞아, 저거였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것이 박근혜를 수많은 선거에서 이기게 하고 대통령의 자리로 끌어올린 수사학적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자신의 주제를 어떻게 입증할까. 그는 ‘배신’ ‘약속’ ‘나쁜’ ‘속았다’라는 키워드를 사용했다.
결정적일 땐 주로 ‘도덕’으로써 주제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가 ‘신뢰와 원칙’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는 고전 레토릭의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설득방법이지만 우리 국민에겐 통한다.
“저거 뭐꼬? 치아뿌라”
우리 사회가 배금주의에 물든 탐욕스러운 사회인 것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초월적 가치의 구현을 희구하고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의 ‘숭고함’과 ‘노스탤지어’가 박근혜에게 투사돼 박근혜의 도덕적 언사는 다른 정치인이 흉내 내기 힘든 어떤 ‘정갈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는 듯하다. 그리고 박근혜는 이러한 장점을 잘 알고 극대화하는 것이고.
여론조사를 보면,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소통 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이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수석들에게 “대면보고가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불통이네”라고 재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통 논란에도 박 대통령은 30~40%대 지지율을 유지한다. 레토릭적으로 보면 주제의 가치와 도덕을 기반으로 한 호소가 먹혀든 덕분일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말의 힘이 대단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 김동철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의 설명에 따르면, 1990년대 어느 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지방순시를 위해 청와대에서 헬기를 탔다. 상공에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내려다보더니 “저거 뭐꼬? 치아뿌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경복궁이 복원돼 지금의 서울 도심 모습이 갖춰진 건 그의 이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1993년 8월 12일 저녁 7시,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김영삼 대통령이 예정에 없이 TV에 나온다. “대통령입니다. 지금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끝. 개인의 삶과 국가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이렇게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벌어진다. 이 점에서 대통령의 말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 없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