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점진적 혁신’ 덫에 걸린 노키아 ‘단절적 혁신’ 시험대 오른 삼성

삼성전자도 무너질 수 있을까?

  • 박상인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sanpark@snu.ac.kr

    입력2015-08-20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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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만에 몰락한 ‘세계 1위’ 노키아
    • 전성기부터 위기 대비한 노키아, 안팎 기득권에 발목
    • 삼성 ‘효자’ 휴대전화 심상치 않은 약세
    • “삼성, 창조적 혁신 경험 없다”
    • ‘삼성전자 위기→한국경제 위기’ 전이 막으려면
    • ※ 이 글은 올 가을 출간 예정인 ‘삼성 v. 노키아’의 내용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편집자>
    ‘점진적 혁신’ 덫에 걸린 노키아 ‘단절적 혁신’ 시험대 오른 삼성
    삼성전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2010년 매출 153조 원과 영업이익 17조 원을 올리며 시가총액 기준 세계 30위권에 진입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지하다시피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의 성공 덕분이었다. 삼성전자는 1992년 D램 분야에서,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휴대전화 분야에서는 2008년에 세계 2위, 그리고 2012년 마침내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제조업자가 됐다. 2012년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은 29%, 스마트폰 점유율은 33%로 애플보다 3%p 더 높았다.

    두 ‘세계 1위’의 운명

    이러한 삼성전자의 성장은 1990년대 후반 노키아가 핀란드 최초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과 비견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핀란드는 금융위기, 최대 교역국 소련의 붕괴, 세계경기 후퇴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또한 당시 노키아는 가전사업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 실패로 위기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노키아는 이러한 외적 어려움과 내적 위기를 극복하고 1990년대에 휴대전화와 통신장비 제조사로 이름을 드날리며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폭풍 성장했다. 1998년 휴대전화 제조업 세계 1위, 통신장비 제조업 세계 2위에 올랐다. 전 세계 언론은 이런 성장을 ‘노키아의 기적(Nokia Miracle)’이라며 극찬했다.



    그러나 노키아의 기적보다 세간의 이목을 더 집중시킨 것은 노키아의 몰락이다. 노키아는 2010년까지 휴대전화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했지만, 2011년부터 시장점유율이 급락했고, 마침내 2013년 11월 19일 주주총회에서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38억 유로에 매각하기에 이른다. 1998년 이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최강자이던 노키아가 불과 3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점유율과 영업이익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세계 정상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이다. 공시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2014년 매출액은 전년보다 9.83%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31.97% 급감했다. 이러한 매출과 영업이익 감소는 스마트폰 판매 부진 때문이다. 2014년 3분기에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IM(IT·모바일) 부문의 실적이 전 분기 대비 반 토막 이하로 급락했다. 4분기에는 반등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삼성전자가 회심의 카드로 2015년 4월 갤럭시S6를 출시했는데도 2015년 2분기 IM 부문 영업이익은 전 분기의 2조7400억 원보다 조금 오른 2조7600억 원에 그쳤다. 이는 2014년 2분기 영업이익(4조4200억 원)의 62%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과연 노키아처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삼성전자와 노키아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삼성전자가 노키아처럼 몰락한다면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알고도 당한 노키아

    2013년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방한한 프랑스 INSEAD 경영대학원의 이베스 도스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의 공공정책 현안과 거버넌스에 대해 대화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지인을 통해 전달해 와, 방한 기간에 두 차례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나로서는 경영전략이 전공인 이 프랑스 학자가 공공정책과 거버넌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연유가 궁금했다.

    도스 교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는 2003년경 노키아 고위 임원의 요청으로 1년간 노키아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계기로 공공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노키아가 도스 교수의 1년 급여를 부담하면서 자기 회사에 와달라고 부탁한 이유였다. 2003년은 노키아가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노키아 고위 임원들은 노키아가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 프랑스 학자를 초대했다는 것이다. 노키아 고위 임원들은 왜 그런 불안감을 갖게 됐고, 그런 불안감 때문에 나름대로 대비했는데도 왜 노키아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을까.

    ‘점진적 혁신’ 덫에 걸린 노키아 ‘단절적 혁신’ 시험대 오른 삼성
    노키아는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이라는 신기술의 파고를 타고 휴대전화 시장의 최강자가 됐다. 자연스럽게 노키아 경영진은 하이테크 산업에서는 기회의 창을 인지하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잡는지 아는 기업만이 생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기술 발전사에서 볼 수 있듯이, 획기적인 신기술이 도입될 때 기존 선도 기업은 몰락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아래 노키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자금력이 충분한 선도 기업이 그 지위를 유지하려면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복잡하고 광범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노키아의 결론이었다. 이에 따라 노키아는 연구개발(R·D) 투자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과감한 혁신을 선도할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또한 신기술을 가진 기업을 인수하거나 다른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기득권 지키기 급급

    노키아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1994년 6.3%, 2002년 10.3%, 2009년 14.4%로 계속 증가했다. 1994년 노키아의 R·D 지출액은 3억 유로를 조금 넘었으나, 2002년에는 거의 10배 증가한 약 30억 유로, 2009년에는 약 50억 유로로 커졌다. R·D를 담당하던 NRC(Nokia Research Center)와 별도로, 1998년에 자본금 1억 달러의 NVF(New Venture Fund)도 설립했다. NVF의 미션은 새로운 사업, 새로운 기술 등에서 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찾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노키아는 NVO(Nokia Venture Organization)라는 조직을 설립해 순매출액의 0.1%를 NVO에 투자했다. NVO는 기술 전문가, 경제학자, 지식인들이 참여해 토론하는 공론장 기능을 수행했다.

    근본적 혁신을 향한 노키아의 또 다른 전략은 신기술을 가진 기업을 인수하거나 다른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디지털 융합과 모바일 인터넷의 도래를 확신한 노키아는 스마트폰이 기존의 휴대전화와 다른 특징을 요구할 것임을 알아챘고, 1998년 새로운 스마트폰 운영체제(OS) 개발을 위해 심비안(Symbian) 소프트웨어 합작회사에 지분 30%를 투자했다. 같은 해, 인터넷 전화 사업자인 캐나다의 비엔나 시스템이라는 회사도 인수했다. 스마트폰 혁명이라는 근본적 혁신 경쟁에서 도태된 노키아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도래와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휴대전화 제조사였던 것이다.

    노키아는 콘텐츠의 중요성도 일찍부터 인식했다. 2000년대 들어서 노키아는 휴대전화 시장이 하드웨어 중심에서 ‘콘텐츠/서비스 중심’으로 변할 것이라고 더욱 확신했고, 전략적 제휴와 인수합병(M·A)을 통해 앱스토어 사업 역량을 강화했다.

    노키아는 앱스토어 오비(Ovi)를 구축하기 위해 엔 게이지(N Gage), 디즈니, 소니, 세가, 유니버설 등과 게임 콘텐츠 공급 제휴, 음원 기업인 라우드아이 인수, EMI/유니버설 음원 공급 제휴, 디지털맵 기업 Navteq 인수, 모바일 소셜 네트워킹 업체 Twango 인수, 모바일 광고 대행업체 엔포켓 인수, 사진공유 사이트 야휴 Flicker와 제휴, 방송콘텐츠 관련 Turner와 제휴, 가상화 기반 오피스 프로그램 공급을 위한 MS Live 탑재 등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노키아는 결국 몰락했다. 노키아의 몰락 스토리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이 초점을 두는 ‘기존 독점이윤’이라는 건조한 추상적 용어에 풍부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채워준다.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도래를 예측했고, 무선 인터넷이나 콘텐츠/서비스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자신들의 기존 휴대전화 틀 안에서 ‘점진적’ 혁신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애플은 기존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단절적’ 혁신을 꾀했다. 기존 휴대전화 시장에서 막대한 이윤을 내던 노키아는 애플과 같은 단절적 혁신을 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이 점점 중요해진 2000년대 중반에도 노키아의 초점은 여전히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신흥시장에서의 중저가 휴대전화 판매에 머물렀다.

    이처럼 기득권을 중시하는 자세는 노키아라는 기업 차원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 조직 차원에도 투영되고 반영됐다. 당연히 노키아 내부에서 가장 많은 자원과 가장 우수한 인재를 할당받는 곳은 심비안 폰 부문이었다. 심비안 폰 부문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새로운 OS 마에모(Maemo)나 미고(MeeGo) 개발팀들과 갈등이 벌어지면, 결국 가장 힘센 심비안 부문이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마에모·미고 개발팀이 노키아와는 별도의 외부 기업이었다면, 이들은 조직 내부의 방해 없이 혁신에 매진해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키아의 몰락은 왜 판을 흔드는 단절적 혁신이 기득권 기업의 내부에서 일어나기 힘든지를 보여준 예다. 노키아는 R·D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벤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제3의 조직을 만들었지만, 결국 내부 기득권 그룹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기득권이 클수록 기존 기업은 더욱 비대화하고 관료화한다. 이런 조직에서는 조직원들의 관심이 새로운 것보다는 기존의 것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로 갈 수밖에 없다.

    수직계열화, 지배구조 차이

    삼성전자와 노키아의 외부적 성공요인은 유사하다. 두 회사는 통신시장의 규제 완화와 새로운 이동통신 표준의 도입이라는 외부적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함으로써 세계적인 휴대전화 사업자로 발돋움했다. 이처럼 환경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주요인으로 최고 경영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민첩성을 중시하는 경영전략이 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휴대전화 사업의 급성장으로 기업 내 휴대전화 사업 비중이 급속히 증가한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노키아에 비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이라는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업 부문을 보유하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다.

    그러나 두 회사는 수직계열화와 소유지배구조에서는 뚜렷이 상반된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부품 생산을 거의 전부 아웃소싱했으나, 삼성전자는 주요 부품을 자체 생산하거나 계열사가 생산한다.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폰 생산에서 선두 기업이 되고 애플의 아이폰을 빨리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삼성전자의 이런 수직계열화를 꼽는 전문가가 많다.

    노키아의 소유지배구조는 1994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이후 전형적인 미국 기업과 매우 유사해졌다. 오랫동안 노키아의 최대주주이던 핀란드 상업은행들과 보험사들 대신 미국 기관투자자들이 노키아의 주요 주주가 됐으며, 노키아의 외국인 지분율은 1992년 13%에서 1997년 말 70%, 2000년 말엔 90%를 넘어섰다. 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된 2013년에도 외국인 지분율은 70% 이상이었다.

    이에 비해 삼성그룹은 전형적인 금산복합 소유지배구조다. 즉, 총수 일가는 자신들의 지분 외에 삼성생명, 삼성물산, 삼성전자 자사주 등을 이용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으며, 총수 일가는 다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삼성그룹 계열사 대다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노키아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선두 기업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유사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양사 모두 원가 절감과 지역별로 상이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공통 플랫폼 아래서 지역시장에 특화된 모델을 개발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해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또한 둘 다 R·D 투자와 M·A를 통해 기술혁신 역량을 강화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두 기업 모두 진화적 혁신 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삼성의 혁신 가능성은?

    노키아와 이런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진 삼성전자는 노키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인가. 앞서 살펴봤듯이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도래를 예측했고, 무선 인터넷이나 콘텐츠/서비스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자신들의 기존 휴대전화 틀 안에서 점진적 혁신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스마트폰이 점점 중요해진 2000년대 중반에도 노키아는 신흥시장 휴대전화 판매에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노키아가 단절적 혁신 또는 창조적 혁신을 추구할 수 없었던 이유다.

    삼성전자의 자서전으로 불리는 ‘삼성웨이’(2013)라는 책에서 저자들이 말했듯, 삼성전자는 아직까지 세상에 없는 새로운 기술 경로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단절적 혁신 또는 창조적 혁신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노키아의 경험과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은 기존 시장과 기술에 막대한 이해관계를 갖게 된 삼성전자가 단절적 혁신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기득권 중시 경향은 노키아 기업 내부 조직에도 투영되고 반영됐다. 삼성전자 역시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관료화의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날 개연성이 높다. 예를 들어 집단성과급 제도는 조직의 폐쇄성을 키우고 기업 내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가 채택되는 것을 방해하는 역작용을 할 수 있다. 사업부의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해오던 삼성전자는 성과가 낮은 부서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2006년부터 연봉의 11%, 2009년부터는 연봉의 20%까지 삼성전자 전체 실적에 근거해 성과급을 지급하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노키아 몰락의 경험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이 실제로 적용된 것을 보여준 사례다. 기존의 독점기업 또는 지배적 사업자는 잠재적 진입기업이나 시장점유율이 높지 않은 기존 기업과 달리, 단절적 혁신이 발생할 경우 기득권을 잃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단절적 혁신에 소극적이게 되고, 결국 이런 혁신은 도전 기업들에 의해 이뤄질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노키아의 전성기엔 핀란드를 ‘일개 기업 경제(one-firm economy)’라고 부를 만큼 노키아가 핀란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다. 따라서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경기 대후퇴와 2009년의 유럽 경제위기 와중에 노키아의 몰락이 가속화하자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고조됐다.

    삼성전자가 무너진다면…

    그러나 노키아의 몰락은 핀란드 경제위기로 전이되지 않았다. 오히려 벤처 창업 열기로 이어지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노키아가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고, 부품 생산을 아웃소싱했으며, 노키아 주식 대부분을 외국인들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키아 몰락으로 인한 생산직 노동자 대량 해고는 노키아 공장이 위치한 살로(Salo) 시와 그 주변의 지역 문제로 국한됐다. 또한 노키아 주식의 대부분을 외국 기관투자자가 보유하고 있었기에, 핀란드 금융기관과 국내 투자자들의 막대한 투자 손실을 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키아의 몰락이 새로운 성장동력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는 아니다. 이는 △노키아의 브리지(bridge) 프로그램 △신생기업에 대한 핀란드 정부의 적극적 지원 정책 △실업보험제도를 포함한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기업과 정부의 적극적 정책과 핀란드 복지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1년 봄, 노키아는 해고된 직원들이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브리지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약 2개월 간 사업을 계획한 후 자기 회사를 시작할 때 2만5000유로(4명까지 한 팀으로 총 10만 유로)의 종자기금(seed fund)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핀란드의 실업보험제도에 따라 일반적으로 실직자는 100주(주말을 제외한 500일) 동안 실업급여를 받으며, 그 후에는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사회안전망 덕분에 노키아 퇴직자들은 창업과 재취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삼성전자가 무너진다면 그 사회적 파장은 노키아의 경우와 사뭇 다를 수 있다. 우선 삼성그룹이 우리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핀란드 경제에서의 노키아 비중보다 훨씬 높다. 나아가 삼성그룹의 수직적 계열화와 계열사 간 출자구조, 그리고 국내 사회안전망 부재로 인해 삼성전자의 몰락은 삼성그룹의 몰락, 그리고 국가 경제의 위기로 전이될 개연성이 높다. 아울러 이런 경제위기가 발생한다면 핀란드에서처럼 신생기업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장기 실업과 우수 인력의 국외 유출로 번져갈 가능성이 크다.

    ‘점진적 혁신’ 덫에 걸린 노키아 ‘단절적 혁신’ 시험대 오른 삼성
    특히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과도하게 보유한 것은 삼성전자의 위기를 삼성생명의 위기로 전이시킬 수 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시장과정부연구센터의 의뢰로 수행된 박소정 교수의 2014년 연구에 의하면, 삼성 계열사의 출자금 총합은 삼성생명 총자산의 11%를 넘고 자본의 92%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비중만 봐도 총자산의 8%, 자본의 70%에 달한다. 따라서 삼성전자 주식 가치의 폭락은 삼성생명의 파산과 직결될 수 있다.

    박 교수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삼성전자 주가가 70% 하락할 경우 삼성그룹의 복잡한 출자구조로 인해 삼성생명 주가는 54.63%, 제일모직 주가는 41.56% 하락할 수 있다. 만약 삼성전자가 청산될 위기에 처해 주가가 100% 하락한다면 삼성생명 주가는 74.44%, 제일모직 주가는 80.54% 하락한다. 자본금의 절반 또는 75% 이상이 감소하면 삼성생명과 제일모직 역시 파산 위기에 처할 개연성이 높다.

    삼성전자발(發) 위기는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압박하는 부작용도 낳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 지분 7.81%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도 대량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붕괴는 국민연금에 치명적인 투자손실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재정 부담과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부문의 저조한 실적은 중국 경쟁기업들의 추격으로 인한 신흥시장에서의 부진, 아이폰6 출시로 인한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부진이 겹친 결과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지난해의 부진을 떨치고 재도약하더라도 노키아처럼 단절적 혁신의 실패로 무너질 개연성은 상존한다.

    노화를 막을 수 없듯

    삼성전자가 몰락할 개연성이 있다는 말은, 삼성전자의 몰락이 삼성전자나 한국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해도 회피하기 어려울 수 있는 경제현상이라는 의미다. 이는 자연 현상인 노화(老化)를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노화에 의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노화 자체를 막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삼성전자의 몰락을 막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말은 노화 자체를 막자는 말처럼 비현실적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이 건재해 휴대전화 사업이 망해도 기업 자체가 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개 기업의 몰락이 경제위기로 전이되는 이른바 ‘시스템 리스크’가 존재할 때, 정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지난 5월 메르스 발병 초기에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최선의 시나리오에 집착하는 바람에 화를 키운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바람직한 정책적 대응은 삼성전자의 몰락이 국가경제 위기로 전이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삼성전자가 몰락하더라도 새로운 성장동력이 돋아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 답은 핀란드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삼성전자의 위기가 삼성생명의 위기로 전이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보험업법상 지급불능 규제의 정상화가 필요하다. 국회에 발의된 보험업법 개정안의 조속한 입법화가 필요한 이유다.

    나아가 기업집단 출자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규제 정립을 통해 삼성으로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정책이 요구된다. 이런 정책의 핵심은 기업집단의 출자구조를 순수지주회사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재도전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

    박상인

    ‘점진적 혁신’ 덫에 걸린 노키아 ‘단절적 혁신’ 시험대 오른 삼성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경제학), 미국 예일대 박사(경제학)

    ● 미국 뉴욕주립대학 스토니 브룩대 경제학과 조교수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시장과정부연구센터 소장

    ● 저서 : ‘벌거벗은 재벌님’,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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