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재정(財政)과 사회보험의 탄생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입력2015-08-21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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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의회정치 초석
    • 루이 16세 과세 강화에 ‘삼부회’로 맞선 귀족들
    • 1750년대 ‘콘솔 공채’ 등장…英 ‘재정혁명’ 이끌어
    • 佛, 1896년 ‘인구 증가 위한 국민연합’ 결성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그리스가 최근 독일을 앞세운 유럽연합(EU) 채권단에 사실상 두 손을 들고 재정 회복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힘쓸 것을 공언했다. 당분간 연금도, 복지 혜택도 줄어드는 가혹한 긴축정책이 예견된다. 먹고사는 문제,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문제는 이처럼 개인, 가정,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현안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일본도 ‘아베노믹스’ 영향으로 주가가 오르고 기업 실적이 개선됐지만, 일본은행이 국채 인수를 통해 양적완화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시각도 상존한다. 쉽게 말해, 지금 수중에 없는 돈을 미리 빌려서 풀어대는 형국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국내총생산(GDP)의 170%가 빚이다. 일본은 이보다 더해 240%가 빚이다. 재정의 규율이 무너지고 금리가 인상되기 시작하면, 보유 중인 국채 평가액이 크게 절하되고 이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금리와 채권 가격은 반비례). 결국 일본도 채권단에 생명줄이 잡혀 있는 지금의 그리스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그런데 일본은 나라의 빚이라 할 수 있는 국채의 91%를 자국민이 들고 있으니 국민이 최대 채권자인 셈이다. 또한 지난해 말 기준 대외순자산(채권에서 채무를 차감)이 366조 엔으로 24년 연속 세계 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빚도 많지만 빚을 갚고도 남을 충분한 자산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흑자재정 향한 오랜 번뇌



    한국은 어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재정 상태가 가장 좋은 수준이라던 한국도 요즘은 가계부채 못지않게, ‘공기업 부채’로 포장된 사실상의 국가부채 규모가 만만치 않다. 당장은 GDP의 65% 수준으로 절대적인 수치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지만, 악화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게 문제다.

    국가가 개인, 가족의 확장판이라고 볼 때 안정적으로 벌이가 생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벌이 안에서 소비가 이뤄지는, 즉 규모에 맞는 살림살이가 유지돼야 ‘잘사는 나라’다. 멀게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부터 시작된 균형재정, 흑자재정을 향한 번뇌는 대항해 시대,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최근까지 모든 나라의 위정자들을 속박하는 소재다. 20세기 들어서는 공공부조나 사회복지 문제까지 본격 대두하며 나라마다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졌다. 이런 와중에 가장 기본적 재원(財源)이라 할 수 있는 노동력도 출산율 감소로 영향을 받고 있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서유럽에선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들의 권한은 점차 세졌다. 귀족은 장원(莊園)의 영주 자격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왕으로부터 면세 특권을 인정받았다.

    다만 영국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이 영국 귀족을 장악해 왕위를 얻으면서 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정복자 윌리엄이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는 대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을 선별해 군역을 맡기고 상으로 봉토(封土)를 수여했다. 그러다 존 왕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위해 귀족들을 대상으로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했다. 전쟁에서 이겼다면 귀족들에게 납세에 대한 보상을 겸해 프랑스 영토를 봉토로 줬을 테지만 패전하면서 문제가 됐다.

    불만이 커진 귀족들이 런던 시민들과 손을 잡고 존 왕의 정책에 반대해 관철한 것이 올해 6월로 800주년을 맞은 마그나카르타(대헌장)다. ‘왕은 관습법에 따라야 하며, 새로운 과세에 대해서는 귀족회의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헌장의 핵심이다. 귀족회의에는 시민대표도 참석을 보장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과세권을 둘러싼 왕과 귀족의 대립 속에서 나온 것이 오늘날 의회정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 재무장관 뜨다

    15세기 대항해시대부터는 서유럽국과 식민지국 간의 무역 거래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와 재정의 관계가 정립됐다. 국왕은 상공업자들에게 무역독점권을 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중상주의(重商主義)로 포장된 카르텔이 형성됐다. 이 수입으로 왕들은 관료제도와 상비군 제도를 운영하며 절대왕정을 정착시켜갔다.

    스페인이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채굴한 많은 양의 은화를 본국으로 들여왔다. 하지만 100년쯤 지나 은이 고갈되자 이미 불어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은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다. 두 나라는 먼저 자국의 모직물 산업을 육성시킨 다음, 여기에서 생산한 상품을 식민지에 파는 방식으로 끌어모은 무역대금으로 국부를 쌓아갔다. 현대적 의미로 보면 안정적 재정 확충을 위해 역외무역 거래를 활성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 경지면적, 생산량, 세수(稅收), 무역수지, 군사비 등에 대한 계량화와 관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이를 아우르는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 분야로 발전했다. 국가 살림살이의 관리자인 재무장관이 최고 요직으로 급부상한 것도 이때다. 프랑스의 경우 ‘태양왕’으로 불리는 루이 14세(1643~1715) 시절 모직물 상인 출신의 콜베르를 재무장관으로 등용해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프랑스도 해외로 유출되는 자금이 갈수록 많아지고 장기간의 경기불황이 뒤따랐다. 초호화판 베르사유 궁전 조성 등으로 재정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인정하지 않는 신교도들을 압박해 당시 유능한 신교도 상공업자들이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도피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루이 16세 집권기에 재정적자가 더 심각해지자 왕정은 귀족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에 대항하는 삼부회가 결성됐다. 삼부회는 결국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서유럽 국왕들은 귀족과 상인 등 부유층 계급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려 전비(戰費)에 충당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모두 다 좋았지만, 패하면 그냥 떼먹는 것이 요즘과의 차이일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절대왕정의 최고봉을 달린 루이 14세 역시 여러 번의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고, 패하면 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채권자들에게 어깃장을 놨다. 다른 유럽 왕들 역시 패전했을 경우뿐 아니라 선대(先代) 왕이 죽어 왕권을 계승하고 나면 부채는 함께 승계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영국에서만 왕의 자의적 재정 운영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1688년 명예혁명 때 제정된 권리장전 덕분이다. 권리장전에는 왕이 돈을 빌리거나 세금을 부과할 때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명시돼 있다. 1692년 영국 의회는 신대륙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전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국채로 전해진다. 왕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상환 여부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채권의 상환조건, 이자 지불의 재원, 이에 따른 신설 세금 징수 방안이 공식화하면서 영국 국채는 강력한 대외적 신뢰를 얻었다.

    국민국가 싹 틔운 ‘재정혁명’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1750년대부터는 여러 종목의 국채를 상환기간을 없앤 일종의 영구채 형태로 통합한 ‘콘솔 공채(consolidated annuities)’가 등장했다. 원금상환 부담을 줄인 대신 영구적으로 이자를 지급했기에 자금의 유동성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국가의 경영 기반은 재정에 있고, 재정을 뒷받침하는 국채의 위상에 대한 법적 보증을 확실히 해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산업혁명에 빗대 영국의 ‘재정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 콘솔 공채의 금리는 연 3%대 전후였으나, 국채 발행 시스템이 후진적이던 프랑스 왕정은 6~7%라는 고금리로 전비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신인도 차이에 따른 결과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 및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승리한 것은 이렇듯 군사적 전술 못지않은 재정 지원의 차이가 좌우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영국의 선도적 재정혁명은 왕조의 교체 없이도 국가와 국민이 재정적 결속을 통해 영속적으로 협력해나가는 근대의 ‘국민국가(nation-state)’ 정착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가 영국처럼 국채 발행을 의회의 관리 하에 둔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이고, 독일은 20세기부터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재정과 금융 시스템 설립에 가장 선진적이었다. 에도 시대부터 자국에서 은화가 많이 산출됐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 승전을 통한 배상금으로 2억 냥(3억 2000만 엔, 당시 일본의 4년치 예산에 상당)을 받은 게 큰 도움이 됐다.

    다만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과정에서부터 영국 파운드화로 기채(起債)된 전시국채를 사상 처음으로 발행하는 과정에서 조달금리가 10%에서 20%까지 상승했다. 일본 정부는 국채 투자자가 부족하자 일본은행에 사실상 인수(underwriting)를 강제했고, 이로 인해 패전 후 극심한 물가 상승을 동반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獨 국민의식 고취한 사회보장제

    쉽게 말해 정부가 왼쪽, 오른쪽 주머니의 경계만 없앤 채 밑천도 없이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댄 것이다.

    당시 부작용을 교훈 삼아 일본 정부는 이후 재정법을 개정해 ‘국채 시장소화(消化)의 원칙’을 정했다. 정부가 재정 규율을 흐트러뜨려 국채를 발행해도 일본은행에서 바로 되사주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다만 오늘날 아베노믹스의 요체인 ‘무제한 양적완화’ 역시 중간에 금융기관이 매개했으나 결론적으로 일본은행이 국채를 무제한 인수하는 방식으로 시중에 돈을 풀고 있어 내용에선 1930년대 후반과 큰 차이가 없다. 일본 정부가 유사시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한 국부(國富) 자산이 있다는 것이 그 때와의 차이이긴 하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공동체적 연대의식이 존재했다. 이런 의식은 산업혁명이 본격화한 18세기 후반 이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대신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그동안 인본주의적 가치에서 배려되던 고령자와 약자에 대한 복지는 국가의 영역으로 점차 이동했다. 세금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전 사회적 복지가 가능한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이었다.

    현대식 사회보장보험제도가 처음으로 태동한 곳은 독일이다. 독일은 중세 이래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등의 제후들이 각 지역을 군웅할거식으로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지역색이 있다.

    1871년 철혈재상(鐵血宰相)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등 주변국과의 분쟁 끝에 첫 ‘통일독일’의 꿈을 이루지만 모든 국민으로부터 동질한 애국심을 얻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예컨대 바이에른 지방 출신들은 다른 지역 출신들을 향해 ‘촌뜨기’라고 야유하거나 ‘우리는 바이에른인이지 독일인이 아니다’라고 반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라는 하나의 우산 안에 있다는 연대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결정했다. 1883년에 질병보험, 1884년에 화재보험, 1889년에 노령자보험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지금 한국에도 이어진 ‘갹출형 적립보험’의 원형이다.

    인구가 줄면 행복하다?

    철혈재상이라는 별명답게 국가의 물리적 통일에는 무기와 병사를 동원했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는 정신적 통일 작업에는 각종 보장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통일 후 중공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급성장하고 노동자 수도 늘어났지만, 앞서의 3대 보험이 독일 국민의 마음속 든든한 버팀목이 된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중산층 계급이 두터워지고 통일된 학교교육이 보급되며 국민 간 연대의식이 높아졌다.

    1967년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제도를 ‘폰지게임(Ponzi Game · 피라미드형 사기)’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젊은 층 인구가 피라미드 구조처럼 늘어나면서 윗세대는 자신이 낸 돈보다 더 많이 가져간다는 의미다. 물론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지속되면서 이 같은 논리는 설득력을 잃고, 특히 선진국을 중심으로 연금 조기 고갈 우려가 상존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20세기까지의 패러다임은 그랬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인구가 감소하면 행복하다’는 논리는 식량 증산이 어렵던 18, 19세기에 흥했다.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가 집필한 ‘인구론’의 영향이 컸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인구의 증가분이 식량의 증가분을 상회하면 인간은 빈곤에 빠지고, 그 현상을 회피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 수단인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역병이야말로 하늘이 준 선물이다. 전쟁 같은 인위적 수단 말고 자연적으로 인구를 줄일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같은 위험천만한 주장도 합리화했다.

    맬서스는 14세기 전 유럽 인구의 절반을 몰살한 것으로 알려진 페스트로 인해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훌륭한 예술가들의 르네상스 문화 창달을 앞당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번식행위는 막을 수 없으므로, 차라리 최저생계가 가능한 빈곤층을 많은 수로 억제하고 상류층은 잉여의 부를 누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천부인권에 반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 같지만, 당장 식량의 한계를 전망할 수밖에 없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진화론과 함께 제국주의 사상의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

    현재 한국과 일본의 출산율이 1.1~1.2명으로 1명을 간신히 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2020년부터는 65세 노인인구가 전체의 3할이 되는 초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저출산 경향이 ‘선진국병’으로 불리면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지만,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이미 200년 전에 시작된 문제다.

    자녀 수 비례해 감세

    저출산 · 고령화는 200년 전에도 고민거리
    1820년대 프랑스 인구는 3000만 명으로, 1000만 명이던 영국을 압도했고, 2700만 명이던 독일보다 많았다. 이후 100년 가까이 프랑스 인구는 정체됐다. 1910년대 프랑스 인구는 4000만 명으로 30% 정도 증가한 반면, 독일은 2배가 넘는 6500만 명, 영국은 3배가 넘는 38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런 흐름은 계속 이어져 현재 인구는 프랑스 6600만 명, 독일 8000만 명, 영국 6300만 명으로 집계됐다.

    1896년 프랑스 통계학자 자크 베르티용의 주창으로 ‘프랑스 인구 증가를 위한 국민연합’이 설립돼 정부와 의회 차원에서 저출산 타개책이 강구되기 시작했다. 당시 베르티용이 분석한 인구 정체의 원인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가 축적될수록 안주하고, 후세의 사람들과 경쟁하기 싫어하는 심리적 배경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당시 프랑스의 영토가 비옥하고 생산성이 높아 중소 소작농도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런 가정에서는 요즘처럼 자녀 1인당 들어가는 교육비 부담이 커서 다출산을 결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둘째,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따른 고도성장으로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도시형 생활 스타일이라 할 만혼화(晩婚化) 현상이 나타났다.

    셋째 요인은 프랑스혁명 이후 탄생한 나폴레옹 법전에서 민법을 새로 제정, 상속재산의 자녀 균등배분 원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장남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 보장돼 있었으나 이 법에 따라 차남 이하에게도 균등배분이 가능해지면서 부의 대물림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출산 자체를 꺼리는 경향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베르티용 측이 마련한 대책도 요즘과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출산 자녀 수에 비례해 감세를 해주고, 자녀가 적을수록 상속세율을 높였다. 출산장려금 지원, 가족수당 지급, 대출 알선 정책까지 시행했다. 3인 이상 자녀를 보유한 부모 중 한 명은 공무원으로 고용하는 파격적인 정책도 동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금 급속한 저출산 경향을 보이면서 1990년대 일본, 2010년대 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표적인 저출산 국가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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