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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잃어버린 땅’ 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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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엔 국내성 아닌 黃城”

고구려사를 바로 세우려면 고구려의 수도와 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먼저 수도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지안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한국 역사학계는 죽었다”라고까지 말한다.

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온 고구려의 천도사(史)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이 서기 343년 고국원왕 13년 7월에 한 5차 천도다. 이 천도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4차 천도 1년 뒤에 일어났다. 1년 만에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뒤에서 상술하고, 5차 천도에만 집중해보자.

삼국사기는 이 천도에 대해 ‘추칠월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秋七月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으로 적어놓았다. 학자들은 이 한문을 ‘가을 7월에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고 번역해왔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중심이 돼 만들었기에 ‘지금[今]’은 삼국사기를 낸 고려 때를 의미한다. 이는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인하대의 복기대 교수(고고학)는 이 해석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번역은 원문 두 번째 문장에서 고딕으로 표기한 ‘동(東)’자를 해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동’을 넣어 제대로 번역하면, “이 성은 지금[삼국사기를 출간한 고려]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서경 목멱산’이 아니라 ‘서경 동쪽의 목멱산’이라는 것이다.



‘동’자를 넣어 해석한 그는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동황성도 ‘동’과 ‘황성’을 띄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전체 원문은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동쪽에 있는 황성(黃城)으로 옮겨왔다. 이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이 성을 동황성으로 보았으나 그는 황성으로 본다. 복 교수의 해석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찾는 단서가 돼준다.

국내성 광개토왕비는 없다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의 손자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6차 천도)하니, 광개토태왕릉과 그 비석은 황성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릉비는 지금 지안에 있다. 그럼 지안이 바로 황성이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국내성을 2대 유리명왕부터 10대 산상왕 때까지의 수도였다고 밝혀 놓았다(참조). 그렇다면 국내성 근처에서는 19대인 광개토태왕의 능비가 발견될 수 없다. 삼국사기만 제대로 봐도 국내성에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는데 국사 교과서는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무지(無知)를 보인다.

지안을 국내성으로 처음 비정한 이는 일제 때 활동한 일본인 학자 도리이류조(鳥居龍臧)였다. 일제 때는 고구려사는 물론이고 역사 연구 자체가 일천했으니 정확한 역사를 추적할 수 없었다. 도리이는 제한된 자료와 자기 판단으로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속절없이 이를 따른다.

에서 보듯 고구려는 95년간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1년간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황성에서 84년을 보내고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는 85년 만에 다시 평양성을 수도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85년 전의 평양성과 85년 후의 평양성은 같은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서로 다른 곳으로 분석해왔다. 85년 후 옮겨간 평양성은 이북의 평양성에 있고 그전의 평양성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 대세였다. 국사 교과서는 85년 전의 평양에 대해선 아예 거론도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평양성(85년 전의 평양)을 처음 수도로 삼은 것은 서기 247년인 11대 동천왕 21년 2월이다.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동천왕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전의 고구려는 환도성을 수도로 삼았다. 동천왕 20년 8월 고구려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역사에서는 조조의 성을 따서 曹魏로 부른다)의 장수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때문에 동천왕은 “환도성은 병란을 치렀기에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며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기게 했다(천도를 했다는 뜻). 이 사실을 전한 삼국사기는 이어 ‘평양은 본디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으로,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라고 기록했다. 왕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도 한다)에서 나라를 연 단군왕검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첫 번째 천도) 비로소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이 평양성이 지금[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단군왕검이 첫 번째로 천도한 곳이 평양인데, 고구려의 동천왕은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 평양이라고 하면서 천도를 했으니,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은 것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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