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호

남녀차별 현장 보고서

알파걸의 분노

“알량한 권력 놓지 못하는 남자들 도태될 것”

  • 입력2018-08-2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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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 성적 추월

    •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 몰카, 성차별, 성폭력 못 참아

    • “여성이 원하는 쪽으로 사회 변할 것”

    국가인권위원회는 8월 9일 서울 시내 모 초등학교에서 출석번호를 남학생부터 매긴 행위를 성차별로 판단해 개선을 권고했다. 남학생들을 앞에 두는 것이 어린 학생들에게 차별 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실 많은 학교는 이런 이유로 남녀 구분 없이 이름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정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경찰이 남성 모델의 누드를 몰래 찍어 공개한 혐의로 한 여성을 구속하자 많은 여성이 폭발했다. 남성에 의한 몰래카메라와 성폭력 범죄가 훨씬 많지만 남자들은 미온적 처벌만 받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강남역 화장실 살해’ 사건 이후 여성혐오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화두 중 하나가 됐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1년간 온라인상 4개 유형별 혐오표현 게시물 8만1890건 중 여성혐오 게시물이 5만여 건으로 가장 많다. 얼마 전엔 미투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은 몰래카메라, 성폭력, 성차별, 여성혐오 피해를 당해왔다고 느낀다. 자신이 직접 당했거나 적어도 피해자들에게 같은 여자로서 연대의식을 느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대, 20대 평범한 여성들의 동참 속에서, 서울 광화문사거리와 혜화역 거리에서 사상 최대의 페미니즘 시위가 열렸다. 젊은 여성들의 화난 응전으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뛰어난 학업 성적과 역량을 갖고 있고 성취욕이 넘치는 ‘알파걸’도 최근 상황에 분노를 표출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차별과 억압이 표면적인 변화에 가려져 있을 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민감해진 10대

    충북의 한 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이모(여·18) 양은 요즘 교사의 말을 듣기 영 거북하다. “너희는 시집이나 잘 가라”거나,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학생에게 “여자가 그게 뭐냐?” 라는 이 교사의 말이 성차별적이라 느낀다. 어느 날 이 교사는 자신의 아내와의 부부싸움을 언급하며 “패고 싶었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져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양은 당장 “그렇게 말하시는 건 문제”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대입 학생부종합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교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그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는 당장 입시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 문제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이양은 “과거엔 당연하게 받아들인 말이 이젠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발언으로 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학교와 사회에서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하지만, 지금 10대 여성들은 이러한 차별에 훨씬 민감해져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며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받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려 한다. 혜화역 집회에 10대 여성이 많이 참여한 것도 이런 이유다. 

    몸소 ‘탈(脫)코르셋’을 실천하는 다른 여고생 이양(여·18)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반 친구들이 화장을 하지만 이양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녀는 “코르셋으로 상징되는 치장이나 화장을 거부하는 10대가 늘고 있다”며 “여성스러움을 강요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때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말한다. 이양은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일상에 누적된 왜곡된 정보를 검열한다고 말한다. 

    요즘 알파걸은 ‘자아존중감이 강한 명석한 여성’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실제로 학교와 사회에서 여성은 실력 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서울 모 대학 독어독문학과 재학생 서모(23) 씨는 자신이 수강한 대부분의 수업에서 1등이 늘 여학생 몫이었다고 말한다. 서씨는 “남녀 성비가 거의 50대 50인 우리 과에서 성적 상위 30%는 거의 여학생으로 채워졌다. 외고 출신이 많은 점 등 남학생과 여학생의 조건이 비슷하지만, 확실히 여성 우세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여자 공무원 더 많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5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보면, 읽기, 수학, 과학 영역 모두에서 여학생들의 점수가 남학생들의 그것보다 평균 19점이 높았다. 과거엔 여학생이 어학만 잘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젠 옛말이 됐다. 수학과 과학에서도 남학생을 앞지르고 있다.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는 여성도 부쩍 늘고 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2018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최종합격자 5002명 중 여성 합격자는 전체 합격자의 53.9%인 2695명에 달한다. 1996년 집계 이후 역대 최다 여성 합격자다. 행정부 소속 국가공무원도 이제 여자가 더 많다. 최근 5년간 여성 비율이 꾸준히 증가해 2017년 50.2%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고무적인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겐 여전히 고충이 존재한다. 20대 여성의 취업률이 괄목할 정도로 높아졌지만, 상당수 여성 취업준비생은 취업 과정에서 여자라서 암묵적으로 차별받는다고 주장한다. 구인하는 회사나 기관이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일부 대기업은 취업설명회에서 아예 대놓고 “여학생들이 여기서 몇 년이나 일할 것 같나? 2~3년 준비해 힘들게 입사한 뒤 결혼과 육아로 5년 만에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업이 여자 지원자를 기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정모(28) 씨는 “어떤 남자와 여자의 스펙(학벌, 토익점수, 실무경력 등)이 비슷할 때 이 남자가 입사 지원서를 20번 써서 1번 붙는다면, 이 여자는 40번을 써야 1번 붙는다”고 이야기한다. 언론계 입사를 준비하는 정모(여·26) 씨는 여자라 불리한 점이 있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몇몇 미디어 관계자는 ‘시험 성적순으로 정량평가하면 기자직을 모두 여자 지원자로 채워야 할 때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럴 땐 ‘여자 기자만 있으면 큰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들이 과연 현장을 잘 취재해 보도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남자 기자가 아무래도 힘들고 험한 취재에 좀 더 낫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고 한다. 결국 최종 합격 결과를 보면 남녀 성비가 얼추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언론계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계에서도 ‘남자는 술을 잘 마시니 대외협력을 잘할 것이다, 남자는 야근을 잘할 것이다, 남자는 결혼해도 집안일로 회사 일에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막연한 선입견에 근거해 채용이 이뤄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요즘 20대 중후반 여자 취업준비생 중 상당수는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결혼보다 취업을 더 중시한다. 사회에 진출해 성공하려는 욕구가 또래 남자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이들은 “지원자의 성별에 근거해 선입견을 갖는 채용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선 “성별에 따라 연봉이 달라진다”는 말도 정설처럼 떠돈다. 취업준비생 김모(여·28) 씨는 “우리나라는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일 것”이라면서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 문제”라고 말했다. 김씨는 특히 일부 기업들이 군 복무기간을 호봉에 가산해주는 점을 비판했다. 

    “20대 남성들이 2년 군복무를 취업에서 겪는 남녀 역차별 사례로 자주 이야기한다. 출산·육아에 대한 보상이 여성에게 주어지는지 반문하고 싶다. 군 생활에 대한 보상은 군인 월급을 인상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사기업이 보상할 문제는 아니다.” 

    취업에 성공한 뒤에 상당수 여성은 ‘유리천장’을 경험한다고 한다. 국가공무원의 반이 넘는 여성 공무원 중 고위공무원이 단 55명에 그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전체 고위공무원 수는 1050명이다. ‘고위직 남초 현상’은 그대로인데 전체 여성 공무원 숫자만 강조되는 것은 알파걸에겐 불만이다.

    “혼자 사는 여교수들”

    상당수 알파걸은 여자에게 유독 성역할이 강조된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모(여·26) 씨는 얼마 전 회사에 결혼 소식을 알리자 “그럼 언제 그만두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씨는 “사장이 청첩을 받더니 ‘집에서 살림할 생각이면 대신할 사람을 새로 구하겠다’고 말하더라. 나는 결혼하는 것뿐이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회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남자 직원의 결혼에 대해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사정은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모 대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한모(여·25) 씨는 함께 일한 여성 팀장의 사례를 들려줬다. 이 팀장은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다 아이를 가진 후 퇴사했다고 한다. 남편이 회사에 계속 다니는 대신 자신이 육아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이후 재취업했지만 연봉이 반으로 깎였다고 한다. 한씨는 “우리나라 여자에게 육아와 직장의 균형은 여전히 어려운 일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요즘 많은 20대 여성은 비혼을 결심한다.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출산·육아라는 성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일류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정모(여·25) 씨는 “여자가 석·박사 공부를 하면 결국 결혼하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고 있다.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 교수를 많이 보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에 사는 알파걸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한 장면. [HBO홈페이지]

    미국 뉴욕에 사는 알파걸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한 장면. [HBO홈페이지]

    일부 알파걸들은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잘못된 성역할을 바로잡는 데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남성혐오와 등치되는 부작용도 나왔다고 평가한다. 8월 4일 광화문사거리에서 열린 4차 불법 촬영 규탄시위를 두고 일간베스트저장소는 시위 참여 여성들을 ‘멧돼지’에 비유했고 시위 자체를 폭동으로 일컫기도 했다. “한국에서 페미 짓하는 X들은 다 남혐 때문에 하는 거지”라는 글이 올라온다. 일부 남성들은 “물질적, 정신적, 신체적 부족함에서 오는 열등감을 해소할 수 없다는 허탈함과 절망감이 분노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여초 커뮤니티 워마드의 상황도 비슷하다. 여성혐오에 대응해 똑같이 남성 혐오로 미러링(모방행위)하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한남충(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말) 박제’로 올라온 게시물이 1000개가 넘는다. ‘박제’는 개인의 사진이나 신상정보 등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려 영구히 전시한다는 뜻이다. 

    공기업 직원 송모(여·26) 씨는 상사가 “너 입술 좀 빨갛게 하든지 뭐라도 좀 발라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데 이런 말이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데 동의한다. 남자 직원에게는 외모에 대한 지적도 하지 않고 커피를 타거나 간식을 나누는 일도 시키지 않는다. 송씨는 자신이 겪는 다양한 종류의 부조리를 타파하자는 페미니즘 운동에 공감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데엔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을 종교적 율법에 비유하며 “율법에 너무 얽매이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듯, 페미니즘도 여성해방을 위한 건데 탈코르셋과 같은 개념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진입 장벽이 높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온건한 페미니즘’ 더 선호

    필자가 접한 상당수 알파걸은 ‘온건한 페미니즘’을 지향했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페미니즘은 이런 것이다’라고 성급히 정의 내려 다른 요소를 배척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남자를 굳이 혐오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에 관한 첨예한 갑론을박은 결국 하나의 궁극적 가치로 모아진다. ‘평등’이다.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김모(여·25) 씨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페미니즘 안에는 다양한 주체와 양상이 있지만, 성별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공통적으로 지향한다”고 말했다. 

    8월 1일 녹색당 강연-토크쇼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은 미러링을 두둔했다. 극단적 상황에 몰려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반사회적 행동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부 여성은 “페미니즘 운동으로 인해 도리어 자기연민에 빠졌다”고 말한다. 정희진은 이 지적에 공감했다. 그녀는 “힐러리 클린턴이 말한 것처럼, 페미니스트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긍정적인 자기 에너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남자도 해방하라”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는 “여성들이 왜 무더운 여름 땀 흘리며 시위 현장에 나갈 수밖에 없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재기해’라는 자극적 부분만 소개하려고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지예는 “페미니즘은 결국 가부장 사회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남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남자친구로서의 가부장제적 짐을 내려놓으면, 남자도 더 살기 편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만 남자들이 이렇게 해방되려면 부당한 권력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부당한 권력은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몰래카메라를 찍거나 폭행하거나 차별하거나 군림하거나 혐오하는 그런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친다. 몇몇 알파걸도 이런 시각에 동의한다. 

    모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정모(여·28) 씨는 “노예제가 폐지되면 노예를 소유한 지주들이 불편해지는 것처럼, 여성 인권이 보호되는 것은 이것을 짓밟고 소비해온 남성들에게 불편한 일일 수 있다. 알량한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남성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지만, 결국 사회는 여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할 것이고,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들은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몇몇 20대 남성은 또래 여성들에게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는 2년 동안 군대에서 고생했고 가난하다. 너희 여자들은 좋은 학교 나왔고 돈도 많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약자라고 하고 권리를 누리려 한다. 이런 무임승차하는 너희 여자들이 내 것을 뺏어간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미취업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또래 여자들 탓으로 돌리는 젊은 남자들 중 일부가 주로 공격적 성향을 나타내는 듯하다. 일자리-복지 정책을 통해 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갈등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다.” 

    정씨는 “절대적 약자도, 절대적 기득권도 없다. 서로의 약점을 이해할 때 기득권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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