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현직 국가원수도 면책 특권은 없다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입력2018-09-12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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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가 국제형사재판소를 두고 “식민주의자들의 새로운 인종사냥”이라고 비난한다. 아프리카연합에서는 케냐 현직 정·부통령 재판을 기화로 로마조약에서 집단탈퇴하자는 주장이 대두됐다. 출범한 지 겨우 10년 된 국제형사재판소에는 중대한 도전이요 위기다.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현직 국가원수의 면책특권 부인은 로마조약의 근본 원칙 중 하나다. 이를 건드리면 이제껏 인류의 지혜를 모아 합의에 도달한 국제형사법의 근간이 무너지고 만다.
    2013년 1월 9일 애제자 중 한 사람인 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함께 점심을 들었다. 인텔리로서 우뚝 선 그의 애환을 듣고 나 나름대로 충고를 해주었다. 우선 외부에서 들리는 비판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신경, 무대응이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정치권에서 보내는 추파를 거절하는 것도 어렵지만 언론이나 기타 사회단체에서 유혹하는 것도 거절하기 어렵다고 그가 토로했다. 물론 그럴 것이다. 나도 30여 년간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여러 가지 외부 유혹이 있었음을 말해주면서 맡은 분야에서 공부를 게을리하면서 전공 밖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 단기간 약장사 노릇을 하다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김 군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국내외적으로 1000만권 정도 팔렸는데, 이탈리아에서 그 책의 출간 계약을 맺고 귀국했다고 했다. 어디 가서 전공 외 일을 하더라도 전공 분야에서 독보적 실력을 쌓아야 학자로서의 비중이 견고해지고 전공 외 일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가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새로 내놓았는데 내가 읽어보기에는 이 책이 더 밀도 있게 쓰인 것 같다. 그가 기자들에게 내가 그의 멘토라고 소개한다고 들었다. 나는 그가 부디 우리나라의 큰 지성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충분히 그렇게 되고도 남을 인재다.

    “송상현 소장에게는 재판 못 받겠다”

    1월 13일 아내와 함께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로 귀임했다. 날씨가 이곳답지 않게 춥다. 도시가 눈 속에서 움츠리고 있다. 이곳에 와 있는 판사와 외교관 등 제자들이 신년 인사차 방문했다. 공무로 바쁜 분들이므로 감사하기 짝이 없다. 1월 19일에는 이성훈 군의 세배를 받고 점심을 대접했으며, 바로 이어서 처4촌 김형석 군 내외가 준호와 지우를 데리고 세배를 왔다. 애제자 김현 박사가 대한변협회장 선거에 출마해 패배했다는 소식이 서울에서 들려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재야 법조계의 수장으로 선출돼 할 말을 하면서도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해 자랑스럽다. 

    3월 30일 15세 미만 남녀 아동을 소년 병사로 동원하는 등의 전범 혐의로 기소된 콩고민주공화국 군벌 토마스 루방가의 변호인단이 난데없이 나에 대한 기피 신청을 공개적으로 제출했다. 루방가를 변호하던 프랑스인 변호사 카트린 마비유가 소송 전략의 하나로 기피신청을 한 것이다. 

    어린 소년·소녀를 납치해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전투에 투입하는 행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는 전쟁범죄 내지 반인륜 범죄다. 루방가는 콩고애국자연합(UPC)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인 반정부군 최고사령관으로 2005년에 체포됐으며 2002~2003년 15세 이하 소년병을 유인·납치해 전투에 투입한 혐의 등에 대해 재판을 받아왔다. 루방가가 9세 아동까지 성노예와 전투병으로 부렸다는 게 검사 측 주장이다. 이 같은 사건의 재판은 납치 여부와 소년·소녀의 연령을 판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동료 재판관들은 루방가 변호인단의 행동에 불쾌감을 나타냈다. 기피 신청서에는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인 내가 각종 연설에서 루방가를 유죄가 확정된 자처럼 다루는 듯한 편견을 보인다는 것과 루방가 재판 도중 뉴욕의 유니세프 본부가 재판부에 소년병에 관한 전문가 의견을 유엔 비밀문서로 제출했는데 내가 명목적이나마 유니세프 한국회장을 맡고 있어 이해관계가 부딪친다는 것이 이유로 적혀 있었다. 

    3월 21일 국제형사재판소 전원재판관회의가 루방가 변호인단의 기피 신청을 심의했다. 당사자인 나는 심의에서 배제됐다. 산지 모나헹 부소장이 사회를 보면서 재판관 한분 한분의 의견을 듣고 표결하는 절차다. 로마규정에 따르면 당사자가 특정 재판관에 대한 기피 신청을 하면 이 안건은 전원재판관회의에서 결정하도록 돼 있다. 모처럼 재판관들은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마음껏 토론했다고 한다. 

    내가 루방가에게 편견을 가졌다는 변호인단의 첫 번째 주장은 전원일치로 기각됐고 유니세프와 관련된 두 번째 주장은 아니타 우샤스카 재판관이 소수의견을 냈으나 나머지 재판관들은 내 입장을 지지했다고 한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직을 유지하는 게 향후 재판에서 불공정할 수 있는지 검토해봐야 하겠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전문가 의견을 제출했다는 유니세프 본부와는 상명하복 관계이거나 그 조직의 일부가 아니다. 또한 그동안 나는 유니세프에서 금전적 기타 일체의 대우를 받아본 일도 없다. 양심상 떳떳하지만 외부인이 내용도 모르면서 뭐라고 떠들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4월 8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마드리드 일정을 마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반 총장은 도착하는 일요일 저녁 이기철 헤이그 주재 대사가 베푸는 사사로운 관저 만찬을 갖고 우리 내외와 한국어로 현안을 논하면서 다소간의 긴장과 피곤을 풀고자 오래전부터 계획했다. 그런데 원래 월요일로 예정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들과의 만찬이 반 총장의 일정 변경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국제사법재판소 측이 염치없이 달려들어 한국인끼리 사적으로 가지고자 계획한 일요일 밤의 만찬 일정을 가로채서 자기네의 만찬으로 대체해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반기문 총장과의 단독회담에서 2013년 2월 4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의 피고인 신분이므로 유엔 사무총장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일반 원칙을 설명해줬다. 또한 반 총장이 아프리카연합이나 아랍연맹을 접촉할 때 ICC의 의사를 전달해 우리와의 관계 개선에 힘써줄 것을 요청해달라고 주문했다. 반 총장과의 개별 회담에서 현안 문제를 모두 한국말로 논의했다. 한국인 국제기구 수장들이 한국어로 국제 문제를 논의한 것에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워싱턴에서 피어난 ‘벚꽃 외교’

    2013년 4월 미국 워싱턴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에 헌화했다.

    2013년 4월 미국 워싱턴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에 헌화했다.

    4월 12일 미국 워싱턴의 세계은행을 방문했다. 미국 출장 중 주말을 한껏 즐길 시간이 생겼다. 행운이다. 토요일 아침 8시 인공호수 타이들 베이슨을 걸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생전 처음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공원을 방문했으며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기념물에 처음으로 참배했다. 개인적으로 할아버지(고하 송진우) 기념사업 때문에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에 관심이 많다. 킹 목사의 거대하고 우람한 석상 기념물은 그의 어록과 함께 참 인상적이었다. 

    한국전쟁 기념물에는 눈향을 깔아 잔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수많은 이름 없는 미국 및 유엔 병사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와 만나보지도 못한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의 역사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작으나마 바쳐진 꽃들이 이들의 넋을 달래는 것 같은데 서울상대 17회 동창회가 매주 자그마한 화환을 바쳐 이를 기념하는 것이 인상 깊었고, 내가 갔을 때는 159번째 주일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나중에 워싱턴에 사는 동창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나와 동기생인 서울상대 출신 몇 분이 이 화환 봉헌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는 나와 동기인 경기고 55회가 이 헌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벚꽃 축제 퍼레이드 시간에 맞춰 도로 연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이나 다양한 행진을 구경했다. 각지에서 온 고등학생 브라스밴드가 지나가고, 육해공군 의장대가 꼬마들을 즐겁게 한다. 일본 미녀들의 행진도 있었다. 퍼레이드가 별로 화려하거나 다양하거나 웅장하지는 않다. 한국인의 역사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태프트 대통령과 가쓰라(桂太郞) 총리가 워싱턴에서 일찍부터 시작한 벚꽃 외교여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국제형사재판소 新청사 기공식

    2013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청소년을 위한 인권 세계포럼’.

    2013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청소년을 위한 인권 세계포럼’.

    그럼에도 도쿄시장이 보낸 수천 그루의 벚꽃나무를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심어 매년 일본을 기념하는 아이디어는 참으로 기발하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금년에는 봄이 늦은 까닭에 우리가 다소 늦게 도착했는데도 한창 절정인 벚꽃을 구경하는 행운을 만끽하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이러한 탁월한 외교적 발상이나 제스처를 인정하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실천해 기선을 잡아가는 방법을 꾸준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4월 16일 국제형사재판소 신(新)청사 기공식이 열렸다. 불순한 일기에도 텐트를 친 행사장에 회원국 대사 등 손님이 참 많이 오셨다. 안전모와 우비를 착용하고 내외 귀빈들과 함께 삽으로 흙을 파서 던졌다. 바람이 심해 금방 입속에 모래가 가득해지는 것을 보니 해변가의 소금기와 모래가 나중에 건물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예방 조치를 마련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기술적 조치를 지시했다. 

    기공식 행사에서 주된 역할을 한 것을 끝으로 소장으로서 역사에 남을 참여는 다 끝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6년간 소장을 하면서 14개국의 조약 가입, 아프리카 피해자 마을 방문, 리뷰 콘퍼런스 주도, 10주년 기념식, 신청사 기공식 등 특정 시기에 소장을 맡지 않았다면 이뤄내지 못할 업적을 남기는 행운을 누렸다고 하겠다. 

    5월 13~16일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로만 코로드킨 러시아대사가 방문을 타진했고, 세계의 법률 수도라는 점을 선전하고자 하는 헤이그시의 이해도 맞아떨어졌다. 러시아 대사는 우연히도 1980년대 초 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만나 오랫동안 교유한 러시아 최고의 해상법 교수 아타톨리의 아들이어서 마음으로 가까웠다. 코로드킨은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러시아 법조인 사회를 개방하고 국제화하는데 내가 가서 크게 한몫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출장을 권고한 것이다. 나는 네덜란드 외무부 등과 협의해 페테르 톰카 국제사법재판소(ICJ) 소장, 테어도르 메론 구유고슬라비아전범재판소(ICTY) 소장과 나 등 3대 국제재판소장이 함께 러시아를 방문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는 러시아 주재 네덜란드 총영사와 대사가 나왔다. 켐핀스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옛 건물을 현대식으로 잘 고쳐서 고급 호텔이 된 곳이다. 10여 년 전 방문 때와 비교해 도시가 많이 서구화 내지 자본주의화된 것처럼 보였다. 

    아시아의 극동지방에서부터 유럽의 동쪽 끝까지 걸쳐 있는 방대한 러시아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냄새가 덜 나고 유럽 냄새가 짙은 도시라고나 할까.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선진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건축가를 초청한 후 아주 근대적인 새 수도를 만들어달라고 명령하면서 슬라브 냄새를 지우고 1703년 탄생한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관통하는 네바강은 무역 수로였다. 스웨덴의 침입을 막고자 건설한 요새가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데 습지대인 이곳에 운하를 파고 물을 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진행했다. 도시 설계자들은 암스테르담과 베니스를 합친 것 같은 아름다운 도시를 지향했다고 한다. 수많은 궁과 정원이 이를 웅변한다. 차르가 다스리는 나라의 수도로서 위용을 자랑했으나 정치적 운명은 기구했다. 이름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를 거쳐 1997년 원래 이름으로 복귀했다. 6·25전쟁을 경험한 나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침공을 900일 동안 버텨낸 역사가 도드라져 보였다.

    아첨하는 지식인의 얼빠진 행태

    노르웨이 베르겐.

    노르웨이 베르겐.

    나를 포함한 방문자 모두가 추진한 러시아 정부 각료들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일행은 러시아 헌법재판소를 방문했다. 노련한 국제 관계 담당자인 대머리 신사가 영어 설명과 함께 우리를 건물 내 곳곳으로 안내했다. 18세기에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다. 법원 건물이 이처럼 유서 깊고 화려해도 괜찮은가. 어느 커다란 회의실로 안내돼 착석하니 발레리 조르킨 헌법재판소장이 행정처장인 여성과 함께 나와 우리를 환대하면서 개황을 설명했다. 러시아에서 현실적으로 사법권 독립은 달성돼 있지 않을 테지만 건물만은 서양 사회 어디에 내보여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헌법재판소 영내에 교회가 있는 것이 특이한데 작지만 꽤 화려하다. 정교 분리 이전의 유산인가. 

    오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법과대학을 방문했다. 총장은 이 대학 법대가 배출한 유명한 동문을 소개하기에 여념이 없다. 건물 입구 복도에 사진과 함께 업적이 간단히 적힌 훌륭한 동문의 기록이 기다랗게 병풍 모양으로 나열돼 있는데 그는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사진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점차 독재화하는 푸틴 체제하에서 아첨하는 지식인의 나약함인가. 이 대학의 교수들과 우리 일행이 선 채로 몇 마디 나누는데 자기는 공용 휴대전화 이외에 푸틴과 직통하는 별도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얼빠진 지식인의 행태는 만국 공통인 듯싶다. 

    들어보니 이 나라에서는 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중요 부서에 진출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극심한 학력 편중의 사례다. 한국의 경우에는 서울에 있는 소수의 대학 출신이 관직 등을 독점한다는 비난이 있으나 러시아의 경우에는 오로지 이 대학뿐이라고 한다. 푸틴은 이 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조교로서 얼마간 있다가 정부로 진출했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전 대통령)는 이 학교 법대를 마치고 부교수로서 민법과 로마법을 여러 해 가르치다가 정계로 투신했는데, 엄격했지만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수였다고 한다. 

    어느덧 8월이다. 네덜란드에서 10년을 살면서도 일이 바빠 주말에 여행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소장 및 재판관 임기가 후반부로 넘어갔으므로 시간 나는 대로 주말여행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간 곳이 노르웨이의 베르겐이다. 

    8월 2일 금요일 오후를 연가로 처리하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니 1시간 반 만에 베르겐에 도착한다. 선진국이므로 택시기사가 요금에 정직할 것으로 믿어 따로 택시를 예약하지 않았으나, 일기예보가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많이 오는 것으로 돼 있기에 폭우 속에서 부족한 택시 때문에 좌왕우왕할 경우를 예상해 떠나는 날 아침에 택시를 예약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대합실로 나왔는데도 택시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택시를 예약해준 소피에게 연락해 경과를 알아보는 등 소동을 피운 후 15분 만에 운전사가 나타났다. 약 18㎞ 거리인데 택시기사가 관광 가이드를 자임하더니 나중에 요구한 팁을 포함해 80유로 가까이 내라고 한다. 참 비싼지고. 투숙한 호텔은 위치로서는 최고였으나 그리 훌륭한 곳은 아니었다. 토요일 저녁 1시간가량 정전 사태가 있었는데도 사과의 말 한마디도 없다. 

    1070년 올라브 키레 왕(King Olav Kyrre)이 처음 세운 베르겐은 오슬로로 천도하기 전 노르웨이 수도였으며, 19세기까지는 북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베르겐이 왜 수세기 동안 부유하고 심지어 한동안 이 나라의 수도였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이곳이 한자동맹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을 알고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13세기부터 독일 상인을 중심으로 북해와 발트해를 무대로 해 전성기에 서쪽으로는 런던, 동쪽으로는 라트비아의 리가를 아울러 독일의 함부르크, 브레멘 등이 한자동맹의 구성원이었다. 그중에서도 1360년부터 베르겐이 한자동맹의 가장 큰 사무소를 유지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국제 상사 분쟁을 가장 신속하게 해결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상법을 연구한 나로서는 한자동맹의 가장 큰 도시 베르겐을 방문한 것에 남다른 감회가 있다. 

    나는 해상법을 공부하면서 영국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의 희귀본 서적 중 18세기까지의 해법을 집대성한 프랑스 학자 파르드쉬의 원전을 보면서 몹시 흥분한 기억이 있다. 해상법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한자동맹의 중심지에 와서 바로 그 당시의 발자취를 직접 보는 것이 또한 흥분을 일으킨다. 당시 베르겐의 해상교역 중심지는 지금의 브뤼게(Brygge·부두라는 뜻)라는 바닷가인데 이곳에는 목조로 지은 오래된 붉은 건물이 줄지어 서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베르겐 어시장은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가장 번화한 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온갖 생선 노점이 그곳에서 관광객을 유혹한다. 우리는 이것이 임시 노점상인 줄 알았으나 이들은 1927년부터 그곳에서 매일 생선 등을 팔고 손님이 요구하면 생선을 그 자리에서 구워주기도 한다. 우리도 두 끼를 이곳에서 해결했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집결된 곳이다. 

    피오르 크루즈를 탔다. 수로를 따라 늘푸른나무로 들어찬 주변의 산에 아름답게 배치된 빨간 지붕의 가옥들이 참 아름답다. 우리나라 다도해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작고 큰 섬들이 점멸하는데 금문교 스타일로 건설한 연륙교들이 참 잘 어울린다. 막상 피오르를 지나가면서 보니 배 옆에 바짝 서서 보는 바위산의 절벽들이 바로 내 앞으로 넘어질 듯 박진감 있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동해나 남해 심지어는 거제의 해금강만 못하다. 

    바위절벽에서 가느다란 폭포수가 길거나 짧게 흘러내린다. 위에서 내려오는 폭포도 있고 바위틈에서 용출되는 물줄기도 있다. 어디를 가나 바다는 깨끗하게 보존돼 있고 선상의 관광객들도 모두 조용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장마 후 산더미같이 쓰레기가 떠내려오는 한강이나 각종 호수의 현실은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9월 9일 마침내 케냐의 윌리엄 루토 부통령 재판이 시작됐다.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이 기자와 재판 관계자들로 꽉 차 있다. 루토는 2007년 케냐 대통령선거 후 발생한 대규모 폭력 사태에 연루된 혐의를 받은 피고인이다. 인종간 전투도 있었지만 무고한 양민 1100명이 살해된 사태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ICC를 매도하고 비난하는 언론 플레이가 강화되는 등 신경이 많이 쓰이는 시점이다. 아프리카 집권자 대부분이 장기 독재자로서 자신도 ICC에 회부될지 모른다고 염려하기 때문이다.

    정·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된 케냐

    루토에게 사실상 궐석재판을 허용한 하급심 결정의 상고 사건을 심의하고자 오전에 상고심재판관회의를 소집했다. 어제 저녁 탄자니아와 르완다, 오늘 아침에는 부룬디, 우간다, 에리테리아가 법정의견서(amicus curiae) 제출 허가 신청을 했다. 나는 상고 본안 심의에 앞서 5개국의 신청을 허가할 것인지 공론에 부쳤다. 4대 1의 의견으로 이를 허가하기로 했다. 이 같은 참고 의견서를 제출하는 것이 상고심 심리를 지연시킬 뿐 결론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정치적으로는 무슨 짓이라도 하고자 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의 분노를 다소 달래고 곤경에 처한 옆 나라를 위해 무엇을 좀 했다는 명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날 저녁 뉴욕에서 반기문 총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유엔 주재 케냐 대사와 장시간 회동한 끝에 그가 제시한 5개 항목을 나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첫째 케냐는 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이므로 좀 더 융통성 있게(more accommodating) 사건을 취급해달라는 것이고, 둘째 자기네 정·부통령이 동시에 공판에 출석하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 셋째 공판 일정의 개시일 및 종결일 외에는 궐석재판으로 진행해줄 것, 넷째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할 것, 다섯째 모든 절차가 판사실에서 진행되도록 할 것 등 5개 조건이다. 나는 대부분 담당 재판부의 전권 사항이므로 내가 말할 여지가 별로 없고 다만 동시 출석을 할 필요가 없도록 이미 담당 재판부가 배려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9월 20일 마음속에 유념하고 있던 남(南)슬라브 국가 크로아티아의 명소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했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적으로 베니스왕국, 오스만투르크, 헝가리, 합스부르크, 프랑스, 독일 등의 지배를 받았다.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이끌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1980년 사망한 후 정치적 불안정기를 거쳐 1990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했으나 크로아티아에서는 소수 국민인 세르비아인이 자신들에 대한 헌법상 대우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데 불만을 품었다.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유고연방 군대와 몬테네그로 군대가 크로아티아를 포격해 1만 명 이상이 죽고 수십만 명이 이 나라를 떠났다.

    아드리아海의 보석,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내리자 젊은 부시장이 마중을 나왔다. 푸른 하늘 아래 찬란한 태양빛을 받으며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젊은 부시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시내로 들어왔다. 그는 자그레브에서 대학 공부를 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곳 출신으로 이곳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 인구는 약 4만 명이고 크로아티아 전체 인구는 400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유고연방이 와해되면서 전쟁을 경험한 1991년의 기억이 아프게 배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시내를 관광하면서 보니 전쟁으로 죽고 파괴된 참상을 전시하는 장소가 여러 군데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건 운전하면서 보건 나라 전체가 모두 바위산으로 구성돼 나무나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곳은 아니다. 그리스 등지를 가면 같은 돌산이지만 그 색깔이 거의 하얀 것에 비해 이곳은 암회색의 돌덩어리로 돼 있다. 아드리아 해변은 기가 막히지만 땅은 전반적으로 척박한 느낌을 준다. 길도 산중턱을 겨우 차 2대가 지나갈 만큼 깎아 건설했기에 인도는 없고 절개 면은 낙석 방지를 위해 그물망으로 덮어놓았다. 온 시내가 돌산의 비탈에 계단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구시가는 바다에 면한 가장 낮은 지점에 건설돼 산중턱 윗길에서도 전경이 아담하게 다가온다.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아니나 이곳은 물가가 비싸고 특히 내가 묵은 호텔은 하루 숙박비가 엄청나게 비싼 데도 서비스는 엉망이다. 관광산업 진흥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무튼 이곳의 풍광과 기후와 시내 성벽이 일행의 기분을 달뜨게 했다. 성벽의 문을 통과해 구시가지로 걸어 들어갔다. 구시가는 현지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화강석이나 대리석을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성벽이나 요새를 쌓아 올렸으며 길바닥도 돌로 깔았다. 길가의 건물도 모두 돌을 써서 바로크식으로 얌전하게 장식했다. 풍경이 찬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희거나 베이지색의 석조건축물에 빨간 기와지붕은 어디에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콤비로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거기다가 짙푸른 남색의 아드리아해까지 아울려 과연 이 도시의 명성은 명불허전임을 깨닫게 한다. 

    해산물이 워낙 풍부해 여행 내내 각종 생선을 즐겼다.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어둠이 깃드는 가운데 커피를 사 먹으면서 야경을 보는 망중한이 얼마만인가. 재즈나 다른 여러 음악을 바에서 연주하거나 길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는 경우도 많은데 나중에 시내에 싸구려 숙소를 잡은 사람에게 들으니 이런 음악과 소란이 새벽까지 이어지고는 바로 청소차들이 돌아다니므로 결국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게 축소해 건설한 만리장성”

    이 아름다운 도시는 1300년 전 그리스에서 피난 온 이들에 의해 건설돼 1918년까지 라구자왕국이었다. 14세기 베니스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베니스와 경쟁하는 해상 강국이 돼 이집트, 시리아, 시실리, 스페인, 프랑스, 터키 등과 교류하면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1667년 대지진과 동방항로 개척으로 쇠퇴했으며 나폴레옹의 지배도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유고연방 해체 과정에서 1991년 유고연방 군대에 의한 포격으로 엄청난 파괴와 살육에 직면했으나 1992년부터 열심히 복구해 관광 중심지가 됐다고 한다. 

    9월 22일 시내의 해안 성곽에 올라가 도시를 일람하고 대표적 교회와 궁을 관람했다. 관광의 백미는 옛날 번성했던 이 나라를 500년 이상 보호해준 시내 성벽에 올라가 한 바퀴 걸어서 도는 것이다. 걸으면서 눈 아래로 보이는 성안의 오래된 집이나 교회를 구경했다. 성 밖의 바다와 섬, 그리고 건너편 절벽과 그곳에 교묘하게 살아 붙어 있는 큰 해송들의 비틀어진 모양, 주변의 푸르디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와 카약 등이 무한한 매력의 덩어리다. 인간적 규모로 아기자기하게 축소해 건설한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10월 25일 그간 전 세계의 관심을 모은 루토 케냐 부통령의 궐석재판 여부에 대한 상고심 결정을 내가 직접 재판연구관들을 데리고 법정에 들어가 선고했다. 방청석이 꽉 차게 사람이 많이 와서 직접 나의 선고를 들었다. 루토가 기일에 결석한 채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얼마 후 개시될 공동피고인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의 재판 출석 의무에 직접 영향을 주는 민감한 문제다. 원래 11월 12일이 케냐타 대통령의 첫 공판기일인데 케냐 정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는 모습을 안 보이고자 그동안 아프리카 국가 전부를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여러 가지 비상수단 내지 꼼수를 쓰는 바람에 아프리카연합과 국제형사재판소가 대충돌의 길로 다가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법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국제형사재판소는 기본적으로 법원이므로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는 법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거듭 단호하게 천명했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중요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장으로서 재판의 독립성과 불편부당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급적 사안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수많은 지지 국가와 협조를 강화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을 쉼 없이 배후에서 조용히 추진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기문 총장과 애제자인 김원수 대사의 막후 노력이 감정적이고 정치적으로 나오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주저앉히는 데 효과가 있었기에 무한히 감사하기도 했다. 

    대충돌의 길로 가는 긴장 상황 때문에 내가 재판장인 상고심이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가 그야말로 전 세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쟁점은 간단했다. 로마규정 제63조 1항이 단순명료하게 피고인의 재판 출석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재판부가 해석을 통해 피고의 결석을 허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원심은 그가 부통령으로서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므로 공판개시일, 종결일, 판결선고일, 피해자 증인의 신문일 등의 경우에만 출석하면 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불출석해도 좋다는 식의 판결을 한 것이 상고된 것이다. 

    내가 심리하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사실심 절차가 3년 정도 걸리는데 현직 부통령을 조약 규정을 문리 해석해 3년간 꼬박 헤이그에 있으면서 공판기일에 매번 출석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일지라도 아직 재판도 시작하지 않은 단계에서 결석이 원칙이고 출석이 예외인 듯 포괄적으로 불출석 허용 결정을 한 하급심은 너무 치우친 것 같아 재량권 남용 쪽으로 재판을 이끌어갔다. 

    그럼에도 5인 상고심 재판관의 의견은 3대 2로 갈리고 말았다. 다만 재량권의 남용이라는 점과 부통령이라는 중책을 수행한다는 것을 대폭적으로 불출석을 인정하는 이유로 삼는 점이 부당하므로 이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왜냐하면 로마조약 63조는 출석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27조에는 국가원수라도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판상 특별취급을 하거나 면책을 인정하는 것을 전적으로 금지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소수의견 재판관은 63조의 출석 의무에 따른 예외를 전연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결을 뒤집자는 결론에는 찬동하지만 이유에서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별개의견을 냈다. 나는 동료 재판관을 더 이상 설득할 생각을 포기하고 그대로 선고했다. 반응은 피고도 기대 이하라고 불만이고 검사도 자기네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불만이었다. 원심의 재판장도 불만을 나타냈다. 이 판결은 앞으로 케냐타 대통령의 출석 의무와 관련해서도 사실상 기준이 되므로 케냐 정부도 불만이었다. 

    케냐 측은 재판부에 케냐타 대통령의 재판을 임기 만료 시까지 정지하자는 신청과 11월 12일 공판개시일정을 연기하자는 신청을 제출했다. 점차 이 사건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 상고되는 경우에는 모두들 주심이나 재판장을 맡기를 회피하고는 소장에게 미루는 경향이 생겨났다. 소장이 재판장을 해야 무게가 있다는 둥 외부의 공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둥 참 말 같지 아니한 소리를 한다. 이 상고사건도 내가 먼저 자원해 재판장을 맡았는데도 심리 과정에서는 모두들 여러 말을 해 진통을 거듭한 케이스다. 

    굿럭 조너선 대통령이 나와 가나 출신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아쿠아 쿠엔예히아를 초청했다. 케냐 현직 대통령 재판과 관련한 우리 재판소와 아프리카연합 간 의견 대립을 거중 조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자는 취지로 우리를 초청했다는 게 대통령궁의 발표다. 

    아부자는 신(新)수도다. 도처에서 건설 공사가 진행됐으며 도로를 매우 넓게 건설하고 있었다. 사바나 지역의 평야이므로 울창한 밀림이나 크게 자란 나무는 별로 없고 평평한 초원지대에 이따금 커다란 바위언덕이 나타나곤 한다. 남쪽의 대도시 라고스는 밀집된 인구와 오염된 공기, 극도의 혼잡으로 정신이 없다는데 이곳은 공기도 맑고 널찍한 길이 시원스러움을 선사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나이지리아 특유의 토속음식이 제법 차려져 있다. 얌으로 만든 흰 떡같이 생긴 주식과 쓴 나물을 약간의 국물과 함께 요리한 음식이 앞에 놓여 있다. 그 지역에서 잡히는 흰 살 생선이 다른 재료 및 양념과 범벅이 돼 나왔다. 쇠고기는 따로 구워 썰어줬는데 다소 질기다. 가능한 한 현지 음식을 익히고자 노력했다.

    “로마조약에서 집단 탈퇴하자”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가 국제형사재판소를 두고 “식민주의자들의 새로운 인종사냥”이라고 비난한다. 아프리카연합에서는 케냐 정·부통령의 재판을 기화로 로마조약에서 집단탈퇴하자는 주장이 대두됐다. 출범한 지 겨우 10년 된 국제형사재판소에는 중대한 도전이요 위기인 것이다. 

    나는 유럽연합 및 각종 국제기구, 전 세계의 수많은 NGO, 중요한 회원국들, 뉴욕·헤이그·제네바·브뤼셀의 지지자들에게 SOS를 보냈다. 반 총장은 아프리카 정상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걸어 탈퇴를 만류하고 그때마다 그 결과를 계속 내게 알려줬다. 또 다른 ICC 지지자들은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중요한 경제지도자인 미국과 유럽의 거물 재벌과 아프리카 투자자 몇 사람을 접촉해 아프리카 나라들이 조약을 탈퇴하면 이는 법의 지배(Rule of Law)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는 그 나라에 투자하는 것을 재고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게 해 아주 큰 효과를 거뒀다. 

    조너선 나이지리아 대통령 면담은 오후 1시 30분으로 예정됐는데 정오에 출발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대통령궁은 호텔에서 그 모습이 일부 보이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대통령궁 출입통제소에 도착해서야 이유를 알았다. 우리 일행이 한 사람씩 앞서 제출한 신상 자료에 따라 방문 패찰을 발부받고자 기다리는데 대통령궁 담당자가 하는 말이 우리 이름을 컴퓨터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30분 넘게 시간 낭비를 한 후 얼토당토않게 나는 ‘George’라는 이름의 패찰, 쿠엔예히야 재판관은 ‘Mrs. George’라는 패찰을 받았다. 갑자기 내가 ‘조지’가 되고 가나 재판관은 나의 부인이 된 것이다. 좋게 해석하면 ‘Judge(판사)’ 라는 단어를 George로 잘못 들은 것이겠으나 대통령궁 사무직원의 일처리 자세와 능력을 보니 발전하기까지 아득하게 먼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원수급 인사의 방문이므로 수개월 동안 실무자끼리 얼마나 많은 교신과 통화를 했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수준이다. 나중에 이 사례를 보츠와나의 모나헹 재판관에게 농담으로 전했더니 그녀는 아마 10유로가량 돈을 주었다면 명단이 기적적으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조너선 대통령이 법무장관, 비서실장, 외무차관, 의전장, 기타 10여 명과 함께 입장해 착석했다. 전통 의상과 모자를 쓴 채 착석한 대통령에게 내가 먼저 감사인사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와 회원국 간 협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가 거침없는 대도로 응대를 한다. 첫마디는 나이지리아는 처음부터 남의 강요로 로마조약을 비준한 것이 아니므로 절대 조약에서 탈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하! 됐다 싶었으나 곧이어 로마조약 27조의 문제점을 거론한다. 현직 대통령의 경우에는 재판 절차를 임기 말까지 정지하고 면책특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나는 이 문제는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총회(ASP)에 조문개정안을 제출하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좋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만 외교적으로 대답했다.

    국가원수 면책특권 부인은 국제형사법 근간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현직 국가원수의 면책특권 부인은 로마조약의 근본 원칙 중 하나인데 이를 개정하자고 건드리면 뉘른베르크 원칙(1946년 12월 11일 유엔 총회에 의해 확인되고 정식화된 ‘뉘른베르크재판소 조례 및 당해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승인된 국제법의 제원칙) 이래 이제껏 인류의 지혜를 모아 합의에 도달한 국제형사법의 근간이 무너지고 만다. 

    나이지리아가 로마조약 체제에서 탈퇴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국제형사재판소 탈퇴 문제가 계속적으로 거론될 가능성은 있으나 서아프리카 맹주인 나이지리아가 탈퇴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니 다른 나라가 선수를 치기 어려움을 나는 간파했다. 그 외에는 그들이 무슨 짓이나 비판을 해도 나는 이를 관망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할 자신이 있다. 다행히 조너선 대통령은 말이 통하는 사람 같고 평범하면서도 인간미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나이지리아의 유엔 대표에게서 들은 표현을 써가면서 각하는 조정역(Bridge builder)이며 평화중재자(Peace broker)이니 잘 부탁한다고 하고 웃으면서 1시간가량의 회담을 마쳤다. 그는 나의 이 표현에 아주 어깨를 으쓱하면서 좋아했다. 우리는 2014년 핵안보정상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됐을 때 다시 만나 로마규정체제 잔류에 관한 방침이 변함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송상현
    ● 1941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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