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편의 아들에게 생활비를 받아내는 할머니, 자식한테 도둑질을 가르치는 아버지, 자기가 일하는 세탁공장 손님들의 주머니를 터는 어머니,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는 이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어느 가족’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일탈적이다. 구성원 전체가 법과 사회 질서 바깥에 있는 이 가족의 이야기가 요즘 많은 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5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국내에서 1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다양성 영화로는 이례적 기록이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건국대 교수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영철 기자]
올해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베스트’가 아닌가요.
“칸이 좋아할 만한 영화라는 생각은 듭니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 작품을 보면 ‘진실과 거짓말, 선과 악 등이 사람 관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끝없이 변주하잖아요. 그게 하나의 작가주의로 평가받고요. 고레에다 감독 또한 ‘피가 같은 사람만 가족인가’라는 이야기를 꽤 오랜 시간 반복해왔습니다. 그 점이 심사위원들에게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또 이 영화에는 인위적이나마 조부모, 부모, 자녀 3대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합니다. 외국인이 생각하기에 동양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가족 구성이죠. 이 영화가 칸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데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내세운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하 교수의 분석이다. 반면 그는 두 영화 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 교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아무도 모른다’를 “고레에다 감독 영화 중 상위 3등 안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다.
특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하 교수가 매우 인상적으로 본 영화다. 201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영화는 여섯 살 된 아들 ‘게이타’가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남자 ‘료타’의 이야기다.
핏줄이 같아야만 가족인가
고레에다 감독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던진 질문은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함께한 시간인가’다. 이 영화에서 료타는 물음의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한다. 반면 료타의 안타고니스트(적대자) 격인 ‘유다이’는 상대적으로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다. 게이타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류세이의 법적 아버지인 그는 아버지의 제 1 덕목으로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꼽는다. 그리고 처음엔 핏줄 쪽에 좀 더 마음이 끌리던 료타 또한 점점 유다이의 생각에 공명해간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한 장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공동체
“그것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다른 ‘어느 가족’만의 특징이에요. 고레에다 감독은 그동안 법적으로 인정되는 가족의 기본 틀을 훼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가진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내용적으로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면, 법이나 혈연에 관계없이 진짜 가족 아닐까’라고 묻는 거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유다이를 료타의 대적자로 세운 고레에다 감독이 이번 영화에는 안타고니스트를 두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그래서 ‘어느 가족’을 보다 보면 영화 속 가족을 제외한 다른 가족, 즉 우리 모두의 가족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처럼 느껴집니다. 관객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교수님 말씀처럼, 사회 밑바닥에서 남루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함께 있을 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영화 주인공들을 보면 자연스레 ‘진짜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가족’ 공동체가 법과 제도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대목 또한 생각할 거리를 주죠. 이 영화 배경은 일본이지만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제가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사례 중 하나는 환자가 입원할 때 ‘보호자의 보증’을 요구하는 겁니다. 보통은 우리 민법이 규정하는 특정 친족 범위 안에 있는 사람만 보호자가 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한 명뿐인 오빠는 먼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병원에 실려 왔다고 합시다. 이 환자 곁에는 10년간 ‘셰어하우스’에서 같이 살아온 오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환자를 매우 잘 알고, 치료 후 간호를 도맡을 생각이며, 만에 하나 치료비가 부족하면 대신 내줄 마음까지 갖고 있죠. 그래도 병원에서는 그 친구를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환자 오빠가 올 때까지는 수술을 안 해주는 거예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는 한 정신병원이 술에 취해 패악질 하는 알코올중독 환자를 긴급 입원시켰다가 기소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환자인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가 정말 아버지가 맞는지 관련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죠. 우리나라에서는 증명서에 올라가 있는 법적 가족만 어떤 사람을 보호하고 보증할 수 있다는 인식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죠.”
이상한 정상가족
‘통계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은 참 이상한 사회다.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계속 줄어들어 ‘국가소멸’을 우려하는 판국에 왜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를 버리며 해외입양을 보내는 걸까. 아동학대와 그로 인한 사망, 가정 내 아동학대는 줄어들지 않는가. (중략)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연결하는 단어로 ‘가족’을 꼽겠다. 한국만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 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 교수가 크게 공감했다는 부분이다. 그는 “지난해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의 합계 출산율이 역대 최저(1.05명)로 떨어졌다고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관련 통계를 보면 기혼여성의 합계 출산율은 2.23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여성은 결혼하면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한 명도 낳지 않는다는 얘기”라며 “이는 우리나라의 가족중심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관련 통계를 찾아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비혼 출산율’은 2014년 기준 39.9%로 한국(1.9%)보다 21배 높다. 프랑스(56.7%), 노르웨이(55.2%), 덴마크(52.5%), 스웨덴(54.6%) 등은 전체 출산의 절반 이상이 비혼 출산이다.
우리나라가 유독 비혼모에 대한 편견이 심한 걸까요.
“김희경 씨 책 제목처럼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이 크죠. 시스템적으로 봐도 결혼과 출산을 한 덩어리로 여기고 ‘가족’을 모든 보건, 복지, 법적 보호의 근본으로 삼으니 비혼모가 곳곳에서 차별을 받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직접 키우는 비혼모보다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복지시설이 훨씬 많은 지원금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비혼모한테는 ‘당신이 엄마니까 자식을 스스로 책임지라’고 하는 거겠죠.
“그게 실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느 가족’에서 주인공 유리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어요. 유리의 엄마 아빠는 제 몸 가꾸고 자기 화 푸는 게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유리에 대해 ‘내가 낳고 싶어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합니다. 그들로부터 학대를 당하다 오사무와 노부요 ‘가족’ 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 유리를, 나라는 굳이 구출해 친모에게 돌려보냅니다. 엄마한테 매를 맞든 학대당하든 그건 그 ‘가족’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 행동의 근간에는 ‘아이는 부모의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 말 유사한 일이 있었다. 인천에서 열한 살 소녀가 부모의 감금과 학대를 피해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한 사건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소녀는 그 전에도 한 번 집을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해 도로 집에 데려다줬다고 한다. 이후 또다시 폭행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두 번째로 도망친 소녀가 이번엔 경찰과 마주쳤다. 이때 소녀는 집이 어디인지 묻는 경찰에게 ‘보호시설에서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또 집에 데려다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가족주의’의 환상이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른바 ‘동반자살’을 보도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도 문제 삼았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부모와 같이 자살하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죠. 그걸 동반자살이라고 하는 건 일종의 미화입니다. 그조차 실패해 아이만 죽이고 자기는 살아남은 부모에게 온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제고요.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으면 보통 ‘내가 죽으면 남은 아이들이 불쌍해질 것 같아서’라고 답합니다. 저는 그 말이 ‘내 소유물인 아이를 주인 없는 존재로 남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걸 합리적인 생각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실은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느 가족’의 가족은 이런 현실 속 가족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상적이죠. 개개인이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고, 각자 원해서 자발적으로 같이 살아가니까요.”
실체 없는 모성 신화
이 영화에서 주인공 노부요는 유리를 유괴한 것 아니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부모가) 버린 아이를 주운 것뿐’이라며 ‘아이를 낳기만 하면 다 엄마가 되느냐’고 되묻는다. 하 교수는 이 질문도 우리 사회가 한 번쯤 곱씹어야 할 주제로 꼽았다.“몇 년 전 게임 중독에 빠진 부모가 자녀를 방치한 끝에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가해자를 정상적인 인간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아주 예외적인 돌연변이 정도로 취급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이를 대여섯 명씩 낳고 기르면서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부모 될 준비가 아예 안 된 채로 아이를 낳아 방치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부모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겁니다. 지역아동센터 같은 데 가보면 초등학교 3, 4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도 못 깨우친 아이가 무척 많아요. 대부분 부모가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자녀를 낳은 뒤 책임지지 않고 방치한 아이들입니다. 이런 현실을 간과하고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와 살 때 가장 행복하다’ 같은 관념을 신성불가침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료타 등이 출생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때다. 병원 측 변호사는 료타의 아내에게 “병원에서 실수 했더라도 당신이 주의를 기울였다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았을 게 아닌가”라고 추궁한다. “어머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 교수는 이러한 모성에 대한 신화가 인류 역사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삶에서 어머니 혼자 또는 부모 두 사람이 자녀를 책임지고 키운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불과 근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어느 가족’ 속 가족처럼 부모 형제를 넘어 조부모와 이모 삼촌 등까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확대 가족 안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얘기다.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집착
진화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생식을 멈추고도 수십 년을 더 사는 이유를 ‘돌봄’에서 찾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생산 활동을 할 때 그들의 부모 세대가 자녀를 맡아 돌봄으로써 문화를 전수하고 다음 세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노인의 존재 이유라는 겁니다.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가 바로 그런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 들어 핵가족이 일반화하면서 이런 방식의 가족 구조를 보기 어려워졌고, 그것은 현대인의 삶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의 공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모든 것이죠. 현재 공교육 커리큘럼은 확대가족이 함께 사는 구조를 전제로 짜여 있어요.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은 가르치지만, 집단구조 내에서 개인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 되는지, 다양한 권위 체계가 존재할 때 무엇을 따를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과거엔 가족 안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예 배울 기회조차 없어요. 그 영향으로 부족해진 것을 어떤 사람은 인성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성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공동체 의식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건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부분에 거대한 블랭크를 가진 어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 사회문제가 된 이른바 ‘진상질’이나 ‘묻지 마 폭력’ 등의 바탕에는 바로 이 공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 교수는 특히 ‘고학력 엘리트’에게 이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안 한 사람은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며 사회성을 기른다. 반면 성공하려고 공부만 한 사람들은 사회성이 더욱 떨어진다. 최근 일부 판사가 대중 일반의 정서와 괴리된 판결을 내놓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의대 전공의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똑똑한 애들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기자나 수사관들도 그렇습니다. 왜 이 가족이 모여 살았는지, 그들 사이에 어떤 유대가 존재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위법 사실과 범죄 전과에만 관심을 두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 주인공들이 저지른 행동은 절도, 갈취, 손괴, 유괴 등 하나같이 범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이들이 우리 사회에 큰 피해를 끼쳤는지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5명의 ‘가족’에게 자기 집과 연금을 내주며 살았던 하쓰에가 죽기 직전 혼잣말로 ‘모두들 고마워’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 하쓰에의 말년은 자기 몫을 나눠 가질 다른 이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행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방치하거나 학대하던 친부모를 떠나온 쇼타나 유리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영화 주인공들은 좀도둑질에 대해서도 남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죠. 예를 들면 오사무가 ‘가게에 있는 물건은 남의 소유가 되기 전엔 모두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극중 엄마 격인 노부요는 아들 격인 쇼타에게 ‘남이 망하지 않을 정도까지 훔치는 건 괜찮은 게 아닐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척이나 공동체적인 사고방식이죠. 이들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마치 옛날에 우리가 참외서리 정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처럼요. 이 영화의 문구점 할아버지도 아이들이 과자를 슬쩍슬쩍 집어가는 걸 알면서 일부러 눈감아줘요. 그런 대목을 보면 고레에다 감독의 지향은 참 고전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 문구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죠. 마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말입니다.
“네. 그 후 쇼타는 현대식 슈퍼마켓에서 좀도둑질을 하다 결국 걸리게 되죠. 아이가 겨우 양파 한 망을 훔쳐 달아나는데 그 슈퍼의 젊은 직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쫓아갑니까. 영화를 보며 ‘저렇게 따라갈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편이 가게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직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쇼타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죠. 아마 그들은 좀도둑을 끝까지 잡아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게 정의롭고 공평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회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정의와 공정성에 목매게 돼요. 그런 면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근본주의, 원리주의가 나타납니다. 21세기에 왜 IS가 생기고 자생적 테러리즘이 발호하는가. 저는 슈퍼마켓 점원들의 모습에 그 대답이 있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온 힘을 다해 정의를 구현한 점원들보다 ‘다른 사람에게 큰 손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면 좀도둑질 정도는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어느 가족’ 구성원들에게 더 호의적이신 걸로 보입니다.
“네, 그렇죠. 제가 이 영화에서 또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쇼타가 추락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범죄와 비밀로 묶인 이 가족의 실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쇼타만 두고 도망을 치려 합니다. 만약 이들이 가족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을 거예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들은 애초부터 가족에 대해 종교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혹은 좀 더 편안하고 즐겁게 살고자 그저 함께 지냈을 뿐이에요. 그러니 생존이 위협당하는 순간 ‘쇼타는 다음에 데려오면 되니까’ 하고 합리화하면서 도망칠 짐을 꾸릴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부분이 또 한번 우리 사회의 가족에 대한 신화를 깨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아주 착하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습니다. 거대한 이상보다는 자기가 가진 욕망이 더 중요한 존재죠. 그 안에서 비록 차선으로 보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최선인 삶을 선택해 살아가는 겁니다.”
거대한 이상이라는 게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윤리적이려고 노력하거나 정의로움과 공평함에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고 봅니다. 삶의 목표를 ‘최악이 되지는 말자’ 정도로 정하면 최선을 추구할 때보다 훨씬 큰 영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가족에 대한 부분도 이렇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반드시 모여 살아야 해’ ‘자녀는 친부모가 키워야 해’ 같은 ‘이상’을 버리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면서 제도적·법적인 문제점을 개선할 때가 됐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서툰 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시스템이 개발돼도 끝까지 거부하다 많은 사람이 다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죠. 지금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 또한 그렇게 낡은 것이 아닌가 돌아볼 때입니다. ‘어느 가족’은 그런 고민을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