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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안, 정부는 무능 결론은 각자도생

2015년 한국, 왜 ‘생존’이 화두인가

  • 정해윤 |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세상은 불안, 정부는 무능 결론은 각자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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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 프레퍼족 등장

세상은 불안, 정부는 무능 결론은 각자도생

SBS TV ‘정글의 법칙’

이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현실주의자다. 이들은 초대형 재난이나 전면전이 발생했을 때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방독면 등)을 비축하고 생존기술을 연마한다. 다음 카페 ‘생존21’, 네이버 카페 ‘서바이벌리스트’가 대표적이다.

두 번째 부류는 도참(圖讖)사상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다. 숫자는 이쪽이 훨씬 많다. 여러 전통신앙 단체나 명상 단체는 대개 비슷한 종말론적인 사상을 공유한다. 최근엔 종말이 닥쳤을 때의 생존 비결을 전한다는 커뮤니티에서 공금횡령 논란으로 카페지기가 고소되기도 했다.

세 번째 부류는 금융위기에 대비하는 커뮤니티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위기가 금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재테크보다는 현재의 자산을 닥쳐올 위기로부터 보호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둔다. 달러의 패권이 몰락하고 금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신념이다.

한국에서 프레퍼족이 등장한 것은 미국에서 프레퍼족이 등장한 것과 유사한 맥락을 지녔다. 미국에선 2001년 9·11테러로 뉴욕 한복판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정부의 무능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 2008년 금융위기로 중산층이 몰락한 것 등이 프레퍼족을 낳은 사회적 배경이 됐다. ‘아메리칸 드림’ 신화는 무너졌고, ‘언제라도 현재의 질서가 붕괴될 수 있다’는 신념은 커졌다. 여기에 2012년 마야문명 종말론 같은 종교적 색채가 더해지면서 프레퍼족이 본격 등장했다.



한국에도 북한 핵무기 위협, 세월호 참사, 메르스 같은 전염병 확산, 정부의 무능, 사상 최악의 취업난과 경제위기 같은 유사한 문제가 있다. 여기에다 다양한 형태의 자생적 종말론 신앙이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미국과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프레퍼족이 나타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생존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에 기폭제가 된 것은 지난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였다. 수백 명의 어린 고교생이 어이없이 수장되는 광경이 TV로 생중계됐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고 사회안전망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됐다. 정부는 도덕적이지도, 유능하지도 않아 보였다.

메르스 사태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의 강남’이 치명적 전염병에 뚫린 것이다. 커다란 쇼크였다. 공기로 퍼진다니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었다. 다수에게 피해를 확산시킨 일부 환자들의 이기심, 조기 차단에 실패한 정부의 무능이 재확인됐다.

결국 그다음 수순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수많은 사람이 ‘정부도 못 믿고 아무도 못 믿으니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을 생존 문제에 집착하게 한 것으로 비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점가에선 ‘재난시대 생존법’ ‘야생생존 매뉴얼’ 같은 생존 관련 책이 잇따라 출간됐고 기대 이상으로 잘 팔렸다. 특히 어린이 서적의 판매 기록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서바이벌 만화’를 표방한 ‘살아남기’ 시리즈는 무려 2000만 부 이상 팔리는 메가 히트를 기록 중이다. ‘바이러스에서 살아남기’ 편은 에볼라 바이러스의 창궐을 타고 아시아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들, 여론주도층, 언론도 불신한다. 이들의 예측이나 해석이 현실에 별로 들어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별일 아니라고 하더니 나중에 별일이 되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때부터 일부 언론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칭했다. 전문가, 여론 주도층, 언론에 대한 이런 불신 역시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이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미국 뉴올리언스의 제방이 무너졌다. 그때 미군 공병단의 한 장성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제방이 범람할 가능성은 0.5%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0.5%의 예외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제방 높이는 진도 8.3의 지진에 대비해 설계돼 있었다. 이 때문에 피해가 커졌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이 정도 제방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닥쳐온 것은 진도 9.0짜리 지진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그린스펀은 이를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로 규정했다. 1% 미만 확률의 일이 실제로 버젓이 발생한 셈이다.

정규분포곡선 맹신

국내 전문가든 해외 전문가든 왜 자꾸 틀리는 걸까.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전문가들이 정규분포곡선 맹신의 늪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은 과학 위에 세워졌고, 과학은 통계에, 통계는 정규분포곡선에 기초한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예측이 어긋난 것으로 확인된 뒤에도 여전히 ‘몇 백 년에 한 번’ 같은 수사(修辭)를 반복한다.

그러나 가끔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어떤 하나가 모든 것을 말아먹기도 한다. 이런 건 정규분포곡선으로 설명이 안 된다. 정규분포곡선은 예외적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축소해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선 이런 예외적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전문가들의 설명보다 세상은 훨씬 위험한 곳인지 모른다. 또한 생존 위기를 느끼는 대중의 무의식적 감각이 더 믿을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개인의 삶은 더 윤택해져야 하고 세상은 더 안전해져야 한다. 이것이 그동안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찰스 페로는 ‘정상적 사고(Normal Accident)’에서 “문명 자체에 내재된 요인으로 인해 대형 사고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소, 항공기, 우주탐사선, 인공지능로봇처럼 첨단 분야일수록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벌어질 위험성은 더 높아진다. 이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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