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았고 추구했고 기댔던 정의가, 가치가, 사랑하는 것들이 마치 꿈이고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부모보다 반려동물
중학생 조카는 어릴 적부터 키우던 개를 잃고 통곡하다 실신했다. 그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동생 부부는 개를 화장한 후에 선산에다 묻었다. 그래야 아이가 선산도 자주 찾을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어머니는 감정이 복잡했나보다. “세상에, 제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던 녀석이…. 피를 주고 살을 준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아지보다 못한 세상이구나!”
2045년엔 우리 어머니 같은 말을 하는 노인이 없을 것이다. 대가족 제도는 완전히 해체될 테니. 핵가족 제도도 위태로울 것 같다. 성인이 된 자식들은 부모 집에서 둥지를 틀지 않을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부모보다도 반려동물들에게 정을 줄 것이다.
2015년 이 시대, 왜 시댁에 잘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며느리가 많다. 남편이 친정식구들과는 가까이 지내기를 원하면서도, 시댁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하는 남편은 ‘불편한 효자’로 몰아붙이며 시어머니와 시댁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두통거리로 여기는 며느리들이. 이제 남자들의 반란 조짐이 보인다. “나라고 장모가 편한 줄 아니? 나도 장모와 연결되는 게 불편해”라고 말하고 싶은 남자들이. 30년 후가 되면 저런 얘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엔 시댁이든 처가든 무게감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갑자기 30년 전, 대학 다닐 때 들은 ‘사회학’ 강의가 생각난다. 당시만 해도 개발도상국이던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존재감이 없었는데, 하나도 내세울 게 없는 우리나라에 서구 노인 문제의 해법이 있다는 얘기였다. 노인 문제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건강과 빈곤, 그리고 고독! 그런데 우리의 대가족 제도는 그런 노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소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사는 노인은 고독하지 않고, 자식들이 챙겨주는 노인은 건강상의 위기를 고독한 실존의 위기로 느끼지 않으니까.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은 할아버지였고, 가장 존재감이 있는 인물은 할머니였다. 아침에 집을 나선 식구들이 오후에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대가족제에선 사람들이 나이 들수록 정신의 중심이 됐고, 힘이 붙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삶의 형태는 전설이 됐다. 오늘날 할아버지, 할머니는 식구가 아니라 ‘군식구’다. 집에서 가장 존재감 있는 인물은 아내고, 아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이다. 집의 주인은 명백히 여자다. 30년 후에도 그럴까. ‘개인주의’가 좋은 남자들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혼술, 혼밥, 혼자 사는 집
요즘 생겨난 말 중에 ‘혼술’ ‘혼밥’이란 것이 있다. ‘혼술’은 혼자 마시는 술이고, 짐작하는 대로 ‘혼밥’은 혼자 먹는 밥이란다. 이것이 우울증과 결합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30년 후엔 혼술이, 혼밥이, 혼자 사는 집이, 혼자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식품 포장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30년 후엔, 아니, 10년 후만 해도 세계적으로 자본은 더 많이 축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고용 창출로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부익부 빈익빈현상은 가속화할 것이다. 뭐든 기계가 할 테니. 기계가 사람보다 똑똑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산업혁명 이후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사람의 일자리를 기계가 빼앗았으므로. 그러나 그 기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사람 손이 필요했다. 그나마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인공지능이 발달하는데 이 속도로 가면 2045년에는 어떨까.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조짐이 보이는 것이, 지금 대부분의 일자리는 현대인을 미생(未生)으로 만든다. 3포시대, 4포시대를 거쳐 7포시대가 된 세상의 미생들이 누구를 평생 부양하겠다고 큰소리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자본의 99.9%를 0.1%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나머지 99.9%의 사람들은 대부분 알바 같은 일을 전전하며 불안과 무기력감을 안고 살 것이다.
30년 전, 불안한 젊음들은 점집을 찾아다녔다. 이제 불안한 젊음은 무기력까지 더해져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30년 후엔 심리치료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의 교회처럼 한 집 건너 하나가 심리치료실이 아닐까.
그때에는 극소수의 사람만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 것을 맹세하는 결혼을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어렵지 않게 헤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평생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결혼은 꿈꾸기 어려울 테니.
우리는 생활세계의 윤리규범을 일차적으로는 가족에게서 배운다. 무엇이 허용되며 무엇이 금지되는지, 부모에게 어디까지 바라도 좋은지. 30년 후에도 부모 재산을 내 것이라 여겨 부모의 재혼을 뜯어말리는 자녀들이 있을까. 지금은 유류분이라는 제도 덕에 부모 재산의 50%는 무조건 자식 몫이다. 그러니 자식들이, 연금만으론 생활이 넉넉지 않아 역(逆)모기지론으로 은행에서 매달 생활비를 대출받아 쓰려는 부모의 행위에까지 제동을 건단다.
자식들이 30년 후에도 그럴 수 있을까. 그때에는 성인이 된 부모와 자식은 거의 남남이 아닐까. 당연히 유류분 같은 제도도 사라질 것이고 부모들은 자기 재산 100%를 마음대로 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어디서 찾을까
30년 전 우리 세대의 부모는 자식 교육에 올인했다. 교육을 통해 중산층이 된 우리는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부모 부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마지막 세대다. 가족해체를 경험한 우리들, 부모가 된 우리 세대는 자식 교육에 신경 쓰지만 자식에게 올인하지는 않는다. 자식이 미래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부모 부양을 자식 책임이라고 떠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30년 후는? 지금의 가족들은 1년에 몇 번 만나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는 될까. 아마 자식들이 결혼이나 동거를 할 때도 자식에게 비용을 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부모는 자식의 결혼식에 초대되는 대상이 되는, 그런 정도가 아닐까. 그러면 무엇보다도 심각해질 노인 문제는 어떻게 될까. 그때 내 나이 82세, 나는 살아 있을까.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변덕스러운지. 아마도 30년 후면 지금 지지되는 윤리규범들이 거의 다 무너질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사회는 자신의 변덕을 ‘발전’으로 포장했지만, 50여 년을 살면서 나는 윤리가, 가치가, 정의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것임을 충분히 경험했다. 자본주의와 과학이 결합해 하루가 다르게 쏜살같이 변하는 이 풍진 세상은 우리를 또 어떤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 데려다놓을까.
평생 좋아하고 추구하던 가치와 윤리가 바뀌고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가 요구되는 세상이니 도덕이나 윤리나 관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 입듯 바꿀 수 있는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렇다면 내 삶을 지지해가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세상이 허방 같다. 단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생존만이 존재 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므로.
우리가 살았고 좋아했고 추구했고 기댔던 정의가, 가치가, 사랑하는 것들이 마치 꿈이고 환상이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사라져갈 때 ‘나’를 찾는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물음이 찾아들 때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전한 한 문장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철학의 정수, 내 인생의 화두였음을 깨달을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명제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