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센 들어와 ‘교통 허브’로 변모
- 개·폐회식장은 3만 석 야구장으로 개축
- 지금껏 ‛환경 파괴 개탄’ 목소리
- 올림픽과 기존 관광지 엮는 데 실패
빙상경기가 열린 M-웨이브.
손으로 면을 내는(手打) 메밀국숫집이 나가노 골목마다 자리 잡았다. 국수 삶는 냄새가 소바 집 밖으로 새어나온다. 8월 22일 나가노 홋포공원에서는 메밀국수 요리하기 체험 행사가 열렸다. 메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한 후 치대 국수를 내는 어린이의 표정이 앙증맞다. 나가노는 소바키리(そばきり·일본식 메밀국수) 발생지다. 나가노에서 맛본 소바키리는 짭조름하면서도 단 게 일품이었다.
소바키리(そばきり) 발생지
1998년 나가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지역사회에 기여한 점을 주민에게 물으니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25년 경력 택시 운전자 미즈하라 야스오 씨는 “신간센(新幹線)이 들어온 것”이라면서 엄지를 세웠다. 신간센은 일본 고속철도 명칭. 히로시 히구치 나가노시 부시장은 “신간센 덕분에 나가노가 교통의 허브가 됐다”면서 웃었다. 신간센은 도쿄-나가노를 1시간 40분에 달린다.
나가노현은 일본 열도 정중앙에 있어 ‘일본의 마음(心)’이라고 일컬어진다. 해발 3000m 넘는 고산연봉이 치솟아 ‘동양의 알프스’ ‘일본의 지붕’으로도 불린다. 혼슈(本州·일본에서 가장 큰 섬) 가운데 위치한 내륙 현으로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 중간에 위치해 일본 동서 문화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강원도처럼 여름엔 피서객, 겨울엔 스키어가 찾아온다. 면적은 1만 2598㎢로 경상남도와 비슷하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흑자, 적자를 따지는 수지타산을 기준 삼을 때 실패한 올림픽으로 손꼽힌다. “실패한 것으로 소문나는 바람에 도시 홍보 효과가 오히려 커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나가노시 관계자는 말했다. 실패했다는 평가를 듣는 까닭은 나가노현과 나가노시가 한국 돈 12조 원에 달하는 지방채를 발행해 올림픽 개최 비용을 충당했는데, 경제 효과가 예상보다 낮았으며 올림픽 이후 지방정부의 재정 운영이 어려움을 겪어서다.
나가노는 올림픽 탓에 진 빚의 상환을 2017년 마무리한다. 계획대로라면 부채를 갚는 데만 19년이 걸린 셈이다.
나가노 올림픽은 나가노시와 하쿠바무라에서 나눠 열렸다. ‘무라’는 일본 행정구역상의 기초자치단체로 촌(村)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나가노의 명물 소바키리(메밀국수).
나가노에서는 빙상·썰매 종목, 하쿠바에서는 설상경기가 치러졌다. 나가노현을 강원도라고 치면 나가노가 스피드스케이팅 등 빙상경기가 열리는 강릉, 하쿠바가 스키·스키점프·스노보드 경기를 개최하는 평창 역할을 한 것이다. 나가노와 하쿠바의 경기장은 국비, 현비, 시비를 투입해 건설했다.
8월 21일 찾은 나가노의 M-웨이브(wave)는 9월 초순부터 시작하는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올림픽 때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M-웨이브는 현재 나가노 올림픽의 상징 구실을 한다. 1997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상 경기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건물 외관이 바다의 물결을 닮았다 해 wave(파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짓는 데 한국 돈 4524억 원이 들었다.
M-웨이브는 올림픽 이후 활용과 관련해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겨울철에는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봄~가을에는 전시회장, 콘서트홀 등으로 활용된다. 유키오 마쓰모토 나가노시 문화스포츠진흥국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가노는 오랫동안 컨벤션 도시를 지향해왔다. M-웨이브에서 전람회가 열리면 숙박시설이 동이 난다. M-웨이브는 콘서트 때 2만 명을 수용한다. 공연, 전람회가 열리는 M-웨이브와 지역경제가 시너지를 낸다. 올림픽을 계기로 건설된 신간센과 숙박시설이 컨벤션 산업에 도움을 준다.”
나가노는 M-웨이브를 지으면서 사후 활용 문제를 최우선에 뒀다.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는 2주간만 열리므로 올림픽이 끝난 후 용도 변경을 쉽게 하고자 관람석을 고정식이 아닌 이동식으로 설계했다.
M-웨이브(왼쪽)는 봄~가을 전시회장, 콘서트홀로 활용된다. 나가노역엔 올림픽을 계기로 신간센이 들어왔다.
골칫거리 된 썰매경기장
나가노는 M-웨이브의 운영을 민간기업에 위탁했다. 적자든 흑자든 운영을 맡은 기업이 떠안는다. 매년 한국 돈 70억 원의 운영비용이 소요된다고 한다. 위탁 관리를 맡은 ㈜M-웨이브 관계자는 “겨울철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스링크, 봄·여름·가을에는 다채로운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면서 “매년 흑자가 난다”고 말했다.
나가노 인구는 37만7000명, 강릉 인구는 21만6800명이다. 나가노가 강릉보다 인구가 많기는 하지만, 강릉에 짓는 빙상경기장들의 사후 활용 문제와 관련해 M-웨이브에서 참조할 점이 있어 보였다. 강릉은 나가노와 달리 해변을 꼈다는 매력이 있다.
나가노에 남아 있는 올림픽 시설은 M-웨이브와 썰매경기장(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 ‘스파이럴(Spiral)’,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개최한 ‘화이트링(White Ring)’, 남자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린 ‘빅햇(Big Hat)’, 여자 아이스하키 경기를 개최한 ‘아쿠아윙(Aqua Wing)’, 개·폐회식이 열린 나가노올림픽스타디움이 있다.
M-웨이브에 4524억 원, 스파이럴에 1010억 원, 화이트링에 1883억 원, 빅햇에 2496억 원, 아쿠아윙에 1183억 원의 건설비용이 투입됐다. 국비 50%, 현비 25%를 지원받았으나 인구 37만 7000명의 나가노시는 올림픽 이후 부채를 갚느라 재정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M-웨이브를 제외하면 투입 및 운영비용 대비 산출 효과는 실망스럽다. 루지 경기 등이 열린 썰매경기장이 특히 골칫거리다. 얼음, 배수관 유지비 등으로만 연 2억 엔(19억3500만원)을 투입하는데, 썰매 종목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낮아 시설 활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위탁 운영을 맡을 민간기업도 구하지 못했다.
나가노올림픽스타디움은 올림픽이 끝난 후 야구장으로 개축됐다. 고교야구, 사회인야구 등 아마추어 경기가 열린다. 중앙 122m, 좌우 99.1m, 3만 석 규모로 서울 잠실야구장(2만6000석)보다 좌석 수가 많다. 최대 수용 인원은 5만 명에 달한다. 일본프로야구(NPB) 올스타전이 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만석을 채운 적이 없다. 2만 명을 수용하는 M-웨이브와 달리 야구장은 콘서트 등의 용도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인구 37만 명의 도시에서 3만~5만 명이 모이는 행사를 기획하기는 쉽지 않다.
개·폐회식장이 들어서는 평창의 인구는 4만3700명에 그친다. 평창의 개·폐회식장도 애물단지로 전락할 소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썰매경기장은 운영을 맡겠다고 나선 사업자가 없어 나가노시가 직영하는데, 수익사업을 벌여 비용을 뽑아낼 뾰족한 방책이 없다. 스켈레톤, 루지, 봅슬레이 등 인기가 낮은 동계 스포츠 저변 확대에 기여한다는 구실로 시설을 유지하는 형편이다. 일본 국가대표 썰매팀이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운영비용의 50%를 국비에서 지원받는다.
해발 1000m에 위치한 스파이럴은 아시아 유일 썰매 종목 경기장이다. 8월 22일 스파이럴은 찾아온 이가 없어 적막했다. 아시아 유일 썰매경기장이라는 명분을 가졌으나 올림픽 개최 후 철거하는 형태로 짓는 게 옳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평창에 짓는 썰매경기장(슬라이딩센터)은 스파이럴과 함께 아시아 유이(唯二) 썰매경기장이 된다.
스키점프대에서 내려다본 인구 9000명의 하쿠바 전경.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린 빅햇은 중절모 모양의 외관을 뽐낸다. 12~2월에는 아이스하키장 및 빙상장, 3~11월에는 다목적홀로 활용한다. 아쿠아윙은 수영장으로 개축했으며 화이트링은 체육관으로 사용한다. 나가노 시민들이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시설이 훌륭한 체육관, 수영장, 다목적홀을 이용하게 됐다고 하겠다.
빅햇, 아쿠아윙, 화이트링을 운영하는 민간기업에 나가노시가 보조금을 지급한다. 보조금을 가장 적게 받고 운영하겠다고 나선 곳이 사업권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설상경기장과 달리 빙상경기장은 건설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유지, 보수비용도 만만찮다.
설상경기가 열린 하쿠바에서는 스키점프대를 제외하면 올림픽이 남긴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스키점프대에서 내려다본 하쿠바는 동화책 속 산간마을 같은 느낌을 줬다.
하쿠바는 인구 9000명의 촌(村)이다. 올림픽 개최 후광으로 인한 특수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불황으로 인구가 오히려 감소했다. 하쿠바의 올림픽 기념관은 찾는 이가 없어 수년 전 폐쇄됐다.
하쿠바에서 료칸(일본식 여관)을 운영하는 모모이 이치로 씨는 “올림픽 전후로 특수를 기대하고 소바를 내는 집이 우후죽순 생겼는데 대부분 망해 나갔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쿠바는 2000가구 남짓이 숙박, 음식, 특산품 판매 등 관광업으로 먹고산다. “올림픽 이후 호주 관광객은 늘었다”고 모모이 씨는 말했다. 호주가 여름일 때 일본은 겨울이어서 호주 스키어들이 하쿠바를 찾는다고 한다. 평창도 호주나 중국의 스키 관광객을 대상으로 올림픽 이전부터 프로모션을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쿠바의 핫포네 스키장은 13개 슬로프를 갖췄다. 가라마쓰다케(2696m)의 동쪽 능선에 터를 잡았다. 민간이 운영하는 스키장에 국비, 현비를 투입해 확장 공사를 한 후 올림픽 때 사용했다. 남녀 활강과 점프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산(山), 눈(雪)이 많은 일본에서 스키 리조트로서 하쿠바의 약점은 볼거리, 체험 거리가 빈약한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올림픽 후광효과로 일본 국내 관광객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리라는 나가노현의 전망은 기대에 크게 어긋났다. 선수촌과 VIP숙소 등은 외국자본에 매각됐고 주민이 운영하는 숙박시설 매출은 오히려 감소했다. 평창은 하쿠바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 3대 절 중 하나인 젠코지(善光寺)와 사찰 입구에 늘어선 상점.
일본 정부와 나가노현, 나가노시는 올림픽 개최에 28조1751억 원을 투입했다.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나가노 올림픽은 앞서 언급했듯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나가노경제연구소는 투입 비용 대비 1.53배의 파급 효과가 있었다고 밝히지만, 경제 유발 효과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측정되게 마련이다. 나가노현과 나가노시는 부채를 갚느라 복지 지출을 줄이고 공공요금을 인상했다.
히로시 부시장은 “신간센이 들어왔으며, 고속도로가 확장됐고, 경기장 시설이 인프라로 남았다는 점에서 성공한 올림픽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림픽 때 자원봉사에 참여하면서 시민의식이 높아진 것, 나가노가 실력 있는 동계 스포츠 선수를 대거 배출하는 것도 성과”라고 그는 덧붙였다.
“올림픽 때문에 관광객이 크게 늘지는 않았다”고 히로시 부시장은 말했다. 올림픽과 관광산업 중흥을 엮어내지 못한 점은 비판받는 대목이다.
나가노는 올림픽과 기왕의 관광지를 효율적으로 연계하지 못했다. 일본 3대 사찰 중 하나인 젠코지(善光寺)가 나가노시에 있다. 해마다 600만~700만 명이 이 사찰을 찾는다. 1970년대 미국 사진잡지 ‘라이프’에 실린 후 세계적 명소가 된 ‘지옥계곡 원숭이 온천(지고쿠다니 야엔코엔)’도 나가노현에 있다. ‘온천욕 하는 원숭이들’로 유명한 곳이다. 젠코지, 지고쿠다니 야엔코엔은 올림픽 효과를 크게 누리지 못했다. 번잡한 한국 스키장을 피해 ‘대통령 스키’를 타려 나가노로 원정을 떠나는 한국인이 없지 않으나, 한국에서 발행된 여행 책자에 나가노가 소개된 경우는 거의 없다. 평창과 강릉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사라진 천년림
올림픽으로 인한 환경파괴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지금껏 나오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스키 경기를 위해 천년림(千年林)을 베어낸 탓이다. 일본 NGO ‘올림픽 필요 없는 사람들 네트워크’는 “나가노가 올림픽 이후 환경 훼손 문제로 골치를 썩는다. 평창의 경우도 현재처럼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일으키고 사후 활용 대책 없이 경기장을 지으면 나가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평창올림픽 스키 활강 경기는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에서 열린다. 스키장 공사 탓에 수많은 나무가 시체처럼 나뒹군다. 수백 년을 산 나무를 베고 스키장을 지어 활강 경기를 치르기로 결정하고 공사에 들어간 만큼 부지를 다른 곳으로 되돌릴 수는 없겠으나 자연 복원과 관련한 대책에 만전을 기해야 후대에 욕을 먹지 않을 것이다.
히로시 부시장은 “스키 알파인 및 썰매경기장 건설 당시 나가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주민 의견을 일일이 들어가면서 설득했다. 양해를 얻지 못한 경우엔 계획을 변경해 다른 곳에 경기장을 지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