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더 이상 피아트(Fiat)가 아니다”
- 로마, 피렌체, 베니스 다음으로 관광객 많아
- 아이스링크 뜯어내고 전시관, 콘서트장, 파티장…
- “평창이 가진 게 뭔지부터 찬찬히 살펴라”
토리노의 중심, 산 카를로 광장. 1650년에 완성된 곳으로 성당과 왕궁 등 중요 건축물이 카페, 부티크 등과 어우러져 있다.
국도를 빠져나와 A4번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오른쪽 차창 너머로 알프스 산봉우리들이 길게 늘어선 풍경이 펼쳐진다. 2006년 토리노 시내에선 빙상경기가, 토리노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알프스 산자락에선 설상경기가 열렸다.
토리노는 올림픽 전과 후로 나뉜다. 1899년 이탈리아 최초의 자동차 회사 피아트(Fiat)가 토리노에 세워진 이후 ‘피아트의 도시’로 통했지만, 올림픽을 계기로 관광도시로 거듭났다. 미슐랭 가이드는 토리노에 대한 평가를 ‘들러볼 만한 곳(worth the detour)’에서 ‘꼭 가볼 만한 곳(worth a trip on its own)’으로 격상했다. 토리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피렌체, 베니스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4대 관광도시 반열에 올라 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당시 설상 종목 선수들의 숙소가 마련됐던 세스테리에는 지금도 겨울스포츠 리조트로 인기가 높다(왼쪽). 토리노를 대표하는 건축물 몰레 안토넬리아나(가운데)를 위시한 토리노 시내.
“올림픽이 토리노가 변화하는 기폭제가 됐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우리의 노력과 함께 천천히 나타났어요. 하루아침에 인기 관광도시로 환골탈태한 건 아닙니다.”
‘전략의 토리노(Torino Strategica)’ 사무실에서 만난 발렌티노 카스텔라니 전 토리노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략의 토리노’는 2000년 그가 주도해 만든 협회로, 도시 재생 전략을 짜고 실천한다. 현재 대표는 피에로 파시뇨 토리노 시장이고 그는 부대표를 맡고 있다. 정부 기관과 기업, 대학, 각계 전문가들이 파트너로 참여한다. 토리노는 도시 재생의 수단으로 올림픽을 유치했기에 이 기관과 올림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90년대 들어 피아트가 생산시설을 이탈리아 남부 및 국외로 옮겨가면서 토리노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실업자가 늘고, 빈집이 생기고, 도시 시설물들은 낙후된 채 방치됐다. 이에 토리노는 2006년 동계올림픽을 유치, 이를 계기로 공항, 철도, 도로 등 도시 기반시설을 새롭게 단장했다. 지하철도 깔았다.
올림픽 시설물 역시 되도록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마련했다. 과거 피아트 공장지구이던 링고토(Lingotto)를 개보수해 쇼핑몰, 콘퍼런스센터, 호텔, 교육기관 등을 입주시키면서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링고토 오발(Lingotto Oval)도 이곳에 마련했다. 개·폐회식장으로 쓰인 올림픽 스타디움은 1933년 지어진 축구경기장을 개조한 것으로, 올림픽 이후엔 다시 프로축구단 AC 토리노의 홈구장으로 활용한다. 피겨·쇼트트랙 경기장인 팔라벨라(Palavela)도 1961년 건설된 박람회장을 개보수한 시설이다. 이러한 기간시설 및 경기장 마련 등에 10억2300만 달러(1조2000억 원)가 투입됐다.
올림픽 이후 토리노는 먼저 이탈리아인들이 주목하는 여행지가 됐다. 그리고 점차 외래 관광객을 확대해가는 중이다. 마르셀라 가스파르돈 토리노관광청 마케팅 책임자는 “올림픽 이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관광객이 두 배로 늘었다”며 “해외 관광객은 30~40%로 유럽인이 다수이지만 미국, 일본, 중국 등에서 오는 여행자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토리노를 관광명소로 ‘재발견’ 했습니다. 낙후된 자동차 공장 말고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거죠.”
그는 토리노를 “나이 든 귀족부인”에 비유했다. 토리노의 역사는 기원전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토리노를 침략했고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1861년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가 됐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토리노 도심을 비롯해 도시 외곽에는 왕궁과 성당, 교회, 왕실의 별장 등 유서 깊은 건축물이 많다.
토리노는 라바자, 페레로로셰, 누텔라 등을 배출한 커피와 초콜릿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토리노가 속한 피에몬테 주(州)는 이탈리아의 주요 와인 생산지다. 카이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집트 박물관, 피아트가 세운 자동차박물관, 국립영화박물관도 있다. 가스파르돈 씨는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가 이렇게 많은 관광자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이를 잘 활용하면 관광도시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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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경기장에서 콘서트장으로 변신한 팔라올림피코 내부(위). 토리노는 헤이즐넛초콜릿을 처음 개발한 유럽 초콜릿의 원조로 명성이 높다.
“바로 여기가 U2가 공연한 곳이에요. 11월에는 마돈나 콘서트가 사흘간 열립니다.”(레이첼 벤코 팔라올림피코(Palaolimpico srl.) 마케팅 담당자)
석 달간의 미주 투어를 마치고 9월부터 유럽 투어에 나선 세계적 록그룹 U2가 택한 첫 번째 무대는 토리노였다. 지난 9월 4일과 5일, U2는 올림픽 때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신설된 팔라올림피코에서 무대에 섰다. 벤코 씨는 “1만5000명을 수용하는 관중석이 공연 내내 꽉 찼다”며 “관객들은 토리노뿐만 아니라 밀라노, 프랑스에서도 왔다”고 전했다.
토리노의 몇몇 올림픽 시설물은 올림픽이 끝난 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활발하게 활용될 뿐만 아니라 토리노 관광산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팔라올림피코다. 팔라올림피코는 올림픽이 끝난 뒤 아이스링크를 뜯어내고 콘서트, 전시회, 컨벤션 등의 용도로 개조됐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360건 이상의 행사를 치렀고, 20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2009년에는 글로벌 콘서트 기획회사 라이브 네이션(Live Nation)이 주요 주주로 참여, 대형 콘서트 유치에 적극 나섰다. 지난해에는 이탈리아 최대 여행사 알피투어(Alpitour)와 파트너십을 맺고(이에 따라 3년간 ‘팔라 알피투어(Pala Alpitour)’로 간판을 바꿔 단다), 주요 행사와 여행 산업 간의 시너지를 꾀하고 있다. 벤코 씨는 “시설물이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한 데다, 고객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실현해 주려는 노력 덕분에 고객이 나날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며칠 후에는 로비에서 웨딩박람회가 열린다고 했다. 로비 천장을 보니 콘서트장에 있을 법한 대형 조명시설이 설치돼 있었다.
피겨 및 쇼트트랙 경기장 팔라벨라도 아이스 스케이트장 및 각종 이벤트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링고토 오발도 링고토 피에레(Lingotto Fiere)로 이름을 바꾸고 전시관, 쇼핑몰, 콘서트장 등 다목적 현대복합물로 이용된다.
피아트 공장이 있었던 링고토는 올림픽을 계기로 쇼핑몰, 호텔,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등으로 개보수됐다.
하지만 모든 시설물이 사후 활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을 선정하는 등 심혈을 기울인 올림픽 빌리지의 일부는 난민들에게 무단 점거됐고, 봅슬레이 등 설상경기 시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카스텔라니 전 위원장은 “설상경기 시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국가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데, 이탈리아는 이 점에서는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 세계 어디든 설상경기 시설은 사후 활용도가 낮아 적자에 허덕인다”며 “4년마다 올림픽 개최 도시에 이런 시설을 새로 짓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올림픽이 토리노 지역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올림픽으로 지역 발전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토리노는 잘 알고 있다. 유럽의 여타 도시와 마찬가지로 토리노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이런 배경에서 토리노는 지금도 도시 재생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현재 3차 전략(Torino′s third Strategic Plan)을 통해 2025년까지 29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1차 및 2차 전략을 올림픽 전후로 진행했다), 핵심은 토리노와 토리노를 둘러싼 38개 지방도시를 하나로 통합해 인구 150만 명 이상의 광역시로 만드는 일이다. 1차와 2차 전략이 토리노에만 집중됐다면, 앞으로는 그간 차별받은 주변 지역으로 ‘성장의 결실’을 나누겠다는 것. ‘전략의 토리노’ 사이먼 망길리 프로젝트·운영 책임자는 “이는 토리노가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도시로 한 단계 더 발돋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정체성 모색
“올림픽을 통해 토리노는 ‘우리는 더 이상 피아트가 아니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이제 다음 질문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냐’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관광도시가 그 하나가 될 수 있고, 토리노가 보유한 우수 대학과 기업을 바탕으로 하이엔드 테크놀로지 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토리노와 그 주변 지역이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내고 공유하는 일, 그것이 올림픽 개최 10년을 맞는 토리노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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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의 벤치마크, 코르티나담페초
1956년 동계올림픽 후 지속적 재투자로 관광명소化
평창은 인구 100만의 산업도시 토리노보다는 코르티나담페초(Cortina d’Ampecho)와 더 닮았다. 코르티나담페초는 이탈리아 동북부 알프스 산악지대 돌로미테(Dolomite)의 마을로, 높다랗게 솟은 산군(山群) 사이에 자리해 태백산맥에 둘러싸인 평창과 정선, 태백 등을 떠올리게 한다.
기자가 코르티나담페초를 찾아간 9월 하순은 1년 중 가장 한가로운 때다.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전 세계 스키어들이 모여들고, 여름에는 트레킹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마을은 북새통을 이룬다. 산 중턱까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도 9~10월에는 대개 운행을 중단한다. 하지만 9월에 유일하게 운행되는 라가주이(Lagazuoi) 케이블카를 타러 온 관광객은 적지 않았다. 케이블카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가 줄지어 있었다.
코르티나담페초는 1956년 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겨울스포츠 및 트레킹 명소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은 컬러 화면으로 중계된 최초의 올림픽으로, 전 세계인은 TV를 통해 석회암 산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은 돌로미테 절경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인구가 6000명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숙박시설을 갖췄다. 코르티나관광청의 마리안 모레티-아디마리 마케팅 담당자는 “코르티나를 찾는 내국인과 외국인 비율은 반반”이라며 “최근에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 영화가 코르티나에서 촬영돼 이스라엘 관광객도 많이 늘었다”고 했다.
현재 코르티나에 남아 있는 올림픽 시설물은 올림픽 스타디움과 스키점프대뿐이다. 올림픽 스타디움은 현재도 스케이트, 아이스하키, 컬링 경기장 등으로 활용되지만, 스키점프대는 이용자가 없어 오래전에 폐쇄됐다. 다만 착지 지점에 축구장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이 사용한다. 최근에는 올림픽 스타디움에 지붕을 씌우는 공사를 완료했다. 올림픽 스타디움 관리를 맡은 안토니오 콜리 씨는 “올림픽 스타디움 운영이 적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올림픽은 절대 잊힐 수 없는 코르티나의 역사이기에 계속 활용 방안을 모색하며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1956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코르티나의 올림픽스타디움은 현재도 아이스하키 경기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용된다.
발레리오 타바치 코르티나관광청장은 “지난여름 슬로바키아에 사는 많은 한국인이 코르티나를 방문했다”며 “왜 별것 없는 슬로바키아에 사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삼성전자와 기아자동차 직원들이었다”며 웃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에도 스키 리조트가 많다.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까지 스키 타러 올 이유가 있을까.
“물론 있다. 알프스를 낀 유명 스키 리조트 12개가 연합한 ‘베스트 오브 알프스(Best of the Alps)’란 게 있는데, 코르티나는 유일한 이탤리언 멤버다.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과 낙천적이고 친절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있는 스키 리조트는 코르티나가 유일하다. 눈과 슬로프만 있다고 스키 리조트가 성공하는 게 아니다. 차별화된 문화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일본 나가노로 스키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가노에 온천과 따끈한 우동 국물이 있기 때문이다.”
▼ 유럽이 오랫동안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다. 코르티나도 그 영향을 받는가.
“유럽인들의 여행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에 고객층을 다양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일본, 중국, 러시아, 남미 등 새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그 한 예다. 물론 한국도 우리의 중요 타깃이다. 내년 6월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국제관광전에 참여하려 한다.”
▼ 올림픽이 개최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관광지로서의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은.
“끊임없는 재투자다. 올림픽 이후 줄곧 시설들을 고치고 늘려왔다. 공공 영역에서 매년 2000만 유로(약 260억 원)가량을 투자하고, 민간 영역에서도 자체적으로 계속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올림픽 이후 스키장 규모가 2배가 됐다.”
▼ 평창도 올림픽 이후 인기 관광지로 거듭나려 하는데….
“차별화된 문화를 발굴하고 발전시키길 바란다. ‘코리아’ 하면 ‘삼성’은 생각나지만 ‘스키’는 떠오르지 않는다. 스키와 한국만의 문화를 어떻게 결부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관광홍보용 홈페이지를 한국어로 만들고 나서 그걸 세계 각국어로 번역하는 형식을 지양하기 바란다. 한국이나 일본 웹사이트는 텍스트 위주인데, 서양 사람들은 글은 잘 안 읽고 사진 위주로 본다. ‘두바이360’(www.dubai360.com)이라는 관광홍보사이트에 들어가면, 두바이 시내를 360도 회전하며 볼 수 있게 해놨다. 한국인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나. 이걸 활용해 이미지 중심의 SNS 마케팅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아울러 겨울스포츠가 발전한 다른 관광지와 파트너십을 맺기를 권한다. 코르티나와 평창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공동 마케팅을 통해 윈-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