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펙(specification, 어학점수 등 평가에 참고되는 능력들) 쌓기’는 청년 구직자만 짊어진 짐이 아니다.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스펙 쌓느라 허덕이는 이가 많다.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과외를 받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인생은 시험, 숙제,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내세울 스펙 없는 평범한 여성의 삶을 다룬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대입 재수학원 영어수업이 아니다. 오전 7시, 대기업 IT(정보통신기술) 직군에서 근무하는 5년차 직장인 박모(32) 씨가 영어학원에서 토익 문법 강의를 듣는 광경이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일주일에 세 번, 회사 출근 전인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동안 토익 수업을 듣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8시 반 출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하고 상사에게 보고하고 회의에 참석한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업무를 마치고 귀가하면 보통 오후 10시다. 몸을 누이기 무섭게 아침이 찾아온다. 언제부턴지 그는 서류가방에 늘 학원교재를 넣고 다닌다.
취미도 ‘불금’도 몰라요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인해 근무시간에 졸고 자꾸 멍해진다. 업무에서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박씨는 “결재 서류에 실수하는 바람에 부장에게서 ‘정신 똑바로 차려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주말엔 커피전문점에서 인터넷 강의로 ‘컴퓨터 활용능력 평가’ 수업을 듣는다. 그뿐만 아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유기견 봉사활동 단체에서 봉사해야 한다.
박씨가 이런 삶을 사는 이유는 다가오는 진급 심사 때문이다. 다른 여러 대기업처럼 그의 회사도 토익 점수를 진급 심사에 반영한다. 그의 토익 점수는 2년 유효기간이 끝나 점수를 갱신해야 한다.
박씨는 “공인 영어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 취득하지 못하면 진급이 아예 불가능하다. 업무실적 외에 컴퓨터 활용 능력과 봉사 실적도 승진이나 연봉 협상 자료로 이용돼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취업과 함께 스펙 쌓기 전쟁에서 해방된 줄 알았는데 달라진 게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취업 후 여행과 취미활동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기대했더랬다.
요즘 이렇게 취업하고 나서도 원치 않는 스펙 만들기 압박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한 사설 교육기관이 직장인 614명을 무작위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88.8%는 자기계발을 위한 학습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학습 목적이 ‘승진과 업무역량 강화’라고 답했다. 이제 직장인에게 스펙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수단이 되고 있다.
건설회사 신입사원 홍모(28) 씨는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소방전기기사 자격증 스터디에 참여하기 위해 종로로 향한다. 홍씨는 취업하면 남들처럼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취업 준비생 때처럼 공부의 연속이었다.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살려 회사에서 플랜트 설계 및 시공 부문에 들어갔다. 그는 이미 전기기사, 전기공사기사 자격증을 따놨다. 그런데 입사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회사는 그에게 소방·통신 분야도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는 소방전기기사 자격증을 따고 나면 통신기사 자격증도 취득해야 한다.
학습지 과외받는 어른들
영어·컴퓨터·봉사가 직장인 승진을 위한 3종 세트라면, 요즘은 중국어도 필수과목 대열 진입을 맹렬히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커진 점,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어난 점, 중국인이 대체로 영어나 한국어를 못하는 점 때문에 여러 기업에서 ‘중국어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직장인이 뒤늦게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린다. 최근엔 직장인 대상 중국어 개인과외가 붐을 이룬다. 과외 선생님은 주로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중국인 유학생이나 중국동포 등이다. 이들은 회사 부근 카페 등 직장인이 원하는 장소로 가서 학습지 같은 것을 펴놓고 1대 1로 중국어를 가르친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이모(29·여) 씨는 출근 직전, 퇴근 직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중국어를 공부한다. 회사에서 이씨에게 “영어만 잘해선 안 된다.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나니 중국어도 좀 익혀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이씨는 처음 접하는 언어이고 한자도 잘 몰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녀는 학습지 과외를 선택했다.
이씨는 “이제 학습지 과외는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많은 직장인이 중국어 학습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됐다”고 전했다. 학습지 과외의 장점은 유연한 시간 활용.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학습지 선생님이 회사 근처 카페로 온다. 학원에 갈 수고를 덜 수 있고 상대적으로 비용도 저렴하다”는 것이다.
한 중국어 학습지 업체 관계자는 “‘직장인을 위한 빨간펜 선생님’이랄까. 최근 직장인 고객이 부쩍 늘고 있다. 기업에서 중국어가 가능한 인재를 선호하는 데다 실제 회사 업무에서도 중국어 활용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한 어학원의 토익 수업 광경.
석사 학위도 이제 웬만한 직장인에겐 스펙 리스트에 필수로 올려놓아야 할 항목이 되고 있다. 많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장려한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마당이라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직장인 스스로 학위 취득에 매달린다. 서울시내 평판이 좋은 대학의 야간대학원(특수대학원)엔 직장인 수강생이 넘쳐난다. 일부 직장인은 낮에 수업하는 일반대학원으로 향하기도 한다.
공기업 4년차 연구원 장모(34) 씨는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다. 이미 다른 분야의 석사학위를 갖고 있지만 MBA 학위가 있으면 승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장씨가 다니는 공기업에선 석사학위 취득 바람이 거세다고 한다. 그는 “우리 회사에선 학위가 승진 심사 때 반영된다. 승진에 욕심 있는 사람치고 대학원에 관심 없는 사람이 드물다”고 말했다.
한 온라인 취업 커뮤니티 관계자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어학이나 전문 영역 강좌를 듣는 직장인도 많다. 주로 이어폰으로 강의를 듣기만 한다. 출·퇴근 시간이 길수록 공부 시간이 길어진다. 모바일 러닝 시장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회사에선 골프도 승진을 위해 갖춰야 할 스펙 항목에 추가된다. 업무 성격상 외부 사람들과의 친분이 중시되는 홍보, 대관(對官), 영업 관련 부서가 주로 해당된다. 공기업 4년차 직원 김모(29·여) 씨는 퇴근 후 집 근처 골프 연습장을 찾는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개인 레슨을 받는다. “우리 회사는 대관 업무가 많으니 골프를 익혀두는 게 어떨까?”라는 직장 상사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한다. 김씨는 “공이 잘 안 맞고 힘도 들지만 필드에서 공무원들과 함께 어울릴 수준은 되도록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했다.
‘묻지마 취직’ 후 이직하려니…
스펙은 비단 승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직할 때도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직장인이 이직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온라인 취업포털의 지난 2월 조사에 따르면 1년차 신입사원의 72.8%가 이직을 고민한다. 업무, 급여, 복리후생에 대한 불만 탓이다. 많은 젊은이가 극심한 청년실업난 탓에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심리로 입사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이런 곳에 내 인생을 묻어야 하나?’ 싶다. 이직을 준비하는 직장인이 많아지는 이유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직을 위한 스펙을 마련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대기업 물류 부문에서 일하는 2년차 직장인 이모(28) 씨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는 금융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매일 저녁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강의가 끝나면 새벽까지 자기소개서를 쓴다.
이씨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좀 더 안정적인 금융 공기업 입사에 도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추석 연휴도 도서관에서 보냈다. “10월에 원하는 금융 공기업 시험이 몰려 있어 연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온라인 취업준비 커뮤니티에 따르면, 직장인이 참여하는 단기 스터디 그룹이 많다. 이들 그룹에서 직장인들은 자기소개서를 서로 첨삭해주거나 공채시험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스펙이 음식 재료라면 자기소개서는 이들 재료를 잘 지지고 볶아서 내놓는 완제품 요리다. 스펙과 자기소개서는 서로 의존적인 불가분의 관계다.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직장인은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올해 광고회사에 입사한 S(25) 씨도 요즘 자기소개서 첨삭에 정성을 쏟는다. 그는 취업의 기쁨을 접어두고 선망하는 회사의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취업난을 의식해 너무 조급하게 입사한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낼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의 임희수 연구원은 “극심한 청년실업이 ‘묻지마 취업’을 부르고, 묻지마 취업이 직장인의 이직 준비와 스펙 쌓기를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중·장년도 ‘스펙 전쟁’으로
중·장년층 직장인도 스펙 쌓기에서 열외인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40~50대 직장인이 퇴직 후 재취업 혹은 노후 준비를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전문 영역 강좌를 듣는다.
중소기업 임원 전모(53) 씨는 3년간 중국어를 공부한 끝에 얼마 전 중국어 능력 검정시험(HSK) 5급을 땄다. 또한 서울시 산하 복지센터에서 도슨트(docent) 양성 강좌를 듣고 있다. 도슨트는 전시회나 미술관에서 작품과 작가에 대해 관람객에게 설명하는 직종. 전씨는 회사에서 재무와 영업을 맡고 있는데, 중국어와 예술은 그의 현재 업무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는 “순탄하게 임원이 된 게 아니다. 퇴사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언제 퇴사 통보가 올지 모른다. 제2의 인생을 미리 준비해놓는 차원에서 관련 스펙을 쌓고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층을 겨냥한 취업 박람회나 창업 설명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증가하는 추세다. 9월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중·장년 채용한마당’ 박람회장에는 중·장년 구직자 7000여 명이 몰렸다. 이들의 구직 열기는 20대만큼이나 뜨겁다.
요즘 직장인들의 스펙 쌓기는 자기계발 차원을 넘어 ‘전쟁’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들은 잦은 야근과 회식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공부할 짬을 낸다. 아침의 단잠과 주말의 휴식도 포기한다. ‘저녁이 있는 삶’은 당연하게 물 건너간다. 대신 과중한 업무에 과중한 학업이 더해진다. 그래도 무쇠로 만든 사람처럼 이겨낸다.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도 줄인다. 이들은 과연 행복한 걸까. 유행하는 광고 문구처럼, ‘격렬하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조금 더 잘사는 길이 아닐까.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은 취업한 뒤에도 무한경쟁이다. 경쟁할 수단으로 스펙을 쌓는 것이니 그 과정의 성취감이나 행복감이 과연 얼마나 높을까 싶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아성취’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