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가와 출판계에선 생존을 모티프로 삼은 프로그램이나 책이 잘나간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이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취업 절벽’과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면서 젊은 층이든 중·장년층이든 ‘살아남는 문제’를 늘 고민하게 됐다.
SBS ‘정글의 법칙’은 지난 4년간 금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문명과 차단된 오지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해결하는 게 전부다. 방송 초기에는 김병만의 개인기에서 인기의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멤버들이 계속 바뀌는데도 인기가 지속되면서 ‘기획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다른 채널에서도 인기다.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는 전국의 은둔 기인을 찾아서 함께 생활하는 내용이다.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개국 초창기부터 방영 중이다. SBS의 ‘생활의 달인’에서는 서바이벌 프로의 인기에 부응해 ‘생존의 달인 무인도편’을 방영하기도 했다.
정글의 법칙, 서바이벌 캠핑
이런 프로그램의 원조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Man vs. Wild’이다. 국내 시청자들도 꽤 즐겨 봤다. 진행자 베어 그릴스(Bear Grylls)는 영국 특수부대 출신으로 칼 한 자루만 쥐고 세계 곳곳의 오지를 찾아 스스로 살아간다. 9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러닝 와일드 위드 베어 그릴스(Running Wild With Bear Grylls)’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알래스카에서 곰이 먹다 남긴 연어를 씹어 먹었다.
10월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마션’은 화성에 표류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를 다룬다. 한국에서 하루 만에 관객 53만 명을 끌어 모으며 흥행몰이에 나섰다. 우리 관객들은 맷 데이먼의 ‘화성에서 살아남기’에 큰 흥미를 보인다. 지구 대기권 밖 고장난 우주정거장에서 산드라 블록이 살아 돌아오는 과정을 다룬 또 다른 할리우드 영화 ‘그래비티’도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윤진이 무인도에 불시착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 미국 드라마 ‘로스트’, 인류문명이 멸망한 뒤 일부 생존자들이 걸어 다니는 시체들과 맞서 살아남기 투쟁을 벌이는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도 한국에 꽤 많은 고정 팬을 두고 있다.
국내 여러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 가수들이 노래 실력을 겨뤄 즉석에서 우열을 정하는 가요 프로그램은 ‘음악’에다 ‘생존’을 결부시킨 기획이다. 매회 살고 죽는 과정의 드라마틱한 요소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존 개념은 대중문화의 차원을 넘어 현실세계의 소비로 이어진다. 캠핑 붐에서 한발 나아가 익스트림(극한) 스포츠로서의 서바이벌 캠핑의 인기가 그것이다. 여기엔 사람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로 비포장길을 달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손도끼로 장작을 패고 모닥불을 피운다. 난로 대용이다. 삽으로 임시 쉼터를 만든다. 석쇠에 고기를 굽는다. 등산용 칼로 웬만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이런 점들이 마니아를 매료시킨다. 최근 서바이벌 캠핑은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홈쇼핑에선 서바이벌 캠핑 관련 용품들이 별도로 판매된다.
세상을 멸망시킬 재난이나 사건이 곧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종말의 날이 왔을 때 살아남기 위해 대비하는 사람을 프레퍼족(Prepper族, 준비족)이라고 한다. 최근 국내에선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프레퍼족이 활동하고 있다.
韓美 프레퍼족 등장
SBS TV ‘정글의 법칙’
두 번째 부류는 도참(圖讖)사상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다. 숫자는 이쪽이 훨씬 많다. 여러 전통신앙 단체나 명상 단체는 대개 비슷한 종말론적인 사상을 공유한다. 최근엔 종말이 닥쳤을 때의 생존 비결을 전한다는 커뮤니티에서 공금횡령 논란으로 카페지기가 고소되기도 했다.
세 번째 부류는 금융위기에 대비하는 커뮤니티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위기가 금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재테크보다는 현재의 자산을 닥쳐올 위기로부터 보호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둔다. 달러의 패권이 몰락하고 금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신념이다.
한국에서 프레퍼족이 등장한 것은 미국에서 프레퍼족이 등장한 것과 유사한 맥락을 지녔다. 미국에선 2001년 9·11테러로 뉴욕 한복판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정부의 무능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 2008년 금융위기로 중산층이 몰락한 것 등이 프레퍼족을 낳은 사회적 배경이 됐다. ‘아메리칸 드림’ 신화는 무너졌고, ‘언제라도 현재의 질서가 붕괴될 수 있다’는 신념은 커졌다. 여기에 2012년 마야문명 종말론 같은 종교적 색채가 더해지면서 프레퍼족이 본격 등장했다.
한국에도 북한 핵무기 위협, 세월호 참사, 메르스 같은 전염병 확산, 정부의 무능, 사상 최악의 취업난과 경제위기 같은 유사한 문제가 있다. 여기에다 다양한 형태의 자생적 종말론 신앙이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미국과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프레퍼족이 나타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생존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에 기폭제가 된 것은 지난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였다. 수백 명의 어린 고교생이 어이없이 수장되는 광경이 TV로 생중계됐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고 사회안전망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됐다. 정부는 도덕적이지도, 유능하지도 않아 보였다.
메르스 사태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의 강남’이 치명적 전염병에 뚫린 것이다. 커다란 쇼크였다. 공기로 퍼진다니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었다. 다수에게 피해를 확산시킨 일부 환자들의 이기심, 조기 차단에 실패한 정부의 무능이 재확인됐다.
결국 그다음 수순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수많은 사람이 ‘정부도 못 믿고 아무도 못 믿으니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을 생존 문제에 집착하게 한 것으로 비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점가에선 ‘재난시대 생존법’ ‘야생생존 매뉴얼’ 같은 생존 관련 책이 잇따라 출간됐고 기대 이상으로 잘 팔렸다. 특히 어린이 서적의 판매 기록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서바이벌 만화’를 표방한 ‘살아남기’ 시리즈는 무려 2000만 부 이상 팔리는 메가 히트를 기록 중이다. ‘바이러스에서 살아남기’ 편은 에볼라 바이러스의 창궐을 타고 아시아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들, 여론주도층, 언론도 불신한다. 이들의 예측이나 해석이 현실에 별로 들어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별일 아니라고 하더니 나중에 별일이 되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때부터 일부 언론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칭했다. 전문가, 여론 주도층, 언론에 대한 이런 불신 역시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이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미국 뉴올리언스의 제방이 무너졌다. 그때 미군 공병단의 한 장성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제방이 범람할 가능성은 0.5%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0.5%의 예외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제방 높이는 진도 8.3의 지진에 대비해 설계돼 있었다. 이 때문에 피해가 커졌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이 정도 제방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닥쳐온 것은 진도 9.0짜리 지진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그린스펀은 이를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로 규정했다. 1% 미만 확률의 일이 실제로 버젓이 발생한 셈이다.
정규분포곡선 맹신
국내 전문가든 해외 전문가든 왜 자꾸 틀리는 걸까.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전문가들이 정규분포곡선 맹신의 늪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은 과학 위에 세워졌고, 과학은 통계에, 통계는 정규분포곡선에 기초한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예측이 어긋난 것으로 확인된 뒤에도 여전히 ‘몇 백 년에 한 번’ 같은 수사(修辭)를 반복한다.
그러나 가끔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어떤 하나가 모든 것을 말아먹기도 한다. 이런 건 정규분포곡선으로 설명이 안 된다. 정규분포곡선은 예외적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축소해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선 이런 예외적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전문가들의 설명보다 세상은 훨씬 위험한 곳인지 모른다. 또한 생존 위기를 느끼는 대중의 무의식적 감각이 더 믿을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개인의 삶은 더 윤택해져야 하고 세상은 더 안전해져야 한다. 이것이 그동안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찰스 페로는 ‘정상적 사고(Normal Accident)’에서 “문명 자체에 내재된 요인으로 인해 대형 사고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소, 항공기, 우주탐사선, 인공지능로봇처럼 첨단 분야일수록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벌어질 위험성은 더 높아진다. 이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대중이 느끼는 불안은 세상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이런 불안이 선제적으로 터져 나온 사건이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해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은 과학적으로 분명 낮았다. 하지만 대중은 ‘우리가 먹을 것을 왜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느냐’에 방점을 찍었다. ‘국가 검역 주권이 제한받고, 미국인도 찜찜해서 잘 안 먹는다는 늙은 소의 고기도 수입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률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7~2011년 5년간 자살한 사람은 7만1916명으로 이라크 전쟁 사망자 3만8625명의 2배,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1만4719명의 5배에 육박한다. 특히 우리 20~30대 남성의 자살률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
상당수 젊은 층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업 없는 빚쟁이’가 된다. 올해 1~8월 학자금대출 규모는 2010년에 비해 무려 217%(8조90억 원) 증가했다. 반면 20대 실업률은 같은 기간 7.8%에서 9.6%로 뛰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15~29세 ‘니트족(NEET族,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비율도 15.6%로, OECD 평균(8.7%)의 2배 수준이다. 또한 젊은 층 취업자 중에는 비정규직이 많다. ‘취업 절벽’ ‘3포 세대’ ‘5포세대’ 같은 용어는 젊은 층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수많은 20~30대 젊은이는 ‘이대로 쓰러지느냐, 살아남느냐’의 생존 문제를 매일같이 고민한다.
‘신동아’ 8월호는 ‘헬조선’ 사이트 운영자를 처음으로 인터뷰하면서 ‘헬조선’과 ‘흙수저’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했다. 몇몇 중앙일간지가 이 기사를 따라 보도했다. 이어 방송으로, 포털로, SNS로 확산됐다. 이렇게 ‘헬조선’과 ‘흙수저’는 단 두 달 만에 우리 사회의 중요 이슈로 떠올랐다.
놀라운 현상이다. 많은 젊은이가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한다는데, 헬(Hell)은 지옥이다. 헬조선, ‘사는 세상이 지옥 같다’는 거다. 먹고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충족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젊은 남성이 계속 취업이 안 되는 상태에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 영원히 취업이 안 되고 앞길이 캄캄해진다. 청년들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을 흙수저라고 칭한다. 흙수저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는 하층민’이다. 살아갈 길 막막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누가 도와줄 것 같지도 않다는 뜻이다.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같은 온라인게임 스타일의 용어와 위계는 젊은 층에 잘 먹히는 측면이 있다. 은유적 표현이겠지만, 죽창에 의한 자살을 마지막 대안으로 제시하는 점은 섬뜩하고 비인간적이다.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은, 많은 젊은이가 생존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