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그림의 진위가 불확실한 것은 일련번호 때문이다. 그림에는 ‘No.7○○○○2’라는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데, 같은 일련번호를 가진 다른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동아’ 취재 결과 확인됐다. ‘점으로부터(From point) No.7○○○○2’다.
최명윤 전 명지대 교수(문화재보존관리학과)는 2012년 어느 소장자로부터 그림의 상태를 살펴봐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그 그림이 ‘점으로부터 No.7○○○○2’였다. 신동아는 이 그림이 2013년 초 진위 감정을 받기 위해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이하 감정협회)에 보내진 사실도 확인했다.
하나는 가짜? 둘 다 가짜?
개별 제품을 식별하려는 목적으로 자동차나 스마트폰에 각기 다른 일련번호를 부여하듯, 그림에도 일련번호가 있다. 특히 작품들이 서로 비슷한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은 일련번호를 보다 체계적으로 부과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3) 화백은 전면점화(全面點畵) 시리즈에서 아예 일련번호를 작품명으로 삼았다. ‘10-Ⅷ-70 #185’는 1970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전면점화 시리즈의 185번째 그림으로, 1970년 8월 10일에 완성했다는 뜻이다.미술계 인사들은 일련번호가 같은 그림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 미술사학자는 “지금까지 이우환 그림에서 일련번호가 같은 작품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미술품 감정전문가는 “일련번호는 식별을 목적으로 붙이는 것인데, 동일한 일련번호를 복수로 사용한다면 일련번호를 붙이는 의미가 없다”며 “일련번호가 동일한 그림이 두 점이라면, 한 점이 가짜 혹은 두 점 다 가짜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술평론가는 “지금까지 이우환 그림을 수도 없이 봤지만 일련번호가 중복된 경우는 못 봤다”며 “위작(僞作)으로 보이는 그림 중에서는 점 그림과 선 그림에 같은 일련번호를 써놓은 것을 본 적은 있다”고 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시리즈가 다르니 같은 일련번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이게 흔한 경우는 아니라서 ‘No.7○○○○2’가 부여된 작품이 두 점이란 사실이 어색하긴 하다”고 말했다. 서울옥션은 문제의 그림을 누구에게 의뢰받았고, 어떤 절차와 판단을 거쳐 홍콩경매에 올리기로 결정했을까. 다음은 서울옥션 모 간부와의 일문일답이다.
“작품 출처 확실”
▼ 홍콩경매를 전후해 미술계에 떠돈 얘기로는 재일교포 3세가 가져온 그림이라고….“재일교포 4세다.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어를 구사했다. 지난해 9월 대여섯 점의 작품 자료를 먼저 보내줬고, 10월에 여기(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로 찾아왔다. 내가 그를 두 차례 만났다.”
▼ 모두 이우환의 작품인가.
“그렇다. 모두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다. 이 가운데 ‘선으로부터’ 두 점을 지난 홍콩경매에 내놨다.”
▼ 해당 작품을 진품으로 판단한 근거는.
“알려졌다시피 2012년 중반부터 이우환의 1970년대 후반 점, 선 그림이 미술 시장에 쏟아졌다. 위작 논란이 벌어졌고 서울옥션도 대단한 경각심을 가졌다. 이듬해 초반 감정협회가 위작이라고 판단한 그림을 작가가 자기 그림이 맞다고 했고, 이 때문에 감정협회가 이우환 그림 감정을 중단했다. 그 바람에 더 이상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데 감정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서울옥션은 감정보다 작품의 출처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여겼고, 이번 건은 출처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에 경매에 내놓았다.”

“의뢰인이 호적등본까지 가져와 상세하게 설명했다. 의뢰인의 가문은 1930, 4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시나가와(品川)에서 사업으로 큰 부(富)를 일군 집안이다. 의뢰인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얼 하던 분인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머니 쪽 친인척 중에는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의뢰인의 고모인가 이모라는 분도 한 번 찾아와 집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 20년 넘게 방치된 집에서 작품을 발견했다던데.
“20여 년 전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친할아버지 별장에 가본 적 없는데, 작년에 별장 인근으로 출장을 가게 돼 그 김에 별장에 들렀고, 거기서 우연하게 이우환 작품을 발견했다고 한다. 친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림들을 소장하게 됐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 숲 속 별장에 오래 방치됐다는 그림이 전혀 손상되지 않아 미심쩍다는 얘기가 있다.
“별장이 있는 곳이 숲 속은 아닌 것으로 안다. 방치된 건 아니고 집 안에, 인적 없는 조용한 곳에 잘 보관됐던 거다. 우리가 작품을 봤을 때도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내부적으로도, 서울옥션의 외부 감정위원들도 진품이라고 판단했다.”
▼ 이우환 화백이 이 그림들을 봤나.
“지난해 10월 말 서울옥션을 방문해 그림들을 봤고, ‘내 작품이 맞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워낙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이 화백이 자신의 그림이라고 했다는 점을 진품의 대단한 근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의뢰인의 설명을 근거로 출처가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막차’ 탄 진품 감정서
현해탄 건너 섬나라에 20년 넘게 잠들어 있다가 우연찮게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됐다는 ‘선으로부터 No.7○○○○2’. 그와 일련번호가 동일한 ‘점으로부터 No.7○○○○2’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점으로부터 No.7○○○○2’를 감정협회에 감정 의뢰한 인물은 60대의 장모 씨로, 인사동에서 화랑을 운영한 이력이 있는 미술품 딜러다. 장씨는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소장자가 ‘점으로부터 No.7○○○○2’를 팔겠다고 가져왔고, 나는 이 그림 매매를 중개할 목적으로 감정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고 말했다.장씨가 이 그림의 감정을 의뢰한 때는 2012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으로, 감정협회를 중심으로 이우환 위작 논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다. 감정협회는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1970년대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위를 의심했고, 그래서 그림들을 모아뒀다가 이우환 회화 작품의 전속 갤러리 격인 갤러리현대를 통해 일본에 거주하는 이 화백이 귀국할 때마다 그림들을 확인하도록 했다. 이 화백은 “모두 내 그림이 맞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화백의 증언을 근거로 해당 그림들에는 진품 감정서가 발급됐다. ‘점으로부터 No.7○○○○2’도 이 시기에 진품 감정서를 발급받았다. 다음은 감정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가짜라고 판단하는데 이 화백이 진짜라고 해서 진품 감정서를 발급한 그림이 20여 점 된다. ‘점으로부터 No.7○○○○2’가 그중 하나다. 이 화백은 20여 점 중 일부에 대해 자신의 그림이 맞다는 취지의 작가 확인서를 써줬는데, 이 그림은 작가 확인서를 받은 것이라 군말 없이 진품 감정서를 내보냈다.”
하지만 감정협회는 작가 진술만을 근거로 진품 감정서를 내보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2013년 2월 이우환 작품 감정을 중단한다. 이 관계자는 “‘점으로부터 No.7○○○○2’에 진품 감정서가 나간 날짜가 2013년 2월 8일인데, 이게 이 시기에 발급한 거의 마지막 감정서”라고 밝혔다.
“현재도 진품이라 생각”
서울옥션과 K옥션은 국내 미술품 경매업계를 대표하는 양대 경매회사다. 지난해 서울옥션은 낙찰 총액 1081억 원을 기록해 1998년 회사 설립 이래 처음으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2005년 갤러리현대의 주도로 설립된 K옥션도 지난해 낙찰 총액 668억 원을 달성해 전년 대비 2배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생기는 걸까. 두 회사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우환 그림의 진위 논란에 연루되고 말았다. K옥션이 위조 감정서가 붙은 이우환 그림을 경매에 내놓은 게 지난해 12월 15일이고, 서울옥션은 이보다 2주가량 앞서 동일 일련번호의 다른 그림이 존재하는 그림을 홍콩경매에 내놨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신동아의 취재 요청 전에는 동일한 일련번호가 붙은 다른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현재도 홍콩경매에 내놓은 해당 그림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우환 일련번호’의 진실은?▼
크리스티, 필립스, K옥션에도 번호 중복된 그림 나와
최명윤 전 명지대 교수는 자타 공인 국내 미술계 최고의 감정 및 복원 전문가다. 그는 2005년 서울옥션에 출품된 이중섭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오랜 기간 이우환의 1970년대 후반 회화 작품을 수집해왔고, 2014년 10월 18일 열린 제1회 한국미술과학회 학술대회에서 1978년과 1979년의 이우환 그림을 중심으로 위작 존재 가능성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최 전 교수가 현재까지 확보한, 동일한 일련번호를 갖는 그림은 모두 5쌍이다(이번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선으로부터 No.7○○○○2’가 출품됨으로써 한 쌍이 추가돼 모두 6쌍이 됐다). 그는 “이 그림들 모두 ‘점’ 하나, ‘선’ 하나가 같은 일련번호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련번호가 같은 5쌍 중 1쌍을 신동아에 공개했다. 이 ‘커플’의 일련번호는 ‘ No.7□□□□7’이다.
‘선으로부터 No.7□□□□7’은 크리스티, 소더비와 함께 세계 3대 경매회사로 불리는 필립스(Phillips) 뉴욕의 2015년 11월 8일 경매에 출품됐다. 50호 사이즈인 이 작품은 74만9000달러, 우리돈 약 9억 원에 낙찰됐다. 최 전 교수가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점으로부터 No.7□□□□7’의 존재를 파악한 것 또한 최근이다. 그는 “얼마 전 소장자로부터 진위를 판단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감정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점으로부터 No.7□□□□7’은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발급한 진품 감정서를 갖고 있다. 감정서가 발급된 날짜는 2012년 7월 20일. 인사동 일대에서 이우환 위작이 유통되고 있다는 의혹이 한창 제기되던 시점이다.
신동아는 1월 13일 일곱 번째 동일 일련번호 점/선 쌍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세계 최대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와 K옥션에서 그 존재가 드러났다. 2012년 11월 15일 크리스티 뉴욕의 ‘전후 및 현대미술 오후 세션(Post War and Contemporary Art Afternoon Session)’에는 ‘선으로부터 No.7△△△△5’가, 3주 뒤인 2012년 12월 5일 K옥션 겨울 경매에서는 ‘점으로부터 No.7△△△△5’가 출품됐다.
이우환 화백, 인터뷰 거절
일련번호가 같은 그림이 점/선 쌍으로 여럿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우환 화백이 점 시리즈와 선 시리즈를 구별해 1번부터 차례로 일련번호를 매겼을 수 있다. 이럴 경우 동일한 일련번호를 가진 점/선 그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미술계 전문가들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최 전 교수는 “그런 식으로 시리즈를 구분해 번호를 매기는 작가는 내가 아는 한 없다”고 했다.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 오래 관여해온 한 인사는 “시리즈가 다르다고 해서 같은 일련번호를 다른 그림에 붙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작가가 실수로 동일 번호를 사용한 것도 못 봤다”고 했다.
파랑, 노랑, 빨강 등 색이 다른 전면점화 시리즈를 그린 김환기 화백은 어떻게 했을까. 환기미술관의 한 학예사는 “색에 따라 일련번호를 구별해 붙이지 않았다. 1970년부터 어떤 색의 그림이냐에 상관없이 그림을 완성하는 대로 번호를 매긴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그는 “동일한 일련번호가 부여된 다른 그림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감정협회는 K옥션 위조 감정서 그림을 비롯해 일련번호가 같은 그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간 진품으로 감정서를 발급한 이우환 그림들에 대해 재감정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부 논의를 시작했다. 감정협회 관계자는 “2012~2013년에는 이 화백 본인이 자신의 작품이 맞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품 감정서를 내보낸 측면이 있다”며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재감정하는 것이 우리 협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 전 교수는 “진품 감정서를 믿고 작품을 사고 판 사람들의 피해를 간과해선 안 된다”며 “이우환 위작 사건에서 중요한 대목 중 하나는 국내 미술계의 감정 신뢰가 무너졌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신동아는 이 화백이 1970년대 후반 자신의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일련번호를 부여했는지 묻고자 그의 일본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 화백은 “통화하지 않겠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1월 13일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과 이우환 화백이 전화통화를 했으며, 이 화백이 ‘일련번호가 같은 다른 그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전해왔다. 어떤 이유와 방식으로 동일한 일련번호를 사용했는지, 동일한 일련번호를 가진 그림들이 실린 과거 전시도록 등의 근거를 제시했는지를 묻자 이 관계자는 “(이 화백이) 그렇게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